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인물로 본 조선왕조 이야기 12
세조
<가계도>
<가족들>
정희왕후 윤씨(1418~1483) |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1428년 세조와 결혼했다. 정희왕후 윤씨는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가 사랑하고 가까이 둔 며느리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행실이 단아할 뿐 아니라 지혜롭고 사교술이 뛰어났다. 이에 세종도 중신들 앞에서 윤씨를 거론하며 칭찬하고 윤씨의 첫 출산을 궁궐에서 하도록 배려하는 등 아꼈다. 소헌왕후는 말년에 병이 들자 수양대군의 집에 머물며 윤씨의 봉양을 받다 죽음을 맞이할 정도였으니 세종 부부의 윤씨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계유정난 당시 정보누설로 수양대군(세조)이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용병을 결행토록 했다. 아들 예종이 19세로 왕위에 오르자 수렴첨정을 했다. 예종이 1년 만에 죽자 요절한 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성종)을 13세의 나이에 즉위 시켜 섭정했다. 섭정기간 동안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세부내용은 <성종편> 참조 |
의경세자(1438~1457) | 세조와 정희왕후의 장남이다. 한확의 딸과 결혼하여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성종) 두 아들과 1녀(명숙공주)가 있다. 건강이 좋지 않아 19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능은 경릉으로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에 있다. |
왕족과 대신들 간의 힘겨루기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단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라 왕권자체가 유명무실했고, 왕을 대신할 실질적인 궁중 어른이 없었다. 김종서와 황보인으로 대표되는 문종의 고명대신, 이들의 권력독점을 견제하는 집현전 학사 출신들, 왕족을 대표하는 과격한 수양대군과 온건한 안평대군으로 세력이 형성되었다.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김종서와 황보인은 왕실을 대신할 사람으로 과격한 수양대신 안평대군과 손을 잡기로 했다. 안평은 수양대군보다 온건하고 합리적이라 조정대신들과 비교적 원만했다. 고명대신들과 안평대군의 규합은 수양대군에게는 위기였다. 수양대군은 황표정사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조정을 통제하는 이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1452년 7월 집현전 교리 권람을 끌어들이고 이후 한명회, 홍윤성 등을 심복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힘을 확대해 나갔다. 1452년 9월 명나라가 단종을 인정한다는 고명을 보내오자 누가 갈 것인가? 문제였는데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갈 것을 자청했다. 수양대군의 지지세력들이 만류했지만 이는 종친의 임무라며 신숙주를 서장관으로 데리고 다녀왔다. 1453년 4월 사은사로 다녀온 수양대군이 대업을 이루기 위해 홍달손, 양정 등 무사들을 끌어들였다. 그가 명나라의 사은사를 자청한 것은 김종서, 황보인의 견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운신할 폭은 넓히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인 셈이었다. 한편 단종을 정순황후 송씨와 혼사를 주도적으로 진행하여 권력욕을 숨긴다. 1453년 10월 10일 밤에 수양은 군사를 일으켰다. 이름하여 계유정난이다. 최대의 정적 김종서를 제거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갔다. 김종서를 살해하고 왕명이라 속이고 황보인을 비롯한 대신들을 불러들인 후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정적을 제거했다. 명분이 “김종서가 황보인, 정분 등과 합세하여 안평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모반을 꾸몄다”는 것이다. 정난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안평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교동에서 죽였다.
이로서 수양은 병권과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자신을 도운 권람, 한명회, 양정 등 43명을 정난공신에 임명했다. 이 때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상문, 정인지, 최항, 신숙주, 하위지 등은 중립을 지켰으나 수양에 암묵적 동의를 했다. 이들은 김종서와 황보인 같은 고명대신들이 권력을 전횡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 일부는 수양이 집권한 뒤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기도 했다.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이제 왕자리를 넘보기 시작했다. 1455년 윤6월 불안한 단종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다 옥새를 넘겼다.
단종이 환관 전균을 시켜 우의정 한확 등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어려서 안팎의 일을 알지 못한다. 이제 대업을 영의정(수양대군)에게 전하려 하노라”고 했다. <연려실기술>
동부승지(의전수석) 성삼문에게 상서원에 가서 옥새를 내어오도록 명하고 균을 시켜 경회루 아래로 받들고 나오라하고 임금이 경회루 아래에 나와서 수양대군을 불렀다. 수양이 들어가니 승지와 사간이 따랐다. 임금이 일어시니 수양이 꿇어 엎드려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임금이 손에 옥새를 들고 수양에게 주었다. <연려실기술> |
조카를 밀어내고 조선 7대 왕 세조(수양대군)가 탄생했다. 하지만 1456년 성삼문과 하위지 등이 단종 복위를 시도했다.
단종복위운동(1차 1456년 6월)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집현전 관원 융화책에 따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공신에 책록되어 승지와 6조의 참판 등에 올랐다. 이들은 계유정난은 방관하였으나 세조의 즉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 집현전 출신 관인과 군권을 관장한 성승(성삼문의 부), 유응부, 김문기 및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 등은 단종의 양위 직후부터 세조를 제거할 것을 모의했다. 1456년 6월 창덕궁 광연루에서 세조의 고명誥命-왕의 책봉에 사용된 문서-을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을 위한 환영 행사자리에 별운검(왕의 호위무사)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발탁되었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려 했는데 한명회가 행사장소를 사전 답사하고 별운검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 거사를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이 거사 성공에 회의를 품고 장인인 정창손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정창손이 즉시 세조에게 고하니 친히 국문하여 성삼문, 박팽년 등을 거열형에 처했다. 상왕(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영월로 유배 보냈다가 사사되었다. |
김시습과 원호, 이맹전 등은 수양의 왕위 찬탈 소식을 접하자 관직을 내려놓는 등 유생들의 반발이 심했다.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유폐시켰다. 1457년 9월 금성대군이 단종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사사賜死하고 단종도 죽였다.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사건(2차 1457년 9월) 1457년 9월에 다시 금성대군 등이 단종 복위 기도를 시도하였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6남으로 단종의 왕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계유정난 직후 수양대군의 배척을 받아 경기도 삭녕에 유배되었다가 경상도 순흥에 이배되었다.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영남 유생들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였다. 그곳의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켜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하였으나, 순흥 관노의 고발로 사건 전모가 드러났다. 세조는 두 차례에 걸친 단종 복위 사건을 계기로 단종 측근들을 제거하고 왕 중심의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쳐 나갔다. |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육조를 직접 통괄하는 육조직계제를 단행하고 집현전 학사들의 단종복위 사건을 빌미로 집현전과 경연제도를 폐지했다. 국정을 건의하는 대간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비서실)기능을 강화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복원하고 1460년 호구의 동향을 파악하고 호의 규모를 규제하기 위한 법전인 호전을 복구했으며 1461년 형량을 규정한 형전을 개편했다.
종래에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까지 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시행하여 국비를 줄였다. 지방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이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에서 문신위주로 인사 조치했다. 지방호족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더니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다.
이시애의 난 세조가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京官)으로 대체하였으며, 수령들에게 지방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여 수령들과 유향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시애는 불만에 쌓인 지역민들에게 조정에서 남방의 병선을 보내 해로를 경유하고 육군은 설한령과 철령을 넘어 일시에 쳐들어와 본도의 군민들을 다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동조했다. 1467년 5월 함경도절도사 강효문이 길주에 도착하자 때려 죽였다. 그런 다음 고을의 유향소에 글을 보내 중앙에서 온 관리들을 모두 죽이라고 선동했다. 여러 고을에서 호응하여 지방관들을 때려 죽였다. 함흥에 있던 신숙주의 아들 관찰사 신면도 죽었다. 이시애는 강효문이 한명회, 신숙주 등 조정의 중신들과 결탁하여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략전술을 펼쳤다. 세조가 신숙주는 의금부에 가두고 한명회는 집안에 유폐시켰다. 이준을 병마도총사로 하여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대항하였으나 허종,강순,어유소,남이 등이 이끄는 3만 군대는 홍원,북청을 돌파하고 이원의 만령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하였다.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으로 퇴각하여 여진으로 도망치려 하였다.당시 사옹별좌 허유례는 자기 부친이 억지로 이시애의 일파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 이운로 등을 설득하여 이들과 함께 이시애 형제를 묶어 토벌군에게 인계하였다. 1467년 8월 이시애 등이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목이 잘림으로써 3개월에 걸쳐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이 평정되었다 토벌군 대장 도총사 이준이은 후일 영의정까지 올랐다. 세조는 난을 진압하고 난 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들을 위로했다. |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우선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없애고 누에농사를 위해 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윤리교과서인 오륜록을 만들어 기강을 바로 잡았다.
1467년 원상제 시행
원상이란왕의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재상들로 구성된 임시로 국정을 의논하던 관직, 국왕이 병이 났거나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국정을 의논하기 위하여 원임, 시임의 재상들로 하여금 승정원에 주재하게 한 임시관직이다.
원상은 세조가 병이 나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등으로 하여금 승정원에서 서무를 지휘하게 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선대 단종이 어려서 김종서, 황보인 등이 황표정사로 왕권을 행사했던 반면에 세조는 늙어 병이 나서 원상제를 시행한 것이다. 세조는 1468년 9월 7일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날 수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불교에 심취하다.
세조가 현덕왕후 권씨의 악몽에 시달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교에 귀의할 결심을 했다. 불교 귀의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개국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과, 훈구 유학자들이 항의하여 연명 상소와 사퇴 등으로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세조는 훈신 중 김수온의 형인 승려 신미를 왕사로 받들어 궁궐로 초빙했다. 신미는 세종대왕 당시 궁궐 내에 내원당을 지었다. 문종 즉위 후에 선종의 지도자인 선교도총섭에 임명되기도 했다. 신미는 평창 오대산 상원사의 중건에도 관여하였다.
세조는 여러 불당의 중수와 창건을 지원하였다. 궁내에 불당을 지었고, 원각사와 신륵사 등을 지원하였다. 또한 수종사중창을 지원하기도 했다. 수종사는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 유가 시주해 세운 곳이다.
수종사 중창 세조가 만년에 병을 치료하려 오대산에 갔다 돌아올 때였다. 뱃길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도중 밤이 되어 양수리에서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이 때 옆에 있는 운길산(경기도 양평)에서 때 아닌 종소리가 들렸다. 신하를 보내 알아보게 하니 절터가 있고, 바위벽에 18나한상이 있는데 그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가 났다. 이 사실을 접한 세조는 매우 감동했고, 발심하여 절을 복원케 하고 수종사라 했다. 수종사는 1459년 왕명에 의해 중창되었다. 종각 밑에는 세조가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굵은 나이테를 간직하고 있다 |
세조는 불교가 왕실의 안녕과 미래를 보장하는 종교적인 신앙으로서 필요하다고 보았다. 호국불교로 민족 의식의 고양과 집권체제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해 많은 불경을 국역하도록 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