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자: 2024.03.03 주일 낮 예배
- 말씀: 빌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제목: 너희의 관용을 널리 알려라
-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담임 이덕휴
- 은혜찬양: https://www.youtube.com/watch?v=sNs7pYjKfT4
할렐루야!!
만나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한 주간도 평안하셨기를 주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축원드립니다.
- 시작하는 말씀
오늘 말씀에는 관용이라는 말이 눈에 띄입니다. 레 미제라블(쟝 발쟝 또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소설을 쓴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탈리아에 르네상스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다"
프랑스의 작가, 철학자, 계몽 사상가. 18세기 유럽 문학계의 최고 유명인사이자 당대 계몽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관용이라는 종교적 표현의 사랑이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으로서의 관용, 즉 똘레랑스(톨러런스 또는 영어의 클리어런스; 틈, 편차, 공차 등의 프랑스 어 단어)입니다.
그는 당시 천주교(카톨릭)과 개혁종교 즉, 개신교와의 갈등으로 같은 민족 간에 또는 이 민족간에 종교개혁 이후의 유럽사회를 피로 물들인 당시의 갈등과 핍박으로 인한 문제에 대하여 평생을 두고 '종교의 광신과 배타성'을 타파하기 위해 싸웠으며, '종교적 관용'을 뜻하는 똘레랑스를 프랑스 정신의 일부분으로 만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가 했던 말 중에서 유명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은 볼테르가 한 말이 아니라 전기 작가가 했다는 일설도 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I disapprove of what you say, but I will defend to the death your right to say it."
(당신이 하는 말에는 찬동하지 않지만, 나는 그것을 말할 당신의 권리는 목숨을 걸고 지킬 것입니다.) 라는 유명한 말을 한 것으로 알려진 볼테르의 사상이 오늘의 성경말씀에서 말하는 사도바울의 관용이라는 말로 대치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하나님 말씀은 우주를 관통하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말씀에서의 관용의 가장 잘 설명되는 구절은 내가 생각할 때, 갈 5:22-23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킹 제임스 버전 ( KJV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말씀이 주시는 메세지는 이렇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4 메시지 ( MSG )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면 어떻게 될까요? 그분은 과수원에 열매가 맺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 삶의 활력, 평온함과 같은 선물을 우리 삶에 가져오십니다. 우리는 사물을 고수하려는 의지, 마음 속의 동정심, 기본적인 거룩함이 사물과 사람에게 스며든다는 확신을 발전시킵니다. 우리는 삶의 방식을 강요할 필요 없이 충성스러운 약속에 참여하고 있으며, 우리의 에너지를 현명하게 정리하고 지도할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이것을 가져오는 데 무력합니다.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길을 가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필수품이라고 부르는 것에 생각 없이 반응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은 선을 위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즉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서론이 너무 길면 주님이 주신 오늘의 말씀이 희석될지 모르니까 본문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우리는 날마다 세상 속에서 살면서 나 자신과 나의 가족을 생각하면서 살아 가는 가족중심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갑니다.
나의 이웃에 대한 배려, 또는 관심 아니면 이타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요즘처럼 다음 달에 있을 우리나라 총선을 앞두고 얼마나 상대를 끌어 내리려는 배타심 또는 이기심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여러분이 잘 보고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참으로 주님의 평화는 뒷전이고 나의 이익과 나의 삶의 목표만을 위하여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모습이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민망할 정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내 자신이 기뻐할 줄 모르면 세상은 먹구름입니다.
기뻐한다는 말의 희랍어 원어는, Χαιρετε ( Chairete )라고 합니다. 이는 고후9:7절 말씀에,
각 사람은 그 마음에 있는대로 하고 슬픔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기뻐하여 주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앞서 관용이라는 말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관용은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즉 내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내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내 자신이 상대방으로부터 판단받는 것이라고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기 위해서는 내 안의 기쁨을 버리고 상대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될 때, 주 안에서 기뻐하게 됩니다. 이것이 관용의 첫걸음이 되는 것이지요
2.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관용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일찌기 독일의 법철학자 한스 켈젠은 말합니다. 민주주의의 정의는 관용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위에 세우기 위해서 왔다 라고 빌라도에게 말하지만, 빌라도는 육의 사람이라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육으로 살면 육의 영이요 영으로 살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라고 했습니다. 빌라도에게서 처럼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는 권세가는 썩어가는 영이 되지만 성령의 생령의 주님을 믿는 우리 만나인은 결코 썩지 않는 영원한 삶을 살 것임을 믿습니다.
관용의 대표적인 예는 골고다에 오르시는 주님에게서 찾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수박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명령조로 말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여기 알게 하라는 말에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 말을 잘 못 들으면 뭐 예수 믿는 사람이 꼭 관용을 알려야 하는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애써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나의 관용을 나타냄으로, 자랑하듯 은근이 나를 표현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내가 참된 관용의 삶을 삶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그것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것을 남이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단어의 깊은 의미입니다.
양보할수 있는 상황이 못되는데, 양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바로 관용의 깊은 의미입니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사실상 관용입니다. 민주주의라는 대의 정치에 관용이 없다면 그것은 절대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하고 싶은데 민주를 위해서 반대하는 반 민주주의는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딜레마입니다. 아시겠어요?
우리가 주님의 선교를 위해서 파견을 나갑니다. 전도할 상대는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결코 죽음으로써 주님을 외면하는 절대적 타종교인을 만납니다.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그를 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지금껏 기독교가 가지고 있었던 불행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나 칼벵 그리고 멜랑히톤 무수한 개혁자들은 비 개혁신앙 즉, 카톨릭 교도들과 싸웠습니다. 죽였습니다. 잘 한일입니까? 놀렐루야 입니다. 정말 놀랠 일입니다. 카톨릭은 어떻습니까? 개신교도을을 죽였습니다 주 안에서 화평입니까? 스스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용은 베풀어라 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교과서에서 아니 성경에서 하라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닙니다. 스스로 주 안에서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친절할 수 없는데... 친절하고...내가 내려다 보아도 한참 볼수밖에 없는 신분의 사람에게도... 인내할 수 없는 힘든 일인데... 인내하고...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온갓 모욕을 당하면서도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 지시고 올라가시면서...용서못할 사건인데 ... 용서하는 ... 그런 것은 믿음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3.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기 바랍니다.
돈 베이커(Don Baker)는 ‘감사요법(Thank you therapy)’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는 환경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나 태도를 변화시킵니다.” 즉 감사가 조건을 변화시키지 못하나 마음가짐을 바꾸어 태도를 변화시키고 결국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감사해도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감사해도 장애를 가진 사람이 정상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감사해도 얼굴이 못생긴 사람이 미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면 가난해도 부자 이상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감사하면 장애가 있어도 정상인보다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현재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고, 다행히 이런 상황마저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심정을 아뢰어야 합니다. 남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떤 인간은 낙천되니까 스스로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었다는 뉴스가 있습니다. 그게 잘 하는 일일까요
주안에서 승리하시는 만나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 만나인에게 주신 말씀은 살전 5:16-18입니다. 함께 봉독하면서 말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