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탄생"관련성지
10. 필리핀 마닐라 롤롬보이 성지
1837년8월,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 (1838 년 겨울 귀환 )
김대건과 최방제, 최양업 세소년은 얼마 후 마카오에서 청국인들에 의한 민란을 겪게 되어 외방전교회 회원들과 같이 수개월간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생활을 하게 된다.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신학생으로 면학이 계속되었으나 곧 동료 신학생인 최방제가 병사하는 불행을 맞는다. 고국산천 멀리 이역에서 동학도이자 동포를 잃은 김대건, 최양업 두 소년의 가슴은 얼마나 쓰라리고 고통스러웠을까. 그러나 그들은 슬픔과 낙담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1836년 12월3일 서울을 떠난 지 6개월여 간의 고생 끝에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당도한 김대건 일행은 긴장이 채 풀리기도 전에 파리외방전교 회원들과 함께 마카오를 떠나야만 했다. 포르투갈 식민정치에 불만을 품은 청국인들이 8월에 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김대건 일행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오른 피난길의 기착지가 바로 마닐라였다.
당시 마닐라는 마카오보다 훨씬 규모가 큰 국제 무역도시였고 포르투갈인이 아닌 스페인 선교사 즉 예수회원들이 진출해 있던 곳이다.
다행히 1837년의 마카오 민란은 그래 겨울이 진압돼 다음해 1838년 마카오로 귀환하게 됐으나 11월 26~27일 밤 사이에 김대건 일행의 맏형이던 최방제가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처럼 두려워하던 죽음이 드디어 들이닥치고 만 것이다.
동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채 아물기 전인 다음해 1839년 4월6일 마카오 민중이 재봉기하자 김대건과 최양업은 칼레리, 데플레슈 신부 등과 함께 다시 마닐라로 피난길에 올랐다.
마닐라로 피난 온 김대건 일행은 다행히 성 도미니꼬 수도회 원장 초청으로 마닐라 인근의 롤롬보이(Lolomboy)에 있는 성 도미니꼬 수도원 별장에서 11월 마카오로 귀환할 때까지 약 6개월간 피난살이를 했다.
그 후 1842년2월28일(2.15일 메트로신부와 에리곤 호 탑승 마카오출발) 대만으로 가시기 위해 다시 이곳에 들러 10일정도 머무시다, 가신 인연 깊은 곳이다.
▲ 성지 피정의집
▲ 성지 김대건 경당. 김대건 성인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