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유감
한 번 일어난 사건은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변덕이 심하다. 이변이네’고 하고, 두 번 같은 일이 일어나면 ‘아니 또 일어났네. 괜찮을까. 다음을 조심해야지’라고 한다. 그러나 세 번 같은 일이 일어나면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자연현상이네.’라고 한다. 즉 당연시한다. 일상이 된다.
지난 주 어느 날, 봄날이 너무 좋아 금호 강변으로 맨발 걷기 나섰다. 맑은 하늘을 향해 수양버들은 노란 잎을 부끄러운 듯 내밀고, 다행스럽게 올해는 하늘에서 봄가뭄 걱정 없게 내려준 겨울비에 힘입어 금호강엔 물살이 넘실대며 윤슬이 흐른다. 산새들도 흥에 겨워 지지배배 소리 높여 노래 부르다 방향 잃고 물가까지 내려왔다.
얼음 녹은 황토길은 몸의 무게를 받고는 폭신한 양탄자 촉감으로 힘을 흡수하였다가 다시 몸을 추스르게 발바닥에 탄력을 실어주며 몸을 받쳐 힘을 되돌려준다.
흥에 겨워 저절로 노래가 나왔다.
『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볼까나~⁓𝅘𝅥𝅮 』
콧노래를 부르며 마주 오는 맨발 동호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 환하게 웃으며 봄의 새악시인 것처럼 밝은 미소로 응답한다.
잠시,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소용돌이치듯 흙먼지가 날아든다. 회색 구름이 모이더니 후드득 빗방울이 지난다. 찬기가 얇은 옷소매를 뚫고 들어온다. 아직은 차다 봄바람이…. 차 한잔 식기도 전, 거짓말처럼 비는 그치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내린다. 땅바닥에 물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아무도 이 변화무쌍함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그래도 햇살의 따스함으로 모든 걸 용서해 주었다. 찬 바람과 작은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 뿌리들은 물을 끌어 올리고, 수양버들 가지는 잎망울의 싹을 틔울 것이다.
젖은 옷을 세탁기에 넣으며 용서해 주었다. ‘한 번쯤 일어날 수 있는 봄날의 변덕이다’라고 보듬으며 기꺼이 예상치 않은 심술궂은 봄비를 용서해 주었다. 갓 피어나는 아가씨의 가시 품은 새초롬함이라 생각하며…
봄이 완연하다. 찬란한 햇빛이 창을 뚫고 달려든다. 따가운 햇살이 지금 당장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온몸을 감아 맨다. 읽던 신문을 접고 배낭을 메었다. 간단하게 물과 사과 그리고 빵 하나를 챙겼다. 미움받는 믹스커피 하나는 몰래 숨기고 주저함이 없이 금호 강변 뚝길로 나섰다.
안심습지의 자랑이다. 강 중간에 쌓인 모래톱으로 인하여 수양버들이 자리 잡아 자란다.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듯 나무들은 푸른 잎을 내밀며 오는 봄을 마중한다. 뚝 비탈 곳곳에는 야생의 살구꽃, 복숭아꽃, 산수유가 피었다. 하얀 민들레는 길가에 자리잡고 앉았다. 강촌마을 앞 뚝방길에는 벚꽃이 활짝 피었다.
어두운 눈에 우연찮게 녹색 꽃이 소담히 피어있는 게 보였다. 그 자태가 꽃의 품위를 잃지 않고 있다. 화려하게 무리 지어 핀 벚꽃이 아니다. 홀로 어쩌다가 벚나무 틈새에 끼어, 우연이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는 곳에 꽃으로 피어있다. 녹악매(綠萼梅 : 靑梅. 꽃잎의 안쪽은 물론, 꽃받침과 가지까지 녹색인 매화)이다. 예기치 않은 녹악매의 출현에 온몸이 봄의 기운을 흠뻑 들이켰다.
녹악매(綠萼梅 )
海月 채현병
청초한 맵씨라니 받침까지 푸르르고
정갈한 마음씨라니 화심(花心)도 푸르르다
저리도 빛나는 성정(性情)을 또 견줄 이 있으랴
따스한 햇볕에 지친 다리도 쉴 겸 벤치에 앉아 커피를 즐긴다. 금호강은 며칠 새 더욱 세차졌다. 어젯밤에 내린 봄비 덕분인가. 소리도 풍성하다. 강은 물이 넘치게 흘러야 한다. 시골 장터 선술집 주인아줌마 인심 마냥.
돌아오는 길은 잠수교를 지나 팔현마을 뚝길을 택했다. 봄기운을 받아 발걸음도 가볍게 잠수교를 지나 팔현습지로 들어섰다.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고 사방이 어두워진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순식간에 후드득 소나기처럼 떨어진다. 홀연 돌개바람이 일어나고, 천둥소리가 ‘우르르 쾅’ 요동친다. 아닌 밤중이다. 갑자기 우박이 쏟아진다. 굵은 콩알만 하다. 비 피할 곳 없으니 뛰어도 소용이 없다. 고스란히 물에 젖은 생쥐가 되어 버렸다.
아니 여름도 아닌데 천둥에 소나기, 우박이라니….
지난주에 경험한 속수무책의 봄비가 생각나고, 경험했으면서도 우산도 없이 움직인 경솔함을 되려 탓했다.
혹시 올봄, 세 번 이런 사나운 봄비를 맞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꿀벌에 대한 다큐가 떠오른다. 인간이 만든 죄악으로 환경은 파괴되었고, 지구 온난화니, 이변이니, 폭염 산불이니 하며 몸살을 앓는 지구의 모습을 거의 매일 매스컴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죄 없는 곤충들은 어떻게 이 위기를 넘길까? 이런 기후를 견뎌낼 수 있을까? 방법이 없다. 최근 몇 년, 꿀벌 실종 사건이 있었다. 꽃이 만발한 산천에 벌이 없다면… . 수정 못 한 꽃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꿀벌이 사라지면, 열매 없이 나무는 대가 끊길 것이고, 머잖아 지구는 사막으로 변할 것이다.
만물을 소생시키는 고마운 봄비다.
봄비 속을 걷다
류시화
봄비 속을 걷는다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봄비는 가늘게 내리지만
한없이 깊이 적신다 / ...후략
봄비에 유감을 가진다는 것은 새봄을 그리는 모든 이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그러나 세 번 같은 일이 거듭되면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자연현상이네.’라고 했다. 즉 당연시한다. 일상이 된다. 즉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말이다.
봄비 유감. 그것은 세 번의 황망한 봄비를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첫댓글 사랑과 그리움의 계절에 사나운 봄비가 왠일? 그래도 봄비는 봄비지요! 지하철 1호선 공사로 인해 차량으로 출퇴근이 어려워 시지에서 동촌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할 때 지나다니던 금호강 강뚝, 잠수교......따뜻한 기억이 납니다.
요즈음 계절이 예전과는 달리 느껴집니다. 봄비도 그러합니다. 글을 잘 풀었습니다. 계속 글을 읽고 쓰시기 바랍니다.
봄비유감! 정말 유감이네요. 봄처녀 마중하려 맨발로 달려 나갔는데 때아닌 천둥번개에 소낙비 우박 까지 봄처녀는 곱게 차려입고 살짝쿵 오시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가끔 심술을 부리기도 한답니다. 아마도 새생명 탄생의 산고 같은 것이지요.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녹악매> 라는 매화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예전엔 일부러 비를 맞고 걷기도 했습니다만, 요즘은 예기치 않은 비를 만나면 유감입니다.
우박이 쏟아지는 그날, 저는 우산을 휴대하지 않고 나갔습니다. ㅠㅠ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봄비는 반가운 손님이란 인식을 갖고 있는데 개구장이 처럼 얄궂은 면도 있네요.
남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면을 익살스럽게 잘 그려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