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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겁(狂風劫) 2권 ≪차 례≫ 제12장 살계(殺計)는 다가오고 제13장 죽음의 덫 제14장호반(湖畔)의 살육전(殺戮戰) 제15장 함정 속으로 제16장 여우 굴을 벗어나다 제17장 함정(陷穽) 속에서 피어난 사랑 제18장 처음으로 펼친 검법(劍法) 제19장 괴이한 추격(追擊) 제20장 마지막 한 명 제21장 마인(魔人)의 출현(出171現) 제12장 살계(殺計)는 다가오고 [1] 유청풍과 고혜원은 영파부가 내려다보이는 풀밭에 나란히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고혜원은 미안한 표정으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동안 고생 많았지? 어떻게 지냈지?" 유청풍은 담담한 음성으로 받아 넘겼다. "내 걱정은 하지마. 별일 없으니." 왠지 그에게서는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찬바람이 쌩쌩 휘몰아쳤다. 고혜원은 심각한 괴리감을 느꼈다. '사부를 만난 후 이러는 건.......' 보나마나 그녀의 사부와 유청풍은 납치사건의 배후로 와호장을 의 심할 것이다. 사부야 시간이 지나면 오해를 풀겠지만 유청풍은 달랐 다. 그는 와호장을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고혜원은 내심 한숨을 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젠 출중한 고수 티가 나." "운이 좋았을 뿐이야." 유청풍의 대답은 여전히 투박하여 그녀가 곁에 앉아 있기 거북할 정도였다. 불현듯 그녀는 겨울 벌판을 걷는 소녀 마냥 전신이 오그라 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그녀는 결심을 한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청풍, 한 가지 사과할 게 있어." 유청풍은 입을 다문 채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고혜원은 그의 안색을 살피며 천천히 서두를 꺼냈다. "사실 내가 무공을 가르쳐 준 이유는 청풍이 검혈의 전인인지 확인 할 셈이었어." 사실 그녀는 사부가 무엇 때문에 단궐이나 그의 전인을 만나려고 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단지 정해단과 살루문의 발호가 드세 지자 그것의 타개를 위한 대책이려니 여겼었다. 어쨌든 사부와 유청풍이 만났다면 더 이상 속일 이유가 없었다. 유청풍은 이미 고혜원이 고백한 속셈을 간파한 터였다. '사실은 혈광마검을 노려서지!' 다정히 지냈던 고혜원, 그녀가 굳이 그를 속이면서 관찰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집념을 드러냈다. "앞으로 너와 함께 무림을 바로 잡을 계획이야. 널 관찰한 것도 그 때문이니까 차후 사부님을 만나도 그에 관해서는 내색하지 말아 줘. " 그녀는 이 말의 답변여하에 따라 그가 사부를 만났는지 확인할 수 있는 한편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냉정하게 잘라버렸다. "불필요한 말이 아닐까?" "아니, 반드시 고백할 생각이었어. 우리 사이를 위해서......." 유청풍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우습군. 냉영괴화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그가 어떻게 대하든 고혜원은 흔들리지 않았다. "타인에게 혈광마검을 빼앗길 수는 없잖아." "다른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고혜원은 정색을 하며 그를 응시했다. "우리는 서로 보호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언젠가 네 곁에 있 고 싶어." 유청풍은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점점 이상한 말을 하는군." 고혜원은 화를 억지로 눌러 참았다. "정해단을 비롯하여 비등원과 홍오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 나는 네가 도와주면 좋겠어." 유청풍은 냉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명심해. 널 안아 줄 형편도 못 된다는 사실을......." 그의 이러한 모독은 그녀의 한 가닥 남은 자존심을 여지없이 뭉개 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눈을 부릅떴다. "자꾸 내게 이럴 거야?" 유청풍의 눈에서 시퍼런 섬광이 이글거렸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을 잊었나?" 고혜원은 난생 처음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아, 기어코.......’ 유청풍의 성격과 능력을 미루어 볼 때 장차 커다란 격돌이 야기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밤이슬을 머금은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사방으로 흩날렸 다. 비록 서로의 육신은 일 척 거리에 있으나 마음은 저 하늘의 별처 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른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가의 잘못을... 용서할 수 없겠니? 어떤 대가도... 내가 대신 받을께. 우리라도... 악연을 막도록 노력하자. 응?" 그녀는 우리라는 말에 유달리 힘을 주었다. 여자의 자존심과 사부의 안위, 그리고 혈광마검 뿐만 아니라 그 어 느 것보다도 그의 복수심을 막는 일이 더 시급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유청풍과 막강한 힘을 지닌 그녀의 가문인 와호장 이 혈투를 벌일 경우 어느 한쪽은 분명히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청풍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앞으로 내 주변을 맴돌지 마라." 어둠 속 저 멀리서 그의 차디찬 음성이 마지막 경고처럼 들려왔다. 고혜원은 벌떡 일어나 앙칼지게 소리쳤다. "자식아! 일을 크게 벌이겠다는 거야?"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한동안 어둠 속을 노려보던 그녀는 불끈 주먹을 움켜쥐며 내심 각 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혈전을 막는 방법은 단 한 가지야! 혈광마검을 내가 소유하는 것 뿐......!’ [2] "휴우! 오늘 밤 이곳만 넘으면 집이로구나." 비급을 얻은 기쁨을 안고 고일두는 쉬지 않고 달렸다. 대륙의 남단인 절강성 영파부에서 북쪽에 있는 하남성 개봉까지 웬 만한 사람들의 경우 아무리 빠른 말을 이용하여 달린다 해도 달포는 족히 걸릴 거리를 그는 그 절반으로 압축했다. 그로 인해 심신이 피곤한 그였다. 어느새 그는 막연산 기슭에 다다랐다. 뿌연 구름이 안개처럼 펼쳐진 구불구불한 산길은 시야도 흐리고 폭 도 매우 좁았다. 그때 앞에서 두 남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흐릿한 달빛 아래 남자는 앞장서고, 여자는 그 뒤를 따라왔다. 길 양쪽이 울창한 숲과 칼날 같은 바위로 둘러쳐져 있어서 어느 한 쪽이 멈춰서 기다렸다가 지나가야만 될 형편이었다. 그러나 양편 모두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는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마주 오다가 결국 일 장여 거리에서 동시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비켜라!" 고일두는 앞에서 버티고 서 있는 장한에게 다짜고짜 소리쳤다. 땀을 흘리며 달려오던 그는 공연히 괘씸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순간 장한은 대번에 욕을 퍼부었다. "건방진 놈! 너야말로 물러서라!" 안하무인으로 자라난 고일두는 이러한 욕을 먹고 자제할 사람이 아 니었다. 더구나 그는 금황옥진비결을 소지하여 다소 들뜬 상태였다. "이 자식!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쐐애액! 일갈과 함께 그는 장력을 날렸다. 아마 적중 된다면 상대는 필경 오장육부가 터져 십여 장쯤 날아갈 것이다. 하나 그의 예상은 무참히 깨져버렸다. 장한은 뻣뻣한 자세로 수중의 시커먼 밧줄을 휘두르며 괴소를 날렸 다. "킥킥! 흑명승(黑冥繩)도 모르는 녀석이 큰소리를 치긴?" 밧줄이 윙! 소리를 내며 회전하자 고일두가 펼친 장력은 봄눈 녹듯 이 사라졌다. 한편 고일두는 그만 몸이 얼어붙는 듯한 심정이었다. '제길! 저 자가 말로만 듣던 야혼승(夜魂繩) 노방(盧龐)이란 말인 가?' 이십대 중반의 장한, 야혼승 노방은 새카만 밧줄로 자신의 몸을 칭 칭 휘감은 채 가늘게 째진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동공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눈에서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 오싹한 안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이십여 세 가량 된 황색 경장의 여인이 시종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두 갈래로 딴 머리칼을 가슴 앞으로 늘어트렸는데 오똑한 콧날과 붉은 입술, 커다란 눈이 몹 시 인상적이었다. 고일두는 아름다운 여인의 정체 역시 쉽게 알아챘다. '그렇다면 저 여인은 엄희채(嚴稀綵).......' 그는 마음을 굳혔다. 비교적 만만해 보이는 엄희채를 공격하면서 허공으로 통과할 생각이었다. 그가 막 신형을 솟구치려할 때 엄희채의 경고가 밤 공기를 찢었다. "흥! 발만 떨어져봐라! 비사귀환(飛蛇鬼環)으로 네 목을 잘라 주마 ." 그녀가 양쪽 소매를 걷어올린 순간 수십 개의 금환(金環)이 으스스 한 한기를 뿌렸다. 오싹한 금환의 빛과 시커먼 흑명승이 어울려 주위 는 몸서리칠 듯한 분위기로 변했다. 이들 노방과 엄희채는 평소 다른 일을 하다가 누군가를 죽일 때만 서로 만나는 특이한 동문 사이였다. 그것도 반드시 밤에만 함께 다니는 귀신보다 무서운 단짝이었다. 세인들은 밤에만 활동하는 이들을 음양야혼귀(陰陽夜魂鬼)라 불렀다. 이들은 연수합공(聯手合攻)을 펼칠 때 실력이 배가(倍加)되는 괴력 을 발휘했다. 그것은 이들이 사용하는 무기가 상호 보완해주기 때문 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색절 모염정이 이들과 일주야(一晝夜)를 싸웠 지만 끝내 결판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일두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재수 없군. 오절에 버금가는 귀신들을 만나다니.......’ 노방의 괴상한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깨트렸다. "킥! 앞서 달려온 보람이 있구나. 반드시 네 살점을 가져가마." 고일두는 가슴이 철렁했다. '불길한데... 이들이 날 기다렸을 줄이야!' 쐐애애액! 벌써 시커먼 밧줄 흑명승은 세 가닥으로 나눠져 요혈을 파고들었다 . 고일두는 재빨리 신형을 솟구치며 장검을 빼들었다. "얏!" 그는 자신의 몸에 흑명승이 닿을 찰나 검으로 세 번 쳐냈다. 하지만 흑명승은 생명체인 양 고일두를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암암 괴사(暗暗怪砂)라는 청해산(靑海産) 흑철광(黑鐵鑛)으로 만든 흑명승 은 명주실처럼 부드러우나 진기가 통하면 쇠도 자르는 기이한 병기였 다. 고일두는 재차 검을 빙그르르 돌려 흑명승의 방향을 바꾸어 놓으면 서 신형을 수평으로 유지했다. 바로 와호장의 절기인 백호천상(白虎天翔)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흑명승을 피한 고일두는 한 소리 터트렸다. "절기를 익혔다는 작자가 고작 살수를 한단 말이냐?" "흐흐! 조화산장에서 도망치듯 빠져 나온 이유나 말해라." 고일두는 속이 뜨끔했다. '혹시 금황옥진비결을 탈취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는 이를 악물고 재차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러나 대결 중의 잡념은 허점인 동시에 곧 패배와 직결되는 법이 다. 이미 엄희채가 던진 금환은 머리 위에서 싸늘한 파공음을 발산했 다. "흥, 비사금환을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휘리리리릭! 하늘을 가득 메운 찬란한 금환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고일두는 혼비백산하여 재빨리 신형을 뒤집었다. 바로 그 순간 금환 하나가 그의 좌측 어깨 부위를 뭉턱 잘라버렸다 . 서걱! 하는 섬뜩한 음향과 함께 그는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삽시간에 그의 상체는 붉은 피로 얼룩졌다. '크으... 무서운 금환천화(金環天花)구나!’ 그는 부지불식간 뻗어 나온 고목의 가지를 밟고 재차 도약했다. 눈을 부릅뜬 엄희채는 집요하게 그를 물고 늘어졌다. "받아라!" 그녀가 팔을 휘저을 때마다 금환들은 마치 강철 톱인 양 나뭇가지 와 바위를 절단한 후 유성처럼 덮쳐왔다. 고일두는 연신 몸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장검으로 부지런히 쳐냈다. "이야앗!" 요란한 충돌음과 함께 십여 개의 금환은 방향을 바꾸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고일두가 날아갈 공간이 형성되었다. '됐어!' 그는 두 번 바위와 나무를 박차며 엄희채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찰나 괴이한 음성과 동시에 뱀 마냥 꿈틀대는 시커먼 밧줄이 밑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키익! 기다렸다." 흑명승이 요동치는 공간, 바로 그 밑이 고일두가 낙하할 지점이었 다. '제길! 자칫 여기서 죽겠는걸!’ 그는 검 끝을 아래로 향한 후 재빨리 몸을 둥글게 만들어 공중돌기 를 시도했다. "비호번선(飛虎飜旋)!" 일순 또 한 가닥의 밧줄이 고일두의 허리 어림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욱!" 아마 두어 줌은 족히 될 살덩어리가 피보라와 함께 허공을 날았다. 피를 뒤집어쓴 고일두는 바위처럼 땅에 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머뭇거릴 새가 없었다. 등 뒤에서 엄희채의 음성이 섬뜩하 게 들려왔다. "관절 부위!" 한순간 번쩍이는 비사금환이 사방에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싸늘한 비사금환 뿐만 아니라 시커먼 흑명승마저 빠르게 다가왔다. 위기를 느낀 고일두는 이를 악물었다. "오냐! 최소한 한 명은 나하고 죽자." 바로 그때였다. "도련님!" 수십 명의 무사들이 허공을 날음과 동시에 총관 갈곤태를 비롯하여 쌍곰보 형제 팽고 팽소가 나타났다. 그들 뒤에는 산길을 까맣게 메운 그림자들이 길게 어른거렸다. 고일두는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노방과 엄희채는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그대로 살 수를 펼쳤다. 어느새 밧줄과 금환에 휩싸인 고일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갈곤태가 놀라서 황급히 소리쳤다. "어서 도련님을 보호하라!" 이미 허공을 날아가던 무사들은 번개같이 흑명승과 비사귀환을 쳐 냈다. 일순 장원의 무사들과 비사귀환, 그리고 흑명승은 한 뭉치가 되었다. 고일두는 그 틈을 타서 재빨리 땅바닥으로 화라락 굴렀다. 동시에 십여 명이 처절한 비명을 터트렸다. "끄아악......!" 고일두를 구한 정예무사들은 모두 목이 잘린 채 나뭇가지와 바위 위에 시뻘겋게 널려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처참한 광경이었 다. 곧바로 노방의 살을 에는 듯한 음성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다음엔 닷 근만 가지고는 안 될걸? 키익......." 이미 음양야혼귀는 사라지고 서늘한 여운만이 귓전을 때렸다. 고일두는 벌떡 일어나 이를 부드득 갈았다. '으드득.... 연놈들! 다시 만나면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갈곤태를 노려보았다. "웬 일이냐?" 갈곤태는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휴우, 다행입니다. 장주님 지시를 받아 마중 나왔습니다." 그는 수하들의 시신을 아예 외면했다. 쌍곰보 형제 팽고 팽소는 지혈제와 천을 꺼내서 고일두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응급처치 후 고일두는 냉정한 시선으로 수하들의 시체를 바라보았 다. '무사는 주인을 위해서 죽는 거야.’ 눈치 빠른 갈곤태가 얼른 갈 길을 재촉했다. "도련님, 가시지요." 칠흑 같은 밤, 십여 구의 고혼(孤魂)을 버려 둔 채 와호장을 향한 긴 행렬이 신속히 막연산을 넘어갔다. [3] "유청풍이란 청년이 신진고수로 등장한 셈이구려?" 홍오간은 조화산장에서 벌어졌던 얘기를 들은 후 시치미를 뚝 떼고 위강 등을 바라보았다. 위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만한 청년은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오." 홍오간은 슬쩍 말을 바꾸며 묘한 어투로 질문했다. "화절이 살아있으니 당분간 지켜봅시다. 한데 위형은 사적으로 비 등원주를 돕다 보면 바빠질 게 아니겠소?" 마치 오절의 체통이 손상된 듯한 말에 위강은 대꾸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색절 모염정도 타박하는 투로 은근히 불을 질렀다. "워낙 의리가 많아서 탈이죠. 설마 오절의 신의를 저해하겠어요?" 유청풍과 관련하여 기분이 상했던 혁련달도 덩달아 염장을 질러댔 다. "위형도 빨리 툭툭 털고 사시오. 나처럼 심간 편하게......." 산전수전 다 겪은 위강이 돌아가는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마침 내 그는 참다못해 한 마디 터트렸다. "아부가 아니고 약속을 지킬 뿐이오! 늙어 죽기 전에 갚으려 하오. " 혁련달 등은 그의 확실한 처신을 아는 터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 다. 선실 안은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때 홍오간은 나름대로 계산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색절이야 아랫도리만 달궈주면 착 달라붙을 테고, 도절은 의리에 약하거든. 문제는 저 흉물 덩어리 공절인데... 도무지 오락가락 중심 이 없어.’ 그는 내심과 달리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으음, 화절을 보호하지 못해 면목이 없소이다." 실상 그는 화절 서하경과 헤어졌어도 한 줄기 미련이 남아있었다. 그러자 혁련달이 위로하듯 말했다. "그게 어디 홍형 탓이오? 화절의 유명세 때문이지."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모염정이 은연중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만약 화절이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가 도와주죠." 혁련달은 평소 습관처럼 위강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아암, 오절의 체면 문제요. 안 그렇소? 위형?" "맞소, 고고한 삶을 살아 화절이란 칭호를 듣건만......." 순간 모염정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고고해? 그럼 난 몸을 막 굴리나? 요 늙은이가......?’ 실상 그녀가 서하경을 증오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나이, 미모, 무공 등 무엇 하나 자신이 서하경에게 뒤질 것이 없었 다. 그런데 사람들은 툭하면 서하경만을 칭송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의 입에서 독설이 튀어 나왔다. "아마 개봉 사람들에게 굽실대서 화를 자초했는지도 모르죠." 개봉은 비등원과 와호장이 있는 곳이었다. 서하경이 와호장의 고혜원을 제자로 받아들였던 것을 빗댄 말이자 위강이 비등원주와 맺은 약속을 비꼬는 말도 되었다. 우직한 위강은 단번에 되받아쳤다. "당금무림에서 개봉과 연(緣)을 맺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이 연이란 모염정이 등인탁과 가까이 지내는 행위를 지적한 말이었 다. 순간 혁련달은 속이 뜨끔했다. '가만, 내가 고일두를 가르친 게 못 마땅하다 이건가?’ 동시에 혁련달은 반박하려고 입술을 씰룩댔으며 모염정의 눈 꼬리 는 위로 좍 째졌다. 갑자기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말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홍오간은 내심 조바심이 났다. '제길, 잘 되어 가는가 싶더니만... 왜들 그래?’ 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자자, 모두 이 홍모(洪某)를 돕자는 게 아니겠소? 세 분 다 의(義 )가 넘쳐서 탈이구려." 위강이 마침내 울분을 토하듯 입을 열었다. "아마 홍형은 알 거요. 정해단에 의해 처자식마저 죽고 나도 사경 을 헤맬 때 비등원주가 도와준 것 말이요. 당시 난 그 빚을 갚기 위 해 두 가지 약속을 했오. 한데 한 가지를 남겨놓고 식언하란 말이오? " 그는 얼굴이 뻘개진 채 식탁 위에 놓인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홍오간은 얼른 그의 팔을 붙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형은 그 약속을 당연히 지켜야 하오. 우리 오절이 독특한 개성 을 지녔기에 존경을 받는 것 아니겠소? 상대방 특성을 존중합시다." 그가 이쪽 저쪽 다 좋게 말하자 모두 수그러들고 말았다. 혁련달이 머쓱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우리도 당할지 모르는 일이요. 대책을 마련합시다." 최초 그 말을 꺼냈던 모염정이 결론을 유도했다. "다른 분들은 그렇고 한즉, 아무래도 이 배에서 이따금 회합(會合) 을 가지는 게 어때요?" "찬성이오." 어언 홍오간이 오절의 중심인물로 부상하는 분위기가 된 셈이었다. 그는 두 손을 정중히 맞잡고 답례형식을 취했다. "저야 뭐, 여러분들이 원하신다면 하시라도 개방하지요." 그는 시종 침묵을 지키는 위강에게 별도로 물었다. "위형께서는......?" 위강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그는 내심 한 청년을 생각하며 구령은배도를 고쳐 멨다. '유청풍이라고 했던가? 또 만날 수 있을지......?’ 곧바로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가겠소이다." 혁낭을 들춰 멘 혁련달도 뒤따라 일어나 인사를 했다. "와호장에 들렸다가 일간 한번 오리다." 그는 살기 어린 안광을 발하며 선실을 빠져나갔다. '청풍... 이놈!’ 그때 홍오간은 모염정의 표정을 살폈다. "색절께서는 어찌 하시겠소?" "전 사천(四川)엘 가야하는데 날이 어두워서......." 홍오간은 그녀가 사천 갈 일이 없음을 알고도 태연히 대꾸했다. "아, 그렇다면 본선에서 일박하구려." 위강과 혁련달은 차라리 잘 됐다 싶어 재빨리 배 밖으로 뛰어내렸 다. 홍오간은 그들의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멀리 못 나가오." 선실은 넓고 화려했다. 모염정은 홍오간의 품에 안겨 뜨거운 숨을 뿜어냈다. "으응, 이제 청풍을 어쩔 셈인가요?" "감탄할 만한 친구요. 그를 이용해 비등원과 와호장이 움직이도록 해야하오." "결국 무림이 들썩대겠군요." 잠시 뜸을 들이던 홍오간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물론. 다음엔... 아마 살루문으로 갈 거요." 살루문은 채권채무대행업으로 무림을 잠식하는 비밀스런 단체였다. 현재 드러난 부분은 오직 탈명색혼대라는 살인조 뿐이었다. 모염정은 활짝 미소 지었다. "호호... 철저히 교육시키는군요." 홍오간은 그런 모습을 보고 의심을 품었다. '요것이 그 녀석과 은밀히 궁합(宮合)을 맞추려는 게 아닌지...... ?’ 그는 홧김에 여체의 구석구석을 무지막지하게 쓰다듬었다. 한껏 다 리를 벌린 모염정은 그의 속을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 "흐응... 화, 화절에 대한 것은... 궁금하지 않아요?" 보드라운 교수가 다급히 그의 허리띠를 풀어버렸다. 하의가 흘러 내려도 홍오간은 천천히 계획을 설명했다. "청풍을 혹사시키면 서하경은 답답해서 나타날 게요." 예순을 넘긴 나이답지 않게 그는 우람한 하물을 턱 하니 노출시켰 다. 그가 모염정의 치마를 활짝 걷어올린 순간 매끈한 여체가 모조리 드러났다. 그녀는 축축한 지체를 우뚝 솟은 돌출부에 교묘히 비벼댔 다. '호호, 넌 강호들과 실컷 싸워라. 난 공력을 빼앗아 장차 무림의 여왕으로 등극하마!’ 갑자기 홍오간은 그녀의 등이 보이도록 돌려놓았다. 이어 그는 그녀의 어깨를 누르더니 뒤에서 힘껏 디밀었다. 상체가 휜 그녀는 둔부를 치켜들며 숨막히는 신음을 토해냈다. "하악!" 짙은 어둠 속, 강물 따라 가는 배와 두 사람이 함께 출렁거렸다. [4] '하루아침에 단주가 바뀔 줄이야.’ 유청풍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등불이 환한 남창(南昌) 성내로 들 어가고 있었다. 새로 온 단주가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그 새 천락무예단은 두 가지 변화를 겪었다. 하나는 운영권을 소유한 단주가 갑자기 바뀐 것이었다. 천락무예단의 수입이 짭짤한 편이지만 관원(官員)을 비롯하여 워낙 뜯어가는 자도 많을 뿐더러 운영권을 노리는 자들도 상당수여서 오 래 버틴 단주가 별로 없었다. 다른 예술단들도 실정은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는 천락무예단이 장소를 강서(江西) 남창으로 옮긴 것이었 다. 원래 무예단은 주기적으로 이동하므로 굳이 변화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어쨌든 공연장소가 영파부에서 남창부로 바뀌었다. 똑같은 부(府)라도 남창은 강서의 성도(省都)이며 동쪽에 장강을 낀 파양호( 陽湖)가 있어 요즈음 같이 초하(初夏)의 유월이면 사람 들로 더욱 붐볐다. 이렇게 천락무예단은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철새 마냥 옮겨 다녔다 . 천락무예단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유청풍은 지형을 익히는 한편 무림 동향을 세밀히 파악해 놓았다. 이 년 전, 유청풍은 다른 단원과 함께 이곳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 다. 그는 지리에 익숙한 터라 주루가 즐비한 외곽의 화류가(花柳街) 를 따라 걷다가 파양객잔( 陽客棧)으로 들어갔다. 그 커다란 객잔은 이층까지 음식점이고 삼층부터 오층까지 숙객(宿 客)을 받았다. 새로운 단주는 성정이 독특한 듯 바로 이 객잔에서 혼 자 기숙(寄宿)한다는 것이다. 유청풍은 오층 끝 방에서 새로운 단주와 마주 앉았다. 놀랍게도 단주는 비사귀환 엄희채였다. 무림을 모르는 단원들은 그녀가 음양야혼귀의 일원인 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깔끔한 독신이어서 객잔에 머문다고 여길 뿐이었다. 엄희채는 안색을 굳힌 채 유청풍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얼마나 바빠서 상견례(相見禮)에 불참했지?" 유청풍이 조화산장에서 돌아 온 시각은 훤히 동틀 무렵이었다. 공교롭게 그 전날 밤 엄희채가 새 단주로 취임했는데 유청풍만 자 리를 비웠던 것이다. 곧 그가 임의로 위치를 이탈한 데 대한 문책성 질문이 분명했다. 이 바닥의 생리를 터득한 유청풍도 쉽게 기죽지 않았다. "단주는 개인적인 일도 없나?" 엄희채는 예리한 안광을 쏘아 보냈다. "흥, 그래서 요극초를 죽였군?" 유청풍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부언할 필요 없이 그녀는 전후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고요한 실내와는 달리 창 밖은 유람객들과 호객꾼이 여자를 흥정하 며 혼잡을 이루었다. 유청풍은 비밀리에 움직인 사실이 드러나자 부담을 느꼈다. '단주가 그곳에 있었다니... 암행(暗行)이 들통나 다음 계획에 차 질을 빚겠는데.......’ 그때 엄희채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펼쳐들고 내용을 읽고 있었 다. 유청풍은 그녀의 그러한 행동이 자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 으로 짐작했다. 이윽고 엄희채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넌 이미 다 알려졌어. 자살행위를 삼가 해." 그녀의 말투를 듣건데 혁련달과 겨룬 사실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 유청풍은 서하경의 신변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절이 탈출한 것도 알고 있을까?’ 화절 서하경에 관한 사항은 그가 뇌운진기를 보유한 것만큼이나 무 림에 끼치는 파장이 커서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은연중 함구를 당부하려고 단호히 말했다. "내 생사는 염려하지 마." 냉정한 안색을 접한 엄희채의 커다란 눈이 번쩍거렸다. "자신만 생각하는 거야? 그럼 본단(本團)의 안전은......?" 유청풍도 안광을 빛내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전을 중시하는 사람이 조화산장에 갔단 말인가?" 일순 엄희채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본단주가 하는 일을 알려고 들지마. 용납하지 않겠어!" 그녀는 요극초를 처치할 계획이었음을 암시하면서도 단주로서 권위 를 잃지 않았다. 비로소 전후사정을 알게 된 유청풍은 다시 그녀의 의중을 살폈다. "나보다 더 위험할 텐데? 단주가 살귀(殺鬼)라서......." 하지만 두 살 연상의 단주 엄희채는 결코 만만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주인임을 명백히 선을 그었다. "설마 개구도(開口跳)라 하여 위계질서를 망각한 것은 아니겠지?" "역할에 연연하지 않아. 그저 좋아서 했을 뿐......." 개구도란 무각의 별칭으로 무예를 춤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맡을 정도로 예술적인 난이도가 높은 배역이었다. 유청풍은 화절 서하경의 절기를 검기무에 응용하여 지금까지 그 역 (役)을 수월히 소화해왔다. 엄희채는 그를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잔여 기간이 이 년 남았군." 찰나 그녀의 손에 있던 서류는 연기로 변해 창 밖으로 날아갔다. 유청풍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왜 계약서(契約書)를 소각하는 거지?" 엄희채가 태워버린 종이는 유청풍이 전(前) 단주와 맺은 계약서였 다. 당시 오 년 기한으로 계약했는데 어느덧 삼 년이 흘러간 것이었 다. 약서가 작성되면 단주는 단원들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쥐 었다. 만약 단원 가운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 있을 경우 원개에 게 가차없이 넘겨버렸다. 또한 단주끼리는 묵시적(默視的)인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설사 계약 종료 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도 단원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 다. 그래서 한번 몸담았던 곳이 단원들의 무덤이며 그러기를 바라는 것 이 그들의 서글픈 일생이었다. 따라서 이 바닥의 절대자(絶對者)인 단주가 계약서를 파기함은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예우였다. 엄희채는 표정을 굳히며 딱 잘라 말했다. "네가 이런 요식행위(要式行爲)를 의식하겠어? 알아서 처신해." 요점만 말하는 태도에서 보듯 그녀는 남자보다 더 호방한 성격이었 다. 유청풍은 그녀의 대범함에 놀라고 말았다. '비사귀환 엄희채, 과연 여걸이군! 빚을 갚겠다 이건가?’ 이 년 전, 바로 이맘 때쯤이었다. 그날도 유청풍은 평소와 같이 몰래 투검 연습을 하려고 밖으로 나 갔다. 무예단 창고 앞을 막 돌아 가던 순간 그는 어둠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기절해 있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양팔에 금환을 찬 스무 살 가량의 여인은 의식을 못 차릴 정도로 심한 내상을 입고 있었다. 유청풍은 그녀를 창고 안에 누인 후 약을 지어다 치료해 주었다. 그날 밤 몸을 회복한 여인은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녀가 지금 앞에 마주 앉은 비사귀환 엄희채였다. 유청풍은 그때 이미 구면인지라 그녀와 말을 놓고 지내는 터였다. 그는 심각한 눈초리로 그녀를 응시했다. '앞날이 평탄치 않겠는걸.’ 살인의 귀재인 그녀가 단주로 취임한 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신중히 고려할 단계였다. 유청풍 자신도 오절에 버금가는 인물 을 아직도 네 명이나 더 손봐야 할 입장 아닌가? 또한 자신과 단주의 활동 결과가 천락무예단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면 백여 명이 전멸(全滅)하는 엄청난 참상으로 번질 것이다. 엄희채는 엄중히 경고를 내렸다. "본단이 공연한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유념하되 차후 임의로 자리 를 이탈하면 결코 가족(家族)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유청풍의 이름이 무림에 알려진 현재 만약 불의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조용히 떠나라는 암시였다. 결국 그녀는 유청풍을 죄고 있던 사슬을 풀어 줌으로써 구은(舊恩) 을 갚은 셈이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