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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못 다섯 성인 순교길 ( 五聖人殉敎路 : 忠淸水營路 ) 연구
A Study on Galmaemot 5 Saints’ Matyr’s Road
(Chungcheong Suyoungro)
2016. 9. 김장환
들어가는 글....................................................................5
1. 조선시대 도로 ..........................................................6
가. 도로 상황 .............................................................6
나. 도로 운영체계 .......................................................7
다. 도로망 ..................................................................8
라. 교통수단 ...............................................................9
2. 대동여지도 충청수영로 ............................................10
가. 충청수영 .............................................................10
나. 충청수영로 ..........................................................10
3. 다섯 성인 순교길 ....................................................18
가. 포도청 ................................................................18
나. 병인박해 시작 .....................................................18
다. 체포와 압송 기록 .................................................19
라. 심문과 판결 기록 .................................................24
마. 충청수영 호송 기록 ..............................................27
바. 순교 후 유해 이동 ...............................................31
사. 다른 여행 기록 사례 ............................................32
아. 순교길 일정과 압송 및 호송 모습 ..........................36
4. 순교길-충청수영로 찾기 ...........................................43
가. 지점 찾기 ............................................................43
나. 노선 찾기 ............................................................46
다. 물길 건너기 .........................................................47
라. 순교길과 충청수영로 .............................................48
마. 의문점 및 확인 ....................................................52
바. 순교길-충청수영로 추정 ........................................56
5. 도로변화 .................................................................61
가. 순교길-충청수영로 도로변화 ..................................61
나. 도로변화 과정 ......................................................64
다. 도로변화 요인 고찰 ..............................................66
나가는 글 .....................................................................69
참고문헌 ......................................................................71
들어가는 글
2016년은 한국 천주교회 박해 역사에서 그 규모나 방법이 가장 극심했던 병인박해
1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병인년 박해 중에서 내포 사목 중심지인 신리와 제천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포도청 심문과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서울에서 360리길 떨어진 보령 충청수영으로 호송되어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다블뤼 주교(48), 오메트르 신부(29), 위앵 신부(30), 황석두 루카(52), 장주기 요셉(64)1) 다섯 분 성인의 순교길을 찾아 가고자 한다.
갈매못 성인들은 다른 순교자들과는 다르게 신리에서 서울로 5일 간의 압송 길과 서울에서 충청수영으로 6일 간의 호송 길을 가게 된다. 모진 박해 속에서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달릴 길을 다 달리고 기쁘게 순교하신 다섯 성인의 마지막 가신 압송 길과 호송길을 밝히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다섯 성인의 순교길을 따라가면서 ‘하늘나라로 기쁘게 가는 길’을 묵상하는 순례길이 된다면 더욱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갈매못 다섯 성인에 관한 연구로 원재연은 <성 황석두의 생애와 활동>(2014)에서 황석두 성인의 생장과 입교, 교회활동, 순교의 과정 및 영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였다. 차기진은 <갈매못 순교자들의 최후 압송로와 순교터‧ 매장지에 대한 연구>(2016)에서 수영에서 갈매못까지의 마지막 압송 길과 장기대 장소, 순교터, 1차‧ 2차 매장지를 고증하였다. 하성래는 <충청수영 5위의 순교와 이장>(2009)에서 다섯 성인의 순교 장면과 이장과정을 정리하였다. 다블뤼 주교에 관하여는 샤를 살몽의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2006)에서 종합적으로 정리된 바 있다.
여진천은 <배론 신학교 푸르티에 신부와 장주기 회장>(2009)에서 장주기 성인의 삶과 순교를 정리하였다.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는 <<장주기 성인 자료집>>(2016)을 통해 장주기 성인에 관한 관련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종합하여 정리 발간하였다. 양업교회사연구소에서는 <<황석두 루카 성인 전기 자료집>>(2013)을 통해 황석두 성인에 관한 자료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 최근 내포교회사연구소에서는 병인 150주년 기념 학술 발표회 자료집 <<갈매못 다섯 성인의 삶과 영성>>
(2016)에서 다섯 성인들의 삶과 영성을 조명하였다.
조선시대 후기 길에 관한 연구에서 고동환은 <<한국 전근대 교통사>>(2015)를 통해 우리나라의 교통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 최영준은 <<한국의 옛길 영남대로>>(1990)에서 조선 시대 옛길인 영남대로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한 바있다.2) 도도로키 히로시는 <<조선왕조의 가도>>(2013)에서 조선시대 육상 교통로의 체계와 형태를 역사지리학적 방법으로 연구 정리 하였다.3) 김의달은 <<한국 국토개발사 연구>>(1983)에서 삼국· 고려· 조선시대의 교통 상황을 정리한 후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의 우리나라 국토 개발 과정을 종합적으로 연구 정리하였다.4) 정연식은 <조선시대의 도로에 관하여>(1998)에서 도로의 형태와 도로 열악성의 이유를 고찰하였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삼남대로(해남로) 노선 발굴과 콘텐츠 개발>>(2011)5)을 통해 삼남대로 노선을 밝혀낸 바 있다. 정진술은 <이순신 백의종군로 연구>(2014,2015)6)에서 의금부에서 공주 일신역까지의 노선을 고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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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주기 요셉 성인은 제천 배론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2) 최영준, <<한국의 옛길 영남대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90, 2004.
3) 도도로키 히로시, <<조선왕조의 가도: 한국 근세 육상교통로의 역사지리>>, 동경, 고금서원, 2013.
4) 김의달, <<한국 국토개발사 연구>>, 대학도서, 1983.
5) 문화체육관광부, <<삼남대로(해남로) 노선 발굴과 콘텐츠 개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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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먼저 조선시대 도로상황 및 운영체계를 살펴보고 1861년 제작된 대동여지도를 중심으로 충청수영로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1866년 이 길을 가신 다섯 성인의 체포와 압송, 호송과정의 기록과 증언을 수집하여 비교‧ 고찰하면서 순교 길의 일정, 노선, 모습을 밝히고자 한다.
순교길 및 충청수영로 옛 길을 밝히는 방법으로는 역사지리학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우선 대동여지도에서 지나는 지점을 확인하였다.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 교차지점, 역과원, 고개, 좌우 산과 내의 위치를 확인하고 찾아보았다. 다음에는 노선을 확인하였다.
노선 확인은 조선시대 고지도 및 지방군현도를 비교하면서 찾아보았고, 일본이 정탐으로 제작한 1895년 구한말 지도와 일제강점기 1914년 이후 지도를 비교하면서 추정하였다. 마지막으로 현지답사와 지적도를 통해 지점 및 노선의 흔적을 추적하며 확인하였다. 위 작업을 수행하면서 나타나는 의문점들은 상기의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밝혀나갔다.
현재의 도로 모습과 지도에서 1866년 순교길 및 충청수영로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도로가 생성
되고 소멸하는 변화의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순교길 및 충청수영로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서 구한말,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와 경제성장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도로변화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조선시대 도로
가. 도로 상황
조선시대 도로는 중앙집권적인 왕의 통치를 위해 행정과 군사적인 측면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는 산과 강이 많은 지형적 특성으로 도로보다는 강을 이용한 수로가 발달하였다. 도로는 산모퉁이를 돌아가고 내를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도로 건설과 보수 유지는 인근 마을 백성들의 부역으로 이루어졌다. 특별히 왕이 행차하는 능원陵園로, 대중국 사행使行로, 북방 경비警備로, 대일본 사행로가 중요한 도로로서 관리되었다. 조선 시대 후기 상업경제가 발달하면서 실용적 지식을 추구하던 실학자들은 도로를 군사적‧ 행정적인 관점에서 점차 상품 운송이라는 경제
적인 관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7)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전工典 교로조橋路條에 의하면 도성 안 도로 너비는 대로 56 척, 중로
16척, 소로 11척으로 하고 양옆 도랑은 너비 2척으로 하도록 하였다.8) 영조척 1척은 31.2cm이므로 대로는 약 17.5m, 중로는 약 5m, 소로는 약 3.4m였다.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에 의하면 도성 안 도로는 대로 36보步, 중로 18보, 소로 9보로 하고, 외방도로는 폭이 대로 12보(읍성안: 18보), 중로 9보, 소로 6보로 규정하고 있다.
대로는 서울 길, 중로는 고을과 고을사이, 소로는 작은 마을에서 고을로 통하는 길이라 하였다.9) 그러나 이러한 도로 규정 폭을 지키기는 매우 어려웠다. 지형 특성상 산골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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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진술, <이순신의 백의종군로 연구: 수원부에서 평택현까지>, <<충무공 이순신과 한국해양>> 창간호, 해군사관학교, 2014, pp.181-209; <이순신의 백의종군로 연구: 평택현에서 공주 일신역까지>, <<이순신 연구논총>> 제24호, 순천향대학교이순신연구소, 2015, pp.48-81; <이순신의 백의종군로 연구: 의금부에서 수원부까지>, <<이순신연구논총>> 제22호, 순천향대학교이순신연구소, 2014, pp.265-300
7) 고동환, <<한국 전근대 교통사>>, 들녘, 2015, p.90
8) 법제처, <<경국대전>>, 부산일보사, 1965,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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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마루는 평지보다 도로 폭이 더욱 좁아졌다. 서울로 통하는 간선도로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그 밖의 도로들은 수레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10)
도로가 제 기능을 하려면 노면을 단단하게 고르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시대 도로를 만들고 관리하며 교량을 수리하는 일은 본래 공조工曹의 영조사營造司가 맡고 있었다. 세종 8년에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으로 그 소속이 바뀌고 다시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명칭이 바뀌었다. 도로와 교량의 관리는 관에서 담당하게 되어있으나, 수성금화사가 도로를 단단하게 고르는 일은 거의 없고, 백성의 도로침탈이나 오물투기를 단속하는 일이 주된 일이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노면이 평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진흙길이 되었다.”11)고 기록하였다.12)
<<경국대전>>에 따르면 지방 도로에 10리마다 소후小堠를 세우고, 30리마다 1식息으로 삼고 대후大堠를 세우되 역을 두며 후에는 리수里數와 지명을 새기도록 하고 있다.13)
후堠란 본래 이정을 표시하는 흙무덤으로써 흙이나 돌무더기를 돈대처럼 쌓아서 후자堠子로 쓰는 경우도 있고, 나무를 세워 후수堠樹로 하거나, 돌로 비를 세워 후비堠碑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역신을 쫓고 악귀의 침범을 막는 장승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거리를 측량하기 위해 기리고차記里鼓車를 사용하였는데 1리를 가면 나무 인형이 스스로 북을 치게 되어 있었다.14)
조선시대 도로는 산을 피하고 계곡을 따라 생겨났기 때문에 내를 건너는 곳이 많았다.
내를 건너기 위한 다리는 토교와 목교가 많았고 석교도 있었다. 토교土橋는 기본적인 나무 구조물과 널판 위에 풀과 흙을 덮고 뗏장을 얹어 놓은 것이고, 목교木橋는 상판을 나무 널로 덮은 것이다. 토교나 목교는 내구성이 없어 무너지거나 큰 비에 떠내려가기도 하여 좀 더 견고하게 석교를 놓았다. 석교石橋는 사찰 입구나 도성 부근에 설치하였는데 인력과 경비가 소요되었다. 광통교, 혜정교, 안양교, 살곶이 다리 등이다. 이 외에도 작은 내에 큰 디딤돌을 놓아 만든 징검다리, 배를 연결하여 묶고 널을 깔은 배다리(주교舟橋)도 있었다.15)
나. 도로 운영체계
조선시대 교통‧ 통신‧ 숙박의 기능을 담당하는 중요한 제도는 역원제驛院制이다. 역驛의 기능은 중앙정부와 지방간 공문 전달, 공물 수송,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에 말과 숙식 제공, 변방 군사정보 보고 등을 위한 것이었다. 이들 역참에서는 통행인을 검문하는 관방關防의 구실도 하였다. 역을 관할하는 최고기관은 병조兵曹이고 실제 업무는 승여사乘輿司가 담당하였다. 지방에는 종6품 찰방察訪과 종9품 역승驛丞을 파견하여 소속된 역을 관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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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유형원저, 한장경역 <<국역주해 반계수록>> 4, 충남대학교, 1968, pp416-419
10) 정연식, <조선시대의 도로에 관하여>, <<한국사론>> 42호(1999.12),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pp.543-555
11) 다산연구회, <<역주 목민심서 5>>, 창작과 비평사, 1985, pp.270-271
12) 정연식, <조선시대의 도로에 관하여>, <<한국사론>> 42호(1999.12),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pp.555-561
13) 법제처, <<경국대전>>, 부산일보사, 1965, p.205
14) 정연식, <조선시대의 도로에 관하여>, <<한국사론>> 42호(1999.12),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pp.561-563
15) 정연식, <조선시대의 도로에 관하여>, <<한국사론>> 42호(1999.12),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pp.563-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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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하고 역에는 역장驛長‧ 역리驛吏‧ 역졸驛卒을 두었다. 역에서는 마패馬牌라는 증표를 가
지고 관등품격에 따라 말의 수를 차등하여 제공하였다.16)
원院은 고려시대부터 공무여행을 하는 관원의 숙식을 위하여 설치된 시설로서 30리에 하나씩 두고 관에서 운영하였다. 지형조건에 따라 평지에서는 간격이 길고 험지에서는 간격이 짧았다. 조선시대에는 원의 운영이 초기부터 원만하지 못하여 도로 주요지점에 여행자를 위한 민간 주막이 생기면서 국가가 운영하는 원은 쇠퇴되어 갔다. 또 원은 여행자 편의 제공 뿐 아니라 구휼활동도 하였는데, 각 원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여 의원 을 배치하고 병자를 치료해 주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통신제도로는 원래 봉수로를 통한 봉수烽燧제도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유명무실화되자 대신에 파발제擺撥制를 설치하였다. 파발에는 말을 타고 달리는 기발騎撥과 도보로 달리는 보발步撥의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원래 역제에서는 말을 교대하는 곳이 역驛이었는데 반하여 파발이 교대하는 곳은 참站이라 하여 운영상 편제를 달리하였다. 파발로擺撥路는 무엇보다도 신속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역로와 겹친 구간도 있고 때로는 봉수대를 따라 지름길을 택하는 경우가 있었다. 기발은 25리마다, 보발은 30리마다 1참을 두어 교대로 달리게 하였다. 파발로는 ㉮서발: 서울-의주 41참 1,050리 ㉯북발: 서울-경흥 64참 2,300리 ㉰남발: 서울-동래 31참 920리가 있었다.18)
다. 도로망
조선시대 초기의 도로망은 서울-개성, 서울-죽산, 서울-직산, 서울-포천 4대로였다.
조선시대 중기 신경준은 <<도로고道路考>>에 1770년(영조26년) 전국 교통 및 시장 등의 상황을 실제 조사하여 정리‧ 기술하였다. 조선 중기 6대로는 서울-의주 제1로, 서울-경흥 제2로, 서울-평해 제3로, 서울-동래 제4로, 서울-제주 제5로, 서울-강화 제6로이다.
이 외에도 각 읍의 사방 경계와 서울까지의 거리를 기록하였고 백두산로, 압록강 연로, 두만강 연로, 8도 해연로, 역로, 파발로, 봉로 등과 연안해로의 노정을 기록하였다.19)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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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김의달, <<한국 국토개발사 연구>>, 대학도서, 1983, pp.220-223
17) 심상규 외, <<만기요람, 군정편 1>>, 경인문화사, 1969, pp.85-94
18) 김의달, <<한국 국토개발사 연구>>, 대학도서, 1983, pp.22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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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한 등의 <<동국문헌비고>>(1770)와 구한말 박용대 등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에 의하면 서울-의주 제1로, 서울-경흥‧ 서수라 제2로, 서울-평해 제3로, 서울-부산 제4로, 서울-통영 제5로, 서울-통영일로 제6로, 서울-제주 제7로, 서울-충청수영 제8로, 서울-강화 제9로까지 대로가 확장 발달되었다.20) 김정호의 <<대동지지>>(1866)에서는 봉화대로, 수원별로가 생기고 통영로, 통영일로는 통영별로가 되어 10대로로 구분하였다.
조선 후기 결속력이 강한 보부상褓負商들은 전국 지방 고을의 장터를 돌아다니며 연결해주는 활동으로 지방 도시 사이의 지선도로가 발전하게 되었다. 애초에 행정과 군사목적으로 만든 간선도로는 보부상들의 고된 발걸음으로 민간의 도로가 되었으며 새로운 도로를 개척하기도 하였다.21)
본고에서는 1866년 병인년 박해의 다섯 성인의 압송과 호송 길을 밝히고자 하기 때문 에 시대적으로 가장 근접하여 제작된 김정호 <<대동지지>>의 구분 명칭을 사용할 것이다. 더불어 이 시기와 가장 근접하여 1861년 제작된 대동여지도를 기본으로 하여 순교길을 찾아가고자 한다.
라. 교통수단
오늘날에는 자동차. 기차, 비행기, 배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누구나 여행을 경험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주로 사대부와 보부상이 여행을 하였다. 보부상은 봇짐과 지게 등짐을 지고 도보로 여행을 하였다. 짐이 많은 경우에는 나귀나 소를 이용하여 운반하였다. 한편, 사대부는 임지부임, 지방순시, 암행감찰, 제사봉행 등의 공무와 조상 성묘, 문상, 유람, 치료 등으로 전국을 여행하였는데, 장거리 여행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교통 수단은 말이었다. 말은 값이 비싸 일반사람들은 이용하지 못하였고 사대부도 친척이나 지방관아에서 빌려서 이용하였다. 말을 이용하면 훨씬 힘이 덜 들었다. 말을 이용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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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류명환 편저, <<여암 신경준과 역주 도로고>>, 역사문화, 2014, pp.191-225
20) 박정주, <고전과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시대의 도로에 대한 소고>, <<대한토목학회지>> 57권 9호, 2009, pp.94-95
21) 옛길박물관, <<옛길 박물관, 옛길편>>, 대원사, 2014, pp.242-260
22) 충남향토연구회, <<향토연구>>, 제36집, 2012,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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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도 달리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걸어서 여행을 하였고 대부분 견마牽馬잡이를 데리고 다녔다.
하루에 말을 타면 보통 평탄한 길은 100리, 산길은 60리 정도로 평균 80리를 이동하였다. <<속대전續大典>>에 “6척을 1보로하며 360보를 1리, 30리를 1식으로 한다.”23) 고하였는데 1리는 약 450m, 10리는 약 4.5km이다. 여행자 뿐 만아니라 말도 잘 먹여야 하기 때문에 역에 들러 말에게 먹이를 먹이거나 편자와 징을 갈곤 하였다. 역이 아닌 경우에는 주막이나 민가를 이용하였다.
공무의 경우는 수시로(일 1~2회) 역에서 말을 바꾸어 탔다. 역에 배치된 말은 상등, 중등, 하등으로 구분 관리되었고 기마騎馬(타는 말)와 복마卜馬(화물 운반하는 말)의 구분이 있었다.
현직 관료들의 여행에는 가마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가장 호화로운 것이 쌍교雙轎인데 말 2필과 말꾼 2명, 가마꾼 4명이 필요하다. 독교獨轎는 외가마라고 하며 한 마리의 말이나 소의 등에 가마를 얹고 그 뒤에서 사람이 가마채를 잡아 균형을 잡고 가는 가마이다. 남여藍輿는 가마채가 길게 뻗어있고 발 디딤 판과 팔걸이 등받이가 있는 4인이 어깨에 메는 운송수단이다. 가마는 백성들의 고생을 동반하여 폐단이 심하였다.24)
3. 대동여지도 충청수영로
가. 충청수영
고려 말 이래로 극성이던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병선을 건조하고 전국에 수군 水軍을 설치하였다. 15세기 말 조선은 단일지휘체계를 확립하고 5만에 가까운 수군과 7백 척이 넘는 병선을 보유함으로서 수군제도를 완성하였다.
충청수영은 “1396년(태조5)를 수군첨제절사水軍僉制節使를 임명하여 보령을 관리하였다”
는 기록으로 시작된다.25) 1440년(세종22)에 처음으로 돌로 성을 쌓았다. 1467년(세조13) 김봉원이 충청도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어 충청도 서해안지역 18개 읍진26)을 통솔 하였다. 1509년(중종4) 수군절도사 이장생은 둘레 3,174척, 높이 11척의 충청수영성을 16년간에 걸쳐 쌓았다. 1896년(고종33) 각 도의 병영· 수영 등 지방군사조직이 폐지되는 조치로 폐영廢營되었고, 1901년 영사營司가 국가에 의해 파괴되었다.
충청수영은 충청도 서부 해안과 안면도, 원산도 등 많은 섬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수심이 깊은 천수만에서 내륙 쪽으로 폭 0.5~2.5km 넓이로 깊이 들어온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앞 바다가 수심은 깊으나 파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으며, 주변 산지는 경사가 급해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한 서해안에서 수군진水軍陣으로서 천혜의 요새지를 갖추고 있다.
충청수영은 해상에서 외적을 방어하는 전쟁의 수행과 군사훈련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으며, 전란이 없을 때는 서해를 경유하여 서울로 가는 조운선을 안전하게 항행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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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법제처, <<속대전>>, 1965, p.323 주척周尺을 사용한 단위로 1척은 춘추시대 23.1cm이나 조선시대 표준형은 20.7cm이다.(남문현, <조선시대 척도자료 용역보고서>, 문화재 관리국, 1992)
24) 정치영,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교통수단>, <<문화역사지리>> 제25권, 2013, pp.74-87
25) 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3>>, 보령현조, 1971, p.179
26) 민병선, <<19세기 충청 수영의 운영과 기능>>, 중앙대학교 대학원, 2012, pp.179 13읍(면천, 당진, 태안, 서산, 해미, 홍주. 결성, 보령, 남포, 비인, 서천, 한산, 임천)
5진(소근진, 당진포진, 파지도진, 마량진, 서천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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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호송하였고, 침몰하거나 난파당한 선박의 구조 및 사후처리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특이한 사항으로 안면도에서 선박목재로 쓰이는 소나무밭松田을 육성 관리하는 일과원산도에서 말을 키우는 일을 충청수영에서 수행하였다.27)
나. 충청수영로
충청수영로는 해남로의 소사 또는 칠원에서 분기하여 평택, 신창, 예산, 홍주를 거쳐 충청수영에 이르는 도로이다. 청소천에서 보령, 남포, 비인, 서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갈라져 나아간다. 대동여지도의 지명과 거리를 표시하면 다음 <표 3>과 같다.
대동여지도에서 해남로를 통과하는 읍치는 과천, 수원, 진위이고 충청수영로를 통과하는 읍치는 평택28), 신창이다. 대로 본선 곁을 지나는 읍치로는 예산, 홍주, 보령이다.
간선과 지선이 만나거나(사거리) 갈라지는(삼거리) 교차지점을 살펴보면 다음 <표 4> 와 같다. 교차지점에서는 왕래가 빈번하여 주막거리가 쉽게 형성되고 늘어나게 된다. 또 한 고을 간의 정보가 교류되는 지점이다.
해남로 역驛을 살펴보면 남대문 밖의 청파역, 과천현에 있는 과천역, 수원화성 앞에 영화역, 칠원 근처에 가천역의 4개의 역이 있다. 충청수영로는 평택현 앞에 화천역, 신창현 근처에 창덕역, 예산 근처에 일흥역, 홍주목 아래에 세천역 4개 역이 있다.
해남로 원院에는 인덕원, 갈원 2개가 있고 충청수영로 원은 요로원, 신례원, 인후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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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민병선, <<19세기 충청 수영의 운영과 기능>>, 중앙대학교 대학원, 2012, pp.46-49
28) 평택(팽성)의 경우 군문진 노선의 이용 시 통과하나 소사 노선 이용 시엔 지나쳐 탁천으로 바로 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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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남아 있었다. 조선 후기 역제가 문란해지고 원은 쇠퇴하고 민간 주막이 늘어나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대동여지도 해남로와 충청수영로에서 지나는 고개와 하천 좌우의 산을 살펴보면 아래 <표 6>과 같다. 서울에서 과천으로 넘어가는 남태령, 사근평에서 수원으로 넘어가는 지지대(미륵당), 병점에서 오산을 넘어가는 중미현, 진위 장호천을 지나 소백치와 대백치를 넘어야 갈원(칠원)에 도착한다. 요로원에서 후천으로 넘어가는 어래현, 신창에서 넘어가는 대치, 연봉정으로 넘어가는 갈치가 있다. 이외에도 작은 언덕과 고개들을 넘어야 한다.
하천으로는 서울의 한강을 동작나루에서 건너야 하고, 사근내와 인덕원천을 건너야 수원에 도착하며, 유천을 건너고 오산의 면현천을 건너서 진위에 도착하게 된다. 진위현 앞에서 장호천을 건너고 통복천을 건너서 소사에 이르게 되고 남천, 안성천을 건너 평택(팽성)에 이르게 된다. 갈원에서 통복천 건너 군문나루에 도착하여 배로 안성천을 넘어 평택을 가는 방법도 있다, 평택에서 탁천을 지나 아산에 이르고 후천을 따라가며 곡교천을 건너야 신창에 다다른다. 신례원을 지나 무한천을 건너서 인후원과 홍주에 갈 수있다. 금마천을 건너야 광천에 이르고 광천을 건너고 청소천을 건너서 충청 수영에 이르게 된다. 이 외에도 작은 내를 건너간다.
한편 말이나 도보로 길을 갈 때 해가 뜬 낮에만 갈 수 있는데, 좌우에 펼쳐지는 대표적인 산을 따라서 가게 된다. 해남로에서 만나는 산으로 서쪽에 서울 관악산, 오봉산, 수원 화산, 오산 독성산이 있고 동쪽에 서울의 우면산, 과천의 청계산, 안양의 갈산, 사근내의 백운산, 수원의 광교산, 오산의 무봉산, 대백치 옆의 불락산 등이 있다. 한편 충청수영로에서는 서쪽에 신창의 비파산, 인후원 옆 팔봉산이 있고 홍주의 월산과 보개산이 있다. 동쪽에는 아산의 연암산, 신창의 도고산, 홍주의 봉수산, 삼봉산, 백월산이 있고 광천아래 오서산 옆을 지난다.
충청수영로 형성을 고찰해보면 우선 외적을 방어하는 수군을 지원하기 위한 군사적 인 측면과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행정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기 이후 인구가 증가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각 도시 간 보부상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점차 도시 간 경제적 기능이 증가하였다. 지방 군현의 장터가 점점 늘어가고 간선‧ 지선도로가 증가하면서 고을사이 도로가 발달하게 되었다. 대동여지도에서 충청수영로 인접 도시인 평택, 신창, 예산, 홍주, 보령 외에도 아산, 면천, 당진, 서산, 태안, 해미, 덕산, 결성, 홍주, 대흥, 청양, 남포, 비인, 서천 등과 지선도로로 연결하게 된다. 이는 농산물과 수산물이 풍부한 충청도 해안 지방의 경제적 교류가 증가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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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무봉산 만의사(동여도 참조)의 오류
30) 무한성천(동여도 참조)의 오류
31) 1895년 <<구한말 지도>>(남영우소장)을 살펴보면 해남로는 대로(2실선), 충청수영로는 중로(1점 1실
선), 읍치를 건너 지나는 도로 구간은 소로(2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오히려 도시 간의 간선도로는 중로(1점 1실선)로 표시하고 있다. 근대문물이 들어오면서 도시 간 교류와 왕래가 빈번해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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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섯 성인 순교길
가. 포도청
조선시대 서울의 치안을 담당했던 관아는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 한성부漢城府, 의금부義禁府, 병조兵曹, 5위군문五衛軍門과 포도청捕盜廳이었다, 그 중에서도 치안이 주된 임무인 곳은 포도청이고 다른 관아는 치안업무를 지원하는 곳이었다. 포도청의 기본업무는 도적을 막는 순라巡邏이나 기생이나 도박 같은 풍속을 단속하고, 도성을 기찰譏察하면서 범인을 잡아 신문하고 처벌하는 기관이었다. 지방관아에서 죄를 다루다 중앙정부로 보낼 일이 생기면 포도청으로 이송한다. 포도청에서는 죄인을 조사하여 사안에 따라 의금부, 사헌부, 형조로 이송한다. 구한말 1883년에 순경부巡警府를 설치하여 외국인을 보호하기도 하였으나 1894년(고종31) 7월 14일 경무청으로 바뀌었다.32)
<<경국대전>>에 의하면 “사형수에게는 칼을 씌우고 추와 차꼬를 채운다. 유형이하 죄수에게는 칼을 씌우고 추를 채운다. 장형 이하의 죄수에게는 칼을 씌운다.” 라고 규정 하고 있다.
칼은 죄수의 목에 씌우는 도구로 마른나무로 만들었으며, 길이 5자 5치 (166.6cm), 머리 쪽이 1자 5치(45.5cm)였다. 무게는 차이가 있었는데, 사형수는 25근 (15kg),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은 20근(12kg), 장형杖刑은 15근(9kg)으로 장단長短과 경중輕重을 칼에 새겼다. 추는 손목에 채우는 나무로 만든 수갑으로 가로 1자 6치(48.5cm), 세로 약 6치(18.2cm), 두께는 1치(3.0cm)였다. 모양은 장방형 나무 가운데에 손목이 들어갈 정도 크기로 두 개 구멍을 뚫고, 그 판자 가운데를 가로로 이등분한 후, 한 쪽 면에는 쇠붙이로 만든 돌쩌귀를 달고, 그 반대쪽 면에는 쇠고리를 달아 자물쇠를 채우게 했다. <<대명률>>에는 추는 사형죄를 범한 남자에게만 사용하고 유형 이하의 죄인과 부녀자에게는 사용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경국대전>>에는 유형‧ 도형 죄인
에게도 추를 채우게 했다. 추는 오른손에만 채우는 것인데 실제 발목에 씌우는 경우가 많았다.
차꼬라고 하는 족쇄는 발에 채우는 쇠사슬로 고리를 연결하여 만들었다. 무게는 3근(1.8kg) 이다. <<경국대전>>에서는 사형수만 채우게 하였다. 항쇄項鎖는 목에 채우는 쇠사슬로 길이는 1발把33)이고 경죄를 범한 경우 채웠다.34)
포도청이 최초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한 것은 1795년 주문모 신부 체포에 실패한 북산 사건이다. 1801년 신유박해기에 천주교 신자들의 기찰 체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때까지도 포도청에서는 황사영의 체포와 같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한성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에서만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경포가 성저십리를 넘어 경기도 지역까지 확대되었고, 1859년 경신박해 때는 기찰 체포범위가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되었으며,1866~1874년 병인박해 때는 경기도 충청도는 물론 경상도 북부 까지 경포가 파견되었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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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허남오, <<너희가 포도청을 어찌 아느냐>>, 가람기획, 2001, pp.85-105
33) 1발把은 양팔을 벌려 닿는 길이로 162~163cm
34) 허남오, <<너희가 포도청을 어찌 아느냐>>, 가람기획, 2001, pp.141-143
35) 차기진,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과정에서의 포도청의 역할과 천주교 순교사연구>, <<교회사학>> 제10호, 수원교회사연구소, 2014, pp.12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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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병인박해 시작
1864년 1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 이하응은 조대비와 함께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직접 정치에 관여하였다. 1860년 북경이 함락되자 서양세력의 위협을 느낀 조정은 1864년 이후 통상을 요구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종교의 자유를 조건으로 프랑스 선교사와 접촉을 시도하였다. 1866년 1월 홍봉주, 남종삼 등이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서울에 도착하게 하고 대원군과의 만남을 기다렸으나, 대원군은 약속과 달리 면담을 미루고 있다가 1866년 2월 19일(음 1월 5일)에 최형과 전장운을, 2월 23일(음 1월 9일)에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를 체포하면서 한국천주교회의 최대 박해인 병인박해가 시작되었다.36)
2월 25일 정의배 회장이 체포되고, 2월 26일에는 정의배 회장 집에 머무르던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볼리외 신부와 도리 신부가 체포되었다. 3월 1일 경기도 고양에서 남종삼이 체포되고, 3월 2일 제천 배론 신학교에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었다. 이때 신학교 집주인 장주기도 함께 붙잡혔으나 푸르티에 신부가 포졸에게 돈을 주고 풀어 주도록 하였다. 3월 7일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남종삼과 홍봉주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3월 9일에는 최형과 전장운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고, 3월 10일 조대비는 <사교금지교서>를 반포하도록 하였다. 3월 11일 새남터에서 정의배, 우세형,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날 신리에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다.
다. 체포와 압송 길 기록
샤를르 달레가 저술한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어 신리에서 서울로 압송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866년 3월 11일 신리37)에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고, 3월 12일 쇠재38)에서 위앵 신부가 체포되었으며, 오메트르 신부는 신리에 돌아와 체포되었다. 황석두 루카는 주교와 함께 가겠다고 자원하여 체포되었다. 신리에서 이틀을 묶은 후 3월 14일 압송 길을 떠났고, 소재날 평택읍(팽성)에서 점심식사(dȋner)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압송 시 모습은 결박 없이 오라를 어깨 걸고 넓은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1866년 3월 11일 거더리(신리) 송 니꼴라오 회장 집에 숨어 있던 다블뤼 주교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3월 12일 위앵 신부는 쇠재 마을에서 다블뤼 주교 편지를 들고 온 신자와 포졸들에 체포되었다. 오메트르 신부는 주교 체포 소식을 듣고 거더리로 돌아와 체포되었다. 서울에서 원정온 포졸들은 순순히 자수한 주교와 신부들을 매우 정중하게 대하였고 결박하지도 않고 그들의 청을 들어 위앵 신부 하인, 송 니꼴라오 회장, 박 필립보 신학생, 황석두 루카 등 신자들을 놓아 주었다. 이때 다블뤼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카는 떠나기를 거절하고 주교를 따라가겠노라고 자원하였다.
포졸들은 서울 길을 떠나기 전에 거더리에서 이틀을 묵은 후 3월 14일 서울 길을 떠났다. ...
서울로 압송할 때 결박은 하지 않고 오라를 어깨에 걸고 넓은 모자를 씌웠었다. 거룩한 기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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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한국교회사 연구소 편, <<한국 천주교회사>> 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pp.249-255
37)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읍 신리
38)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금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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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얼굴에 나타나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모여든 모든 외교인이 매우 이상히 여겼다.
평택읍내에서 포졸들은 선교사들에게 고기가 들어 있는 훌륭한 점심식사를 대접하였으나 그 날이 소재날이라 식사를 들려하지 않자 포졸들은 급히 다른 음식을 준비하였다.39)
이 과정에 대하여 샤를 샬몽은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에서 칼레 신부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3월14일 압송 길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신리에서 홍주까지 다블뤼 주교는 거칠게 짚으로 짜여진 바구니 밑에 막대가 두 개 달린 가마를 타고 가고, 오메트르‧ 위앵 신부와 황석두는 걸어서 갔고, 홍주에서는 서울로 가마를 타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압송 모습은 오라를 어깨에 걸고 누런색 헝겊으로 된 넓은 챙이 늘어진 모자를 씌워 죄인을 모습을 갖추었다고 기록하였다.
소재날 평택에서 고기를 물리고 다른 음식으로 식사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마침내 3월14일 수요일에 비통한 행렬이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다. 칼레 신부는 이렇게 썼다.
“법을 지키기 위해 붉은 끈을 그들의 어깨에 걸쳐 놓기만 했고 테두리가 처져있어서 몸을 모두
가려주는 모자를 씌웠습니다.” 중죄인들에게 씌우는 이 모자는 누런색인데 헝겊으로 된 넓은 챙
이 늘어져 있어서 얼굴과 상체를 가려주어 볼 수도 없고 남에게 보일 수도 없다. 다블뤼 주교는
약간 멀리 있는 홍주까지 가마로 호송되었고, 다른 두 선교사제는 더 이상 베일을 쓸 필요가 없
어진 유럽 사람의 얼굴을 보려는 호기심 많은 군중들을 뚫고 걸어서 갔다. 홍주에서는 선교사제
들에게 죄인의 모습을 갖추게 했다. 그런 다음에 죄인들이 타는 가마에 올라타게 했습니다. 이 가마는 거칠게 짚으로 짜여진 바구니 같은데 이 밑에는 막대가 두 개 달려 있어서 들 수 있습니다. 가마를 타고 서울까지 가는 도중에 평택을 지나면서 그들은 식사를 하기 위해 멈추었습니다. 포졸들은 선교사제들에게 기름진 훌륭한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소재일이어서 고기요리를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포졸들이 먹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주교님은 “오늘은 천주교 신자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날이기 때문이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포졸들은 금방 사과를 했고 요리들을 물리고는 선교사제 셋이 먹을 수 있도록 고기가 들어있지 않은 식사를 새로 준비하게 하였습니다.40)
한편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과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의 증언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홍주 신리 출신으로 서울 거주하던 목격자 이덕인 시몬은 황석두가 신리에서 홍주까지는 봇짐지고 따라가는 것을 보았고, 홍주에서 서울로는 짚둥우리를 타고 갔다고 들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포교가 가로되, “그렇게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 오너라” 하였습니다. 황 루카는 홍주까지 봇짐지고 따라갔다가 홍주에서 등어리(짚둥우리) 타고 서울로 갔다고 합니다. 죄인이 황 루카가 신리에서 나가는 것은 보았으나, 포교하고 수작하는 말은 못 듣고 동네어른들에게 들었으며, 홍주에서 등어리 타고 서울로 갔다는 사정은 남에게 들었습니다.41)
목천 뫼당 출신으로 서산 소려골에 거주하던 강치화 가롤로는 다블뤼 주교는 가마를 타고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는 걸어서 신리에서 홍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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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pp.426-437
40) 샤를 살몽 저, 정현명 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대전가톨릭대학교, 2006, pp.376-377
41)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11, 이덕인 시몬 증언 (황석두 전기 자료집, pp.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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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교가 잡힌 후에 주교 방으로 포교들과 주교 복사 황 루카와 함께 들어가서 황 루카가 성 교도리 말을 하니까 “옳기는 옳으나 나라 엄명이 계시니까 할 수 없이 잡아가야 쓰겠다.” 하고,
한 이틀을 그 신리에서 묵은 후에 안 주교는 승교乘轎하시고, 오, 민 신부는 걸어서 가시고, 황루카는 자원으로 따라갔는데, 나도 홍주 읍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다 친히 보고 이 위의 사정을 다 친히 보았습니다. 홍주에서 서울로 가셨다가 서울에서 수영으로 가서 그 네 분이 함께 치명하
셨다는 말을 전편으로만 들었습니다.42)
홍주 출신으로 서울에 거주하던 황석두의 견진대자인 문선량 필립보는 황석두가 자원 하여 주교를 따라 홍주로 갔고, 홍주에서 말에 태워 서울로 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안 주교께서 잡히실 때에 포교들이 안 주교만 모셔가고 황 루카는 못 오게 하였으나, 루카가 자원하여 굳이 주교를 따라 홍주로 내려가니, 홍주에서 할 수 없이 포교들이 루카를 말에 태워
가지고 주교와 함께 서울로, 수영으로 데려 갔습니다.43)
<<교구재판록 순교자약전 보완자료>>에 황석두는 홍주에서 읍인에게 강론하고 신창 고을에 들렀으며 서울 압송 길 주막 주막에서 도리를 벽파劈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당시에 주막에서는 식사는 물론 숙소를 제공하고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장구들을 정비하였다.
황 루카가 홍주 읍내로 들어가서 읍인에게 무수히 강론하니, 듣는 자들이 “천주학을 못 할 것으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구나!”하는 자가 많았다. 서울로 올라 올 때 신창 고을에 들러 또 도리를 벽파하니 거기서도 듣는 자들이 옳은 도리로 알더라. 서울로 올라가며 주막 주막에서 도리를 벽파하니 처음 듣는 자는 모두 옳게 들었다. 포교가 말하기를, “아무리 옳을지라도 너무 옳다고하니 듣기 싫다.”44) 증언자는 미상이나 홍주를 출발하여 서울로 압송 길에 신창에서 숙소를 정해 하루묵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홍주아문을 떠나 서울로 가실 즘에 신창읍에서 숙소를 정하고 안 주교께서 강론하신 말씀이 신
창 관속官屬더러 “내가 죽어도 후세에 내 말을 전할 것이요. 내가 살아도 이후 내 말을 하리라.”
하시고 황 루카는 본국 사람인고로 성교에 밝은 도리를 다 말씀하시니, 관민이 다 듣고 말씀 정
대함을 찬송하지 않는 이 없더라.45)
아산 오리골46)출신으로 공주 사기점골47)에 사는 이명심 토마스는 군문나루48)에서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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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96, 강치화 가롤로 증언(황석두 전기 자료집, p.103)
43)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116, 문선량 필립보 증언(황석두 전기 자료집, pp.109-110))
44)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첨부자료 <순교약전보완자료>(황석두 전기 자료집, p.118)
45)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 현대문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p.366, 증언자 미상, 정리번호 192
46)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 공수5리
47)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명곡1리
48) 이 마을의 본래 이름은 군물진軍勿津이다. 조선 전기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평택현 읍지邑誌에도 군물진이라고 기록되었다. 군물진은 안성천 북쪽에서는 유일하게 평택현 땅이었다. 조선시대에 평택현은 충청도였고 진위현은 경기도였으므로 이 곳이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도계道界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중요성 때문에 군물진은 주변 나루와 달리 관아에서 관리하는 나루였다. 일제가 평택역을 만들고 군문다리를 세워 나루는 기능을 상실하였다. <<평택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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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이 말 위 짚둥지에 타고 가시는데, 주교와 신부는 붉은 오라줄을 뒤에 늘어뜨리고 흰보를 쓰고, 황석두는 보를 쓰지 않고 칼만 쓰고 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고있다. 얼굴은 안 보이나 다블뤼 주교는 목소리로 알았고, 신부는 강복하는 모습으로 알았음을 증언하고 있다. 군문나루는 평택에서 안성천을 배로 건너 갈원으로 가는 나루이다. 압송 길에는 평택-소사-갈원 노선이 아닌 평택-군문나루-갈원 노선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안 주교께 성사를 받고 뵈었습니다. 교우 가르칠 때에 간절한 마음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잡힐 때에는 보지 못하였으나, 잡혀서 서울로 가실 때에 군문이 나루터에서 보니 안 주교와 어느 신부 두 분과 황 루카 등 네 분이 각각 말 위의 집둥지에 타셨는데, 주교와 신부는 흰 보를 쓰고 결박 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붉은 줄이 뒤로 늘어져 있었습니다. 또 주교와 신부께서 보를 쓰고 계셨
기 때문에 못보고, 다만 안 주교께서 앞에 가시는 것은 목소리를 듣고서 알았고, 신부들은 어느 신부인지 몰랐으나 한 분 앞에서 죄인이 쳐다보고 성호를 놓으니까 신부께서 손을 내밀어 강복하셨습니다. 황 루카는 보를 쓰지 않고 칼만 썼습니다.49)
병인박해 기록을 많이 남긴 서울 출신 박순집 베드로는 서울 남대문 밖에서 네 분의 압송 길을 목격하였다. 그는 말위에 짚둥우리 타고 몽두와 행추칼 쓰고 수갑을 차고 있는데, 조선교우(황석두)는 몽두를 쓰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서울로 들어올 때 남대문이 아닌 서소문으로 들어와 운현궁에서 내리고 사관청士官廳50)으로 가 하루 갇혔다가, 포도청에 사흘간 갇힌 후, 치명하러 호송 길을 떠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압송 길은 여러 날 걸렸기 때문에 주막 주막에서 밤에 강론하였다는 말을 포교에게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잡혀서 서울로 올라오실 때에는 남문 밖에서 보니 말 위에 집둥우리(죄인을 태워 운반하던 도구)타시고 몽두(죄인의 머리에 덮씌우는 가리개의 일종) 쓰시고 행추칼 쓰시고 손에 수갑이 채워져 오시는데, 민 신부와 오 신부와 황 루카와 장 회장51)등도 함께 같이 왔습니다. 안 주교와 두 분 신부는 위에서 같이 말한 바와 같이 오시고, 조선 교우는 몽두는 쓰지 않고 행추칼만 썼습
니다. 서울 서소문으로 들어왔는데 나라에 가례嘉禮가 있었기 때문에 나라 분부에 대원군이 있는
운현궁으로 내리라 하여 거기 가서 사관청으로 갔습니다.... 사관청에 하루 갇혔다가 포청에 사흘
동안 갇힌 후에 시골로 치명하러 내려갔습니다. 이 사정은 교우에게도 듣고 친구에게도 들었습니
다. ...잡혀서 서울로 올 때에는 여러 날 걸렸기 때문에 주막 주막에서 밤에 강론을 많이 하였다는 말을 포교들한테 들었는데, 그 포교들은 루카를 잡아오던 포교에게 들었다고 합니다.52)
칼레 신부는 장주기 요셉 회장이 3월 2일 제천 배론에서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될 때 함께 따라가려 하였으나, 푸르티에 신부가 포졸들에게 항의하여 되돌려쫓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5일간 마을에 있다가 3월 7일 노럴골53) 교우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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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2016년 6월 25일자 (평택시 마을 군문동 - 안성천 마을)
49)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90, 이명심 토마스의 증언(황석두 전기 자료집, pp.97-98)
50) 조선시대 포교捕校들이 공무를 보던 청사廳舍. 포장捕長의 사택私宅 가까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한국 103위 성인 가운데 이경이와 권진이가 기해박해 때인 1839년 7월에 잠시 이곳에 갇혀서 이순성의 온갖 배교 위협과 유혹을 받던 중 탈출한 곳이기도 하다. <<Good News 가톨릭 정보 사전:www.info.catholic.or.kr>> 사관청의 위치는 찾지 못하였다.
51) 장주기 회장은 제천에서 따로 서울로 압송되어 3월 20일(음 2월 4일) 도착 추정됨.
52)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16, 박순집 베드로 증언(황석두 전기 자료집, p.74)
53)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에 있는 너럭골 마을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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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포졸들에 다시 체포되어 제천관장에 끌려갔다가, 다시 경포가 내려와 서울로 데려갔다. 장주는 챙이 처진 노란모자 쓰고 오라는 걸친 채 기뻐하며 서울로 압송해 갔다고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3월 2일(음력 1월 15일)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붙잡히고 나서 장 요셉은 신부들의 바람에 따라 다른 신자들과 함께 산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었다. ... 포졸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소리 질렀다. ... “당신은 누구요?” “나는 신학교 주인 장 낙소요.” 포졸이 대꾸했다. “아! 이런, 그렇다면 어딜 가는 게요? 양인 선생들과 함께 가야지?” 장 요셉은 존경스러운 신부들과 합류하게 되어 매우 기뻤다. ... 푸르티에 신부는 포졸들에게서 그를 끌고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장 요셉은 계속 그들과 함께 머물렀고, 다음날 잡힌 이들을 서울로 호송 할 때에도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포졸들은 두 신부와 마찬가지로 그를 소에 태웠다. 장 요셉은 아주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반시간 가까이를 갔는데, 그때 뒤를 돌아본 푸르티에 신부가 장 요셉이 뒤따라 오는 것을 보고 포졸들에게 항의했다. ... 그를 소에게 내리게 하고 쫓아 보냈다. 장 요셉은 닷새 동안 마을에 있었다. 그리고는 먹을 것이 떨어져 배론서 3리외54)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노럴골이라는 교우촌으로 갔다. 두 신부 체포 때 있었던 포졸들이 그를 알아보고 그를 체포하여 제천 관장에게 끌고 갔다. ... 관장이 서울에 의견을 물으니 그를 끌고 갈 포졸들 3, 4명이 내려 왔다.
그들은 신자 몇 명이 누워있던 옥 앞 가서 소리를 질렀다. “서울로 가게 될 놈은 나와라.” 그러
자 장 요셉은 당장 일어나서 기뻐하며 포졸들 앞에 나섰다. 포졸들은 장 요셉을 보더니 그의 태
도에 놀라서 “겁내지 마시오. 서울까지 잘 모시겠소.” 그러자 요셉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겁낼
것이 무엇이요? 나는 오히려 원을 풀게 됐소.” 그들은 장 요셉에게 챙이 처진 노란 모자를 씌우
고 어깨에 붉은 오랏줄을 걸쳤지만 그를 묶지는 않았다.55)
최원실 바오로는 장주기 회장이 배론서 제천 갈 때는 걸어가고 제천 읍내에서 서울로 갈 때는 짚둥지 타고 박달재를 넘어 가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안춘명 시몬은 배론서 체포된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하루 지난 후 짚둥우리 타고 결박 없이 행추칼 쓰고 가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으나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들과 함께 압송 가는 도중에 풀려나기 전의 일이다.
장 회장이 배론서 갈 제는 걸어가고 읍내서 서울로 갈 때에는 신부네와 같이 짚둥지 타고 박달 재를 넘어가는 것을 친히 보고 더 모릅니다.56)
어제께 여쭌 대로 신부네 잡으러 왔던 포교들이 신부네를 잡아갈 때에 장 회장도 잡아가려고 한즉, 신 신부가 말려 못 잡아가게 하시는 고로 그때에 아니 잡히고, 신부네 권면으로 죄인과 한가지로 제천 서면 너럭골로 가다가 이틀 만에 장 회장 혼자 배론으로 다시 들어갈 새 죄인도 같 이 가려고 한 즉 장 회장이 말리기로 죄인은 같이 못 갔습니다. 장 회장이 배론 들어가신 후로 다시 아니 나오는 것을 보고 잡힌 줄로 알았더니, 과연 머물러 있던 포교들에게 잡혀 배론서 하루 지난 후에 신 박 신부와 한가지로 읍내로 들어가는 것을 죄인이 묘 곁에 숨어 서서 보니 결박아니 하고 짚둥우리만 타고 가옵더이다.... 또 갈 때에 회장은 행추칼 쓰고 갔다 하옵더이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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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옛 프랑스의 거리 단위 lieu로 1리외는 약 4km (10리)
55) <장요셉 낙서, 64세, 수영에서 순교 배론의 회장이며 성요셉 신학교 주인> 파리외방전교회고문서고 579권 f.1236(장주기 자료집, pp.73-79)
56) <병인순교자 시복재판록 1>, 회차 55, 최원실 바오로 증언(장주기 성인 자료집, 2016, 수원교회사연 구소 p.151)
57) <병인순교자 시복재판록 1>. 회차 48, 안춘명 시몬 증언(장주기 성인 자료집, 2016, 수원교회사연구 소 pp.14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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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공세리 출신 오기선 신부의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에서 모친과 할머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다섯 순교자들이 음봉 삼거리 뒷내 큰 바위58)에서 소재날(금요일) 식사 때 포졸들에게 고기반찬 물린 일화를 전하고 있다.
1866년 3월 14일59) 홍성 포도청에서 서울로 압송되던 안 주교님, 오 신부님, 장 요셉 주기,황루카 석두의 인간성에 감격한 포졸들은 선심을 썼다. 아산군 음봉면 삼거리에서 천안과 평택을 질러가는 길목이 있다. 바로 가까이에 “뒷내라는 아주 오래된 신자부락이 있고 대여섯 명이 앉을만한 큰 바위가 있느니라.” ... 할머님, 어머니께서 심심하면 일러주시던 이야기였다, 홍성서 곤장, 주리몰매로 온 몸이 성한 데가 없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끌리다 시피 서울로 압송되던 중 “여보시오 주교나리들, 여기서 좀 쉬어갑시다.” 하는 포졸의 한마디에 다섯 순교자들의 폐부를 찌르는 듯 고마웠다. 안 주교님은 포졸의 부축을 받으면서 큰 바위 우편에 앉으셨다. 차례로 오 신부님, 민 신부님, 장 주기, 황 석두, 두 회장님도 세 분 성직자를 공손히 모시고 아픈 다리를 겨우조아리며 앉았다. “도둑놈도 선심을 쓸 때가 있다고 하잖아요? 우리 포졸들 인심을 보시라오. 포졸 질을 수십 년 해 왔지만 당신들처럼 점잖은 사람들은 첨 보았읍지유!” 그 날은 금요일이었다.
고기를 안 먹는다는 것이 법인지라 육찬을 다 물리시고 산나물, 채소 등으로 차려진 상을 받았다. 식전 기도를 드린다, “아름다운 조선음식도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일 것이니......” 우리 할머님 얘기다. 그 때 외인들 틈에 뒷내(동천리東川里) 교우들도 몰래 어울려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남몰래 슬프게 울었단다. 술이 한 두 순배 돌아 포졸들이 거나할 제 “자 이제 좀 가 봅시다,” 앞장선 포도대장이 졸개들에게 호통을 쳤다. 잘 모시고 서울로 가라고.... 서울에 와서 우포도청에 투옥되었다.60)
<<가톨릭 신문>> 기사에 의하면 1973년 4월 11일 오기선 신부는 다섯 성인들이 식사를 하였던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복자바위를 절두산 성지로 옮겼다. 지금 바위가 놓여있던 부근61)에 비슷한 모양의 바위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가 발톱을 세우던 1866년 3월 충청도 내포에서 잡힌 세 프랑스인 신부와 한국인 신자 2명이 걸터앉아 쉬며 진리를 토했던 복자바위가 11일 오후 충남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에서 절두산 기념광장으로 옮겨져 1백7년 전 순교복자의 모습을 되새기고 있다.
라. 심문 및 판결 기록
샤를르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와 샤를 살몽의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에서 네 분의 성인은 3월 18일 서울에 도착하여 사관청 구류간拘留間62)에서 하루를 보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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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오성바위 – 이 지점은 충청수영로에서 온양-청양으로 가는 도로와 신창-예산 으로 가는 도로가 갈라지는 지점으로 대동여지도에 후천을 따라 곡교천-신창길이 있었다. 따라서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59) 이날은 신리에서 홍주로 출발한 날로 날짜 오류.
60) 오기선,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성황석두루가서원, 1985, pp.185-186
61) 현재는 구도로와 신도로 사이에 바위와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으나, 원래 있던 자리는 구도로 길가 음식점 바로 앞 느티나무 밑이었다고 증언함.(2016년 8월 1일 김윤배(1940년생)의 증언)
62) 구류간은 17세기 중반부터 법사와 오군영에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해서 1725년경부터 전 아문으로 확대되었다. 구류간은 수감 대상의 증가로 감옥의 구치기능과 징계기능의 분화가 필요해졌기 때문에 발생했다.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신분제의 해체에 따라 범죄와 갈등, 하극상이 증가했다. 양란 이후 왕성한 활동을 보인 내수사와 궁방에 먼저 사옥이 설치되었다. 특히 각 관서와 군문에서는 식리활동이 관서의 재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채무징수가 관서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징채를 위해 구류간에 채무자를 가두고 심지어는 고문을 가하는 사례까지 발생했다. 구류간의 설치는 형정권이 각 아문에 분산된 것을 의미했다. 또 감독관리 체제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이에 정부는 구류간에 대해 혁파령을 고수했다. 영조의 지속적인 혁파와 단속에도 불구하고 구류간은 끈질기게 부활했다. 또 단속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편법이 개발되었다. 관서 근처 민가에 구류간을 설치하기도 하고, 아예 별옥을 만들기도 했다. 감옥이 있는 법사에 이송하는 법도 있었다. 임시로 민가를 빌려 구류하기도 했다. 경주인의 경우는 보수라고 해서 구류간보다 시설이 좋은 여염집에 유치해서 보호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에 정조는 구류간을 적발하면 건물 자체를 철거해 버리는 강경책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감옥의 구치기능과 징계기능의 분리는 합리적 요구였고, 구류간을 혁파하는 근본 적인 방안은 사채에 의존하는 관서의 재정체제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는 구류간에 대해서는 혁파론을 고수했다. 이는 조선 정부가 육전체제에 기초한 형정의 운영원칙을 고수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순조 때 잠시 사라졌던 구류간은 철종, 고종 때에 다시 부활했다. 각 관서는 구류간을 운영할 뿐 아니라 사법과 소송에까지 간여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침내 형정권이 통제를 벗어나 각 관서에 완전히 분할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혜경, <조선후기 형정권의 분화: 구류간을 중심으로>, <<조선시대학회보>> 70호(2014.9), pp.27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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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도청으로 가서 심문과 고문을 받는다. 포도청 심문 나흘째 되는 날인 3월 22일 사형을 판결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서울에 도착하여 증거자들은 구류간에 갇히었다, 그들이 당해야 하였던 신문과 고문에 대한 정확한 사항은 하나도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들이 선배들처럼 의금부로 이송되지 않았다는 것과 조선말을 완전히 알고 있던 다블뤼 주교가 관장들 앞에서 자주 오랫동안 천주교의 변호를 폈다는 사실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아마 이 이유 때문에 그리고 그가 천주교의 가장 높은 스승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가 다른 동료들보다 더 자주 더 심하게 다리에 몽둥이질을 당하고 곤장과 몽둥이로 찌르는 형벌을 당해야 하였다. 나흘째 되는 날 그들의 사형선고가 내려졌다.63)
음력 2월 4일64) 서울에 도착하여 그들은 구류간에 갇혔다. 그곳은 맨 땅으로 되어 있는데 천민에 속하는 도둑들과 암살자들이 뒤죽박죽으로 갇혀 있었다. ... 조선말을 매우 잘 알았던 다블뤼주교가 판관들 앞에서 자주 오랫동안 천주교에 대해 설명을 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나흘째 되
는 날 그들에게 판결이 내려졌다.65)
우포도청에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관변 기록인 <<포도청등록>>에 의하면, 황석두는 자신이 발견한 천주교의 진리는 구름을 걷히고 하늘을 보는 것 같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고, 대군대부이신 천주를 배반함은 충효의 도리가 아니며, 이를 위해 죽더라도 미혹 되거나 변함이 없는 도리라고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용감하게 교리를 설파하였다.
병인 2월 3일... 죄인 황석두, 54세, 사호 뉘가(루카)아뢰옵니다. “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연유로 체포되었는지, 이제 이 옥의 규칙은 배교하면 살고 배교하지 않으면 죽는 것이니, 전후의 사정과 오늘의 깨달은 단서를 사실대로 말하라”고 추문하였더니, 다음과 같이 자백했습니다. “저는 본래 연풍 태생으로 유업儒業에 종사했습니다. 책을 읽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성교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구름이 걷히고 하늘을 보는 것 같아 이를 배워 영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영세라는 것은 곧 성교에서 그 덕에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창졸간에 얻음이 있으니, 어찌 박학다문하여 고명한 학자 선비들로 하여금 그 확연함을 함께 담론하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나라에서 이를 엄하게 금하고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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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pp.426-437
64) <<우포도청등록>>의 음력 2월 3일 황석두 루가의 신문기록으로 보아 날짜 오류, 3월18일(음력 2월 2일)로 추정됨.
65) 샤를 살몽 저, 정현명 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대전가톨릭대학교, 2006,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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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죽임이 연이어 일어났음에도 이 학문은 계속 번져 경향에 확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깨닫 는 사람은 반드시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안 주교는 곧 교화황 다음인데, 그 를 만난 지 이제 18년이 됩니다. 그를 스승처럼 섬기기는 하지만 역시 스승으로만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교는 본래 정한 곳이 없이 동서로 다녔는데, 저는 가는 곳마다 그를 따라 공경하고 모셨습니다. 이제 배교하라는 가르침은 영감께서 체통을 잃으신 것입니다. 천주는 큰 임금大君이 고 또 큰 아비大父입니다. 내 몸을 낳아준 부모도 천주와 비하면 그보다 아래의 임금이나 부모인
것입니다. 비록 만 번 죽더라도 천주를 배반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어려서부터 충‧ 효 두자를 익히고 생활화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충‧ 효를 행하지 아니함이 없다면, 천하를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는 손바닥 보는 것 같이 쉬운 일입니다. 배반하라는 한마디는 다시 묻지 마십시오.
이밖에 아뢸 말이 없습니다.
죄인 황석두 다시 추문한 것을 아뢰옵니다. “네가 말한 성교는 곧 사교邪敎로 지극히 패악하여 인륜을 없애는 것이다. 네가 이미 충효를 말하고 있는데, 어찌 충효를 지키는 사람이 나라의 법을 범했느냐? 나라의 법을 범한 것은 불충한 것이고, 신체에 형벌을 받는 것은 불효한 것이다.
깨달았다하고 얻었다하니 가히 하늘이 그 혼백을 빼앗았다고 할 것이다. 다시 불충‧ 불효했다는
사실을 지만遲晩했다고 공술을 들임으로써 주뢰형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고 추문하였더니, 다음과 같이 자백하였습니다. “제가 받아들인 성교는 1866년 전에 천주께서 강생하여 전한 것입니다. 천하로 하여금 이 학문을 행하도록 한다면 교화의 지극한 다스림이 이루어져서 스스로 깨달음이 깊어지고 스스로 얻음이 밝히 드러날 것이니, 비록 도거刀鉅(행형도구)아래 죽더라도 미혹되거나 변함이 없는 도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제 만일 나라의 법을 범하여 신체가 형벌을 받게 된 것을 불충, 불효라고 하신다면 다만 지만했다고 공술하겠습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66)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의 페롱 신부 증언과 순교자 약전 보완에 의하면 황석두 는 법정에서도 강직하게 교리를 전파하여 더 많은 형벌을 받았고 혹형을 잘 참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황석두)가 형벌을 받았으며, 그것도 그의 동료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인데, 그는 처형 순간에 더 걷지도 못하였다. 그가 형벌을 거듭 받은 이유는 그가 체포된 이후에도 도 법정에 가서도 교리를 설파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문초를 받던 중 어느 순간에도 그의 강직함이 나약해 졌으리라고 추측할 만한 말은 한마디도 들어 본 적이 없다.67)
포교가 황석두를 포청으로 데려갔는데, 포장이 문목 형벌로 혹형하였으나 감수 인내하고 잘 참는 것을 보고 말하되, “황가는 서양인보다 더 형벌을 잘 받는다.”고 하고서, “천주학에는 아주 도통한 사람이로다.” 하였다.68)
3월 23일(음력 2월 7일) 관변 기록 <<비변사등록>>에 의하면 네 분 성인을 충청도 수영에서 군문효수 하여 백성을 경계하도록 결정한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두 포도청의 계목을 보니 서양사람 안토니, 오 베드로, 민 유아누가, 사학인 황석두가 모두 죄를 시인하여 공초를 냈는데, 그들을 머물러 살게 해주고 서로 화답하여 응한 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굳게 숨기고 있으니, 묘당에서 품처하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의 교화시키기 어려운 습성은 종자 이하의 종자로서 다른 부류의 다른 풍속이 중외中外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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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우포도청 등록>> 병인 2월 3일 죄인 황석두 재초再招
67)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페롱 신부 증언>“황재건 루가”(황석두 전기자료집, p.79)
68)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첨부자료<순교약전 보완자료>(황석두 전기자료집,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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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인심을 그르치게 하였으므로 이미 주벌을 면 할 수 없는데, 국경을 넘어 들어 온 죄 뿐만이
아니라 황가가 공초한 교활하고 흉측한 말에 이르러서는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벼울 것이니, 모
두 군문을 내주어 효수하여 백성을 경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모두 공충도 公忠道 수영에 압송하게 하여 효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69)
샤를르 달레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병중에 있던 고종의 혼인이 예정되어 있어 서울에서 멀리 있는 보령 충청수영에서 처형하도록 결정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장주기 회장도 함께 처형하도록 결정하였다. 샤를 살몽은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에서 장주기 요셉이 함께 형장에 보내달라고 간청하여 은혜를 받았다고 적고 있다.
왕이 병중에 있고 오래지 않아 왕의 혼인이 예정되어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이 좋지 않은 징조가 되어 250리 떨어진 보령 충청수영으로 처형지가 결정되었다. 이때 배론의 회장이며
푸르티에 신부의 집주인으로 체포되어 압송되어 오고 다블뤼 주교 일행과 함께 처형을 청한 장주기 요셉도 함께 처형하도록 결정되었다.70)
장요셉은 구류간에 갇혀 관례적인 신문과 고문을 당하고 난 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가 다블뤼 주교와 주교의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보내달라고 간청을 해서 그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71)
마. 충청수영 호송 길 기록
샤를르 달레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충청수영 호송 길에 다섯 성인들이 고문 받아 상처가 난 다리를 기름종이로 싸고 몇 조각 헝겊으로 잡아 맨 채, 노란 모자 쓰고 오라를 목에 걸고 말을 타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샤를 샬몽은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에서 3월 29일 수영에 도착하여 다음날 이웃 읍내(마을)72)를 돌아 구경시킬 계획이었으나 3월 30일 성금요일 처형되기를 위엄 있게 요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다섯 순교자는 말을 타고 수영으로 호송되었다. 몽둥이질로 부수어진 그들의 다리는 기름종이로 싸서 헝겊 몇 조각으로 잡아매었다. 머리에는 노란 모자를 쓰고 목에는 오라가 걸려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넘쳤고 여러 번 포졸들과 구경꾼들이 놀라는 가운데 성영을 읊고 성가를 부르며 하느님께 열렬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3월 29일 성 목요일 주의 만찬 날 저녁에 그들은 형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포졸들이 이튿날 길을 꽤 많이 돌아 이웃 읍내에 가서 사형수를 구경시킬 계획을 짜는 것을 들었다. 그는 즉시 이들의 말을 중단하고 “아니 되오. 당신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오, 내일 형장으로 곧바로 가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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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비변사등록>> 고종 3년 병인 2월 7일; 동일자 <<승정원일기>>, <<일성록>>참조
70)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 연구소, 2000,
pp.426-437
71) 샤를 살몽 저, 정현명 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대전가톨릭대학교, 2006, pp378
72) 칼레 신부의 순교보고서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포졸들이 다음날 형장으로 가지 않고 길을 돌아 수영이라는 이웃 읍내에 가서 사형수를 구경시키기로 자기들끼리 계획을 짰다.”라는 기록에서 3월 29일 저녁 수영성에 도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Avant de se coucher, il fut décidé entre les satellites qu’on ne se rendrait pas le lendemain, à l’endroit de l’exècution, mais que par un dètour, on irait montrer les condamnès à la ville voisine appelée Sourieng. <<전교회연보>>(APF) 40권 236호 칼레 신부의 <병인박해 보고서>중 ‘갈매못 5위 순교사적’, pp.49-51(장주기성인 자료집, 2016, 수원교회사연구소, p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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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죽어야하기 때문이오.” 위엄 있는 어조의 말에 포졸들의 우두머리들과 포졸들과 군사들 모두가 한마디 대답도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73)
성목요일 저녁에 그들은 형장에서 몇 십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다블뤼 주교는 다음날 길을 아주 많이 돌아 이웃 마을로 가서 사형수를 구경시킬 계획을 짜는 소리를 들었다. 주교는 즉시그들의 말을 중단시키고 “아니 되오. 당신들이 애기 했듯이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오. 내일 곧바로 형장으로 가주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 죽어야만 되기 때문이요.”라고 외쳤다. ... 주교의날이 위엄이 있어 그들은 모두 한마디 대꾸도 없이 주교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74)
칼레는 <병인박해 보고서>에서 서울 압송 길과 마찬가지로 충청수영에 호송되었다고보고하고 있다. 즉, 어깨에 붉은 오라 걸고 챙이 처진 노란 모자 씌우고 말에 태워 갔다. 압송 길과 다른 점은 호송 길에는 몽둥이질로 다섯 성인들의 다리에 모두 기름종이와 헝겊으로 싸매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섯 성인들은 포도청에서 겪은 고초에도 행복과 환희의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며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영으로 내려갈 때 다섯 사람은 서울로 올라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두 말을 타고 갔다. 똑같
이 어깨에는 붉은 오랏줄이 걸쳐졌고 머리에는 챙이 처진 노란모자(삿갓)가 씌워졌다. 그들의 다
리는 모두 기름종이와 헝겊으로 싸 매여져 있었다. 형문刑問을 받을 때 세모꼴로 된 긴 몽둥이로
다리 앞부분과 발과 발가락을 아주 세게 때리는 형벌을 당하면, 다리가 깨지고 부러지는 일이 왕
왕 일어난다. 내려가는 동안 다섯 희생자들의 얼굴은 그들이 겪은 갖은 고초로 가득했지만, 사람
들은 그러한 흔적아래에서 놀라운 행복과 환희의 표정을 보았다. 고난의 한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기쁨이 흘러 넘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벅찬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때때로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의 기쁨을 표현했다.75)
박순집 베드로는 전아무개라는 사람이 동작나루까지 따라갔다고 들은 바를 전하고 있다. 서울에서 과천으로 가는 해남로 가장 큰 강 한강을 동작진에서 나루로 건넜음을 알 수 있다.
황 루카가 치명하러 고마 수영으로 내려갈 때 루카의 말과 행위가 좋았기 때문에 서울 외인 중에 전가라고 하는 사람이 신발을 둘러메고 동적이 나루까지 일부러 쫓아갔다고 합니다. 황 루카의 얼굴에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빛이 나타나더라고 그 사람도 죄인에게 와서 말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한테 듣고 죄인에게 이야기 하였습니다.76)
양성 미리내77) 출신으로 용인 검은정이78)에 살던 이원명 빈첸시오는 양성 소새79)에서 호송 길의 장면을 목격하였다. 수갑 차고 머리에 보를 쓰고 짚둥지 타고 가는데 메고 가는 사람이 한 여남은 명, 여럿 하인들과 군사들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양성현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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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 연구소, 2000, pp.426-437
74) 샤를 살몽 저, 정현명 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대전가톨릭대학교, 2006, p.379
75) <<전교회연보>>(APF) 40권 236호 칼레 신부의 <병인박해 보고서>중 ‘갈매못 5위 순교사적’, pp.49-51(장주기성인 자료집, 2016, 수원교회사연구소, pp.83-84)
76)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21, 박순집 베드로 증언(황석두 전기 자료집, p.77)
77)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78)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4리
79)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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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을 지나는 길은 해남로 갈원에서 직산으로 가는 길에서 충청수영로 첫 지점인 평택(팽성)으로 갈라져 나가는 분기점이다. 호송 길은 압송 길과는 다르게 칠원-소사평- 평택 노선을 갔음을 알 수 있다. 호송 모습이 짚둥지를 가마에 메고 호송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병인년 2월 초순에 죄인이 주교, 신부, 교우가 치명하러 내려간다고 하기에 양성 소새에 가서 보았습니다. 가까이에서 보지 못하고 멀리서 보니, 안 주교, 오 신부, 황 루가와 장 회장 등이
손을 앞으로 수갑하고 머리에 무슨 보를 쓰고 집둥지 타고 가시는데, 메고 가는 사람이 한 여남
은 명이 되고, 다른 하인도 여럿이고 군사는 여럿이나 되는지 똑똑히 모르고, 그 모양으로 따라
가지는 않았습니다.80)
홍주 출신으로 해미 마새81)에 살던 임여행 베드로는 말을 타고 몽두 쓰고 수영으로 내려왔다고 들은 바를 증언한다.
서울에서 죽이지 않고 수영으로 죽으러 내려 갈 때에 죄인의 부친이 보니 안 주교와 신부 두 분께서 말을 타시고 머리에 꾀갈(몽두) 쓰고 내려오시더라고 했습니다.82)
증언자는 미상이나 해미 마새 사는 김요한과 안드레아 형제가 네 분이 올라가시고 장주기 회장이 포함된 다섯 분이 내려오는 것을 신창 연봉정83)에서 보았다고 들은 바를 증언하고 있다.
이곳에서 떠나 4일 후에 도로 내려 오실 때 다시 보니, 올라가신 네 분외에 장 요셉 회장이라 하는 이와 다섯 분을 신창 연봉정에서 다시 보았는데, 내용 일을 아는 사람은 해미 마새 사는 김 요한 김 안드레아 형제더라.84) 천안 여사울85)살았던 광호 헤르메네질도는 홍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충청수영으로 호송되어 신창을 지나갈 때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튿날 홍주로 가 상경하시고 3월 열 하룻날86) 신창으로 지나가실 때에 잠깐 뵈옵고 ......87)
정산 출신으로 홍산 거칠88)에 살던 김홍칠 마티아는 호송 길에 홍주를 들렀고 홍주에서 수영으로 가는 길로 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원래 충청수영로는 홍주를 들르지 않고 인후원에서 수오랑을 거쳐 광천에서 수영으로 가는 길로 가게 된다. 또 홍주 영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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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123, 이원명 빈첸시오 증언(황석두 전기 자료집, p.111)
81) 충청남도 당진군 대호지면 마중리
82)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95, 임여행 베드로 증언(황석두 전기 자료집, p.101)
83)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궁평리 (궁평리 주민들은 정자는 없어졌으나 길가 마을을 ‘연봉정’이라 부름)
84)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 현대문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pp367 증언자 미상 정리번호 192
85)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86) 음력 2월 11일의 오류 추정됨. 호송 길에서 신창을 지나는 날은 양력 3월 27일, 28일(음력 2월 11일, 12일)경임.
87)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 현대문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p.390, 광호 헤르메네질도 증언 정리번호 201
88)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화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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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서 홍주에서 하루 묵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홍주 신리에서 체포되고 홍주에서 죄인의 모습을 갖추고 서울로 가서 심문 후 판결을 받고 다시 홍주로 돌아와 홍주 앞바다 충청수영으로 향한 것으로 보아 해읍정법該邑正法이 처형지 결정의 주요 이유라고 볼 수 있음을 반증한다.89)
서울에서 황 루카와 안 주교와 같이 홍주로 내려와 있을 때 홍주 영장이 포교들에게 말하길, “저 황가는 수영으로 함께 보내지 않으면 어떠하냐?” 하자 황 루카의 말이 “그게 무슨 말이오?
사제 간에 어찌 떨어질 수가 있다는 말이오?” 하고 홍주에서 주교와 함께 수영으로 갔습니다. 거
기에서 주교에 심부름이든지 담배 피워드리는 것이든지, 항상 복사 노릇을 하더라 하며 수영에 가서는 수영 아전들에게 밤낮으로 성교도리를 벽파하니 아전들 말이 “저런 양반은 위에 영令이 유연하여 살렸으면 좋겠다.” 했습니다.90)
남포 서짓골91) 살다 병인박해로 보령 수청고지92) 처가로 피신하였던 이치문 힐라리오는 처남을 비롯하여 동생, 누나, 처고모, 종 6촌 종수 5명의 목격담을 증언한다. 수영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주교와 신부는 충청수영 수사의 장청방에서, 황석두와 장주기는 다른 방에서 다담상을 받는다. 처형장은 술재93)를 넘어 10리 거리에 있는 모래사장(현재 영보리 갈매못 성지)인데 짚둥우리 타고 갔다고 들은 바를 증언하였다.
... 대접하는 법은 사부양반과 같이 하여 아전과 노령들이 주교 신부 앞에서는 말 한마디를 함
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주교와 신부 세 분은 장청將廳 아랫방에 앉으시고 조선 교우들은 윗방에
앉히고, 다담茶啖을 올린즉 두 교우는 먹지 아니하고 안 주교와 오 신부는 떡국을 잡수시고 민
신부는 얼마 잡수시지 않았습니다. ... 그 날이 수난대재날이라 주교 말씀이 “내가 오늘 오전에 죽을 터인데 한낮이 다 되어가니 어서 결박하고 어서 죽여 달라” 하며 호령하매 그 말을 듣지 않는데, 말들 하기를 “지금 죽을 놈들이 어서 죽여 달라고 한다.” 하고 참소에 나갈 때 거리가 거의 십리 상거가 되는지라. 짚둥우리를 타고 중로에서 술재라 하는 고개에서 민 신부가 슬픈 모양으로 머리를 숙이고 흥흥 소리를 내며 우시고....94)
홍주 월춘 출신으로 해미 마새에 살던 임여행 베드로는 처형현장을 목격한 부친에게서 들은 바를 전하고 있다. 장청 방에서 마지막 다담茶啖상을 들고 보령 백정 희광이가효수梟首를 집행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수영에 가서 치명할 때 죄인의 부친이 가서 보았다고 하는데, 서울에서 주교‧ 신부‧ 교우 합 다
섯 분이 수영으로 내려와서 안 주교, 오 신부, 박 신부(오류) 세 분은 장방 윗방에 앉히고, 황 루
카와 서울에서 내려온 장 서방 하나 그 두 교우는 장방 아랫방에 앉혔습니다. 주교께서 수사보고
말씀하시기를 내일 오시에 죽게 하여라 하시니, 수사가 차담상을 차려다가 드리니까 안 주교는 여러 가지 음식을 골고루 맛보시며 좋다고 황 루카에게도 먹으라고 하시더라 합니다. 안 주교께서 그 중 많이 잡수시고 신부들도 얼마씩만 잡수셨다고 하며 치명날은 병인 2월 17일(오류)인데,
서울에서 희광이가 내려올 예정이었으나 내려오지 않자, 보령 백정놈을 붙잡아다 죽이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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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한국교회사 연구소 편, <<한국 천주교회사>> 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pp.264-265
90)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88, 김홍칠 마티아 증언(황석두 전기 자료집, pp.95-96)
91)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92)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93) 충청수영성 동남쪽 밖에 보령으로 가기위해 넘어가는 고개로 현지명은 ‘솟재’이다.
94)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정리번호 194번, 이치문 힐라리오 증언 (황석두 전기자료집,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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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백정놈은 한사코 죽이기 싫다고 하였습니다. 안 주교는 너무 늦는다고 걱정하시니 병인 2월 17일 수영 장날에 장기대에 동여매었습니다. 안 주교는 그 백정놈이 서툴렀기 때문에 두 번 찍혀서 치명하시고 다른 신부와 교우는 대번 칼에 치명하였다고 합니다. 죄인의 부친이 광천장에 까지 친히 보았다고 합니다.95)
<<뮈텔 주교 일기>>에 기록에 의하면 1899년 11월 18일 내포지역을 사목방문하면서 뮈텔 주교는 광천 독바위에서 조수에 맞춰 도착한 배를 타고 30리를 가서 충청수영 건너편인 호변(천북면 학성리)에서 저녁식사하고 밤늦게 안면도 영목항에 도착한다. 이당시 안면도의 나무가 북쪽 20리 남쪽 20리에 이르는 곳은 다 베어지고 중앙 30리 거리에만 조금 남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1월 21일 안면도에서 배를 타고 말이 기다리고 있는 수영으로 왔으나 너무 늦어 하룻밤을 주막에서 머무르고 다음날 출발한다.
11월 21일 아침나절에 비가 조금 내렸다. 11시쯤에 배에 올랐는데 마을사람들이 모두 왔다.
11시 45분 닻을 올렸다. 약간의 풍랑과 북풍이 있었다. 상당히 춥다. 2시 30분쯤 수영水營에 도착했는데 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길을 떠나기에는 너무 늦어서 하룻밤을 묵기위해 주막에 들렀다.
수영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다. 그곳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 신부가 한 분이 와서 거처하게 되면 교우가 될 용의가 있다고 한다. 불행히도 그곳이 이곳 주민들을 개종시킬 수 있는 유일한 동기이다.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부족하다. 1866년 다블뤼 주교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한 곳이 여기다. 그들이 사형당한 장소는 이 곳에서 서쪽으로 약 3리 정도 떨어진 갈매못이란 곳이
다.
11월 22일 날이 새기 전에 출발했다. 보령으로 가는 첫 번째 고개를 넘으니, 오른쪽 첫 골짜기 안쪽으로 갈매못이 보인다. 짐꾼들은 하우고개(솟재, 우치라고도 함)로 해서 지름길로 가고 우리는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길은 보령읍에서 왼편으로 멀리 있다. 보령읍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름다운 묘가 있는데, 그것이 민비의 부친의 묘라는 말을 들었다. 길은 바다를 따라 뻗어 있다. 우리는 조수 때가 된 수로를 가끔 만나야 했다....96)
오기선 신부는 자서전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에서 압송 길과 마찬가지로 호
송 길에서도 음봉 삼거리 바위에서 식사를 하고 기쁜 마음으로 성가를 부르고, 다블뤼
주교의 마지막 강론 말씀을 들으며 함께 있던 신자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어머니에게서
들은 바를 전한다.
3월 20일, 다시 음봉 삼거리 바위에 다다랐다, ‘이번에는 안 주교님이 포졸들에게 진 빚을 갚
아야겠다고 바로 그 자리에서 푸짐한 잔치가 벌어졌다. 모여든 촌락의 남녀노소 틈바구니에 교우
들도 숨어서 그 술과 음식을 받아먹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어머님이 말씀해 주셨다. 잔치가 끝나
자 주교 신부님들은 ‘떼 데움’ 찬미가를 드높이 부르고 성모성가를 목청 높여 불렀다. 안 주교님
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강론을 들어보시오! 천주님을 공경하여 후세에 천국에 가서 만납시다.”
하시고 갈매못 목 자르는 형장으로 향했다. 성가를 또 부르며...97)
바. 순교 후 유해 이동
1866년 3월 30일 보령 백정 희광이의 칼질로 참수된 다섯 성인의 머리는 장기대에 매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매달렸다. 시체들은 3일간 모래밭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1866년 4월 2일 외교인들이 장기대에서 머리를 내려 각각 몸체와 맞춘 후 다섯 성인의 시체들을 모래를 파서 그 자리에 묻고 돌로 쌓았다.(1차 매장) 처음으로 황석두 의 시체는 황천일 요한 등 가족들이 찾아다가 홍산 삽티에 안장하였다. 5월 21일(음력 4월 8일)경 밤 이사심 바오로, 김순장 요한, 장주기 아들 장노첨 등이 순교자들의 시신에 달린 명패를 확인하고 머리와 시신을 일치시켜 염하고 처형장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4개의 광중을 만들고 관 없이 시신을 안장하고 하나의 봉분을 쌓았다.(2차 매장) 그 후 이사심 바오로가 무덤에 가보니 여우가 침노한 흔적을 보고 1866년 7월(음) 남포 서짓골로 유해를 이장한다.(3차 매장)98)
18년이 지난 1882년 블랑 신부는 유해의 유실을 염려하여 이치문 힐라리오에게 강경 으로 유해를 가져오게 하여 잘 봉인하여 프티장 주교가 있는 일본 나가사키의 오우라大浦성당에 안치한다.(4차 안치) 그 후 12년이 지난 1894년 6월 뮈텔주교의 요청으로 4개의 자루를 나무상자에 담아 배에 싣고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용산신학교에 안치하였다.(5차 안치) 1900년 11월 4일 다시 명동성당 지하 묘혈로 안치한다.(6차 안치) 1967년 절두산 순교기념관으로 안치하여 현재에 이른다.(7차 안치)99)
사. 다른 여행 기록 사례
순교길 일정을 찾기 위해서는 다음 내용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해가 뜨면 출발하여 죄인의 모습을 갖추고 말을 타고 가면서, 어디에서 점심을 먹고, 해가 지면 어디에서 숙박을 하였으며, 어디에서 말을 갈아탔는가를 추정하는 일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조선시대 여행 기록 중에서 옛 길을 간 다른 사람들의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1597년 4월 1일(음) 임진왜란 중에 모함으로 투옥되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옥에서 풀려나 권율 장군 휘하로 백의종군 가는 중에 아산 본가에 들르는 데 그 일정이 <<난중일기>>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① 4월 1일 의금부 옥문을 나선 충무공 이순신은 남대문 밖 부하인 윤간의 종의 집에서 하루를 머무른다. 4월 3일 윤간의 종의 집에서 출발하여 동작나루를 지나고 과천을 거쳐 인덕원에서 잠시 누워 쉬며 말을 쉬게 하였다.(35리) 수원부에 도착하여 수하의 군사 집에서 숙박한다.(90리) 이 당시 수원부는 현재의 화성이 아니고, 화성에서 서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일대 화산 바로 남쪽(현 융릉· 건릉 일대)이었다.
다음날 4월 4일 수원의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조발의 술대접을 받고 진위구로振威舊路를거쳐 냇가에서 말을 쉬게 하고 오산의 황천상 집에서 점심을 먹는다.(30리) 다시 길을 떠나 진위구로에서 말을 쉬게 하고 수탄水灘(군문진)을 경유하여 평택현(팽성)에 도착한다. 평택에 도착한 이 충무공은 이내은 손의 집에서 숙박한다.(70리) 4월 5일 이순신은 객사리, 탁천점, 별악암, 요로원, 어라항현을 넘어 분산墳山(선영)에 도착한다. 선영先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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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차기진, <갈매못 순교자들의 최후 압송로와 순교터‧ 매장지 연구>, <<갈매못 다섯 성인의 삶과 영 성>>, 내포교회사연구소, 2016, pp.145-166
99) 하성래, <충청수영 5위의 순교와 이장>, <<교회사학>> 6호, 수원교회사연구소, 2009, pp.31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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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른 후 외가를 거쳐 본가에 도착하여 숙박한다. (아산 현충사 50리)100)
1720년경 춘향전을 판소리로 엮은 <<열녀춘향수절가>>에 나오는 내용 중에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하여 남원으로 가는 길의 지점과 일정이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② 첫 날 남대문을 나온 어사 이몽룡은 청파역에서 말을 타고 밥전거리 지나고 동작나루 건너서 남태령을 넘고 과천읍에서 점심을 먹는다.(30리) 사그내, 미륵당을 지나 수원에 도착하여 숙박한다.(80리) 둘째 날 상류천, 하류천을 지나고 대황교를 건너서 떡전거리, 진개울, 중밑을 지나 진위읍에서 점심을 먹는다.(40리) 칠원, 소사, 애고(아교)다리를 지나 성환역에 도착하여 숙박하고 말을 갈아탄다.(90리) 셋째 날 새슬막을 지나고 천안읍에서 점심을 먹는다.(40리) 천안 삼거리를 지나 김제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덕평을 지나고 원기에 도착하여 숙박한다.(80리) 넷째 날 차령을 넘고 궁원, 모로원을 지나고 공주를 통과한 후 금영에서 점심을 먹는다.(50리) 경천역에서 숙박하며 말을 갈아탄다.(70리)
다섯째 날 노선, 초포교, 사교를 통과하여 은진에서 점심을 먹고(40리) 황화정을 지나 여산에 도착하여 숙박한다.(70리) 여섯째 날 탄현을 지나 삼례역에서 점심을 먹고 말을 갈아 탄 후 (40리) 전주, 만마동을 지나 오원역에서 숙박한다.(90리) 이레 날 임실, 말치를 지나 계수역에서 점심을 먹고 말을 갈아타고(40리) 박석치, 율현을 지나 드디어 남원 춘향이 집에 도착한다.(80리)101)
1760년 7월 18일(음)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다리 습창濕瘡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온천을 다녀오는 일정이 <<온천일기溫泉日記>>와 <<온궁사실溫宮事實>>102)에 기록되어 있다.
③ 남대문을 나서 서빙고에서 점심을 먹고(10리) 동작나루를 건너서 과천에 도착하여 숙박한다.(30리) 수레를 이용하여 행차하고 행렬이 많은 관계로 사근평 행궁에서 점심을 먹고(20리) 수원부에 도착 숙박한다.(60리) 다음날 말을 타고 진위에 도착하였지만 하천에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고 숙박한다.(30리) 다음날 소사에서 점심을 먹고(30리) 직산에 도착하여 숙박한다.(60리)
5일 째 되는 날 천안에서 점심을 먹고(25리) 드디어 온양에 도착하였다.(55리)
한편 온천에서의 피부병 치료를 마친 후 8월 1일 다시 귀경하게 된다. 온양온천을 출발 천안에서 점심을 먹고(30리) 직산에 도착하여 숙박한다.(55리) 다음날 소사에서 점심을 먹고(30리) 진위를 통과하여 가나 오산 부근에서 날이 어둑해져 급히 숙박할 장소를 물색한 끝에 독산성에서 숙박하게 된다.(70리) 다음날 독산성을 출발하여 도중에 점심을 먹고 과천에 도착하여 숙박한다.(70리)
4일 째날 상초현에서 점심을 먹고 서빙고를 지나 남대문에 도착하였다.(30리) 내려갈 때 일정보다 서둘러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다.103)
주문모 신부 사건에 연루하여 정약용은 1795년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금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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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이은상 역주, <<난중일기>>, 현암사, 1968, pp297-299, pp.156-158노승석 역,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 동아일보사, 2005, pp.383-386
101) 김현룡 편저, <<판본 및 교주: 열녀춘향수절가>>, 아세아문화사, 1981, pp.138-140
102) <<온천일기>>는 1760년(영조36) 7월 18일부터 8월4일 가지 사도세자의 온천행차를 기록한 1책의 일기이고, <<온궁사실>>은 정조가 사도세자를 추승推陞하기 위해 편찬한 책이다.
103) 전용훈,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글항아리, 2012, pp.5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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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가서 약 6개월간 일하면서 일기로 남긴 것이 <<금정일록>>이다. 서울에서 금정으로가는 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⑤ 1795년 7월 26일(음) 신시(오후3-5시경)에 출발하여 우의정 체제공에 인사하고 청파역에서 이가환과 인사한 후 늦게 동작나루를 건너 승방점에서 숙박한다.(20리) 7월 27일정오 수원부에서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50리) 화성 유수 조심태와 대화하고 진위에서 숙박한다.(100리) 7월 28일 갈원에서 예산현감으로 부임해 가는 이승훈을 만나 함께 동행 하며 평택현에서 점심을 먹고(40리) 곡교천에서 숙박한다.(90리) 7월 29일 신례원에서 점심을 먹고(40리) 대흥현 광시역에서 저녁을 먹고(50리) 20리를 더 가 밤 늦게 금정역 관사(오죽헌梧竹軒)에 도착한다.(110리)104) 해가 긴 여름철에 비교적 젊은 나이여서 하루에 먼 거리를 갔다.
1801년 1월1일(음) 홍주영장으로 부임 받아 서울에서 홍주로 가는 노상추는 그의 일기에 노정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④ 1월 1일 청파역에서 말을 빌려 타고 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넌 후 시흥 주막거리에서 숙박하였다.(30리) 역촌이 해산되고 역리와 역졸은 도망간 상태이다. 다음날 어렵사리 말을 구해(貰馬) 출발하였다. 사근평 행궁을 말에서 내려 지나고 만석거와 연화역延華驛과 장안문을 통과하여 선왕 정조가 축조한 화성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는다.(50리) 말과 역졸을 바꾸어 팔달문으로 나와 하류천을 지나서 현릉원이 보이자, 말에서 내려 절하며 선왕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한다. 진위현에 도착하여 숙박한다.(100리) 다음날 진위를 출발 하여 갈원에 도착하여 말과 역졸을 돌려보낸 후 10리를 가니 평택 군문나루에 도착한다.
나루에서 얼음을 깬 후 배를 띠워 건너서 평택현에서 도착하여 점심을 먹는다.(40리) 아산에 들어섰으나 날이 차고 눈발로 앞으로 갈 수 없어 요로원에서 숙박한다.(70리) 다음날 몸에 병이 나 늦게 출발하여 신창현에서 숙박하였다.(30리) 다음날 아침 일찍 신창현을 출발하여 30리 지나 신례원에서 점심을 먹고 대흥에 도착하여 숙박한다.(70리) 음력 1월 6일 아침에 출발하여 홍주에 도착한다.(30리)105)
뮈텔은 교구장 주교가 된 후 연말에 지역별로 사목방문을 하면서 자세한 여행일정을 <<뮈텔 주교 일기>>에 기록하였다. 철도가 생기기 전 내포 지역을 방문한 내용이다.
⑥ 1896년 10월 23일(양) 말을 세내는 일로 9시 30분에 드예 신부, 조 요셉 회장과 함께 출발하여 2시쯤 과천 주막에서 점심을 먹고(30리) 저녁7시 쯤 새암내 주막에 도착하고 8시경 갓등이에 도착하였다.(80리) 다음날 9시 출발하여 신포주막에서 점심을 먹고 (40리) 6시 30분경 아산만 해안에 도착하였다. 한 시간 걸려 배로 나루를 건너서 걸매106)에 도착하였다. 비오는 주일 하루를 쉬고 10월 26일 6시에 출발 15리 간 후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 맞은 편 해안에 도착하고 30 리를 더 가서 양촌107)에 도착하였다. (70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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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정약용, <<여유당전서보유>> 2, 다산학회, 1974, pp.2-4 조성을, <금정시절 다산의 활동과 사상>, <<한국실학연구>> 제6호, 2003.12, pp.163-167
105) <<노상추 일기>> 3, 국사편찬 위원회, 2005, pp.239-301(신대원 역 참조)
106)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
107)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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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합덕지 둑길을 따라가고, 양촌 도착 바로 전에 왼쪽에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신리마을을 지나는데, 지금은 완고한 외인 마을이 되어 있었다. 10월 27일 8시 반에 출발 예산을 지나 20리에 있는 차거현(수레너미고개)108) 밑에서 점심을 먹고(40리) 저녁 6시 반경 유구주막보다 10리 더 가 숙박한다.(70리) 다음날 11시경 웅진 나루터에 닿고 정오에 공주읍에 도착하였다.109) (30리)
또 1899년 11월 6일(양) 뮈텔 주교는 9시쯤 빌린 말로 짐 실은 말을 끌고 서울을 출발하여 정오에 과천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30리) 밤이 되어 수원에 도착하나 마부들이 10리를 더 가자고 하여 대황교까지 가서 숙박한다.(80리) 11월 7일 7시에 출발하여 10리를 가 중미에서 아침하고 성환에서 숙박하였다.(80리) 다음날 10시에 천안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30리) 풍세110) 장터에서 잠시 쉬고 보산원111) 공소까지 가서 숙박하 였다.(70리)112)
위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물론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다른 계절과 기상여건에 따라 변수가 발생하지만, 평균적으로 하루 일출부터 일몰까지 30~40리에 점심을 먹고 70~80리에 숙박하며 하루나 이틀에 한번 말을 갈아타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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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차동리에서 공주군 유구면 녹천리에 걸친 고개
109) <<뮈텔 주교 일기>>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p.422
110) 충청남도 천안군 풍세면 풍세리
111) 충청남도 천안군 광덕면 보산원리
112) <<뮈텔주교 일기>>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pp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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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순교길 일정과 압송 및 호송 모습
갈매못 다섯 성인들의 체포, 압송, 심문, 판결, 호송 기록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체포에서 순교에 이르는 일정을 정리해보면 다음 <표 8>과 같다. 먼저 관련된 기록에서 월일과 요일에 일어난 내용을 장소별로 정리하였다. 다음으로 압송 및 호송 길에서 죄인의 모습을 갖추고 말이나 가마를 타고 포졸들과 함께 가면서 점심을 먹고, 숙박을 하며, 말을 갈아타는 역말을 추정해 볼 수 있다.
3월 11일(일) 신리에서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가 경포京捕에 체포되었다.
3월 12일(월)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가 체포되었다.
3월 13일(화) 신리에서 머물며 쉬었다.
3월 14일(수) 네 분 성인들은 영장營將이 있는 홍주목으로 압송되었다.
3월 15일(목) 홍주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말(또는 가마)을 타고 출발하여 신례원(40리) 을 지나 신창에 도착하여 숙박한다.(70리)
3월 16일(금) 신창을 출발하여 곡교천을 지나 후천에서 점심을 먹고(30리) 요로원을 지나고 탁천을 지나서 평택(팽성)에 도착하여 숙박한다.(60리)
3월 17일(토) 평택을 출발하여 군문나루를 건너고 칠원을 지나서 진위에서 점심을 먹고(40리) 오산을 지나 수원에 도착하여 숙박한다.(90리)
3월 18일(일) 수원을 출발하여 사근평을 지나 과천에서 점심을 먹고(40리) 남태령을 넘은 후 동작나루를 건너고 서소문을 통해 서울로 들어와 운현궁에서 내린 후 사관청 구류간에 도착한다.(70리)
3월 19일(월)~ 3월 22일(목)까지 우포도청에서 심문과 고문을 받는다.
3월 23일(금) 충청수영에서의 군문효수형 판결을 받는다. 이때 제천 노럴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온 장주기도 같은 형을 받는다.
3월 24일(토) 포도청 고문으로 상처가 난 몸으로 말을 타고 서울을 출발하여 과천에서 점심을 먹고(30리) 수원에서 숙박한다.(70리)
3월 25일(일) 수원을 출발하여 중미현(30리)을 지나 진위에서 숙박한다.(50리)
3월 26일(월) 진위를 출발 갈원에서 점심을 먹고(20리) 소사평을 경유하여 평택(팽성) 에서 숙박한다.(40리)
3월 27일(화) 평택을 출발하여 후천 삼거리 주막에서 점심을 먹고(40리) 곡교천을 건너 신창에 도착하여 숙박한다.(60리)
3월 28일(수) 신창을 출발 신례원(30리)을 거쳐 홍주에 도착하여 숙박한다.(70리)
3월 29일(목) 홍주를 출발하여 광천(30리)을 지나 충청수영에 도착한다.(70리)
3월 30일(금) 성금요일 장청에서 마지막 식사를 한 후, 솟재를 넘어 갈매못(10리) 모래사장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길 일정 중에서 내용이 상충되는 기록이 나온다. 서울 압송 길 중 ‘평택읍내에서 점심’이라는 기록(달레)과 ‘음봉 오성바위에서 점심’(오기선)중 어느 것이 타당한가 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가정을 하며 고찰해 보았다.
우선 <달레의 평택에서 점심식사(dîner)113)가 타당하고, 오기선의 오성바위 점심식사 가 타당하지 않다>고 가정해 보았다. 서울 압송 첫날 90리를 가야 하는데 밤에 곡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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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dîner’는 ① 시대에 따라 시간의 차이가 있었음. (루이 1세 시대: 오전11~12시, 루이 15세 시대: 오후 2~3시, 나폴레옹 1세 시대: 오후 5시, 루이-필립 시대: 6시, 19세기 말: 오후 7시, 현재: 7~8시)
② 점심의 뜻으로 쓰는 것은 벨기에, 스위스, 캐나다 및 프랑스 여러 지방. (이휘영 편, <<에센스 불한 사전>>, 민중서관, 2006, pp65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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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건너 후천 음봉 주막이나 요로원 근처에서 숙박을 해야 한다. 해가 짧은 겨울철에 하루 90리 길 죄인을 압송하기에는 무리한 일정이다. 또 교구 재판록 증언에서 “신창에서 숙소를 정했다”와 “신창에 들러 도리를 벽파하였다”는 기록과 맞지 않게 된다.
다음에는 <달레와 오기선 둘 다 타당하다>고 가정해 보았다. 서울 압송 첫날 70리를가서 신창에서 숙박한 후, 3월 16일 금요일 신창을 출발하여 30리를 가서 음봉 오성바위(주막거리)에서 점심을 먹고, 또 30리를 가서 평택에서 저녁을 먹으면 일정이 자연스럽다. 달레의 천주교회사의 ‘dîner’를 ‘식사’로 번역하면 맞게 된다. 그러나 점심에 고기를 물렸는데, 저녁에 또 고기 식사를 제공한 사실은 맞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달레가 타당하지 않고, 오기선이 타당하다>고 가정해 보았다. 달레가 아산에 있는 음봉 오성바위 주막위치와 평택읍내(ville de Pieun-Taik)를 혼동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달레는 <<한국 천주교회사>> 첫 장 지도에서 아산과 평택을 확연히 구분하고 있다.114) 또 오기선의 증언은 두 세 차례 전해지는 과정에서 와전될 가능성이 크고, 홍주 출발날짜, 압송 시 두 회장, 홍주서 주리 몰매 사실 등이 왜곡되어 전하고 있다. 죄인 압송 중에 포졸들이 낮에 거나하게 술을 먹고 압송하였다고 약간은 과장되어 전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위의 기록들을 논리적으로 정리해보면 ① 3월 16일 금요일 소재날 고기 음식 물리쳤으며 ② 순교 압송 및 호송 길 일정에서 음봉 오성바위에서 점심식사 하였고 ③ 평택읍내에서 저녁식사(dîner)를 한 것으로 보면 대체로 자연스럽게 된다. 달레의 경우 소재날 고기물린 사실이 강조하여 표현하였고, 오기선은 2차, 3차 전해진 증언으로 압송시 상황과 호송 시 상황이 혼동되었고 일부는 과장되어 와전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는 찾아보아야 하는 일은 어떤 모습으로 압송 또는 호송 길을 갔는가 이다.
샤를르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기록에서 압송 및 호송 길의 모습의 사례를 찾아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베르뇌 주교는 옷소매만 붙잡고 좌우에서 포졸이 압송하여 갔다. 서울에서 체포된 베르뇌 주교는 거리도 가깝고 저항하지 않고 자진하여 갔기 때문이었다.
1866년 2월 23일(양력) 하오 4시에 많은 포졸 떼가 집에 침입하여 곧 바로 주교의 방으로 달려가 붙잡아 가지고 오라로 묶었다. 그러다가 주교가 도무지 저항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을 보고는 거의 즉시 포승을 풀고 각기 그의 옷소매를 붙잡은 두 병정이 좌우에서 호송하는 가운데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115)
서울 베르뇌 주교 집에서 5분 거리인 정의배 회장 집에서 체포된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오라에 가볍게 묶인 채 좌우 소매를 잡고 압송하였다.
1866년 2월 26일(양력) 새벽에 그는 포청으로 끌려갔다. 두 병졸이 그의 양 옆으로 걸으며 각기
그의 소매 한 쪽씩 잡고 갔다. 중죄인들에게만 사용하는 홍사로 그의 팔은 가슴위에 가볍게 묶여
있었다.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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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지도자료 참조
115)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p.391
116)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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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골에서 체포된 볼리외, 도리 신부는 오라에 가볍게 묶인 채 넓은 챙이 달린 몽두를 쓰고 들 것(짚둥지 가마)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었다.
1866년 2월 27일(양력) 아침 포졸 한 떼가 이 씨 집으로 곧장 몰려와 그를 잡은 것이다....볼리외 신부를 잡고 나서 같은 포졸들이 그 곳에서 시오리 거리에 있는 도리 신부의 마을117)로 갔다....그는 오후 한 시에 체포되었다. 이튿날 28일(양력) 선교사들은 각기 들것 같은 것에 들려 양
손이 홍사로 가슴위에 묶이고 머리에 중죄인들이 쓰는 모자를 쓰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 모자는 누런 빛깔이며 헝겊으로 된 넓은 챙이 달려있어 그것이 축 늘어져서 얼굴과 몸의 윗부분을 덮어 사람들을 볼 수도 없고 남들이 볼 수도 없게 한다. 이것은 어떤 위험한 범인들을 체포한 것으로 인하여 일어날 지도 모르는 소란이나 반란시도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118)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는 오라를 어깨에 걸친 채 붉은 모자(몽두) 씌워 소에 태워 서울로 압송해 갔다.
1866년 3월 3일(양력) 아침 9시에 증거자들을 각기 소에 태우고 어깨에 홍사를 걸었으나 손을 묶지 않았고, 중죄인들에게 씌우는 붉은 모자를 씌우고 서울로 길을 떠났다. 거리는 사흘 걸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푸르티에 신부가 병으로 너무도 쇠약해져서 포졸들은 그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여 행정을 하루 더 길게 잡아 서울 도착하는데 5일이 걸렸다. 길을 가는 동안 두 증거자들은 그들의 모자 전을 치켜 올리고 갔는데, 만나는 크고 작은 마을마다 엄청나게 많은 외교인의 무리가 두 서양선생들의 얼굴과 풍채를 보려고 크나큰 호기심을 가지고 몰려 들렀다.119)
수원에서 체포되어 서울 압송된 앵베르 주교는 서울 성문에 이르러 오라로 결박하고 포도청에 들어갔다.
1839년 8월 10일(양력) ... 주교는 옷과 몇 가지 일용품을 조그만 꾸러미에 싸고, 아무도 따라 오지 못하게 한 뒤 배반자(김여상)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얼마쯤 갔을
때에 주교는 포교 5명을 만나, 그들에게 청하여 그를 따라오려고 하는 불쌍한 정안드레아를 집으
로 돌려 보내주게 하였다. 길을 가는 동안 앵베르 주교는 포교들과 호기심에 끌려 그가 지나가는
길에 모여 있던 20명 쯤 되는 다른 사람들에게 천주의 말씀을 전하였다. 포교들은 그를 (수원에서)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 성문에 이르자, 주교는 국사범들을 묶는데 쓰이는 오라로 결박되어 가서 포장에게 인도되었는데, 그는 주교를 처음에는 포도청에 가두었다.120)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의 판결을 받은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
부는 의자에 앉아 묶인 채 들 것(2인 가마)에 실려 형장으로 호송되어 갔다.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도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호송되었다.
1866년 3월 8일(양력) 그들을 사형장으로 데려가기 위해 옥에서 끌어냈다. 외국인 신부들을 구
경하려는 엄청난 군중이 구류간 문 앞에 모여들었었다. .... 증거자들은 각기 긴 의자에 올려 져서 두 사람에게 들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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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경기도 용인면 손곡리(손골)
118)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pp.398-399
119)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p.414
120)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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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와 팔은 펴진 채 의자에 단단히 묶여 있었고, 머리는 약간 뒤로 젖혀져 머리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의자 위쪽 뒷면에는 양면에,‘여러 가지 형벌을 받은 후 사형선고를 받은 반역하고 불복종한 아무개’라고 쓰여 진 판자가 달려 있었다.121)
1866년 3월 11일(양력) 이들은 금부에 이송되지 않고 구류간에 남아 있었으며, 거의 즉시 내려진 그들의 사형선고는 그들이 도착한지 사흘째 되는 날 집행되었다. 3일 전에 다른 선교사들에 대하여 행한 것과 같은 의식으로 군대를 크게 전개시킨 가운데 그들을 새남터로 데려갔고, 모든 것이 같은 모양으로 전개되었다.122)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는 등 뒤로 오라에 묶인 채 가마에 태워 새남터 형장으로 호송되어 갔다. 그날( 1839년 9월 21일: 양력)이 되자 그들은 등 뒤에 손을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백 여 명의 군인에게 호송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 정하여진 장소에는 말뚝을 세워 놓았는데, 그 위에는 기한 폭이 펄럭이고 말뚝에는 그들의 사형 선고문이 달려 있었다. 도착하자, 그들의 옷을 벗기고...123)
병인년 조선 관료였던 남종삼과 홍봉주는 소 수레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팔과 무릎을 결박한 후 머리칼을 새끼줄로 묶인 채 서소문 밖으로 수레를 달리게 해 실신시킨 후 팔을 등 뒤에 결박하고 머리를 나무토막에 두고 망나니가 칼질을 하게 했다.
1866년 3월 8일 주교와 선교사들을 형장으로 데려가는 행렬이 겨우 떠났을까 말까 할 때에 소가 끄는 우차 2개가 금부 옥 앞에 멎었다. 수레 위에는 거치른 십자가가 하나씩 있었다. 이 사형 집행은 보통 다음과 같이 행하여진다. 사형수는 발을 발판에 올려놓은 채 팔과 무릎을 결박한 밧줄로 십자가에 묶여 있다. 치켜 올린 머리칼은 새끼로 매어져 있고, 십자가 꼭대기에는 선고문이 달려 있다. 우차가 서문 밑을 지나 성 밖으로 나가자마자, 발판을 치우고 길에 있는 돌들 위로 달려가라고 소를 막대로 찔러본다. 그러면 오래지 않아 몸이 이미 고문으로 인하여 반쯤 부수어진 사형수는 무섭게 흔들려서 실신하게 된다. 형장에 이르면 망나니 들은 밧줄을 끊어 사형수를 땅에 떨어지기 한다. 그런 다음 그의 옷을 모두 벗기고 팔을 등 뒤에 결박 지은 다음 머리를 나무토막에 올려놓는다. 병정 한사람이 머리칼을 잡아맨 밧줄로 머리를 지탱하고 있다가 망나니가 일 마치면 이내 머리를 옆으로 던진다.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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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p.400
122)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p.415
123)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p.460
124)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pp.405-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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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송 및 호송의 모습을 비교하여 살펴보면, 병인박해 순교자들은 기해박해 때보다 더 강하게 중죄인으로 취급하였으며, 체포 장소가 서울에서 거리가 멀수록 죄인의 복잡한 모습(짚둥우리, 몽두, 칼, 수갑)을 하였고, 외국 선교사는 얼굴을 알아 볼 수 없게 하였다. 포도청에서 가까운 곳에선 걸어서, 먼 곳에선 들것이나 소나 말에 태워 압송해 갔다. 형장으로 호송되어 가는 모습도 기해박해 때에는 등 뒤 결박하여 들것에 실려 갔으나, 병인박해 때에는 의자에 결박한 채 들것에 실려 갔다. 한국 순교자의 경우는 소 수레 위에 십자가에 묶인 채 서소문 형장으로 호송되어 갔다.
이상에서 증언자의 기록 및 사례를 종합해보면, 신리에서 홍주까지 다블뤼주교는 결박없이 중죄인이 쓰는 누런색 헝겊모자(몽두蒙頭)를 씌워 가마에 태워갔고,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는 걸어서 홍주까지 압송되어 갔다. 홍주에서 서울까지는 짚둥우리를 말에 태워 수갑과 행추칼을 채우고 붉은 오라는 어깨에 걸친 채로 압송되어 갔다.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는 외국인으로 몽두를 씌웠다. 충청 수영 호송 길에서도 압송 길과 마찬가지 모습이었고, 짚둥우리를 말에 태워 갔으나 일부 구간에서는 가마에 태워가는 모습의 증언(양성 소사)도 있다.
위의 증언을 바탕으로 호송 및 압송 길 모습을 추정하여 스케치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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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몽두蒙頭 ; 조선시대 중죄인을 체포해서 연행할 때 머리에 덮어씌우던 물건으로 원래 쇠로 만든 항아리 모양의 것을 머리에 씌웠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삼베를 사용하였다. 국가전복이나 매국행위를 한 모반죄인 등을 체포할 때 해와 하늘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얼굴을 가렸으며 국청에 들어와 야 비로소 몽두를 벗겼다.... <<한국사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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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교길-충청수영로 찾기
1866년 병인년 당시의 충청수영로를 찾기 위해서 한국 고지도 중에 가장 제작연대가 가까운 1861년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기본으로 하고 1872년 지방군현도와 고 지도들126)를 참조하여 지점(점)과 길(선)을 찾아보았다. 이 길을 확인하기 위하여 일제강 점기의 1914년 이후 제작된 5만분의 1 지도127)와 1895년 일본이 정탐하여 제작한 구한말 지도128)를 비교‧ 대조하였다. 또한 국립지리정보원의 사이트에서 위성지도를 비롯한 최신지도(2016년)와 구지도(1960년 이후 소장본)를 찾아보고, 다음사이트 인터넷 지도 (2016년)를 대조하면서 길을 찾아갔다. 여러
지도들을 대조하고 비교하면서 정확하지 않은 부분은 현장을 여러 차례 답사하여 검증하고 충청남도청 홈페이지 사이트 3D 생활정보 지적도를 참조하여 확인하였다.
가. 지점 찾기
우선 충청수영로 지점을 확인하였다. 해남로에서 충청수영로로 갈라지는 지점은 갈원(칠원)과 소사평이다. 갈원에서 군문나루를 거쳐 평택(팽성)으로 가는 길과 소사평을 거쳐 평택으로 가는 길 2개의 노선이 있다. 갈원은 현지명 칠원으로 2차선 구舊도로 길가에 옥관자정129) 우물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을 지나서 1km 정도 가면 군문나루와 소사평으로 갈라지는 지점이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해남로는 통복천을 건너 소사평으로 나아간다.
이때 통복천을 건너는 지점의 확인이다. 통복천 양쪽이 모두 신도시 주택단지 건설로 공사가 한창이다. 다행히 문화체육부에서 삼남대로를 연구하여 그 지점에 기둥표 지를 해놓은 것을 발견하였다.130)현재 평택시 소사동 소사마을에 대동법 시행비가 있어 소사평 분기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비를 조금 지나면 작은 천과 소사교가 나오고 넓은 소사 평야가 펼쳐져 있다.
다음은 평택현(팽성)에 있었던 역말인 화천역이다. 노와리에서 동네 어른의 말씀에 추팔리에 옛 역말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현장을 방문하니, 마을 조금 높은 곳에 동네에서 관리해 온성황당(마당馬堂)이 보존되어 있었다. 또 소사평에서 안성천을 건너 노와리로 가던 지점을 이야기 듣고 그곳에 가 보았다. 이 지점은 안성천과 성환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지금은 제방으로 막히고 농로로 변하고 공장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평택현 옛 고을인 팽성읍에는 객사가 아직 남아있어 그 위치를 확인해 주고 있다. 탁천濁川 지점은 평택현과 요로원要路院을 이어가는 곳으로 팽성읍 동남쪽 석근리에 위치하고 있다. 탁천은 아산방조제 건설 이후 농지가 정리되고 개울처럼 천이 좁아졌다.
요로원은 봉재저수지 끝자락인 아산시 음봉면 신정리 100번지131)로 45번 도로가에 ‘신정리 1구(요로원)’이란 표지판이 있다. 동네 어른의 말씀으로는 예로부터 요로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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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서울대학교 규장각소장 한국학연구원 자료(해동지도, 조선지도, 1872지방도, 동여도, 청구도, 비변사 방안지도, 광여도, 팔도군현지도, 여지도, 동국여도 등)
127) 국립지리정보원 소장 고지도(50000:1) - 일제강점기 제작분
128) 남영우 편, <<1895 구한말 지도>>, 성지문화사, 1999,
129) 이곳을 지나던 인조가 우물의 물맛이 좋아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다.<경기도 삼남대로 안내지>
130)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삼남대로의 길을 연구하고 경기도에서 경기도 구간을 관광 자원화 하였다.
131) 안경희, <요로원>, <<향토연구>> 제36집, 충남향토연구회, 2012, pp.15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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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왔으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신정리, 원남리를 지나서 큰 고개를 넘어 음봉으로 가는데 이 고개가 어래현이다.132)
동천리(뒷내)에 옛 주막거리 후천 삼거리가 나온다. 커다란 아름드리 느티나무아래 식당들이 있고 그 옆에 현재 오성바위와 다섯 성인 기념탑이 세워져 있어, 이 지점이 순교길에 오가며 점심 식사한 곳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삼거리에서 서쪽 염치 저수지를 돌아가는 길을 따라가면, 굽은 다리曲橋가 있던 지점이 나오고 좀 더 둑길을 가면 곡교천을 건너 신창으로 가는 다리가 있던 지점이 있다.
신창현은 향교가 있고, 척화비· 공덕비 등이 서있는 신창초등학교가 옛 고을 지점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신창의 역말은 창덕역昌德驛이다. 현재 순천향대학 정문과 저수지를 지나서 좌측 갈래 길을 가면 역말로 추정되는 마을을 발견할 수 있다. 아산시 신창면 창암리에 ‘역말’이라 표지된 마을이 있다.133) 신창에서 예산으로 가는 21번, 45번 국도로 순천향대학을 지나면 고개가 나타나는데, 이 고개가 대치大峙이다. 이 고개를 지나서 도고온천역을 지나면 지금은 사라져 흔적만 남은 갈치葛峙가 있다. 갈치를 우회하여 신례원에 이른다.
신례원新禮院134)은 옛 원 중에서 특이하게 읍 소재지로 발전한 곳이다. 청양-공주-합덕-당진-서산 지선도로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 발전하였다. 무한산성無限山城을 지나서 무한천을 건너면 예산군 오가면 역탑리에 역말로 추정되는 일흥역日興驛이다. 현재 위치는 역촌리 외곽인 임성중학교 앞 노상으로 ‘옛 역원, ‘역장터’라 불린다.135)
인후원仁厚院은 신례원에서 20리 거리로 예산과 홍성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홍성군 홍북면 대인4리 인후원 마을의 21번 국도 동편 지점이다. 지금은 제일레미콘 공장이 들어서 있다.136) ‘인후원 부락’이라는 표지판이 도로에 있다.
홍주성洪州城은 홍성 시내 중앙에 있고 최근 성 안 모습을 새로 복원하는 사업이 활발히 진행 중이었다. 세천역細川驛은 홍성에서 광천으로 가는 샛길로 현재 홍성군 홍동면 원천리에 있는 세천 마을로 추정되는데, 광천천과 금마천이 작은 물길로 만나고 인후원 에서 바다와 만나는 광천으로 가는 평지 길에 위치한다.137)
인후원에서 홍성으로 가다가 금마 부평4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금마면사무소를 지나고 수오랑(사고개 4거리)을 거쳐 홍동과 세천을 지나면 홍주를 들르지 않고 곧장 광천점廣川店에 이르고 지나고 보령 청소천 건너서 충청수영으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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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어래현<어라항현<월랑고개<원남고개 (요로원 남쪽 고개)로 추정된다.
133) 김아름, <창덕역>, <<향토연구>> 제36집, 충남향토연구회, 2012, pp.97-101
134) 유병덕, <신례원>, <<향토연구>> 제36집, 충남향토연구회, 2012, pp.139-147
135) 유병덕, <일흥역>, <<향토연구>> 제36집, 충남향토연구회, 2012, pp.105-110
136) 홍제연, <인후원>, <<향토연구>> 제36집, 충남향토연구회, 2012, pp.149-151
137) 홍제연, <세천역>, <<향토연구>> 제36집, 충남향토연구회, 2012, pp.4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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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해남로의 지점 확인이다. 해남로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삼남대로(해남로) 노선 발굴과 콘텐츠 개발>>(2011)를 발간한 바 있고, 경기도에서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경기도 삼남길’을 안내 팜플랫(지도, 사진)을 만들고 지점표지를 설치하여 스탬프 찍기로 관광 자원화 하였다. 위의 두 자료를 참조하여 해남로의 지점을 답사 확인하였다. 위 자료는 정부차원의 역사‧ 문화 유적지를 경유하여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도보여행 구간으로 변형하여 노선을 정하였다. 특히 이 구간은 도시화 및 산업화로 인한 신도시(택지) 개발로 소멸되거나 변형된 구간이 많고, 남아있는 구간도 밀집주택가 사이에 보도步道와 차도車道 구분 없는 구간이 많다.
나. 노선 찾기
지점확인과 함께 충청수영로 지점과 지점을 연결하는 선인 노선을 확인하였다. 노선을 찾는 일은 지점을 이어가는 작업이다. 현지도 상에서 지점을 찾은 후 1919년 일제강점기 지도와 구한말 지도를 비교하면서 길을 찾아가는데 특히 산과 천에 유의하며 길을 찾아갔다. 여러 차례의 답사를 통해 확인하고 일부 구간은 지적도를 통해 확인하였다.
칠원에서 통복천을 건너 군문나루까지 구간은 평택역 설치와 철도로 인해 길이 끊어지고, 평택의 도시화 팽창과 함께 변형되어 우회도로로 바뀌었다. 칠원에서 통복천을 지나 소사동에 이르는 구간은 통복천 위쪽과 아래쪽으로 동삭지구, 소사지구 주택지구 개발로 모든 길이 사라졌다.
소사동에서 소사교를 지나서 소사평 들판을 건너 안성천을 건너 팽성읍 노와리에 이르는 구간이다. 구간 중간에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며 끊어지고, 아산방조제 건설로 농지가 개간 정리되면서 길이 바뀌었다. 또 도로와 다리가 새로 생겨 대체도로를 이용하면서 안성천을 건너는 길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안성천을 건너 노와리에서 평택현(팽성읍)으로 가는 길에 추팔리에 있었던 평택 역말인 화천역을 지난다. 한편, 팽성을 거치지 않고 탁천으로 바로 가는 직선 길은 노와리-방축리에 이르는 2차선-1차선-마을길로 이어진다.
방축리-석근리 길은 농지와 고속철도(KTX)로 끊어졌다.
탁천 지점 아래쪽 운용리와 둔포리에는 아산 테크노밸리 산업지구가 들어서 모든 지형이 사라졌다. 운교리에서 마을길과 농로로 둔포천을 건너서 관대리와 산전리 사이 길을 지나면 새로 확장된 45번 국도와 만나게 되고, 봉재저수지 옆을 지나면 요로원(신정리)이 나온다. 운교리에서 산전리에 이르는 길은 아산방조제 건설이후 농지로 바뀌면서 옛길이 없어지고 바뀌었다. 45번 국도 구도로를 따라 원남리-어래현-음봉삼거리를 지나면 동천리 옛 주막거리(오성바위 지점)에 이른다. 도로가에 이순신 백의종군로 표지석이 설치되어 옛 길이 지나가는 지점임을 표시하고 있다.
음봉 주막거리 오성바위 지점(현 동정삼거리)에서 우측 동정리 방향으로 냇가 길을따라 가면 염치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 옆길을 따라가면 곡교리에 이른다. 충남 도청 3D 지도를 확인하면 염치 저수지 안에 후천을 따라가는 옛 길이 지적도 상에 표시되고 있다.
이 길과 39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이 곡교(굽은다리: 고분다리)이다. 이 고분다리를 지나 곡교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다. 현재 곡교천은 제방을 확대하고 잘 정리되어 있어 온양 시민들의 운동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행히 곡교천을 건너는 자전거 전용 다리가 새로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지적도에 보면 천의 폭이 좁혀져 있었고 제방 안쪽에도 농지가 있었다. 곡교천 신창 쪽은 아산시 환경사업소가 크게 자리 잡고 있어 길이 소멸하였다.
곡교천에서 신창현가는 구간은 수장리에서 신창교차로 부근까지 남성2리 마을회관을 지나는 길이 이어지다가 밭으로 끊어졌다.
신창에서 다시 21번, 45번 국도로 4차선 도로로 확장하여 시전삼거리를 지나서 갈치를 우회하여 신례원에 이른다. 갈치의 소멸된 길은 도고면 금산리에서 효자리에 이르는 옛 길이다. 산 고개 길 1km 정도가 밭과 흔적으로만 있고 남은 길은 마을 주민들이 농로로 사용하고 있다. 바로 옆에 장항선 철도가 새로 옮겨지면서 터널이 생겼다.
신례원에서 무한산성을 지나고 무한대교를 건너면 일흥역 이었던 오가면을 지나게 된다. 21번 국도 구도로가 4차선의 직선으로 확장하여 응봉-금마를 거쳐 홍성에 이른다.
홍성을 거치지 않고 광천으로 가는 길은 인후원을 지나 21번 도로 부평사거리에서 금마면사무소를 지나 덕정리-수란리-홍동면-세천역을 거쳐 광천읍에 이르는 차량이 적고 풍경이 아름다운 호젓한 2차선 길이다. 홍동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우측도로로 가면 세천 마을(원천리)으로 가는 길이 있다. 세천마을, 척괴마을을 지나서 광천까지는 평지이고 쉽게 가는 길이다.
광천읍을 지나 바닷물과 만나는 광천을 건너서 토굴새우젓 길을 지나서 장항선 철길을 따라가며 청소역에 이르기 까지 길이 끊기고 이어지기를 반복하게 된다. 청소천에서 웅포 구간은 간석지 사업과 보령방조제 건설로 바닷물이 드나들던 청소천 주변이 농지로 변하고, 610번 평지의 지방도로가 생겨 대체되었다. 바닷물을 피해 가던 산길은 흔적만 남았고, 장곡 저수지로 길이 끊어지고 서해안 고속도로는 옛 길 흔적조차 사라지게 하였다.
웅포에서 영보리 까지는 2차선 도로로 확장되었다.
광천에서 천북을 경유해 가는 길은 홍주목 관할이었던 용천, 천북(흥양)을 지나서 보령방조제(한산사)에 이른 후, 앞바다를 배로 건너면 바로 충청수영에 도착한다.
다음은 해남로 노선 찾기이다. 지점 찾기와 마찬가지로 해남로 노선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삼남대로(해남로) 노선 발굴과 콘텐츠 개발>>(2011)를 발간한 바 있고, 경기도에서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경기도 삼남길’을 노선 안내 팜플랫(지도, 사진)을 만들어 노선을 잘 알려주고 있다.
최근에는 터널과 교량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형태의 신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고속철도의 건설로 교통수단의 또 다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댐이나 대규모 간척지 조성사업으로 많은 간척지 농토가 생기고 해안이나 하천의 모습이 많이
변하면서 도로도 함께 변하였다.
다. 도로변화 고찰
순교길의 도로변화 내용을 4가지 구분하여 고찰해 보았다. 첫째는 길이 없어지거나 이용이 중단된 구간이다. 용산과 세류는 군사적 이용 목적으로 없어지고, 과천‧ 평촌‧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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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최주형, <도로의 역사와 앞으로의 도로 개발 방향>, <<고속도로>> 51호(1995.12), pp.89-104
151) 최주형, <도로의 역사와 앞으로의 도로 개발 방향>, <<고속도로>> 51호(1995.12), p.93
152) 통계청, <<한국 통계연감>> 2015년, 2016, pp.66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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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신도시 주택 건설로 길이 없어졌으며, 진위‧ 아산은 산업도시 건설로 길이 사라졌다.
강이나 하천 주변 길은 간척사업과 방조제 건설로 인한 농지정리로 길이 없어졌다. 안성천 주변의 소사평, 노와리, 탁천 주변 방축리, 석근리, 둔포천 주변의 운교리와 산전리, 삽교천 주변 신리, 상궁리, 보령방조제 주변의 진죽리, 장곡리, 청소천 주변의 재정리, 정전리 등이다. 염치 저수지가 생기면서 이용을 할 수 없게 된 오성바위-석두리 구간이있다.
갈치 구간은 산을 돌아가는 대체도로 건설로 이용이 줄면서 현재는 끊어져 있다.
한편 보령 죽림리, 재정리, 장죽리 구간 길은 장항선 철도로 인해 길이 끊어지고 기차 길로 바뀌어 완전히 이용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산길은 흔적만 남고 길은 축소되어 주민들이 농로로 이용하고 있다. 물론 소멸된 구간은 주변에 다른 대체 도로가 생겨 옮겨간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둘째는 길이 축소된 구간이다. 이 구간들은 대체도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해남로는 오산역 앞의 주택가 골목길인데, 오산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확장하면서 주변은 네모형 주택지와 도로가 생기고 기존 도로는 상가 골목길로 축소되었다. 충청수영로는 석두리에서 곡교천에 이르는 길, 신창 수장리-남성리-신창읍 길인데 염치 저수지로 길이 끊어지고 온양으로 돌아가는 대체로가 생겨 이용이 축소되었다. 홍성-수영 간 도로 상정리-장척리 구간도 홍성-광천 간 21번 국도로 대체되어 발전하면서 이용이 축소되었다.
셋째는 길이 확장된 구간이다. 옛 길과 동일한 노선으로 기찻길로 끊어지지 않고 오히려 기찻길을 따라 도시 간을 연결하는 자동차 도로로 발전한 구간이다. 해남로 서울에서 과천- 수원-오산- 평택으로 가는 길 중에 1번 국도로 바뀌어 발전을 같이한 구간이다.
충청수영로는 신창-예산-홍성-광천-보령에 이르는 길은 꾸준히 도로가 확장되고 발전하였다.
다음으로 아직도 옛 길과 비슷하게 남아있는 구간이다. 도시 사이 도로가 아닌 면 소재지 사이 도로는 포장되어 그대로 남아 있다. 해남로는 도시 주택가 2차선 도로로 남아 있는 구간으로는 의왕 가구단지, 수원 정자동-만석거-영화동-화성-세류 구간, 대황교-병점, 오산-청호리 구간이다. 충청수영로는 노와리-방축리, 신정리-음봉면사무소, 부평사거리-광천, 교성리-수영, 장척리-천북-보령방조제 구간이다. 순교길은 구만리-용리, 예림리-역탑리 구간이다.
마지막으로 물길을 건너는 방법으로 대부분 하천에 교량을 설치하였다. 동작대교, 인덕원교, 오산대교, 봉남교, 군문교, 예산대교, 옹암교, 보령댐교를 비롯한 모든 하천을 교량으로 건넌다.
도로변화의 과정을 살피면서 특별히 철도가 옛길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 <표 18>과 같다.
사람이 자연에 발자국을 남기면서 길은 시작되고, 이용하는 빈도수가 늘어나면 노면이 단단해지고 노폭이 넓어진다. 그러나 이용하는 빈도수가 줄어들면 흔적만 남긴 채 자연 상태로 점차 사라져간다.
경제가 성장하고 도로건설 기술이 발전하면서 도로는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다. 인구가 늘어나 도시들이 성장하고, 교통수단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도로의 수요가 발생하게 된다.
국가의 재정적 여건에 따라 정부는 도로를 새로 건설하거나 개량, 보수, 유지 등의 관리를 하게 된다. 도로 이용자는 경제적 효율성을 고려하여 교통수단을 선택한다. 자동차, 기차, 항공기, 배 등 교통수단은 상대적으로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하거나 쇠퇴한다.
대체 교통수단이나 대체 도로가 생기고 편의성이나 경제성이 떨어지면 기존의 도로는 축소‧ 소멸하게 된다. 자동차가 주된 교통수단이 된 오늘날의 도로는 경제성장과 국토개발의 필수요소로 국가경제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도로가 변화하는 요인을 고찰해 보면 다음의 6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사람과 화물의 이동수요 변화에 따라 도로는 변화한다. 수요가 발생하면 도로가 만들어지고 수요가 증가하면 도로가 확장하고 포장을 강화한다. 수요가 감소하면 점차 도로가 줄어들고 소멸해 간다.
둘째는 자연적 요소로 산사태나 홍수 등 재해가 일어나면 도로가 유실되거나 폐쇄되어 장기적으로 복구가 안 되면 도로의 기능이 정지하게 된다. 복구하는데 비용이 발생하고 시간이 걸리며 일시적으로 사용을 할 수 없게 된다.
셋째는 직접적 요인으로 자동차 수요의 증가이다. 군용차량이나 화물차, 자가용, 고속버스가 늘어나 자동차 전용도로가 새로 생기고 체계적인 도로망이 건설되고 도로차선과 포장이 확장하게 된다.
넷째는 자동차 외에 다른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도로는 변화하게 된다. 기차가 등장하여 철로가 부설되면서 도로가 축소 단절 폐쇄가 생기고 역세권을 중심으로 도시의 기능도 변화한다. 비행기 수요가 증가하면서 공항이 생기고 도로가 축소되며 공항권을 중심으로 도로가 형성된다. 고속철도가 발전하면서 기차의 수요가 다시 증가하게 되었다.
다른 교통수단의 발전은 자동차 도로와 효율적 대체 수단으로 끊임없이 경쟁하고 있다.
한편 취미나 문화 관광의 새로운 수요로 자전거 및 도보 전용도로가 많이 조성되고 있다.
다섯째로 국토개발 사업에 따라 도로가 변화하게 된다. 저수지 및 간석지 개척, 하천 제방이나 댐건설로 물길의 폭이 줄고 도로가 소멸하거나 신도로로 대체하게 된다. 신도시나 신산업단지의 건설은 도시 전체를 계획적으로 개발하면서 기존 도로는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도로가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토목기술의 발달로 도로가 변화한다. 산 절개 기술, 교량 건설 기술, 터널 공사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도로는 평탄해지고 직선화되며 발달하게 된다.
나가는 글
한국에서 가장 치열했던 병인년 박해로 보령 충청수영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다섯 성인의 압송과 호송 길 일정‧ 모습‧ 노선을 찾아보았다. 다행히도 시대적으로 가장 근접한 1861년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지점과 노선을 자세히 안내해 주었고, 1872년 지방군현 지도와 1895년 구한말 지도가 이 길을 찾아 밝혀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병인년 순교자 재판기록과 증언기록, 포도청 등록 등의 사료들은 압송과 호송 길의 일정‧ 모습‧ 노선을 추정하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부족한 식견과 구체적이고 확실한 사료의 부족으로 추정한 결과를 도출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 전문적인 연구와 추가의 구체적인 사료가 발견되면 더욱 확실한 사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차례 답사를 하면서 현재길 모습에서 옛길을 확인하는 과정에 현지 어르신들의 증언이 많은 도움을 준 반면, 오랜 시간이 지나서 옛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차 사라지고, 개발과정에서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구간도 많았다. 걷거나 말을 타고 다니던 조선 시대 도로가 기차가 다니는 철길이 생기고, 자동차 길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과 그들의 전쟁을 위한 우리 민족의 쓰라린 고통을 읽어볼 수 있었다.
해방 이후 6.25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고 1970-80년대 고속도로와 신도시를 건설하였고,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고 마이카 시대가 도래 하면서 도로는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서울 주변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신도시와 신산업지구의 개발은 산과 하천, 토지, 주택, 도로 등 모든 지형을 변화하게 하였다. 또 건설기술의 발전-교량건설, 터널 굴착, 산 절개 기술-으로 도로는 평탄하고 큰 폭으로 포장‧ 확장되게 되었다.
국가 재정을 사회 간접자본에 투자하여 경제를 활성화 하는 정부 정책은 도로발전의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자연 환경의 파괴나 근시안적인 도로 건설과 폐기, 정치적 예산 투입으로 인한 국가 재정의 낭비는 유의해야 할 점이다.
오늘날 한국천주교회 내에선 성지순례가 한창이다. 국내 성지는 건물‧ 조형물‧ 코스‧ 후원모집이 장소와 교구만 다르고, 서로가 비슷하고 동일하게 조성‧ 운영되고 있어 성지 별로 차별화된 순례 콘텐츠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순례자들은 고비용을 들여 성지 순례의 영역을 해외로 넓혀 가고 있다. 시간과 비용 면에서 경쟁력 있는 국내 성지 콘텐츠를 개발하여 다양하고 심도 있는 순례길을 제공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갈매못 다섯 성인 순교길은 새로운 순례길 개발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본당과 교구를 뛰어넘어 순교길 노선에 있는 성지와 성당들이 협력하고, 주변의 역사 문화 유적들과 연계하여 청소년, 청년을 위한 순례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국내에 있는 외국인 이주공동체와 외국인 순례자를 위한 순례길 홍보와 안내시스템도 개발해볼 만 하다. 평신도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이룩하고 순교로 지켜낸 한국 천주교회 역사를 외국에 널리 알리는 좋은 기회로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조선시대 옛 길을 찾아 갈매못 다섯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15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충청수영로의 도로 변화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길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새로 생겨나고 성장하며, 축소되고 소멸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와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 길은 몸이 실제로 움직이는 시공간이기도 하고 마음이 지나가는 시공간이다. 순례 길을 걸으며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 보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 가는 삶의 보람’을 찾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갈매못 다섯 성인의 순교길을 따라 가며 성인들의 생각과 마음을 반추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답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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