이 때 프랑스가 구세주로 나섰는데, 당시의 프랑스 국방장관이 바로 비르 하케임 전투에서 유대인 부대의 용전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쾨니그 장군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권한을 최대한 발휘하여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해 주었다. 이집트에 팔아막었던 AMX-13 100대 외에 AMX-13 전차의 포탑을 들어내고, 30구경 105mm 유탄포를 탑재한 MK61자주포 약 60대, 그리고 60대의 셔먼전차와 150대의 하프트랙을 합쳐 약 370여 대를 제공하였다. 이 장갑차량들은 1956년 7월의 어느 날 하이파 항에 도착했는데, 제7기갑여단이 직접 이 양륙 작업을 맡았다. 당시 참모총장이던 다얀은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런 협력관계를 ‘프렌치 커넥션’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 군은 주포를 AMX-13과 같은 프랑스 제 CN75-50으로 바꾸고 기존의 가솔린 엔진을 디젤기관으로 교체하고, 이에 맞추어 서스펜션도 바꾼 M50 ‘슈퍼셔먼’으로 개조했던 것이다. 누리꾼들이 흔히 ‘마개조’라고 부르는 이런 놀라운 개량능력은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특징이자 강점 중 하나였다. 독립전쟁이 시작되기 전, 즉 팔레스타인 내전이 한 참일 때, 국부 벤 구리온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실 우리는 가진 게 없고, 싸우려는 의지와 잠재력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알아야 할 것은 구두를 만들려는 자는 먼저 구두를 수선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1950년대 초반만 해도 이스라엘 육군은 전술교리를 완전히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단순화하면 ‘기계화 보병파’와 ‘전차파’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계화 보병파의 대표는 2대 참모총장에 오른 이갈 야딘 Igal Yadin과 3대 참모총장인 모셰 다얀 장군이었다.
기계화 보병파의 주장은 독립전쟁 때의 경험을 살려 반궤도 장갑차에 탑승한 보병을 주력으로 전차와 야포의 화력지원으로 적 진지를 돌파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그들에게도 전차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였지만 대규모적인 전차운영은 비경제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전차파의 대표는 라즈코프와 아사프 시모니 Asaf Simoni 남부군 사령관 이었다. 이들은 미래 전쟁에서 전차가 전술적으로 가장 가치가 있는 병기이므로 기계화 보병의 지원이 아니라 집중적이고 대대적인 운용으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요충지를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참고로 이스라엘 군은 육해공군 삼군을 통합하고, 전략적 여건상 시리아와 레바논 방면을 맡는 북부군 사령부, 요르단 쪽을 맡는 중부군 사령부, 이집트 즉 시나이 방면을 맡는 남부군 사령부로 나뉘어 운영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기계화 보병파’ 쪽에 요직에 오른 인물들이 많았으므로 힘은 그 쪽으로 쏠렸다. 하지만 전차파에게 역전의 기회가 주어졌다. 1952년, 이스라엘군은 ‘청군’과 ‘녹색군’으로 나누어 대규모 훈련을 실시했다. 제7기갑여단은 적군 역할을 맡은 청군에 소속되었는데, 부여단장 우리 벤 아리 Uri Ben Ari 중령은 눈부신 지휘를 보여주었다. 그는 상급부대에서 만든 전술 계획을 부시하고 여단을 130km 배후에 있는 녹색군의 배후로 몰아쳐 보급을 차단했던 것이다. 이렇게 원 계획은 엉망이 되었고 원래 승자로 ‘예정되어 있던’ 녹색군은 패하고 말았다. 당황한 야딘 장군이 전령을 보낸 다음에야 여단의 진격은 멈추었다. 훈련이 끝난 후, 장군은 작전지도에 붉은 선으로 여단의 진격로를 그렸다고 한다.
우리 벤 아리
놀랍게도 벤 아리 중령의 나이는 27세였다. 그의 본명은 하인츠 베너였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출신으로 베를린 태생이었다. 독일군 장교와 결혼한 이모만 제외하고는 모두 나치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구데리안을 비롯한 독일 장군들의 전격전 이론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키부츠에게 교육을 받고 하가나에 입대하여 1948년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예루살렘과 네게브에서 빛나는 전공을 거둔 경력이 있었다. 이 훈련 이후에도 ‘기계화 보병파’와 ‘전차파’의 대립은 그치지 않았고, 결국 1955년 제7기갑여단은 갑자기 해체되는 날벼락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