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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과 수필문학 / 김규련
하동 섬진강 둑엔 유달리 풀꽃이 많았다.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그 풀꽃을 따서 강물에 띄워 보내며 놀곤 했었다. 들찔레 새순을 꺾어 먹던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내 집 이웃에 초등학교 선생 한 분이 있었다. 어린 내 눈에는 그분이 늘 우러러 보였다.
나는 강마을, 쇠락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데다 비범한 재주도 없고 책가방 끈도 길지 않을 것 같아, 소년 적 꿈이래야 고향 초등학교 훈장이 돼서 풀꽃처럼 사는 것이었다.
이것이 나의 초심이었다고 할까. 허나 내 초심은, 기왕이면 고등학교 훈장을 해야지 하는 욕심 앞에 무참히 무너졌다. 나이 들자 일자리를 얻으려고 시험을 쳐서 고등학교 교원 자격을 따냈다. 바람결에 풀씨 날려가듯 나는 뜬금없이 고향을 떠나 경북 땅에 와 뿌리를 내렸다.
6.25전쟁이 일어난 그 해 3월에 군위 중·고등학교 교사 발령을 받았다. 교사 생활도 잠시, 전쟁의 와중에 나는 육군 제2군단 정훈부 문관으로 종군하게 됐다. 선무공작을 위해 진격하는 국군의 뒤를 따라가다 전투에서 전사한 수많은 장병들을 목도했다. 아군, UN 군, 적군 시체가 뒤섞여 있었다. 교복 차림의 학도병과 인민의용군의 소년병들이 처참하게 죽어 있는 시신도 봤다. 그 순간 그들의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소식이 끊긴 내 어머니 생각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사병들 몰래 나무 그늘로 뛰어가 펑펑 울어버린 그날이 어제만 같다.
전쟁이 끝나자 나는 학교로 복귀했다. 유랑극단의 악사처럼 나는 여러 고을을 떠돌며 60년대 초반까지 비틀거리는 훈장 노릇을 했다. 가는 학교마다 당시의 동료 교사들은 퇴근길엔 으레 무리 지어 주막에 들러 말술을 마셔댔다. 전쟁의 상흔 때문이었을까, 상실의 허무감 때문이었을까. 월말에 외상 술값 청산하면 남는 돈이 몇 푼 되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는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외침으로 술을 삼가게 되었다.
70년대 초반에 폐결핵으로 직장에서 물러나 절집에서 요양생활을 했어야만 했다. 그때 괴로운 시간을 죽이려고 무심코 읽은 것이 수필이었다. 수필에 매료돼 수필이라면 무조건 읽어댔다.
가장 감동을 느낀 작품은 김소운의 「외투」와 「특급품」, 윤오영의 「달밤」과 「염소」, 피천득의 「수필」과 「인연」이었다. 이 수필들은 암흑 속에서 방황하는 내 영혼에 한 줄기 빛으로 다가왔다. 흙먼지 바람으로 사막이 돼버린 나의 감성의 영토에 산이 솟아나고 강물이 흐르고 모든 동식물이 죄다 부활해서 생명의 환희를 느끼게 했다.
수필은 시로 쓴 소설이요, 소설로 쓴 철학이요. 언어로 그린 명화요, 뜻으로 부르는 노래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수필은 거짓 없는 자화상이다. 미래 문학의 주류는 수필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가지게 됐다.
건강이 회복돼 교단에 다시 섰다. 나의 일상은 아침에 향을 사르며 기도하고 학교에 가 글 가르치고 집에 돌아와 글짓기 공부하는 일이었다. 한데 직장과 사회생활에서 때때로 내 마음과 말과 몸짓이 서로 어긋나서 따로따로 놀 때가 있었다. 이럴 때 신앙과 글짓기의 염원이 흔들거리는 내 발걸음을 바로잡아줬다고 하리라.
70년대 중반에 영남 수필문학회에 참여해서 김시현, 김진태, 이원성, 장혜옥…과 함께 수필 창작 활동을 했다. 그 후 수필 문학지(발행인 김승우)에 「강마을」을 발표해서 등단하게 됐다.
권위가 법보다 더 힘쓰던 유신시절에는 장학사가 교사의 꽃이었다. 나는 장학사가 되고 싶었다. 애씀과 요행으로 연구사와 교감을 거쳐 나는 드디어 그 꽃으로 변신하게 됐다. 그러나 꽃이 되는 그날부터 공술, 공밥, 공차를 즐기는 버릇이 생겨났다. 이 버릇은 강력한 최음제와도 같았다고 하리라. 악취 풍기는 독초 꽃이 된 그 후로 수필은 나를 버리고 떠나가 버렸다.
70년대 후반에 나는 교장으로 승진됐다. 임지는 상주시 모동면에 있는 중모 중 · 종합고등학교, 그곳으로 가자면 구름도 쉬어 간다는 추풍령을 거쳐 백화산 기슭으로 찾아 올라가야 했다. 첩첩산중의 고원지대에 마을이 있고 학교가 있었다. 일남 삼녀와 아내, 다섯 식구를 대구에 두고 혼자 와 있는 내처지는 완전히 죄를 짓고 쫓겨 온 유배생활이었다.
수필창작을 재가동했다. 감옥의 담벼락 같기만 했던 높은 산과 산이 어느덧 모정의 뜰 안으로 바뀌면서 나를 정겹게 껴안아줬다. 자연의 속살 속에 숨어 있던 무수한 생명들이 나와 끈끈한 교감을 이루게 됐다고 할까. 그 후로 나는 수필을 쓸 때 어떤 소재도 침잠과 완색, 적공과 체득의 관조 과정을 거치게 됐다.
그 무렵 「개구리 소리」, 「행복한 유배」…등 꽤 많은 수필을 캐냈다. 김병규, 송규호, 서정범, 박연구, 원종인… 과 함께 수필집 《한잔 차에 잠긴 세월》을 펴냈다. 곧이어 이호석, 윤오영, 이상, 노천명, 조지훈, 김소운, 피천득, 한흑구, 천경자, 김태길…등 저명 작가들의 작품 틈에 내 졸작이 끼어서 《조그만 가슴으로 큰 행복을》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라는 수필집이 나왔다. 부끄러운 영광이었다.
70년대 말, 나는 영양군 교육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험준한 태백산맥이 남으로 치달을 때 내륙 쪽 한 기슭에 산수 빼어나고 인심 후덕한 고을이 생겨났다. 그 고장이 영양군이다. 타관 사람이 이곳에 와 살며 어쩌다 밤에 술 마시고 실수하면 밝은 달이 유죄요, 소쩍새가 공범이라며 그 허물을 용서하고 묻어주는 곳이었다.
교육장의 큰 소임은 학교장이 소신껏 학교 경영을 하도록 보호하고 도움을 주는 일이라 했던가. 명교육장일수록 학교 방문을 삼간다고 했다. 내게는 좋은 기회였다. 사무실에 틀어박혀 책이나 뒤적이고 잡문이나 끼적거리고, 싫증 나면 관내 여기저기 풍광이나 즐기고.
다행히도 수필 소재가 도처에 깔려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순박하고 다정한 인심 속에, 화전민의 생활 속…
「거룩한 본능」 「화전민의 한 소녀」 등 숱한 작품을 찾아냈다. 「거룩한 본능」은 훗날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됐다. 내 생의 보람이요, 큰 기쁨이었다.
80년대 초, 나는 고령군으로 이동됐다. 대가야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고도가 아닌가. 여기서도 「대가야의 토기」 「고분군을 돌며」…등 적지 않은 작품을 얻을 수 있었다.
81년 10월 9일, 김태길, 차주환, 허세욱, 유경환, 김우종, 김열규, 정진권, 변해명, 정목일, 김규련 …등 20여 명이 모여 <수필문우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김태길을 선임했다. 그 해 11월 25일 충남 동학사 금수장에서 제1회 작품 합평회가 있었다. 이병남의 「그림 속의 아이들과 나의 대가야의 토기」가 도마 위에 올랐다.
2년 뒤 나는 포항 고등학교장으로 돌아왔다. 경북의 일 번지 고등학교, 명문 대학 입학을 위한 격전지, 학부모의 한을 풀기 위한 해한 작업장. 나는 여기서 내 모든 정열을 바쳤다. 한편으로는 빈남수, 이기태, 서상은, 성홍근… 과 함께 형산수필문학회를 세웠다. 영일만의 야경을 바라보고 소주, 생선회를 즐기면서 수필 토론을 했던 그날 밤들이 행복했다.
삼 년 머물다 나는 경북 교원연수원 초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연수원은 구미시 금오산 자락에 있었다. 고려 말의 충신 야은 길재의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길재의 충절에 감복한 이성계는 '금오일구 비아소유글귀를 하란사했다고 한다. 여기서도 수필창작은 계속됐다.
침상사, 측상사, 마상사에서 번갯불처럼 스쳐가는 화두를 붙잡고 참구해 보라는 구양수의 명언이 금오산에서 불쑥 떠올랐다. 나의 화두는 이제 수필의 서두와 결미였다고 할까. 독자의 시선을 단방에 꽉 붙잡고 끝까지 끌고 갈 글머리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용을 그려놓고 마지막으로 용의 눈에 점을 콕 찍어 넣자 용이 생명을 얻어 꿈틀거리듯 수필의 결미도 그렇게 할 수 없을까. 이것이 늘 피를 말렸다. 「감나무에 달린 잎새들」 「바위」…도 그쯤에 나왔다.
구미시장 서상은과 한국문협 구미지부를 설립한 것도 추억으로 남는다. 그동안 나의 수필집 《강마을》과 《종교보다 거룩한》이 출간됐다. 오 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포항여고로 자리를 옮겼다.
예순두 살에 비로소 제대로 된 교장 노릇 해 봤다고 할까. 돌부처같이 앉아 있어도 학교는 잘 돌아갔다. 한 달에 두 번 훈화나 하고 수필창작과 지방신문에 칼럼이나 쓰다 45년간의 교직생활을 마감했다.
멀쩡한 몸에 달라붙은 물혹 같은 교육 위원 잠깐 하다 지금은 대구에서 살고 있다. 《높고 낮은 목소리》, 《소목의 횡설수러》, 《귀로의 사색》… 등 잡문집도 계속 펴냈다.
팔순의 어귀에 이르러 때늦게 초심을 찾아 들풀처럼 살고 있다고 할까. 지나가는 계절 따라 꽃이야 피겠지만 어찌 그윽한 향기까지 기대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