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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09 월 20 일 )
1805.10.15~1839.9.12
최양업 사제 부친
일명 영환(永煥), 영눌(永訥), 치운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두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땅 누곡(樓谷,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崔仁住)와 모친 경주이씨(慶州李氏)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內浦)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경기도 부평(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토마스)를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애긍시사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순교토록 준비시킬 때가 된 것을 알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으나 서적은 감추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보고 조카 최 요한이 놀라서 “다른 교우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 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언제 하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839년 7월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고, 그의 이러한 태도에 포졸들은 안심하고 누워 잠을 잤다. 해뜰 무렵에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하고는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 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가고,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왔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다. 행인들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그는 “형제들아 용기를 분발하라. 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오 주 예수를 보라!”고 하며 격려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냈다.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분이 치밀어서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다. 그는 태형 340도와 곤장 110도를 맞았다. 다른 많은 교우들은 석방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와 일가 부인 3명뿐이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인 崔榮訥(京煥 프란치스코) 간추린 약력
출생지 | 충남 청양군 농암리 다락골 |
출생 | 1805 년 10 월 15 일 |
수리산입주 | 1837 년 7 월 |
전교회장 | 1839 년 춘월 |
체포 | 1839 년 7 월 31 일 |
옥사순교 | 1839 년 9 월 12 일 (35 세 ) |
시복 (로마 ) | 1925 년 7 월 5 일 |
유해이전 | 1929 년 6 월 18 일 |
시성 (서울 ) | 1984 년 5 월 6 일 |
성인 기념비 건립 | 1984 년 4 월 15 일 (성지주일 ) |
[수리산 성지 홈피]
[향기가 있는 삶] 최경환 성인
모든 이에게 사랑을 심어주셨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년, 회장, 기해박해 때 옥사)
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토마스 신분의 아버지인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흥주군 다랫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한국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를 믿었던 집안이다. 최경환은 원래 성질이 괄괄해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업어서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고 곧잘 다투었다. 이러한 성질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여 후일에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온화해진 성품을 보고 탄복하였다.
그가 살던 지방 교우들은 오랫동안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대부분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최 프란치스코는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서울, 가원도, 부평 등을 전전하며 살다가 경기도 과천 수리산 뒷듬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뒷듬이마을 사람들은 드문드문 집을 지어 담배일 을 일구고 옹기장사를 하며 살고 있었다.
최경환은 산을 개간해 밭을 일구고 살면서 새로 찾아오는 교우한테는 집을 마련해 주었다. 밤에는 교우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함께 묵상하며 기도를 드리는 등 마을을 교우 촌으로 만들어 나갔다. 훗날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부친은 자주 묵상을 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였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 이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다. 또한 아버지의 말씀은 힘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주셨다."
1863년 모방(Maubnt) 신부가 입국하여. 조선에서는 서양신부가 들어와 전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신학생을 선발하고 있었다. 어느 교우가 최경환의 맏아들이 총명한 아이라고 천거하였다. 모방 신부는 그들 부부를 찾아가 최양업(토마스)을 신부로 만들자고 하였다. 그때 최경환은 "신부님, 고맙습니다. 이것은 저희들의 뜻이 아니라 천주의 부르심이요 소명입니다. 저희 집안에 이러한 기쁨이 찾아올 줄은 참으로 몰랐습니다" 하며 흔쾌히 승낙하였다. 당시는 유교적 관념이 뿌리박고 있어서 자기가 낳은 자식을 형이나 아우한테 양자로 보내는 것도 꺼려하던 때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대 회장이 된 그는,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교우들과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나누어주었고,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한테는 순교할 준비를 하라고 이르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다. 같은 해 7월 13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반가이 맞으며 요기를 하고 쉴 것을 청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안심한 포졸들은 그날 밤 평안히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잠을 깬 포졸들은 아침을 푸짐하게 대접받은 뒤 최경환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체포해 서울 포청으로 이송하였다.
포장은 프란치스코에게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면서 고문을 하게 하였다. 그의 아들 최양업이 신부가 되기 위해 나라밖으로 나간 사실이 알려지자 포장은 더욱 화가 나 무지하게 매질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려졌다. 교우들은 형벌을 못 이겨 대부분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는 태형 삼백사십 도와 곤장 일백여 도를 맞으면서도 아내(이성례 마리아)와 친척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9월 11일 프란치스코는 포장앞에 끌려가 치도곤 오십대를 더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 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졌다"라고 말한 뒤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 그의 나이 서른 다섯이었다.
[경향잡지, 1996년 8월호, 편집부]
[103위 성인 약전] 최경환
그의 집은 매우 부유하엿으며, 특히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었을 때 제일 먼저 입교한 집안 중의 하나였다. 이에 프란치스꼬도 어려서부터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본래 성질이 괄괄하여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신앙의 힘을 얻어 노력한 끝에 점차 온화한 성품을 갖게 되었다 한다.
장성하여 감에 따라 프란치스꼬는 우상숭배에 빠진 주변의 사람들 속에서는 구령(救靈) 하기에 많은 장애가 있음을 깨닫고 형들에게 다른곳으로 이사하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형들이 이를 듣지 않았으므로 어느 날 그는 하직 편지만을 남겨놓은 채 집을 나가버렸다. 그의 편지를 읽은 형들은 매우 놀라 곧 집안 사람을 보내 돌아오도록 간청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더욱 열심히 형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가족들이 그의 말을 이해하고 다래골을 떠날 수 있도록 하였다. 프란치스꼬의 가족은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곳으로 이사하여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이사하자 마자 외교인들과의 송사(訟事)에 져서 가산을 잃게 되었다. 친구 몇몇이 상소(上訴) 하자고 권하였음에도 그는 『악으로 악을 갚으면 안된다』고 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프란치스꼬는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과천(果川) 고을 수리산에 정착하여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열성으로 교리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자녀들에게 성교의 진리를 가르쳤다. 가난한 중에도 애긍시사(哀矜施搭)를 하여 그곳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교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멀리서 찾아오는 이도 있었다. 훗날 토마스 신부는 이 때의 그르 가리켜『저의 부친께서는 자주 묵상하고 신심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신앙의 신비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얻으셨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천주와 결합하여 종교에 대한 말씀만을 하시고 그러한 말씀은 모든 이들에게 천주께 대한 사랑과 사제에 대한 감탄의 정을 넣어 주었으며 또한 그 분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박애심과도 결합되어 있었습니다』라 하여 부친이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열성과 신심을 갖고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기해년의 박해가 시작되고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때 회장에 임명된 프란치스꼬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교우들과 불행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순교자들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도 노력하였다. 가족들에게도 순교준비를 시킬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가지고 있던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는데 다만 종교서적은 그냥 간직하였다. 순교의 그 날까지 배우고자 생각한 때문이었다.
마침내 7월 31일 밤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들이닥쳤다. 프란치스꼬는 조금도 놀라지 아니하며 이들을 친한 친구처럼 맞아 들여 음식을 대접한 다음 이튿날에는 교우 40여 명을 데리고 포졸들을 따라 서울로 향하였다.
도중에 외교인들이 그들 일행을 놀리고 비웃었지만 그는 『형제들, 용기를 재시오. 주의 천사가 금자(金尺)를 가지고 당신들의 걸음을 재고있는 것을 보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갈바리아로 나아가시는 것을 보시오』라고 소리치며 모든 이들을 격려하였다.
옥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포장을 프란치스꼬를 끌어내어 갖은 고문과 형벌을 가하며 배교를 억지로 강요하였다. 피가 흐르고 살이 떨어져나가 뼈가 드러났으나 그는 고통을 참아 조금도 겁내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교리를 설명하여 배교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할 뿐 이었다. 포졸들은 그의 아들 토마스가 국외로 나가있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가혹한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루걸러 고문을 당하면서 그는 태형 3백40도와 곤장 1백10도를 맞았으나 언제나 기도와 전교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이에 옥 중의 죄수들까지 그의 굳은 신앙심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두달 동안을 갖은 형벌로 시달리던중 9월 11일에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나가 치도곤 (治盜棍) 50도를 맞으니 그것이 프란치스꼬에게 주어진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또한 최후의 신앙고백이었다. 이때까지 그를 따른 사람은 아내 이성례(聖禮) 마리아와 이 에메렌시아라는 여교우 뿐이었다. 옥에 돌아온 후 그는 마지막까지 천주의 성의(聖意)를 빌면서 숨을 거두니 때는 1839년 9월 12일로 그의 나이 35세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4월 8일, 김옥희 수녀(한국 순교복자회ㆍ수원대 교수)]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한국교회 디딤돌 놓은 ‘참신앙인’
수리산 교우촌 회장으로 신앙 모범 보여
신심 함양 힘쓰고 나눔·극기 실천에 앞장
‘회장’이라는 직분보다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이자 ‘이성례 마리아의 남편’으로 더욱 잘 알려진 최경환 프란치스코. 그는 한 사람의 아버지, 남편, 평신도 등 다양한 꼬리표를 달고 신앙인으로서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 인물이다.
김수태(충남대) 교수는 ‘2009 수리산성지 학술 심포지엄’에서 “최경환은 수리산에서 체포돼 순교할 때까지 보여준 훌륭한 표양들만으로도 오래 기억하기에 충분한 인물”이라며 “공소회장으로 당시 교회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기해박해에서 평신도 순교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렇듯 그는 한국교회 평신도의 대표격인 정하상과 동시대를 살았고, 한국교회의 디딤돌을 함께 놓으며 평신도의 위상을 높였다. 1827년경 그는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해 살다가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 김성과 경기도 부평으로 이주했다.
1838년에는 과천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에 정착해 이곳을 교우촌으로 일구는데 힘썼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장남 최양업을 마카오로 보내고, 그는 모방 신부에 의해 수리산 교우촌의 회장으로 임명돼 신앙의 명맥을 이어갔다.
최경환의 「칠극」(예수회 판토한 신부가 지은, 죄악의 근원 일곱 가지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을 다룬 책)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 「칠극」의 가르침을 신심의 바탕으로 삼고 있던 그는 교리에 해박했으며 묵상과 독서를 통해 신심 함양에 힘썼고, 나눔운동과 극기 실천, 그리스도와 성인·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고자 애쓰는 참신앙인이었다. 그는 ‘회장’으로서 교우촌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물론 경제적 측면까지도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신자들은 어버이 같이 돌봐주는 그를 존경하고 따랐으며,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 찾아오고는 했다.
아들 최양업 신부 또한 아버지에 대해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 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최경환은 자신이 선종할 때까지 평신도의 사명과 본분을 다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인해 서울과 인근 지역에서 많은 이들이 죽고 살아남은 이들은 피신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수리산 신자들과 함께 서울로 와 순교자 시신을 찾아 안장해주었다. 당시 무자비하고 잔혹한 박해 상황을 미루어 보았을 때, 최경환의 의연하고 담대한 애긍 실천은 놀라운 것이었다.
아들을 신학생으로 봉헌하고, 마을의 ‘회장’직분까지 맡았던 최경환은 체포됐을 때도 남보다 더 많은 고문과 형벌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울로 압송돼 가던 도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산으로 올라간 것을 생각합시다”라며 격려했고 마음을 다잡았다. 포도청에서는 “천지만물의 대주재 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배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켜냈다.
수리산 교우촌에서 신자들과 함께 평신도 신앙과 애긍을 실천하던 최경환은 결국 1839년 9월 12일 34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순명하고 신앙공동체를 일구기 위해 애썼던 그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24일, 오혜민 기자]
5. 성 최경환 · 복자 이성례 부부 [가족의 인연을 하느님께로] (2) 최양업 신부 부모… 강인한 신심을 순교로 증명 - 수리산성지 성당에 있는 최경환 성인 · 이성례 복자 가족 성화.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경기도 과천 수리산 속에 있던 ‘뒤뜸이’ 마을은 박해를 피해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룬 곳이라고 전해진다. 생계를 위해 담배를 경작했다고 해서 일명 ‘담배촌’이라 불린다. 이곳을 일구고 개척한 이는 다름 아닌 한국교회 두 번째 성직자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 성인이다. 그는 1805년 홍주 다래골 새터에서 태어났다. 새터는 현재의 충남 청양이다. 조부 최한일 때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집안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부친 최인주는 신유박해(1791년)로 시련을 겪은 후 모친을 모시고 낙향해 새터에 자리를 잡았다. 14세에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의 조카뻘 되는 복자 이성례(마리아, 1801~1840)와 혼인해서 1821년 장남 최양업을 낳았다. 1827년경 가족들을 서울로 데려와 살았으나 박해의 위험이 닥치자 강원도 김성과 경기도 부평으로 이주했고, 이어 1838년 수리산 뒤뜸이에 정착했다. 앞서 최양업은 1836년 초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돼 그해 말 동료들과 함께 중국 마카오로 출발했다. 최경환은 「칠극」(七克)의 가르침을 신심의 바탕에 두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최양업 신부 서한에 따르면 그는 교리에 해박했으며 묵상과 독서를 통한 신심 함양에 힘썼다. 또 이웃과의 나눔과 극기 실천에 뛰어났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고자 노력했다. 모방 신부로부터 수리산 교우촌 회장에 임명됐던 그는 아울러 회장으로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물론 경제적인 부분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 수리산성지 성당 앞 최경환 · 이성례 비석. 1839년 기해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자 최경환은 신자들과 함께 상경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안장했으며 다시 수리산으로 내려와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평생 교회 가르침 안에서 신자로서의 본분을 따랐던 그는 일찍부터 순교 원의를 지니고 있던 터였다. 최경환은 결국 그해 음력 7월 아내 이성례와 자식들, 교우촌 신자 40여 명과 함께 체포돼 투옥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았다. 아들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유학 간 이유만으로도 형벌은 더 극심했다. 40일 이상의 참혹한 고문 속에 110여 대의 곤장을 맞으면서도 하느님을 증거했다. 굳건한 태도에 외교인들조차 천주 신앙을 찬미하게 했던 그는 9월 12일 포청옥에서 장독사(杖毒死)했다. 「최우정(바시리오)의 이력서」에 의하면 시신은 그의 형 최영겸 부자에 의해 노구산에 안장됐다가 수리산 뒤뜸이 앞산으로 옮겨졌다. 이후 1928년 4남 최신정의 처 송 아가타 증언을 토대로 뒤뜸이에서 유해가 발굴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 안치됐다가 다시 절두산에 봉안됐다. 현재 수리산성지 본묘에는 후손들이 기증한 유해(손뼈 5기)가 안치돼 있다. 이성례는 수리산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던 당시 음식을 준비해 대접한 다음 어린 자녀들과 함께 남편 최경환의 뒤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평소에도 자신이 가난할 지라도 주위의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돌보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사순시기에는 금육·금식으로 모은 양식을 남편과 의논해서 어려운 신자들과 나눴다. - 수리산성지에 있는 최경환 성인 묘. 남편, 자식들과 격리된 채 젖먹이 아들 최 스테파노와 감옥에 갇혔던 그는 300여 대 이상의 곤장을 맞는 등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보였다. 그러나 젖먹이가 굶어 죽어가고, 남편 최경환이 옥사하자 마음을 접고 배교를 선언했다. 아들 최양업이 신학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다시 형조로 압송된 이성례는 갇혀있던 신자들이 배교를 취소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할 것을 권고하자 재판관 앞에서 당당하게 배교 의사를 거둬들였다. 옥에 있던 아들의 죽음을 보면서도 순교 원의를 잃지 않았던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해 감옥에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6명 신자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복자 부부는 부친 최인주로부터 이어진 신앙을 배경으로 자기희생과 절제에 바탕을 둔 남다른 자선을 베풀고, 기도와 영적 독서로 얻은 신앙심을 순교로서 증명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9년 9월 22일, 이주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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