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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초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서 이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죽고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그해 창덕궁이 완성되었으므로 광해군은 이곳을 떠났으며,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宮號)를 붙여주었다.
조선 후기에 덕수궁은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고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이곳에 유폐시킨 일이 있고,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고종 말년 조선 왕조가 열강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기자,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897년(광무 1)에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를 전후하여 궁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고, 정관헌(靜觀軒)·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의 건물도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광무 8)에 궁에 큰불이 나서 전각의 대부분이 불타 버렸다. 그러나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05년(광무 9)에 즉조당(卽阼堂)를 비롯하여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준명전(浚明殿), 흠문각(欽文閣),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으며, 중화문(中和門), 조원문(朝元門) 등이 세워졌다. 이후 1906년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되었다. 이후 이 문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되었고 궁의 정문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으며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910년에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다.
한편,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1897년(광무 1)에 영친왕 이은(李垠)이 여기서 태어나서 1907년(융희 1)까지 거처하였고, 1904년(광무 8) 헌종의 계비 명헌태후 홍씨(明憲太后洪氏)가 인수당에서 별세하였으며, 황태자비 민씨(閔氏)도 석어당에서 별세하였다. 1907년(융희 1) 8월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하였고, 고종의 순헌귀비 엄씨(純憲貴妃嚴氏)가 즉조당에서 별세하였다. 고종은 1907년 왕위를 물려주고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이와 같이 덕수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약 10년간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며, 궁내의 각 건물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그 뒤 별다른 사건을 겪지 않다가 1945년 광복 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1947년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이 자리에 들어오게 되어 덕수궁은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석조전은 6·25전쟁 중에 내부가 불탔다. 이후 덕수궁은 공원으로 바뀌어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석조전은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었다.
● 중화전 권역
1985년 1월 8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중화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이다.
1902년(광무 6) 창건 당시에는 2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되고 1906년 단층으로 중건되었다. 공포(栱包)는 내사출목(內四出目) ·외삼출목(外三出目)이고, 우물천장을 하였으며, 천장 한가운데에 다포(多包)로 천개(天蓋)가 새겨졌고, 천장 널판에 휘황한 금색의 쌍봉이 구름사이를 나는 모습으로 돋을새김[浮彫]되었다. 고주(高柱) 사이의 우물천장 밑 가구(架構)는 다포집이면서도 다포집답지 않은 익공계(翼工系)의 양식을 혼용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의 각 마루에는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놓았으며, 토수(吐首)를 끼웠다. 단청은 모로단청(毛老丹靑:부재의 끝 부분에만 여러 무늬를 놓아 갖가지 색으로 그린 단청)으로 하였고, 광창(光窓)과 문짝에는 소슬 꽃살문을 새겨 짜서 위관(偉觀)을 돋우었다.
중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5량가구(五樑架構)로 되어 있는 다포계 팔작지붕구조이다.
●석조전
동관의 기본 설계는 영국인 J.R.하딩(John Reginald Harding),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하였으며, 1900년(광무 4)에 착공하여 1910년(융희 3)에 완공하였다. 지층을 포함한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이며, 지층은 거실, 1층은 접견실 및 홀,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서재 등으로 사용되었다.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다.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당시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이곳에서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6·25전쟁 이후 1972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1992~2004년에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다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이전하였고, 복원 이후 2014년 10월 13일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서관은 1937년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으로 지은 건물로 8·15광복 후 동관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이 1998년 12월에 개관되어 덕수궁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5-1번지에 있다.
●준명당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부터 경운궁(慶雲宮, 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하여 많은 건물을 중건하였던 1897년에 새로 지었다. 내전(內殿)의 하나로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인데,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불이 나 타 버린 뒤에 즉조당(卽阼堂)과 함께 지어진 것이다.
이 건물의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자모양 평면을 이루고 있다.
왼쪽으로부터 2·3·4번째 칸은 대청으로 통하는 현관으로 개방하였으며, 대청은 침전에서 흔히 쓰는 3칸대청이 아닌 2칸대청이다. 대청 오른쪽에 온돌방을 두고 다시 그 옆 한 칸은 누마루로 구성하여 즉조당의 누마루와 구성상 대칭을 이루고 있다.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는데, 기둥 위는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고 주두(柱枓 : 대접받침)를 놓아 보머리[樑頭]를 받치고 있다. 또, 끝이 둥글게 된 보머리 밑에는 기둥 윗몸으로부터 초각(草刻)된 부재를 내어 이를 받치고 있는 초익공식을 이루고 있다.
기둥 사이 창방 위에는 소로[小累]들을 놓아 굴도리로 된 주심도리(柱心道里) 밑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지 않고, 용두(龍頭)를 놓아 장식하고 있다.
앞과 뒤의 대청 툇간(退間)에는 띠살창호를 달고 위쪽에 빗살로 된 교창(交窓)을 달았으나, 온돌방과 이를 둘러싼 툇간에는 井자살로 된 창호들을 달았다. 또, 온돌방에 딸린 굴뚝[煙堗]은 뒤편에 따로 검은 벽돌로 쌓고 위에 연가(煙家)를 놓아 장식하고 있다.
종래 화재가 난 뒤 경효전(景孝殿)과 흠문각(欽文閣)에 모셔져 있던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을 준명전(濬明殿)과 그 서행각(西行閣)에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준명당은 불타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해왔다.
그러나 이는 준명전과 준명당을 같은 건물로 착각한 데서 온 잘못된 판단이며,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를 보면 현재의 준명당은 1904년에 중건된 것임이 분명하다.
중건 이전의 준명당은 1897년에 지은 건물이고, 즉조당은 조선 중기의 건물이므로 두 건물은 서로 다른 건축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중건되면서 새롭게 전체로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평면구성을 제외한 구조·색채·형태 등에서 통일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후원에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고 거기에 벽돌로 쌓아 만든 굴뚝이 남아 있어 당시의 후원 조경방법을 일부나마 전해 주고 있다.
● 즉조당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던 건물로서, 1623년(인조 즉위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즉위한 뒤부터 즉조당이라 불렀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慶雲宮, 현 덕수궁)으로 옮겨온 뒤 정전(正殿)으로 사용되었고, 한때 태극전(太極殿)·중화전(中和殿) 등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다. 1902년 정전인 중화전이 건립된 뒤부터는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불이 나 타 버린 것을 같은해 3월에 중건한 것이다. 고종이 상왕이 된 뒤 거처하던 궁궐로서 궁명(宮名)을 덕수궁으로 바꾼 뒤인 1907년부터 1911년까지는 후비인 엄비(嚴妃)가 이곳에 거처하였다.
건물의 위치는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 중앙 북쪽 경사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화전의 바로 뒤에 높은 돌기단을 쌓고 세웠다. 준명당(浚眀堂)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아 평면을 확장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정면을 기준으로 평면구성을 보면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된 맨 오른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구성된 누마루이며, 오른쪽 두 칸은 방과 방에 부속된 퇴이고, 그 옆은 대청과 개방된 현관, 맨 왼쪽 한 칸은 방이다. 한편, 현관 앞 처마 밑에는 ‘즉조당(卽阼堂)’, 대청 앞 기둥 위쪽에는 ‘경운궁(慶運宮)’이라고 쓴 현판을 걸어놓았다.
건물의 구조는 먼저 기단부터 보면 긴 댓돌을 바른켜쌓기로 쌓은 높은 기단으로, 윗면에는 네모 전돌을 깔았으며 대청에 맞추어 기단 앞쪽에 3줄의 계단을 배열하였다. 주춧돌은 네모뿔대모양으로 이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귀기둥을 기준으로 건물의 구조를 보면, 기둥 윗몸을 창방에 연결하여 짜맞춘 다음 기둥 위에 주두(柱頭)를 놓고, 이 위에 당초무늬를 새긴 부재를 놓아서 가로로 댄 둥근 모양 주심도리(柱心道里)와 직각 방향으로 걸친 둥근 모양 보를 아울러 받치고 있다. 쇠서[牛舌] 없이 초각(草刻)된 부재만을 써서 초익공식을 택하였고 기둥 사이 창방 위에는 소로를 놓아서 장여를 받치고 있다.
공포대(栱包帶)에 칠해진 단청은 녹색과 적색을 썼으며, 청색과 밝은 황색의 대비적 사용으로 밝은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 위의 처마는 겹처마이며, 팔작지붕마루는 양성을 하지 않고 착고·부고·적새 등을 켜로 쌓아 단정하게 구성하였다. 이 건물의 전체적인 구성은 복도와 난간으로 연결된 준명당과 함께 계획된 것이며, 후원에 남아 있는 굴뚝은 주변의 풍치를 더하여 주고 있다.
●석어당
1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의 굴도리집.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의 바로 뒤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의주까지 피난갔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와 임시로 정치를 행하였던 곳으로, 1904년의 화재로 원래 건물은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90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긴 댓돌을 높이 쌓은 기단 위에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4각형 기둥을 세웠다. 기단 앞 가운데 5단 계단을 두 곳에 설치하였다. 1층 평면의 구성을 보면 바깥두리기둥은 평주(平柱), 쪽두리기둥은 고주(高柱)를 세우고, 평주와 고주의 사이인 퇴(退) 부분은 위치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부여하였다.
대청 앞쪽 2칸 위 퇴는 개방하고 그 양옆은 모두 문과 창을 달아서 독립된 구역을 설정하였는데, 이는 퇴의 안쪽에 대청이 있는 경우와 방이 있는 경우를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또, 대청이나 방을 더 넓게 사용하기 위하여 건물 뒤쪽에 가퇴(假退)를 덧단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맨 왼쪽 방에 설치하여 놓았다. 아래층 기둥머리 위에는 당초무늬를 조각한 초익공을 두었으나 쇠서는 생략하였고, 위층 기둥머리 위에는 공포를 두지 않아 민도리집 형식을 쓰고 있다.
창호는 가퇴에만 격자살창을 쓰고 나머지 부문에는 모두 띠살창을 사용하였다. 처마는 1·2층 모두 겹처마이고, 지붕은 우진각이다. 지붕마루에는 양성을 하지 않고, 착고막이·부고·적새·수키와 등을 켜로 쌓는 방식을 택하였으며 아무런 장식기와나 잡상 등을 두지 않았다.
●광명문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기거하던 침전(寢殿)인 덕수궁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1919년 1월 함녕전에서 숨을 거둔 고종의 국장 행렬이 시작된 지점으로, 고종의 관은 이 문으로 나가 장지인 남양주 홍릉으로 향하였다.
1897년(고종 34) 함녕전이 창건되었는데 함녕전 정문인 광명문도 이때 함께 건립되었는지는 기록이 분명하지 않아 알 수 없다. 1904년(고종 41) 함녕전에서 발생한 화재로 많은 전각이 불에 타 사라졌고 1906년 중화전을 비롯한 전각들 대부분이 중건되었는데 광명문도 이때 중건되었다. 일제는 1933년 궁궐을 훼손하고 궁역을 축소하여 조선의 품위를 깎아내리는 정책에 따라 덕수궁 중심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을 철거하고 중앙공원으로 개조하였다. 이로 인해 광명문 좌우에 있던 행각이 철거되었고, 광명문도 1938년 궁의 남서측 구석진 자리인 석조전 서관 남쪽으로 문짝과 벽체가 모두 제거된 채 이건되었다. 그리고 본래의 기능과 다르게 석조전의 부수적 공간으로서 창경궁 자격루(국보 제229호), 흥천사명 동종(보물 제1460호) 등을 전시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이후 1952년과 2012년 수리를 진행한 바 있다.
2018년 문화재청이 광명문 제자리 찾기 사업을 추진하여 원 위치인 함녕전 남행각 앞쪽으로 이건을 완료한 뒤 2019년 3월 준공식을 가졌다. 이로써 약 80년 만에 광명문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덕수궁 화재 후 중건한 1906년의 모습을 기준으로 삼아 완전해체 후 이건하고, 부재 일부를 교체하여 수리하였다. 그리고 과거 제거되었던 문짝과 판벽을 복구하였다.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면적은 55.11㎡이다. 기단석은 화강석을 다듬은 장대석으로 되어 있고, 초석은 총 12개로 모양이 다른 네 종류가 있다. 기둥은 12개 모두 두리기둥(원주, 둥근기둥)인데 평주(건물 바깥쪽 둘레를 감싸는 기둥)는 10개, 고주(건물 내부 안쪽 둘레를 감싸는 기둥)는 2개로 구성되었다. 공포형식은 사면이 모두 같이 이익공으로 되어 있고,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서까래 끝에 덧얹는 짧은 서까래)을 사용한 겹처마이다.
●함녕전
‘함녕(咸寧)’ 뜻은 ‘모두(咸)가 평안하다(寧)’이다. 《주역(周易) - '건(乾)' 괘 단사(彖辭)》에 나오는 “만물에서 으뜸으로 나오니, 만국이 모두 평안하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시절에 국가 간에 평화롭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듯 하다.
‘함령전’으로도 아는 사람들이 많다. ‘寧’을 '령'으로 읽고 쓰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듯 하다.[3] 그러나 그것은 활음조 현상 때문이다. '寧'의 앞 글자에 받침이 없는 경우 '녕'으로 발음하기 힘들어 편의상 그렇게 부르고 쓰는 것일 뿐이다. 함녕전의 경우, '녕' 앞의 글자 '함'에 받침이 있기 때문에 원래대로 함녕전으로 읽는 것이 맞다.
이 때 지은 건물들은 대부분 신축이었으나, 국가 재정 상황 때문에 경복궁의 전각을 옮겨온 것도 많았다. 함녕전이 그런 경우로, 경복궁의 만화당(萬和堂)을 옮겨 지었다. 황제의 침전인만큼 빨리 공사를 시작했지만, 1897년(건양 2년) 2월에 고종이 환궁한 후에도 완공을 못하여 고종은 한동안 석어당에서 머물렀다.[5] 그 해 6월, 함녕전의 상량문 제술관이 임명되었으며# 함녕전에서 신료들을 접견한 것으로 보아# 대략 7월에서 8월 경에 공사가 끝난 듯 하다. 완공 이후 고종은 함녕전을 자신의 주 처소로 삼았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함녕전의 온돌 수리 공사를 하고 아궁이에서 불을 때다 대화재가 일어났다. 경운궁 주요 전각이 불 타 사라졌고 화재의 발원지였던 함녕전도 당연히(...) 잿더미로 변했다. 그해 12월에 바로 복구 공사에 들어가 2년 뒤인 1906년(광무 10년)에 재건했다. 이 때 기존의 함녕전과 약간 모습이 달라졌다. 함녕전 서쪽에 위치했던 행각을 담장으로 바꾸고, 서북쪽에 온돌방 4칸을 추가로 지었다.
함녕전이 소실된 이후 고종은 중명전을 집무실 겸 침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06년(광무 10년)에 다시 지었어도 그 무렵 있었던 여러 역사적 격변때문에 함녕전으로 돌아갈 시기를 놓치고[7] 계속 중명전에서 거주했다. 1907년(융희 원년)에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함녕전에 잠시 머물긴 했지만, 얼마 안있어 창덕궁으로 이어했다.[8] 결국 고종이 공식적으로 아주 돌아온 것은 이미 국권을 뺏긴 후인 1912년 10월이었다.
이후 이왕직[9]에서 고종의 편의를 봐준답시고 행각들에다 대기실, 사무실을 설치하는 등 주변 모습을 많이 바꾸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 후 함녕전을 빈전과 혼전[10]으로 사용했고 이후 전호(殿號)를 효덕(孝德)으로 정하여 약 1년 간 함녕전을 '효덕전(孝德殿)'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후 주인없이 건물은 비었고, 1938년 일제의 덕수궁 공원화 계획으로 관광지로 변했다.
2009년 문화재청에서 일제가 변형한 행각을 복원했고 2019년에는 정문 광명문을 원 위치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