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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역사에 나타난 예배의 모습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남˓북장로교회와 캐나다 장로교회와 호주 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으며, 이들의 예배 양식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예배당은 주로 동네 언덕 위에 세우고, 주일날 아침과 저녁 그리고 수요일 밤에 예배하러 갈 때는 하얀 옷을 곱게 차려입고 몰려드는 모습이 마치 하얀 파도 물결과 같았다. 그리고 주중에는 가장이 집안에서 자녀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인도하였다.
예배는 한국인 개종자들의 삶을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매일 같이 가정예배를 드리고, 공예배로는 주일날에는 낮과 밤에, 수요일에는 밤에, 그리고 금요일에는 구역예배를 드리고, 그 밖에도 각종 기념예배를 드리고, 송별예배와 영결예배에 이르기까지 예배는 기독교 신앙인의 삶의 전부였다.
이번 시간에는 한국인 개종자들이 우상숭배에서 하나님 예배로 전환하는 모습을 먼저 알아보고, 그다음으로 예배의 장소가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알아본 후, 다양한 예배의 형태는 무엇이었으며, 가정예배의 중요성은 어떠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1. 전통적 자연숭배에서 하나님 숭배로
한국의 전래적인 민간신앙은 크게 두 주류를 이루었다. 조상의 영을 숭배하는 정령신앙과 자연을 숭배하는 자연 신앙이다. 조상의 영은 묘(墓)와 위패, 그리고 자연을 방황하는 영(魂)으로 삼분되어 후손들의 길흉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자연에 산재한 각종 신령들을 모시는 집인 당집이 있었다.
이러한 한국인들의 전통적 신앙을 선교사들은 한마디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된 것”들이라고 하였다.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는 1894년 전라도를 여행한 다음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 민족의 종교성은 “종교가 없다”라는 놀라운 사실이다. 유교는 부패하고, 불교는 분쇄되었으며, 백성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예배한다.” 나무 신, 산의 산, 도로의 중간을 차지한 신, 바람과 파도의 신, 부엌의 신, 마마 신 등이다. 어디에도 신(god)은 있지만 하나님(God)은 아무 데도 없다. 참으로 이 민족은 “헛되고, 거짓된,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을 물려받았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한국의 마을마다 입구에 서 있는 각종 신상들을 만나게 되고, 거리에 나서면 이곳저곳에 널려 있는 음식물을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방안에 들어서면 선반 위 혹은 한쪽 천장에 있는 신물(神物)을 접하게 되었다.
천주교는 전래 당시에 한국인들에게 상당한 파급력을 지녔다. 벨(Eugene Bell) 목사는 목포에서 천주교는 개신교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하였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한국인들의 숭배 습관’에 어울리게 각종 주상을 교회 안에 두고 그 앞에 절하게 한 것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가톨릭 신부는 고해성사 때 예수의 성상을 보였으며 사람들은 곧바로 고개를 숙여서 절하곤 하였다. 오랫동안 우상에게 절하는 습관에 젖은 한국인에게는 개신교적인 철저한 복음주의보다는 가톨릭이 더욱 쉽게 파고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개신교를 접하게 되면서부터 각종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기는 하였어도 여전히 마음속에는 자연신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집 안에 있는 위패를 비롯하여 신물(神物)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여 기독교로 개종 후 이 신물을 숭배하지는 않을지라도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는 마을에 있는 석상, 장승 혹은 신물을 단순한 자연물로 간주하여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개종자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 부분을 목포의 의료 선교사 오웬(C. C. Owen)은 이렇게 말한다.
목포의 벨 사택에서 남서쪽 산 아래 마을의 중앙에 있는 본 동네의 모습이다. 마을의 번화가와 시장 터에 이 ‘마을 신’이 서 있다. 크기는 10~12피트이고 첨단에 돌갓이 덮여 있다. …… 이 돌을 건들면 죽는다는 미신이 있다. 신년 예배 때마다 우리 선교사들은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고, 또한 이 돌을 예로 제시하곤 하지만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돌을 신으로 예배하지 않았다고 부인한다. 그렇지만, 이 돌을 건드리면 병에 걸린다는 생각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한국인 개종자들을 신주 혹은 신목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한 다음에 선교사들은 각 가정에 있는 전래적인 신물들을 무너뜨렸다. 이 부분을 오웬 목사의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Mrs. Ching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으로, 어느 날 아침 공부를 끝내고서 진지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주물(呪物)을 부셔야 하느냐고 또한 부셨을 경우에 어떠한 일이 생기느냐고 물었다. 그때 이후로도 나에게 그것들을 태워 버리도록 한 날을 정해주었다. Mrs. Bell, Miss Graham, 그리고 나는 주물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Mrs. Ching은 아주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내 머리 위에 덮개도 씌워지지 않은 선반에 있는 어떤 물건을 가리켰다. 살펴본 결과 이 작은 상자 안에는 2~3야드 길이의 조악한 무명천, 무명천이 들어가 있는 반쪽 바가지, 조그마한 병에 쌀이 담겨 있었다. 이것들을 부엌으로 가지고 가서 태우려고 시도하였다. 우리에게 불편함을 가중시킨 것은 Mrs. Ching이 우리가 보이지 않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면서, 간격을 두고서 그리고 때를 맞춰서 이웃집 아이에게 불이 붙어서 타느냐고 속삭이는 소리로 묻곤 하였다. 불이 붙고 드디어 이 더러운 신들은 재로 변하였다. Mrs. Ching은 잠시나마 재앙이 닥칠 것으로 두려워하였다가 아무런 일도 닥치지 않자 성공적으로 이 일을 치른 데 대하여 크게 기뻐하였다.
이렇게 각 가정에 있는 신물들을 제거한 다음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당산나무가 있고 그 옆에 당신(堂神)을 섬기는 당까지 한꺼번에 구입하여 당을 헐고 당산나무를 베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이렇게 하여 교회가 마을의 높은 언덕에 들어서고 종소리와 함께 찬송과 기도를 함으로 새로운 신앙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2. 다양한 예배 처소
1860년대의 미국은 유럽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안정된 사회를 가꾸어 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남북전쟁을 겪게 되면서 황폐화된 미국 사회를 신앙으로 치유한 부흥사가 바로 무디(D. L. Moody)였다. 따라서 교단과 교파를 떠나서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사회적 필요성을 반영하듯 무디의 부흥 집회는 앞선 세대의 부흥사 피니(Charles Finney)와 맥을 같이 하면서 초교파적이었다.
한쪽에서는 각 교단들 고유의 예배모범에 따른 예배가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교단과 교파를 떠난 부흥회 유형의 예배가 있었다. 이 후자의 경우에는 노상에서, 천막에서, 가정집에서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예배를 드렸다.
한국에 도착한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관은 바로 이러한 후자에 속함으로써 다분히 선교적이며 또한 부흥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마펫(Samuel A. Moffett), 그리고 남장로교회의 테이트(Louis B. Tate), 전킨(William B. Junkin), 벨(Eugene Bell) 등에 이르기까지 종말론적인 기대가 강한 신앙인들로서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이들로부터 시작한 예배는 다분히 부흥회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형식이 한국교회의 예배형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1) 선교사들의 임시사택
한국인들의 예배 처소는 초기에는 개인 집, 그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방이나 사랑을 주로 사용하였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 데이비스 양(Miss Linnie Davis)은 매일 오후 3시에 자신의 방으로 몰려 들어온 동네 꼬마 아이들에게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 어학 선생에게 성경의 그림을 들고서 이야기를 들려주게 한다. 이어서 “예수 사랑 하심은”이라는 찬송을 노래하기도 한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기도함으로써 만남은 끝난다. 이렇게 이들의 예배는 끝나곤 하였다. 이처럼 선교사들은 거주지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신이 임시로 기거하는 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다음 단계로 선교부가 확정되고, 서양식-한국식 혼합형의 사택이 완공되기까지 임시로 사용하였던 초가집, 혹은 기와집을 건축한 후에는 이를 임시 예배 처소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임시사택을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주거문화에 따라 사랑이라고 불렀다. 이 사랑채의 크기는 각각 달랐다.
예를 들면, 벨 목사가 목포에서 거주하였던 초가집에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거실과 침실과 부엌이 있고 뒤쪽에 따로 방을 부속으로 꾸미고 이를 예배실로 사용하였다. 그 후 광주로 옮겨 온 벨 목사는 임시사택을 1년 가까이 사용하다가 사택을 건축한 이후인 1905년 11월부터는 주중에는 광주 선교부 진료소로, 그리고 주말에는 예배 처소로 사용하였다.
2) 한국인들의 예배 처소
개신교 선교 초기의 한국인들의 재정적 상황은 참담할 정도로 가난하였다. 그렇지만 한국인 개종자들은 자신의 삶의 현장을 예배 처소로 내놓은 경우가 많았다. 이는 생활의 근거를 버리는 희생적인 태도였기 때문에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한 지역에 들어가서 불신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 무리들이 교회라는 조직으로 발전하기까지는 선교사들이 노상에서 그대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노상 예배는 당시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지금까지는 복음 사역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으며, 거리 예배, 거리 설교, 전도지 판매 등은 금지된 상태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외국인이며 또한 이상스러운 사람이고, 또한 사역은 아직 도입 단계에 있다. 한 해 동안 그럭저럭 우리 집에서, 남자 거주지에서, 노상 예배실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
그다음에 등장한 예배 처소는 주막이었다. 주막은 음식과 술과 함께 조그마한 방을 잠자리로 제공하는 서비스업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주막은 당시 도보여행을 주로 하는 여행 관례에 따라 한 지역에서 타지역으로 이르는 지름길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깊은 산 속에, 강변의 나루터, 그리고 바닷가에 주로 위치하였다. 따라서 선교사들도 선교여행에서 주막을 신세 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주막에서 선교사들은 주막 주인에게 전도함으로써 주막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도하는 매체이기도 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권 1899년 편에 있는 삼도리교회에 관한 기록이다.
羅州郡 三道里. 敎會가 成立하다. 初에 鄭元三, 李文五, 尹相三 등이 믿고 光州 牛山里 敎會에 다니며 禮拜하더니 李文五는 酒業을 폐기하고 基旅幕을 禮拜 處所로 使用할새…….
초기 한국인 개종자들은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하였다. 이들은 한 지역의 최초의 개종자가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내놓는 경우가 많았으며 두 번째는 숫자가 많아져 감에 따라 공동으로 기금을 거두어서 지역 내에 집을 매입하고 예배 처소로 구조를 변경시키기도 하였다.
8월 말에 세 번째로 여행했으며, 태인 지역의 구봉리, 태인 지역의 계하를 찾았다. 매개교회는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그대로이지만 예배 참석이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집을 새롭게 사서 예배당으로 개조하였다. 매개로부터 이들은 서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가서 전도함으로 조그만 집단이 매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구봉리에서는 교인인 주 선생의 집에서 10~12명 정도가 예배드린다. 이들은 예배할 집을 사려고 돈을 모으고 있다. 계하의 김 선생은 집을 사서 남자와 여자가 각각의 방에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게 하였다. 참석자는 50명 정도이지만, 이끌어 갈 지도자가 없다.
맥켄지(Mr. McKenzie) 교회의 사람들은(소래교회를 말함) 교회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장사 배에도 예배실을 하나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책들을 함께 싣고 다니면서 쌀을 사고 팔러 가는 곳마다 말씀을 선포한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 자립하고 또한 동시에 복음을 선포한다. 이들은 한 달에 15달러어치의 책을 판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선교사들의 방이나 임시거처인 사랑에서 그리고 한국인들은 노상에, 자신의 집에, 주막에, 그리고 선상(船上)에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예배를 드렸다.
3. 다양한 예배의 모습들
한국인 초기 개종자들은 예배당을 마련한 다음부터는 다양한 종류의 예배를 드렸다. 예배당 건축을 마친 후에 드리는 건물봉헌예배, 주일예배, 찬양예배, 성찬예배, 송별예배, 기념예배, 감사예배 등을 드렸으며, 가정집에서는 가정예배를 드렸다.
1) 주일예배/수요예배
주일예배는 아침 예배와 저녁 예배로 나누어서 드렸다. 주일날 아침과 저녁에 예배드리는 것은 당연하였으며, 수요예배도 또한 드렸다. 특히 주일 밤 예배와 수요일 밤 예배가 끝나고 나면 때에 따라 간증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 교회들은 예배가 끝난 후에는 성경공부도 겸하여 함으로써 예배와 성경공부는 한국인 초기 개종자들을 교육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남자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일 년에 두 차례씩 구역들을 순회하면서 각종 문답을 실시하고 교회 직원을 임명하였으며, 그 후에 여자 선교사들은 한 선교구 구역 내에 있는 모든 교회를 순회하면서 여성 신자들과 아동들을 교육하였다.
2) 기타 특별 예배들
가. 병원 개원 예배
예배당에서 드리는 공예배를 제외한 여타의 예배도 상당히 많았다. 첫째는 선교부 소속 진료소 및 병원에서 드리는 날마다의 개원 예배였다. 병원은 오전에 직원들이 모여서 아침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였다. 목포에서 오웬 의사는 목사보다는 의사로 활동하였는데, 오전에 진료소의 직원들과 함께 아침 예배를 드림으로써 문을 연 다음에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에게 번호가 적힌 전도 소책자를 나누어 주면서 집에서 읽고 다음에 올 때 가져오게 하였으며, 약 봉투에도 성경 구절을 손수 기록하고, 여기에 간절한 기도를 덧붙였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칼을 사용하시옵소서. 전파된 귀한 말씀이 기도의 날개와 하나님의 권능의 날개를 달고 날기를 원하옵나이다.”나는 환자를 돌보는 동안에 환자들에게 예수를 말한다.
광주 선교부 소속 선교사이자 의사인 놀란(J. W. Nolan)은 오웬 의사의 방법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목포에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1905년 11월부터는 광주로 옮겨서 진료소를 맡아 운영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진료소 문을 연 1905년 11월 20일에서 1906년 1월 1일까지 293명을 치료하였으며, 두 차례의 큰 수술과 아주 많은 수의 작은 수술을 실시하였다. 일상적인 하루의 일과는 나의 조사가 예배를 드리면서 “옛이야기를 매일 되풀이하였다.” 사람들이 이 예배에 관심을 가진 것을 매우 다행으로 여긴다. 복음과 관련된 질문으로 예배가 중단되는 것은 흔한 일이며, 그때마다 세심하게 대답하였다.
나. 감사예배
감사예배는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1893년 성서번역을 결정한 이후로 성서번역 위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고한 결과 1899년에는 일부 성경책의 번역본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에 감사하는 예배를 드렸는데, 선교 공의회 감사예배의 모습을 불(W. F. Bull)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위원회가 7일에 모였다. 이 위원회는 한국의 각 선교회의 대표와 성서공회 사람들로 조직되어 있으며,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 9일 주일날은 한국어로 신약성경이 최초로 완역되어 출간된 것을 기념하는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가졌다. 예배는 한국어와 영어로 진행했다. 단상에는 번역위원들이 앉았으며, 안식년을 맞아 휴가 중인 레이놀즈, 성서공회 대표들, 영국과 미국 영사, 알렌에게 번역자 각각에게 잘 장정된 한국어 성경을 두 권씩 전달했다.
다. 송별예배
송별예배는 그때까지는 한국인이 선교사의 안식년 귀국에 맞추어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기원하는 예배였다. 이 자리에서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이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였다. 군산 선교부의 전킨은 안식년을 맞이해서 귀국할 때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내가 미국에서 돌아오면 그때 교인으로 받아들여 주겠다고 하면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울었으며, 몇 사람은 월요일에 와서 울면서 내가 떠나기 전에 받아들여달라고 했습니다. 지난 5월에 떠날 때에 예배를 마치면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나는 이 찬송이 끝나지 않았음을 확신합니다. 이것은 지난 8년 전에 고국 교회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오랫동안 작별을 고하고 떠나는 것이 힘들었듯이 이제는 이 사랑하는 형제들을 떠나서 미국으로 오기가 힘들었습니다.
1912년 벨 목사가 안식년을 맞이하여 귀국할 때, 순천 선교부의 코잇(R. T. Coit) 목사가 안식년을 맞이하여 귀국할 때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송별예배를 드렸다.
송별예배의 또다른 형태는 영결예배였다. 선교사 자신이나 가족이 목숨을 잃을 때에 각 선교부에서는 묘역을 마련하고 매장하는 영결예배가 있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가장 먼저 자녀를 잃은 사람은 레이놀즈였다. 1893년에 낳은 첫 자녀를 서울에서 잃고서 서울의 외국인 묘지에 매장하였다. 1901년에는 벨 목사의 첫 번째 부인이 죽자, 서울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에서 영결예배를 드린 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매장하였다.
이렇게 영결예배는 다양하였다. 벨 목사의 장례예배도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 광주 선교부 아이들의 선생으로 와 있었던 여자 선교사 Mrs. Sara Elizabeth Talmage(윌슨 의사의 큰 딸)는 벨 목사의 영결예배를 먼저 본인이 살았던 사택에서 미국인 선교사들을 중심므로 그리고 두 번째는 묘역에서 한국인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드렸다.
라. 기념예배
기념예배는 다양한 제목으로 드려지곤 하였다. 첫 번째는 1917년에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 25주년 기념예배이다. 이 예배에서는 기념예배, 기념사, 선교보고 등의 행사가 뒤따랐다. 두 번째는 선교사들의 한국선교 20주년, 25주년 등을 기념하여 한국인 동역자들이 개최하였다. 예를 들면 니스벳(J. S. Nisbet) 목사의 선교 25주년을 기념하여 1932년에 전남노회 소속 목포 시찰회 목회자들이 김세열 목사를 대표로 하여 목포 양동교회에서 기념예배를 드렸다. 세 번째는 한국인 목회자들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다. 광주 양림교회 김창국 목사도 1935년에 “성역 20주년 및 양림교회 부임 14주년 기념예배”를 드렸으며, 1942년에는 “양림교회 부임 2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볼 때, 다양한 예배의 종류는 결국 예배가 한국인 기독교인의 모임의 핵심이었음을 말한다. 이런저런 중요한 인생의 과정을 통과할 때마다 마치 통과의례처럼 예배가 그 몫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4. 가정예배
가정예배는 기독교의 발생으로부터 지속되어 온 중요한 예배 형태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한국 교인들에 대한 초기 신앙점검의 형태로서 세례 조건으로서 가정예배를 내세우기도 했다. 다음은 전라북도 군산의 최흥서 장로의 가정예배로 인하여 이웃집 소녀가 참석하고, 그 후 이 소녀가 죽음으로써 부모를 개종시킨 이야기이다.
다음의 만차산교회의 역사에 귀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접근하였던 사람 가운데 최흥서는 가장 부자이며 또한 존경받을 만하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그는 지도자라고 알 수 있었으며, 그의 집은 근래에 이르기까지 예배 처소로 사용했었습니다. 그는 예배를 이끌고, 어린아이들과 초신자들을 가르치고, 많은 형제들과 나그네를 돌보고, 적지 않은 숫자의 형제들과 나그네들이 그의 지붕 아래에서 좋은 음식을 대접받았습니다. 최근에 최 씨는 우리가 미국에 가고 없었던 기간에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습니다.
아침저녁 가정예배에서 조용한 묵상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웃 가정의 어린 소녀가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드디어 우리가 하늘의 아버지를 모신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녀도 그리하여 주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했으며 가슴이 벅차게 되어 자기네 집으로 가서 쏟아 놓았습니다. 그녀의 첫 번째 말은 “아버지, 어머니, 우리 집은 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모두 하늘의 아버지를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들은 화가 났고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는 아프게 되었으며 지속적으로 기독교인이 와서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그들이 와서 기도해야지 자신이 살 것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아이가 죽을 것 같은 지경에 이르러, 이 부모는 최흥서와 최관보를 불렀으며, 이들은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신속하게 병이 나았습니다. 아이는 이로써 부모가 개종하리라 생각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은 굳어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서 아이가 다시 아프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예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망하게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나는 죽을 것이며, 이로써 부모는 많은 ‘고생’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기도했으나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질병에 걸렸으며 온 가족이 집에서 집집을 돌면서 구걸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만차산교회에는 마음을 바꾸고 기독교를 믿게 된 이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통적 우상숭배에서 기독교적 예배로의 전환, 예배의 장소, 다양한 예배의 종류 그리고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한국 교회사에서, 그 가운데 1883년에서 1902년까지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글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예배의 순서와 절차는 요즈음에 한국교회가 드리는 예배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예배의 종류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오늘날의 신앙인들보다 더욱 진지하고 겸손하게 예배에 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