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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사범학교의 성적표도 81명 중 전 학년 1등이다. 조병화시인은 이때를 「편운과의 대화(김삼주)」에서 이렇게 회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 쯤 되었을 거야. 그 때 열심히 공부하는 길만이 내가 갈 길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리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었어. 밤에 늦도록 불을 켜놓고 공부를 하면 어머니도 주무시지 않고 일을 하셨지. 죄송스러워서 ‘어머니 주무세요’ 하면 ‘네 방에 불이 켜져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자겠어’ 하시면서 일을 하셨어. 그래서 나는 일부러 불을 일찍 끄고 자는척했어. 그리고 어머님이 주무시면 다시 공부를 하고. 사범학교 시절도 그랬어. 럭비 선수였으니까 방과 후엔 자습할 시간이 없었거든. 그래서 밤에 취침시간이 되면 자습실로 옮겨 밤을 새우곤 했었지. 그런 보람으로 난 줄곧 1등자리를 지켰어. 그 힘든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성적은 모두 ‘甲’을 받았지.”
경성사범학교에서는 공부이외에도 미술부, 육상경기부, 럭비부등 다방면에 거쳐 활동을 하였으며, 조선 럭비 대표 선수로 전 일본 대회에 참가하여 3년 연속 우승을 하기도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대한 럭비 축구협회 이사를 맡기도 했다.) 이때 국내 시는 물론 폴 발레리, 릴케, 로망롤랑, 헤르만헷세, 보들레르, 랭보의 시를 읽었다는 편운은 조윤재선생의 지도로 교내 조선어 연구회 회지『반딧불』에 천성환, 선우휘와 같이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출처] 편운 조병화 문학관 탐방|작성자 장다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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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27(토) 오후 2시. 혜화동자치회관 2층 혜화홀
편운문학상 김광규 운영위원장, 김명인 심사위원장, <꿈> 편집주간 김삼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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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 / 나호열
한때는 달팽이를 비웃은 그런 날들이 있었지
세상은 핑글거리며 돌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겠나 하고
집 속에 틀어박혀 공상이나 일삼는 철학자처럼
머리 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이 무슨 필요 있느냐고
그러나 어느 날 자급자족 되지 않는 세상에 찬 바람 불어
밥 굶고 신문지 이불 삼아 노숙하는 사람이 나임을 알았을 때
발 부르트도록 걸어왔던 그 길이 신기루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록 구부리고 토끼잠을 잘지언정 달팽이 네가 부러웠다
집은 갈수록 멀어지고 겨울은 끝내 떠나가지 않을 듯 싶었다
이 시는 비웃음과 부러워함이라는 대립적 정서의 마주침에 의하여 전개된다. '나'는 '달팽이'를 비웃고 또 부러워한다. 비웃는 까닭은 첫째 '달팽이'가 느리기 때문이다. 단순히 느리다는 이유만으로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핑글거리며 돌아가고 있는데/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그 빠른 세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는 자본주의 시대이고, 자본주의의 핵인 부의 창출은 속도와 직결돼 있다. 남보다 빠르고, 남보다 앞서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시속 백이십 킬로미터를 허용하는 시대에 달팽이 걸음처럼 느린 차를 누가 사겠는가. 주문만 하면 원하는 떡을 집으로 배달해 주는 시대에 디딜방앗간을 누가 이용하겠는가. 그러기에 속도를 추종하는 일은 이미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미덕 중의 하나로 자리잡고 말았다. 달팽이처럼 길을 가는 것은 어리석다. 아니, 시대에 뒤떨어진 짓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자에게 달팽이는 비웃음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나'가 달팽이를 비웃는 두 번째 이유는 달팽이가 "집 속에 틀어박혀 공상이나 일삼는 철학자처럼/머리 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속도의 시대에 "머리 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이성을 갈다듬는다거나 정신의 깊이를 더해 가는 일은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행동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나보다 남의 생각과 행동을 살피기에 민첩해야 한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앞질러야 하고 흐름의 방향을 읽는 데 재빨라야 한다. 그래야 돈과 명예가 자기 것이 된다. 이런 판에 "머리 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이 어찌 비웃음의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달팽이를 부러워한다. 왜냐하면 '나'는 자신이 추종하던 자본주의의 허망한 실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세상에 찬 바람 불어"에서와 같이 자본주의의 핏줄인 돈줄이 막혀 버렸을 때 '나'는 명예와 부 대신 노숙의 신세로 전락해 버린다. "무작정 우회도로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신기루를 지나 또 다른 신기루를 향하여/걷고 또 걸으며 꽃 피우는 하루"('거울 앞에서')처럼 "핑글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세상이 신기루 투성이 임을 '나'는 뼈저리게 체험한다. 그래서 '나'는 달팽이를 부러워한다. 달팽이를 부러워한다는 것은 '느림'과 '머리 속 황무지 개간'을 긍정하는 것, 속도를 벗어나려는 것이리라. 속도의 경쟁은 끝이 없으므로, 속도의 경쟁에서 영원한 승자가 되는 길은 속도를 벗어나는 일이므로, 그 길만이 온전한 '나'로서 '집'을 갖고, 일가를 이루고, 평안히 겨울의 시대를 지낼 수 있으므로.
- 김삼주 (경원대학교 교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