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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은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는가?
2024년 3월 일 /
신 8:1-6 /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하는 모든 계명을 그대로 지켜 행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살아 남아서 번성하게 되고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그것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2)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40년 동안 저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신 그 여정을 모두 돌아보십시오. 그 목적은 여러분의 고집을 꺾어 겸손하게 낮추어 놓는 한편, 여러분이 과연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 여러분의 마음을 시험하여 알아보시려는데에 있었습니다. 3) 주께서 여러분의 고집을 꺾으실 때에 여러분을 굶주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여러분도 몰랐고 여러분의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주께서 여러분에게 먹여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주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치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4) 지난 40년 동안 여러분의 옷이 해진 일이 없었고 여러분의 발도 부르튼 일이 없었습니다. 5) 여러분이 이 사실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옳게 가르치듯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르쳐 주시는 길로만 걸어가면서 주님을 경외함으로써 주님의 명령을 지키십시오. 7) [선물로 주시는 가나안 복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제 여러분을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땅에서든 들녘에서든 산지에서든 똑같이 깊은 곳에서 샘물과 시냇물들이 솟아날 것입니다. 8) 그곳은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열고 올리브 기름과 꿀이 나는 땅입니다. 9) 그 땅에서는 먹는데에도 부족한 것이 없고 어느것 하나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 땅의 돌에는 철이 들어 있고 어느 산에서나 구리를 캘 수 있습니다. 10) 여러분은 거기서 풍족하게 먹고 행복해지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아름다운 땅을 보며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살았다. 막판에는 애굽 사람들의 핍박으로 인해서 고통이 심했다. 고통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자 모세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광야를 통과해야 했다. 지중해 바다를 끼고 블레셋 지경 지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하는 가자 지구 쪽으로 걸어서 가나안으로 갔다면 1주일 정도면 들어갈 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빠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를 돌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시나이반도로 인도하셨다. 시나이반도는 사막지대로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 사람이 살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❶ 물이 없다. 사람이 물이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❷ 그곳은 사막지대이므로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양식이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❸ 일교차가 너무 심하다. 낮에는 섭씨 45도 이상의 고온이고, 저녁에는 쌀쌀하게 추운 날씨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길로 인도하셨다.
광야를 통과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의 본보기이다. 고전 10:11에서 저들의 모습은 우리의 본보기이며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기록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가는 과정 가운데 광야를 통과했던 것처럼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도 광야와 같은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광야를 통과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실 만큼 사랑하시는데 왜 우리가 당하는 고난 중에 침묵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신 것처럼 육체도 질병이 없이 건강하게 하시고, 물질적인 어려움도 없이 풍족하게 하시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하시면 좋을 텐데 오히려 반대되는 일들이 ….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걷게 하신 이유를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왜 우리가 광야와 같은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묵상하면서 그 해결책을 찾아 미리미리 예방하거나 풀어가면 그만큼 좋을 것 같다.
1. 겸손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기 위해서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다. 2절, 3절, 16절에 보면 3번이나 ‘너를 낮추시며’라고 말씀하셨다.
낮추시는 이유는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겸손’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다.
❶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하게 하여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신다.
❷ 고난이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세상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그들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함을 지니게 하셨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광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미드바르’이고 동사형은 ‘다바르’이다. 이 다바르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인 ‘지성소’라는 용어가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면서 그들을 낮추셨고 그들을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만드셨다.
우리는 ‘광야’ 하면 고난을 떠올리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광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났다. 세례요한은 빈들에 거했는데, 그 빈들은 유대광야이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금식하셨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영적 싸움을 한 후 지쳐있을 때,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광야는 고난의 장소이다. 원어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없음의 자리’라는 뜻이 있다. 환경적으로 견디기 힘든 장소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환경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의 장소인 광야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겸손해졌다.
바울이 바울 되기 전에 그는 사울로 세상적으로 보면 잘난 청년이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 권력과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으니 학문적인 면에서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었으니 종교적으로도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배경이 그를 하늘 높은 줄 모르게 교만하게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시려고 계획하셨다. 그래서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빛과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으로 그에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주셨고, 그 결과 눈이 멀어 사흘을 보지 못하는 고난을 겪게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겸손하게 만드셨던 것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신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작은 자인 것을 가르쳐주셨다. 또 눈이 멀게 된 고난을 통해서 그의 자아를 박살내신 것이다. 그 사건을 통해서 사울은 겸손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사울은 내 복음을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과 그 왕들에게 전파시키고자 내가 택한 그릇이다.’라고까지 하셨다.
교육이 4대 의무 중 하나님인 것처럼 겸손과 온유는 성도가 배워야 할 의무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실까? 크게 두 가지이다. ❶ 겸손이 복이기 때문이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❷ 교만이 저주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
2. 시험하시려고
2절, 16절에 보면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는 또 하나의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사람이 고난을 겪으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❶ 부르짖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 ❷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고난이 찾아오면 ‘시험이다’라고 생각하고 잘 통과해야 한다. 대학입시를 잘 통과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지만, 입시를 잘 통과하지 못하면 재수를 하든지 취직을 해야 한다. 입사 시험을 잘 통과하면 직장에 취직이 되지만 입사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백수생활을 해야 하는 것처럼 광야 시험에 합격하면 가나안에 들어가지만, 광야 시험에 불합격하면 합격할 때까지 광야 생활을 통해서 고된 훈련을 더 받아야 한다.
광야 시험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1.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확인하려고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광야 시험을 통해서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기 원하셨다’라고 하셨다.
광야는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불편함이 백성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원망과 불평으로 자신들의 잘못된 마음을 드러낸다.
■ 어느 한 집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았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친구가 많았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놓고 ‘애야, 너는 친구가 많은가 보구나?’, ‘예, 아버지, 저는 많은 친구를 두었습니다.’, ‘그래, 이 아비는 친구가 하나밖에 없는데, 너는 친구가 많구나? 그런데 하나 물어보아도 괜찮겠니? 이 아비 친구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리는 정말 귀한 친구란다. 너의 친구들은 어떠니?’ ‘예, 아버지, 제 친구들도 저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친구들입니다. 얼마나 의리가 많은데요.’라고 대답을 했다. ‘그래, 그러면 너와 내가 각자의 친구들을 시험해 보면 어떻겠니?’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가마니에 둘둘 말아 넣은 다음, 짊어지고 각자의 친구 집을 방문하기로 하고, 먼저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 집에 도착했다. 친구 집에 도착한 아들은 힘차게 그 집 대문을 두드리며, ‘여보게 날새, 나야, 나. 내가 실수로 사람을 찔러 죽였다네. 이 시체를 잠시만 맡아 주지 않겠나? 나 자네의 가장 친한 친구야!’ 안에서 그 소리를 들은 친구는 문도 열어주지도 않고 ‘미안하네. 나는 당신 같은 친구를 둔 적이 없네’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상심한 아들은 그다음 친구 집에 가서 똑같이 ‘여보게 날새, 나야, 나. 내가 실수로 사람을 찔러 죽였다네. 이 시체를 잠시만 맡아 주지 않겠나?’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받아 주지 않았다. 드디어 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큰 소리로 ‘여보게 나야,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네.’라는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문을 열면서 ‘어서 들어오게. 걱정하지 말게. 내가 자네 친구 아닌가?’ 결국, 아버지가 짊어지고 간 시체, 아니 새끼 돼지를 가지고 그날 저녁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친구가 많은가? 그러나 진실한 친구를 평소에는 구분하지 못한다. 진실한 친구는 어려울 때 알 수 있다.
진짜 믿음은 고난 중에 알 수 있다. 평상시에는 똑같다. 똑같이 기도하고, 똑같이 찬양 드리고, 똑같이 봉사도 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할 때, 내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때 사람의 믿음의 진위가 드러난다.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교인들의 마음을 본다. 어떤 사람은 입을 열어 부정적인 말을 하고 교회가 시험 들게 만드는 마귀의 도구가 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교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부족하기는 하지만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하실 일을 말하며 기도로 교회에 힘을 보태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기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문제를 통해 우리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하신다.
2.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지 안 사는지 확인하신다.
2절에 보면 광야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하셔야 하는 것은 그 누구도 핑계를 대지 못할 것이며, 후일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도 있다.
광야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다. 백성들의 생각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동과 거할 곳을 결정하셨다. 이때 이들을 시험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심대로 순종하고 따라오는가 아니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가를 보신 것이다.
유월절 사건으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오늘 읽은 본문 출애굽기 13장에는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그 옛날 요셉에게 했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요셉의 해골을 메고 애굽 땅을 빠져나왔고(19) 또 애굽 땅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21, 22).
이처럼 급하게 애굽 땅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가까운 블레셋 땅이 아니라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셨다(13:17).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기록된 말씀처럼(13:17) 아직 믿음이 부족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땅을 지나다 전쟁이 일어나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염려했기 때문이요,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자랑하던 애굽의 군사들을 홍해 바다에 수장시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전했다 할지라도 홍해를 갈랐다가 닫게 할 수 있겠으며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우리가 붙일 수 있는 단어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할 일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가야 할 길을 인도하시는 선 한목 자 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다.
그뿐인가? 의식주문제조차 완벽하게 해결해 주셨다. 광야 백성들의 양식으로 매일 아침 만나라는 특별한 양식을 이슬처럼 내려 주셨다. 어느 나라 어느 백성이 만나라는 양식을 먹었으며 그것도 40년간을 안식일을 뺀 매일 양식을 공급받은 것이 있었는가?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전했다 할지라도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우리가 붙일 수 있는 단어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애굽을 나와 광야로 들어갈 때는 걱정도 많았지만 실제로 인도하심을 따라가니 만사가 다 해결되었다.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속에는 ‘위대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감히 표현조차 못 할 ‘사랑의 하나님’이 스며 있다. 그리고 믿는 우리가 기도해야 하며 실천해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마 6:9-13 /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높임을 받으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오늘날 우리도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시험을 보고 있다. 성경과 성령의 음성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가르쳐주신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가 아니면 자기 맘대로 사는가를 보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린아이가 어른이 시키는 대로만 해도 어린아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혜로운 일을 할 수 있다.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지혜롭고 안전한 일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는지 그렇게 하지 않는지 보신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기도와 말씀을 통해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문제를 던져 주시면서 우리가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신다.
에덴동산에서도 함께 거닐기를 원하시지만, 광야에서도 함께 거닐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기도를 할 때도 기도 제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행동하여야 한다. 그래서인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히브리서 11장 말씀이 생각이 난다.
히 11:1 /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
히 11:6 / 여러분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이는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얻을 수 있다.’라는 것보다 우리 자신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위대한 일에 동참할 수 있음에 깊이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것처럼 고난 중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시험하신다. 이런 면에서 야고보 사도의 권면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약 1:1-8 /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나라 밖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문안을 드립니다. 2)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겪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뻐하십시오. 3) 험난한 길은 여러분에게 인내를 기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4) 인내력을 기르십시오. 여러 문제가 닥쳐올 때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치지 마십시오. 인내력이 충분히 길러지면 여러분은 완전히 성장해서 어떤 일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5)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알고 싶거든 하나님께 여쭈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후하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결코 여러분을 꾸짖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6) 그러나 하나님께 구할 때는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구하십시오. 의심하는 마음은 바람에 밀려 파도치는 물결과 같아서 침착성이 없습니다. 7-8) 그런 상태에서 정한 결단은 처음에는 이랬다가 나중에는 저랬다가 하여 매우 불안정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믿음으로 구하지 않는다면 주께 어떤 것을 기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알기를 원하셨을까?
1.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기 원하셨다.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셨고 만나를 먹이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광야 생활은 말씀으로만 살게 하셨다. 홍해를 만났을 때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라고 말씀하셨고 모세가 순종하자 홍해가 갈라졌다. 다시 말하면 홍해는 말씀으로 갈라진 것이다. 마라의 쓴 물을 만났을 때는 나뭇가지를 지시하셨고 그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지 쓴 물이 단물이 되었다. 마라의 쓴 물도 말씀으로 단물이 된 것이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도 그러했고, 요단강을 건널 때도 그러했고,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도 그렇게 하셨다. 말씀을 받고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났다.
광야에는 먹을 것이 제대로 없다. 먹을 것 때문에 걱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하늘에서 만나가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말씀대로 하늘에서 40년 동안 만나가 내렸다. 백성들은 만나를 먹은 것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필요 이상의 만나를 거두지 못하게 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많이 거두어서 보관해 놓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남겨둔 것은 상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것조차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제6일에는 다른 날 보다 두 배를 거두고 제7일에는 거두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다른 날에는 남은 만나가 상했었는데 신기하게 안식일에는 상하지 않았다. 이런 경험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확신하게 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때로는 좀 더딘 것 같아도 힘들게 느껴지기는 해도 가장 완벽한 것이요, 가장 좋은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것을 알기 원하셨다.
광야 생활을 한 사람들이 장정만 약 60만 명이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200만 명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엄청난 사람들을 40년간 먹이셨다. 그것도 광야에서 말이다. 이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사실 이 기적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다고 근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믿음만 있다면 우리도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 믿음만 있다면 위대한 일에 도전할 수 있다. 우리가 큰일을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없으므로 도전하지 않아서 그렇다.
하나님이 풍성하게 공급하신 이유는 그분은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때를 따라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 설령 구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하시도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졌다.
마 6:25-33 / 그러므로 내가 전정으로 말한다. 먹고 마시고 입고하는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이미 생명과 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으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가 걱정한다고 해서 그 걱정이 너희 목숨을 한 순간이라도 연장시킬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왜 의복 때문에 걱정하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으나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왕도 그 꽃만큼 아름답게 옷을 입지는 못하였다. 30)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돌보아주시지 않겠느냐? 31) 그러므로 음식과 의복을 쌓아 두려고 걱정하지 말라. 32) 왜 그런 것에 마음을 쏟고 자랑을 늘어놓는 이방인처럼 되려고 하느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33)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족하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돈을 더 잘 벌기 때문에 자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풍성하게 사는 것은 맞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 능력을 누가 주셨는가? 18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라고 하였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재물 얻을 능력만이 아니라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심지어 자식을 낳고 못 낳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자식을 낳지 못하다가 결혼한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자식을 낳게 되었다. 창 30장에 보면 라헬이 자식을 잘 낳는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라고 했다. 그랬더니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식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4. 마침내 복을 주시려고
16절이다.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것은 마침내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다. 애 3:33에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다. 그래서 광야 생활을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우상숭배에 빠졌다.
지금 시대에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도 비슷하다. 아버지께서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는데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지금 훈련하셔서 언제 복을 누리겠느냐고 말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진리적이지는 않다. 우리의 인생이 무엇일까?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 영원한 세계에 비교하면 일순간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 세상만 생각한다면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겠는가? 영원한 세계가 있기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학교 다니고 학원 다니는 일이 피곤하고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 부모들은 싫다는 학교와 학원을 억지로라도 보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부모가 아이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아이가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아이들 잘되라고 하는 일 아닌가!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라.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잠깐 힘들지만, 그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마침내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지금 광야 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다면 기억하시라. 광야를 지나면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다. 지금 광야 생활이 힘들다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시라. 곧 하나님이 예비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결론을 이렇게 맺고 싶다.
겸손은 인간을 가장 품위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겸손하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과 같으며,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독선적이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과 같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가치는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는 성품이 될 때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가운데 ‘실존(實存)’이라는 말이 있다.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 가운데서 실존을 발견하며, 칼 야스퍼스는 ‘난파(難破)’된 삶에서 실존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어떤 방법도 의존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은혜’이다. 우리가 철저하게 낮아져서 ‘겸손’의 성품 말고는 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삶이 시작된다.
성경을 보면서 깨닫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완성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다듬어 가신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성품이란, 완성품으로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품 훈련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마치 칼을 쓸 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칼을 맡기는 것과 같으며, 총을 쓸 줄 모르는 아이에게 총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품은 늘 성숙해가는 것이다.
본문 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께서 사십 년을 광야에서 걷게 하신 이유가 있구나! 우리를 낮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보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게 하셨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너무나 명확하게 보고 계셨다.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본성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우리의 낮아짐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낮아짐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가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바로 겸손이다. 40년 동안 철저하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낮추는 작업’을 하셨다. 광야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존재, 인간의 연약함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셨다. 이 겸손함은 인간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제 축복의 땅, 가나안을 앞에 놓고 모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이 무엇인가? 개역 성경에서는 민수기 8:14이 ‘두렵건 대’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Living Bible에서 보면 이렇게 표현하였다. ‘that is the time to watch out …’ 이 말씀은 신명기 8장 처음부터 시작되는 구절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던 그 땅을 얻게 될 때, 모든 것이 풍족하게 될 때, 더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살 것 같은 세상이 될 때, 교만하여질 것을 염려하며 모세가 이 글을 기록한 것이다.
교만의 가장 큰 위험이 무엇일까? 본문 14절은 ‘여호와를 잊어버릴까’라고 기록하였다. 반대로 말하면 겸손한 때는 여호와를 기억하지만, 교만해지면 여호와를 잊어버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르는 성품의 기초가 바로 ‘겸손’이다. 그동안 겸손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던 것은 김석균 목사의 겸손을 통하여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김석균 목사의 ‘겸손 가사’
♬ 슬픔속에서도 울지 않는 것, 억울해서 울지 않는 것,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도 걱정하지 않는 것, 사랑할 수 없는 사람조차도 사랑하며 품어주는 것,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용서하여 주는 것, 어떠한 자기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 참을 수 없어도 화내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 감사할 수 없는 그런 조건에서도 감사하며 사는 것, 칭찬이나 비난 가운데서도 침묵하며 살아가는 것, 말씀 순종하길 어려울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 어떠한 자기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 겸손은 겉사람이 드러나지 않고 속사람이 드러나는 것,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 / 어떠한 자기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어떠한 자기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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