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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역 폭발 희생자 추모
48주기
25.11.11 PM 9:15
개인적으로 한달전부터 준비한 이리역 48주기 추모날을 위해 준비를 했었다.
서울에서 익산역까지 가는 KTX 열차승차 왕복권을 미리 예약을 하기 위해서 그날의 폭발했던 시각. 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에 맞혀 나는 정확한 그 시각 이리역 폭발 희생자추모탑을 찾아가기 위해서 추모시간을 계산하고 왕복 열차표를 구매해 두었다. 22년 6월 16일 그날에 익산역 근처 꽃집을 찾아 다녔지만 국화꽃을 팔지않아 헌화를 못했던 아쉬움이 컷던 생각에 나는 미리 서울에서 추모를 위한 헌화꽃(국화) 미리 예약해 두었다.
11월 11일 당일날 하루일을 마치고 예약한 국화꽃을 찾아서 곧바로 용산역으로 향했다.
익산역으로 가는 동안 국화꽃이 시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줄기에 수분이 공급되도록 준비를 해서 저녁 6시 40분경 용산역에서 익산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려가는 내내 정보자료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곧 찾아 볼 희생자 추모탑을 생각하면서도 한켠으로는 조금 답답함이 몰려왔다. 그 답답함은 "수십년 흘러온 세월동안에 과연 대한민국은 그날의 아픔을 어떻게 치유하였고, 똑같은 일들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을까? 과연 준비는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1시간 20분이 걸려 저녁 8시가 조금 넘어서 이리역에 도착하였다.
익산역에서 나오자 마자 과거 22년 6월 16일 밤에 찍었던 사진 그대로 이산역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계획한 추모시간 전 약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저녁을 먹지 못하고 내려온 터라 배가 고프기도 하여 여유있는 시간에 음식점을 찾았다.
마땅히 먹을 곳을 찾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곳은 햄버거집이 있어서 저녁밥은 햄버거로 결정하였다.
햄버거를 주문하고 먹는 동안 이날을 남기기 위한 사진준비를 위해 핸드폰과 삼각대를 세팅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횡단보도를 겉너서 추모탑 방향으로 향했다.
설마 나같은 사람은 있을까?
나같이 그 시간에 추모탑을 찾는 사람이 있을거란 생각에 혹시나 하면서 걸어 갔다.
추모탑으로 가는 동안에 그날의 추모식행사가 있었는지 특별한 느낌은 없었고, 역시 그시간에 추모탑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찾은 추모탑 앞에서는 적막함과 역사내에서 비춰지는 불빛으로 추모탑은 잘 보였다. 시간별 익산역에 도착하는 열차와 통과하는 열차들이 있었고, 익산역에 정차하는 열차 안에서 희생자 추모탑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이 사람들은 이날이 이리역 48주기 추모날 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은 어두운 저녁이라 큰 기대는 안했지만 익산역사 안에서 비쳐진 조명에서 추모탑이 빛나고 있었다. 사진안에서도 조명과 함께 추모탑 모습을 담아냈다. 그리고 이날은 추모식이 있었는지 추모비 앞에는 노란 꽃화분이 나란이 나열되어 있었다. 밤 9시 15분에 맞혀서 준비한 국화꽃을 헌화하면서 곧바로 묵념식을 가졌다.
이리역 폭발 희생자 공식 추모식은 2010년, 사고 발생 33주년까지 대규모로 진행된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정기적인 공식 추모식은 중단되고, 추모탑 참배 중심의 소규모 추모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 몇몇만 찾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익산시에서도 추모행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 졌다. 하지만 추모행사는 꾸준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날의 비극은 여러가지 이유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산업혁명을 통한 발전된 오늘날에도 화약류 산업에는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이리역 폭발사건을 교훈삼아 후손들에게도 계속해서 역사인식을 상기시키고 제대로 관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리역 폭발사건에 대한 문제점들은 국민들 마음속에 조금씩 조금씩 잊어혀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같이 화약류관리에 연구하고 일하는 사람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아직도 관리가 엉망이라는 것을 화약류 관리하는 사람들은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77년도에는 태어나기 전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 그리고 역사기록에서 그날의 큰 아픔을 알 수 있었고, 국가비상사태에 놓이면서도 대한민국의 충격적인 역사기록으로 남게 되면서 과연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그날을 되세기면서 무엇을 했을까 하는 것에 나는 추모탑 앞에서 만큼은 마음이 무거워 졌다.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업종의 일들을 하면서 다이너마이트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않고 일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아픈역사를 겪고도 지금 대한민국의 화약류 산업의 안전관리는 과연 제대로 갖추었을까? 나의 생각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날에 있었던 폭발사고의 일들을 되세기지 않고 아픔을 잊은채 다시 다이너마이트의 관리허술과 시스템을 질책하면서 나는 답답함과 아쉬움을 삼켰다. 화약류관리는 더 확실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신속정확한 정보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적용할 수 있는 데에도 기술적인 내용을 사회적 공고와 R&D 사업등 많은 곳에서 알리고 발표를 해도 관리기관의 공무원들과 관여된 기업체, 그리고 무관심 속의 국민들에서 변화와 발전되지 않는 이 현실을 나는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고, 이 답답함을 어디에서 말할 곳도 없었다.
이날은 11월 11일 빼빼로 데이라는 기념일과 겹쳐 있었고, 부산에서는 UN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민들은 아픈 과거를 되세기기 보다 빼빼로 데이라는 기념일을 즐기는 분위기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나는 같은 업종의 일을 한 사람으로서 이리역 그날의 아픔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들이 찾지 않고 잊어져 갈때 오늘날을 챙기고 기록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아픈역사를 잊쳐지지 않도록 그날의 아픔을 기억할 수 있도록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이날에는 추모식을 진행한 사람들이 있었다. 인터넷에 검색한 결과의 인터넷 기사내용을 적어본다.
[한국철도 전북본부(본부장 이두희)는 11일 오전, 익산역 내 ‘이리역 폭발사고 추모탑’에서 ‘이리역 폭발사고 48주기 추모식’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추모식에는 이리역 폭발사고 유족회장을 비롯한 회원들과 전북본부장, 처장, 익산역장 등 철도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헌화와 참배를 통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사고의 아픈 역사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전북본부는 이번 48주기를 맞아 익산역 구내 추모탑 주변을 정비하고 국화꽃을 비치했으며, 추모식 후 유족회원들과 함께 오찬을 가지며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한다.
이두희 본부장은 “이리역 폭발사고로 희생되신 분들과 유가족분들의 슬픔을 잊지 않겠다”며 “사고 수습을 위해 현장으로 뛰어들었던 분들과 순직하신 철도선배님들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더 안전한 철도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위에 추모식을 갖는 분들은 철도관계자와 유족회장을 비롯한 회원들등 철도직원들이었다.
마지막에 안전한 철도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나는 철도안전이 아닌 다이너마이트의 화약류안전을 강조하고 싶었다. 이날의 추모식은 철도안전에서 일어난 사고보다는 화약류 취급부주의와 부정부패등 여러가지 요소로 일어난 일들이었지만 가장 위력한 다이너마이트 안전관리에서 비롯한 사고가 제일 큰 문제였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철도안전보다 대한민국 화약류 안전관리에서 발생된 사고인 만큼 화약류 안전관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되지만 우리나라 화약류 안전관리시스템은 여전히 관리허술의 시스템으로 이어져 오는 것에 답답한 마음을 갖게 한다.
화약류인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일어난 이리역 폭발 희생자를 위해서 화약류에 관계된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찾아서 그날을 되세기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리역 폭발 희생자 공식 추모식은 2010년, 사고 발생 33주년까지 대규모로 진행된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정기적인 공식 추모식은 중단되고, 일부 철도관계자들만 이리역 폭발희생자 추모식을 이어가고 있는 듯 하다. 이 분들 외에 국민들 마음에서 서서히 이리역 폭발사고의 아픔이 잊어혀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캄캄한 저녁밤 추모탑에 세겨진 희생자 분들의 이름이 잘 보이지 않아 휴대폰 후레쉬를 켜서
희생된 65명의 한분 한분 이름을 쳐다보았고, 추모를 위한 시를 다시한번 마음속으로 읽었다. 그리고 추모탑에 있는 사진을 보면서 그날의 아픔을 또한번 되새겼다.
마지막으로 희생자 추모탑을 보며 발길을 돌려서 가려는데 국화꽃이 너무 쓸쓸해 보였다.
희생된 59명의 분들만큼 헌화꽃을 준비 못한 마음이 걸렸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는 날을 기약하면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고개를 숙여 마음속에 있던 소원을 빌었다.
별이 되신 희생자분들께 그날에 있었던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지켜달라고...
그리고 국가를 위해서 하는 일이 잘 될수 있도록 도와달라면서 마무리를 지었다.
서울로 되돌아 가는 열차시간은 밤10시 20분으로 추모식을 시작한 밤. 9시 15분에서 약 50분 정도의 시간으로 추모식을 마치면서 다시 열차를 타기 위해 익산역으로 향했다.
익산역 객실에서 열차를 기다리면서 나는 생각나는 추모비가 있었다. 22년 6월 17일에 찾아갔던 추모비였다. 이리역 폭발 희생자 탑 위치에서 정 반대 방향에 있는 추모비가 생각났다.
그때 그날 인터넷 지도에 잘못 표기된 이리역 희생자 추모탑을 찾아 갔지만 가던 길에 덩그란이 놓여져 있는 어색한 추모비 하나가 있었다. 이 추모비가 이리역 폭발 희생자 추모비인줄만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1950년 7월 11일 미군이 이리역을 폭격하여 민간인 희생으로 인한 추모비였었다.
그래서 나는 확실히 그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순직비
22년 6월 16일 그 때 찾았던 순직비였지만 시간 관계상 늦은 밤 열차시간의 여유가 없어 찾아가지 못해서 아쉬웠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인한 사고였지만 미군이 이리역을 폭격하여 민간인 희생으로 인해 새워진 추모비 또한 화약류로 만들어진 폭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던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순직비였다. 그래서 1950년 7월 11일의 날에 일어난 것이지만 그래도 나는 익산역에 왔으니 함께 추모의 시간을 갖고 싶은 마음이 컷지만 아쉽게도 찾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역사안에서 순직비 방향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나마 추모하는 마음만 가졌다.
다음에 익산역을 찾을 때 다시 찾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아쉬움을 뒤로 하면서 열차에 올랐다.
그날 익산역을 찾은 목적은 이리역 폭발희생자 추모를 하기위해 갔지만 민간인 희생을 위한 순직비에는 찾아가지 못한것이 끝내 마음속 아쉬움으로 남았다.
수십년 동안에 실무업무를 통하여 익힌 기술과 기능을 활용하여 화약류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을 연구했지만 국가기관에 적용을 하기 위해서 몇 년 동안 노력해 온 힘들은 많이 남지 않은 듯 하다.
열차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에는 내가 찍었던 사진을 다시 보면서국가를 위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세월과의 싸움속에 정책사업으로 적용하기란 힘들고 고독한 마음과의 싸움과도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앞날이 두렵기도 하다. 더욱더 힘든 것은 나의 가족, 첫째딸과 돌이 얼마 지나지 않은 아들, 그리고 아이엄마, 가족들이었다. 나를 믿고 기다려 준 시간은 한없이 많지만 이 일은 언제까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리역 폭발 희생자 추모탑을 찾고 추모를 하면서 또 한번 더 힘을 내서 일어서 보자고 다짐을 하면서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그날이 빨리 오기를 희망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 하려한다.
분명 이리역 폭발사고를 알아가면서
그 당시 이후에도
한국화약에 모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정부패와 금전거래등의 일들이 만연했던 문제점들로 일어난 일이라 생각한다.
이 와중에도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전재산을 내놓은
현암 김종희 회장님에 대해서 공부하면서도
애국자이면서 존경하는 사람중에 한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