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황사영 생가 터 (순례지/성지)
주소: 인천시 강화군 월곶리 대금동
황사영은 그의 선조 10여 대가 판서 벼슬을 지낸 명문가 태생으로 부친 황석범 역시 진사 시험에 합격돼 한림 학사로 있었다. 하지만 황석범은 1774년 병사하고 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나게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 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산데르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활짝 열려 있던 출세길을 마다하고 주 신부를 도와 전교에 전력했으며 그와 함께 동숙하며 전교길에 올랐다.
그 후 10년 후인 1801년, 전국에는 신유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몰아친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이승훈, 정약종 등 조선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순교한다. 황사영 역시 몸을 피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충북 배론에 있는 토굴에 몸을 숨긴다.
조정에서는 그를 서학의 주요 지도자로 간주했고 박해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김 대왕 대비는 특별히 그를 10일 내 시한부로 잡아들이라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조선 교회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를 지켜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리던 황사영은 마침내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가로 38센티미터, 세로 62센티미터의 흰 명주천에 깨알 같은 글씨로 한줄에 1백10여 자씩, 1백21행, 모두 1만 3천3백11자를 써서 교회에 대한 박해와 앞으로의 전교를 위한 근본 대책 등을 적었던 것이다.
이렇게 쓰여진 백서는 같은 해 10월 동지사 편으로 북경 주교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힌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 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헌(黃景憲)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