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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장 복수(復讐) 표문객잔의 점소이 오삼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염병할, 자고로 년놈들은 다 똑같다니까! 들어올 때는 요조숙녀요, 천하의 협사지만 일단 방에 들면 저 난리를 쳐요!" 학학거리는 소리, 나 죽어 하는 소리, 곧이어 침상이 부서질 듯 요동치는 소리가 울린다. "아이고, 죽갔구만!" 오삼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십 년 점소이 생활에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보았다. 싸늘한 얼음 꽃처럼 성결하던 여인, 그 여인이 지금 사내놈의 밑에 깔려 저리 죽겠다며 몸부림을 치면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염병할, 생긴 건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힘은 항우장사인 모양이네. 어떡하면 여자를 저렇게 미치도록 만들 수 있는 거야?" 오삼은 자신의 작고 초라한 연장이 연상되어 휴 한숨을 쉬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화창하던 날씨가 어느새 급변하고 있었다. 우르르릉! 천둥이 친다. 꽈가가강! 벼락이 친다. 후드득 빗줄기가 무섭게 들이치기 시작하자 오삼은 창문의 발을 내렸다. 그런 오삼이 흠칫 하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분명히 발을 내릴 때는 없었거늘, 세 노인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이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징그러운 추물들이었다. '늙어도 정말 추하게 늙었군!' 오삼은 얼른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어서 오십쇼!" 노인 중에서 그래도 조금 나은 편으로 늙은 노인이 오삼의 손에 황금덩이를 올려 주었다. 족히 백 냥은 될 황금이다. 오삼의 입이 쫙 벌어지는 것을 보며 노인이 물었다. "저기 저 방에서 난리를 치는 남녀는 한 방에 들었나?" 오삼은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닙니다. 어차피 저 지랄을 떨 것들이 무슨 이유인지 방은 두 개를 얻었습니다. 아마 은밀한 관계인 모양이죠. 남자가 유부남이던가, 여자가 유부녀던가!" "호오 그래? 그럼 지금 난리를 치고 있는 방은 사내 방인가? 여자 방인가?" "아니 노인장들은 아직도 그런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보아하니 부실해서 쓰기도 힘들 것 같은데!" "크크크! 자네도 늙어 봐! 대리만족도 그런대로 괜찮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그건 그렇고, 사내 방은 어딘가?" 오삼은 별다른 의심 없이 단궁비가 얻은 방을 알려 주었다. "고마우이! 잠시 자네의 얼굴 좀 빌릴 수 있겠나?" "예? 얼굴을 빌린다고요?"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군! 얼굴을 빌린단 말은…!" 스스슥! 노인의 징그럽던 주름이 인두로 누른 듯 쫙 펴졌다. 연후 그 얼굴이 슬슬 변하는데! "헉! 그건 내 얼굴인데…!" 분명 그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 떠오른 살기는 오삼으로서는 평생 떠올릴 수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장장 다섯 번! 떨어지지 않겠다고 앙탈하는 추냉아에게 잡혀 양기가 바닥나도록 힘을 쓴 후 단궁비는 둑 터진 물처럼 쏟아지는 쌍코피를 닦으며 추냉아의 방을 빠져 나왔다. 아무리 젊은 삭신이지만 사지가 휘청거리는 게 아무래도 과하지 않았나 싶다. 피곤한 몸을 뉘려 자신의 방으로 향하던 단궁비는 오삼이 급히 다가오는 걸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곁을 스치는 순간, "끌끌끌! 자네를 처음 봤을 때 아내로 인해 세 번 죽을 고비를 넘긴다고 했지?" 소름이 오싹 끼쳤다. 단궁비가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 오삼으로 분한 녹사삼검이 바짝 다가섰다. "크크! 못다 푼 회포는 유부에서 실컷 즐기게!" 번쩍 눈 앞에서 녹색 기광이 튀었다. 무기가 아니다. 그의 몸이다. 그의 몸에서 짙은 녹색빛을 띤 강기가 백렬하듯 퍼지며 단궁비를 강타한 것이다. "크윽!" 단궁비가 붕 떠서 뒤를 향해 날았다. 일격에 오장육부가 뒤엉키는 듯한 고통이 파생되었다. 입과 가슴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는 그! 녹사삼검은 촌각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십팔장 십팔각을 우박처럼 퍼부었다. 그런데 그 순간 단궁비의 몸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그리고 허공을 짚어 가는 그의 신묘한 몸놀림! 구전백환신공이 펼쳐진 것이다. 연기처럼 자신의 공격권을 빠져나간 단궁비를 본 녹사삼검이 경악성을 토했다. "이건… 야마신의 무공…!" 단궁비가 흐릿하게 웃었다. "늙은이, 당신 실수한 거야. 최소한 나 단궁비가 누구의 제자인 줄 알고 기습을 했어야지!" 단궁비가 몸을 날렸다. 지면에 닿을 듯이 낮게 깔려 접근한 후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가각! 수도(手刀)가 인간의 몸을 베었거늘 마치 잘 벼린 검이 몸을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이 떨어졌을 때 녹사삼검의 가슴은 세 치 깊이로 깊게 베어져 있었다. "크으윽! 실수다. 허나…!" 녹사삼검이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에 위치한 백회혈과 뇌호혈을 눌렀다. "크크크! 녹사삼검은 세 쌍둥이다. 원신령(元身靈)에 의해 네놈이 오마신의 후예인 것이 네 형님들에게 알려질 터, 네놈도 끝장이다." 파악, 녹사삼검의 머리가 폭약처럼 폭발했다. 단궁비는 자신의 처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특이한 기(氣)가 있다. 지금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기운은 극히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극에 달한 고초를 극복한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잔혹한 기운이다. '녹사검! 그들이다.' 스스슥! 단궁비의 몸이 귀영처럼 공간을 이동했다. 그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얇은 격자문 하나! 그 사이에 생사가 교차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방 안에서 흘러나오던 기가 스르르 소멸되었다. '어떻게?' 자객의 무공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은신술이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가해지는 기습이다. 그러나 그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 사물과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단궁비를 노리고 있는 녹사이검은 그런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단궁비는 이목을 적의 행동에 집중했다. 그러나 적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울러 강한 강기막으로 차단했는지 전혀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위험하다. 상대는 내 일거수 일투족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까지도.' 방 안, 그 안에는 녹색 운무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두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데 그들의 몸에서 짙은 녹색의 운무가 뭉클뭉클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두 노인의 자세다. 녹사이검이 녹사일검의 등 뒤 명문혈에 장심을 밀착시키고 있었다. 합체대전력(合體大全力)! 녹사삼검으로부터 단궁비가 오마신의 제자라는 원신령을 받은 그들은 단 한 번에 승패를 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뭉클거리며 솟구치던 녹색 운무가 한 순간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의 형상이었다. 녹사검(綠邪劍)! 그들에게 그런 명호를 붙여 준 검, 그것은 쇠붙이가 아니라 진기가 결집되어 검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물체였다. 검은 아니나, 간장 막사보다 몇 배 더 뛰어난 검인 것이다. 한순간 녹사일검이 번쩍 눈을 떴다. '모든 조건은 완비되었다. 단궁비, 이제 누군가 너의 이목을 흐트리면 끝장이다.' 그렇다. 하다못해 바람에 날리는 풀잎 하나라도 단궁비의 신경을 건드린다면 그는 끝장인 것이다. 단궁비는 소름이 돋았다. 강호 출도 후 두 번째 위기다. '노출되었다. 움직이면 죽는다.' 단궁비는 빠르게 자신의 상황을 판단했다. 상대는 강점으로 그를 노리고 있고, 그는 단점으로 적의 강점에 대항하고 있다. '좋아! 해보는 거다.' 그는 순식간에 발산하는 모든 기를 제어했다. 호흡을 멈춘 것은 물론,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박동조차 차단해 버렸다. 순식간에 그는 죽은 사람처럼 완벽하게 모든 것을 숨겼다. 보이지 않는 상대와의 대결, 그러나 사실은 상대를 보고 하는 진검승부보다 더 긴박한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만일 이 상황에서 누군가 단궁비의 호흡을 깨뜨린다면 그는 단숨에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다. 그것은 녹사이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녹사이검은 방 안에 있고 단궁비는 객잔의 복도에 있다는 점이다. 지형상으로는 녹사이검이 절대 유리했다. 그리고 그의 예측대로 두 사람의 대결에 있어 결정적인 상황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추냉아에게서 시작되었다. "인간이 아냐! 괴물이야.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어!" 전신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옷을 입는 간단한 동작도 힘들 지경이다. "남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픈 걸 하고 싶어서 난리를 치는지!" 자신이 유혹해 놓고 발뺌을 하는 그녀의 뻔뻔스러움! 그게 여자다. 추냉아는 흡족하게 웃었다. "기분은 좋았어. 몸 안의 찌꺼기들이 활활 타 버린 것 같아!" 그녀는 옷을 입었다. 그리고 동경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가다듬었다. 자신 스스로도 도취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에게 가서 맛난 음식을 시켜 먹는 거야. 그리고… 호호호!" 추냉아는 거울을 보며 요염하게 웃었다. 사내를 알아 버린 여인의 자태는 그 자체가 유혹이다. 더욱이 쌀쌀하기 이를 데 없던 그녀가 웃자 만개의 꽃이 활짝 피어오르는 것 같다. "가을은 밤이 너무 짧은 것 같아." 맙소사. 아무래도 다시 그 일을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스르륵! 추냉아는 문을 열고 단궁비의 처소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움직임은 녹사이검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단궁비, 넌 끝장이다.' 추냉아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녀는 화사하게 차려입은 옷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단궁비 앞에서 빙글 돌며 입을 열었다. "어때요? 이 옷이…!" 단궁비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추냉아는 입을 딱 벌렸다. 격자문이 소리도 없이 베어졌다. 불쑥 솟구치듯 드러난 녹색의 검과 격자문을 빠져 나오는 녹사이검의 몸놀림은 전광처럼 빨랐다. 단궁비와 문 사이의 공간은 불과 이 척, 반격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단궁비는 심장을 노린 검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녹사이검이 빨랐다. 종잇장 같이 얇은 검이 심장 부근을 파고들었다. "안돼!" 추냉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몸을 날렸다. 왜인지 모른다. 다만 단궁비를 죽일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의 표출이었다. 그녀의 대응은 시의적절해서 녹사이검의 앞을 가로막아 단궁비의 목숨을 구할 것 같았다. 그러나, "바보 같으니! 이 단궁비, 여자를 희생해서 목숨을 구할 정도로 비겁하지는 않다!" 아마 추냉아가 끼어 들지 않았다면 목숨을 구했을지도 모른다. 단궁비에게는 유성백리탄의 절정 경공술과, 구전백환신공이라는 신묘한 보법이 있으니까! 그러나 추냉아가 끼어듬으로 인해서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단궁비의 손이 번개처럼 허공을 갈랐다. 추냉아를 밀쳐 버린 것이다. 전력을 다한 녹사이검의 무공은 무시무시했다. 그들 개개인은 이미 불패괴옹을 능가하는 무술의 고수들이다. "크크크! 단궁비, 너에게는 일 푼의 가능성도 없다." 번쩍! 단궁비의 가슴을 관통하는 진기로 만들어진 녹색검! 그 공격이 어찌나 빠르고 신랄한지 녹사이검이 그대로 단궁비를 꿰뚫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성공이다.' 녹사이검이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 처절한 외침이 단궁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안돼! 네가 죽으면 안돼!" 네가 죽으면 안돼? 무슨 소린가? 의아한 생각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까가가강! 진기의 결정체 녹사검이 쇳덩이를 가르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일그러진 단궁비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양손이 그대로 그들의 머리를 내리쳤다. "으으… 설마 금강불괴?" 퍼억! 녹사이검의 머리가 두부처럼 으스러졌다. 금강불괴는 아니다. 단궁비의 가슴에는 공처럼 뭉쳐진 적원이 있었다. 비록 의식을 잃었지만 적원의 몸은 도검으로도 훼손이 불가능한 금강불괴의 몸뚱이! 애석하게도 녹사이검이 공격한 단궁비의 심장은 적원의 몸뚱이였던 것이다. 단궁비는 안타깝게 적원을 쓰다듬었다. "적원, 네가 두 번째 나를 살렸구나!" 추냉아와 헤어졌다. 멀지 않은 함양에 그녀의 친척이 있기에 일단 그곳에 들려보겠다는 것이다. 그녀는 단궁비가 동행하기를 원했지만 단궁비 역시 불패괴옹과의 약속이 급했다. 떨어지기 싫어하는 추냉아를 설득한 후 홀로 길을 나섰는데… 거리마다 무산(舞山)의 단풍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선 청춘 남녀들로 만원이었다. "좋군!" 단궁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이제는 길을 가는 여인의 둔부만 봐도 이상한 생각이 든다. 그를 스쳐 지나던 세 여인이 걸음을 멈추고 분노한 눈으로 단궁비를 바라보았다. 때는 가을! 여인들의 풍성한 둔부를 보며 알찬 수확을 연상하는 이 해괴함은 뭔가! 여인들의 눈썹이 곤두섰다. 그녀들은 화려한 비단옷에 허리에는 패옥을 북두칠성의 모양으로 박은 검을 차고 있었다. 아울러 세 여인 모두 개성있는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미쳤나봐!" 그들 중 한 여인이 단궁비의 눈길에 둔부가 따가웠는지 은근히 손으로 가리며 말한다. "그러게 말이야. 인물이 아깝다 얘. 어지간하면 재활용해서 쓸 수 없을까?" "아냐! 다른 건 다 재활용이 되지만 인간은 쉽지가 않데. 특히 저렇게 맛이 간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맛이 가 버린데. 그러니 얼굴을 보고 속으면 안돼!" 까르르륵! 여인들의 상쾌한 웃음소리가 귓전에 영롱하게 부서진다. 맑은 가을햇살처럼 생기 넘치는 웃음소리였다. 단궁비는 헤벌죽 웃었다. 비록 미친놈 취급을 받았지만 평범한 인간들의 평범한 사고방식이 좋았던 것이다. 여인들은 단궁비의 웃음을 보고는 잠시 넋이 나간 표정이더니 조금 전의 비웃음은 어디다 던졌는지 묘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단궁비는 걸음을 서둘러 그녀들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가을인데 올해 내가 거둔 것은 추냉아 하나 뿐인가?" 그렇게 홀로 말하고 보니 또 괴상망측해 웃는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아직 젊지 않은가! 인생의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보고 살 때다. "추냉아! 솔직히 좋았어. 그 담대함과 그 미모, 때로는 도도하게 느껴지지만 차가운 표정 뒤에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정열!" 나무 그늘에 벌렁 눕는다. 하늘을 떠가는 구름 하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연이어지는 생각들! 억지로 잊고자 해도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열화신군 염사, 결국 피를 보아야 한다. 그의 거처인 화염보는 그렇게 멀지 않다. "염사, 구천 중 하나. 흡백충을 없애려 한 것을 보면 당신은 천향루와 한 패가 틀림없지." 단궁비는 천천히 일어났다. 저 멀리 눈에 들어오는 염사의 본거지인 화염보를 향해 걷는 그의 입가에 차디찬 살소가 흘렀다. 열화신군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청년 마야! 그 존재가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었다. 단궁비라는 애송이의 목을 치라고 했다. '그 애송이를 이 염사가 해치우란 말이지?' 그의 눈빛이 어두운 음영을 드리웠다. 불끈 치솟는 반발심을 누르기 위해 그는 말아 쥔 주먹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열 다섯 살에 무림 출도, 그 후 수백 번의 비무를 거쳐 오른 영광스런 보좌 구천(九天)! 처음에는 얼마나 자랑스러웠던가? 천하를 발치 아래에 둔 듯 황홀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마야! 십 년 전 어느 날 파릇한 애송이가 그를 찾아왔다. 놀랍게도 그를 동반한 사람은 천하제일의 색후 염후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은 염후 그 마녀가 그 새파란 애송이에게 굽실거린다는 점이었다. 그 애송이가 비무를 청했다. 자신의 이름을 마야(魔爺)라고 밝히며! 처음에는 몰랐다. 마야라는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러나 천 년 전 마도무림의 전설로 불렸던 백만마종주 나백의 직전제자를 일컫는 명호가 마야라는 것을 알았을 때 열화신군 염사는 기절할 듯 놀랐다. "당신이 이기면 이 염후는 물론, 마야라는 칭호와 함께 백만마종주 나백의 절기를 주겠다." "카카카카!" 염사는 우렁차게 웃었었다. 백만마종주의 후인이라면 얌전히 처박혀 무공을 수련한 후 완벽해진 후 도전하는 것이 옳았다. 하긴 새파란 애송이니 참을성이 없었겠지! 아니면 염후 저 색후의 충동질에 참지 못하고 강호에 뛰쳐나왔겠지. 그렇게 단정을 내렸다. 승부는 단 일초였다. 단 일초, 염사가 패했다. 마야의 능력은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가공할 것이었다. "치욕스러워 말도록! 구천의 대다수가 일초에 패했으니까!" 그 다음은 굴종이었다. 무려 십 년 동안 열화신군 염사는 청년 마야의 충실한 종노릇을 해 왔다. 그리고 오늘, 자신의 명성에 일대 치욕이 될 한 가지 명령을 받았다. 단궁비를 죽이라는 명령이다! 십 년 전 그 상황과 어찌 이리 비슷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도 운명을 결정짓는 상대는 애송이였고, 지금도 상대는 애송이다. 더욱이 지금의 애송이는 십 년 전 그들이 일해무룡을 방문해 손수 폐혈제맥수를 펼쳐 불구로 만들었던 어린놈이다. 놈이 어떻게 폐혈제맥수의 저주를 풀고 무공을 익혔는지, 또 어떻게 광풍곡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지만 염사는 생각을 접었다. 생각조차 귀찮은 것이다. 염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가을의 붉은 노을이 온 산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솟구치는 살심처럼 짙은 불꽃이었다. "와라. 애송이. 넌 혈궁의 대멸살계(大滅殺計)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것이다." "후후후! 이미 온 사람에게 오라고 하면 어쩌란 말이오?" 열화신군염사를 비웃듯 창문 너머에서 들려 오는 낭랑한 음성. 염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대가 이렇게 접근하도록 그가 몰랐다는 사실에 경악한 것이다. "단궁비?" "그렇소!" 스스슷---! 염사의 눈 앞에 귀영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귀신을 뺨칠 신속한 경공술! 너 단궁비는 폐혈제맥수의 저주를 푼 후에는 용이 되었구나!' 열화신군은 나타난 인물을 지그시 쏘아보았다. 첫 느낌은 강적이라는 점이었다. 두 번째 보았을 때 딸을 둔 아비로서 보았을 때 녀석은 정말 훌륭한 사윗감이라는 점을 느꼈다. 세 번째 보았을 때 절대로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염사는 느꼈다. 염사는 몸의 긴장을 풀 듯 창가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제지를 한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군!" 단궁비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럴 능력을 지닌 수하가 없다는 표현이 옳지!" 염사는 단궁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마음은 부인하고 싶지만 부인할 수 없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수하들 중에 단궁비를 제지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내 평생 위업을 말 한 마디로 깔아뭉개다니 대단한 입심이군. 시작할까?" 단궁비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들에게서 폭발할 것 같은 살기가 발산되었다. 두 사람이 막 공세를 펼칠 그 순간!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영롱한 목소리가 울리며 염사의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여인이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여인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 서 있는 단궁비를 보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있죠?" 그 여인이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스친 여인, 그녀의 풍만한 둔부를 보며 망측한 상상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쾌활한 여인이 열화신군 염사의 딸일 줄이야! 염사 역시 딸이 단궁비를 알자 불안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너 설마…!" 단궁비는 실소를 터뜨렸다. "쓸데없는 상상은 치워. 난 당신처럼 지저분한 인간이 아니니까!" 단궁비의 싸늘한 어조에 염사의 딸 염미방(廉美房)은 의혹이 서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군데 그렇게 무례하죠? 아버님의 손님이 아닌가요?" 단궁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염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 이년, 남자의 일에 웬 참견이냐? 썩 네 방으로 가지 못할까?" 염미방의 순진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욕설은커녕 꾸중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단궁비를 향해 말했다. "당신 무릉도에서 온 일해무룡의 소궁주죠? 그렇죠? 아버지는 늘 당신이 복수하러 올까봐 신경을 쓰셨는데 결국 이렇게 오고 말았군요!" 쿵! 고막을 망치로 친 듯한 공명음이 울렸다. 염미방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열화신군 염사가 일해무룡의 멸망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뜻 아닌가! 아니 어쩌면 십 년 전 그에게 금제를 가한 인물이 염사라는 뜻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의 기색을 살피던 염미방은 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당신은 잘못 찾아 왔어요. 아버지는 잘못이 없어요. 아버진 상급자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에요." "방아!" "싫어요. 그만 해요. 난 아버지가 싫어요. 죄를 짓고 두려움에 떠는 아버지가 싫단 말이에요!" 절규하듯 부르짖는 염미방,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표독스럽게 단궁비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자신의 부친을 향해 다가가는 단궁비를 보던 그녀는 결정적인 허점을 발견했다. "죽엇!" 그녀가 일장을 날리자 단궁비의 시야가 시뻘건 장막으로 갇혔다. 지독한 열기가 온몸을 태웠다. 피부가 벌겋게 타오를 정도인데 단궁비는 고통을 몰랐다. 그는 염미방이 아닌 염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에서 지극히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염사! 폐혈제맥수를 아나?" 염사는 대답이 없고 다시 염미방이 일장을 날렸다. 쾅! 그녀의 두 번째 공격이 단궁비의 가슴을 무섭게 내리쳤다. 하지만 단궁비는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고통은 이미 잊었다. 아버지와 그가 겪은 고통은 이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진정한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아버지를 도울 수 없었던 아들, 아들을 도울 수 없었던 아버지! 부자를 그렇게 만든 원흉을 오늘 만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염미방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뿐인 것이다. 흡백충, 천향루, 그런 단어들이 모조리 기억에서 사라졌다. 단궁비는 염사를 노려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염사, 딸에게 유언을 남길 시간은 주겠다. 연무장에서 기다리지." 석양이 지고 어둑해진 연무장을 밝히기 위해 그곳에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단궁비와 염사!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염사, 네가 무릉도의 살겁을 일으킨 장본인인가?" "알면서도 물음은 서로 피곤한 일!" "그 사실 하나만 해도 당신이 지옥에 갈 이유는 충분하다." 단궁비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살기를 머금고 길길이 날뛰는 음성보다 더욱 섬뜩하게 느껴지는 저음이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게 열화신군을 응시했다. 열화신군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어렸다. "건방진 놈!"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허공을 엇비슷이 갈랐다. 파바박! 번갯불을 몇십 가닥으로 나눈 듯한 극히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의 공격은 무려 십여 초 교환되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닥에 내려섰다. 대등한 실력이었다. 일전에 불패괴옹은 태무독에게 고전했었다. 염사 역시 태무독과 함께 구천의 일인인 것을 생각하면 지금 그와 대등하게 대결하는 단궁비의 무공은 실로 놀라운 점이 있다. "다시 한 번 일장을 받아 보거라!" 열화신군은 비조(飛鳥)처럼 몸을 날렸다. "열화주천장(烈火朱天掌)!"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터지고 그의 장심에서 시뻘건 불덩어리가 노도처럼 토해졌다. 뜨거운 화기는 단궁비를 단숨에 태워버릴 듯 질풍처럼 다가들었다. 단궁비는 쌍장을 천천히 가슴 높이로 끌어올렸다. "혈마단천강!" 쿠우우우우---! 핏물을 연상시키는 시뻘건 혈류(血流)가 오 장을 뻗어 나갔다. 바로 오마신 중 혈마신의 성명절기이며 극성의 성취에 이르면 석 자 두께의 철벽도 순식간에 녹여 버린다는 가공할 양강지공이다. 콰콰콰쾅---! 두 사람의 공격이 정면충돌하자 천번지복하는 굉음이 터졌다. 열화신군이 술 취한 사람처럼 연신 비틀거렸다. 단궁비의 두 눈이 싸늘히 빛났다. "절금혼!" 칼로 자르듯 터진 냉혹한 일성이 단궁비의 입에서 터진 순간 흡사 폭풍(暴風)같은 장경이 열화신군의 전신요혈(全身要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폭사해갔다. 염사의 얼굴이 다급하게 변했다. 그는 숨을 고르기도 힘든 상황이거늘, 단궁비는 역습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열화만경!" 염사는 필생의 진력을 양손에 모아 홱 뿌리쳤다. 천지를 태울 정도로 강맹한 장력이 단궁비를 향해 뻗어 가는데, 빠바박---! 도끼로 장작을 빠개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가공할 힘으로 몰려드는 열화신군 염사의 장경을 쪼개는 단궁비의 흰 손! 이것이 절금혼이었다. 철벽도 폭파시키는 위력을 지닌 절금혼이었다. 자신의 장경을 대쪽처럼 쪼개며 날아드는 흰 손을 본 염사는 급히 신형을 이동했다. 사사삭! 여덟 개로 분리되는 그의 신형! 그러나 그 신형들은 찰나간에 단궁비의 흰 손에 가루로 변하고 말았다. 그 후 염사의 중부혈에 단궁비의 공격이 그대로 작렬하고 말았다. "크윽!" 실끊긴 연처럼 훨훨 날아가는 염사를 본 단궁비가 유성백리탄의 경공을 펼쳤다. 매처럼 염사를 낚아챈 단궁비의 신형이 까마득한 점(點)이 되어 사라졌다. * * * 궁금한 것은, 누구나 나와 같은 생각일까? 그것이었다. 무릉도원같이 평화롭던 무릉도를 멸망시킨 자! 선친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인간! 장차 전 중원무림을 혈란으로 이끌 천향루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자! 아울러 자신을 조종하는 괴수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인물! 난 염사를 통해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을 택할 것이다. 염사는 질리고 말았다. 말조차 없다. 묻지도 않는다. 퍽 소리가 날 때마다 몸의 한 부분이 망가졌다. 비명을 지르고 애원을 해도 상대는 눈멀고 귀멀고 말을 잃은 인간이었다. 처음에는 버텼지만 며칠만에 염사는 무엇인가를 막 중얼거렸다. 어떤 밥을 먹고, 하루에 변소를 몇 번 가고, 어떤 계집을 품었는지도. 그럼에도 단궁비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생각 나는 대로 입을 열었다. 마야의 행동방식은 어떠했고, 그의 목소리는 어떠했으며, 그가 어떤 보고를 받았을 때 좋아했는지! 하다못해 마야를 만난 장소, 수백 군데도 넘는 그 장소를 일일이 기억해 낸 염사는 발악하듯이 외쳤다. 그 자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염사는 과거를 되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왜? 도대체 무엇을 알고 싶은 게냐?" 수십 군데도 더 터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물음에도 단궁비는 반응이 없었다. 무지막지한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염사가 마침내 파김치가 되었을 때 단궁비는 벙어리가 아니란 듯 입을 열었다. "널 마야로 생각해라. 그 동안 네가 마야가 소집한 집회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 유추하는 것이 네가 할 일이다." 미친놈, 내가 어떻게 마야가 된단 말이냐? 처음에는 그런 발악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쇳덩이같은 주먹이 연달아 온몸에 작렬하고 송곳 같은 손가락이 전신 혈을 산산이 짓이기자 염사는 자신도 모르게 마야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후 그는 정신없이 떠들었다. 무얼 생각하고 단궁비에게 무얼 말했는지 염사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본능에 따라 마야가 되어 앞으로 그가 취할 계획들을 수백 가지 늘어놓았다. 비로소 단궁비가 싱긋 웃었다. 무슨 뜻인가? 저 웃음은? 염사가 그걸 바라볼 때 깍지 낀 양손이 하마처럼 내리쳐졌다. 골이 띠잉 울리면서 염사는 뇌리가 하얗게 비는 것을 느꼈다. "헤헤헤!"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눈동자가 풀리면서 염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잊어버렸다. 염사가 어떤 경로로 그에게 왔는지는 모른다. 마야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염사를 이렇게 철저히 파멸시킨 단궁비의 잔인함에 웃었다. "단궁비, 인정한다. 넌 대단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직은 서툴러. 피가 끓는 젊음이 너의 약점이다. 기다려라. 두 달 후 이 선물에 대한 보답을 해 주지." 마야의 몸에서 살인적인 마기가 뻗자 순식간에 염사의 몸뚱이가 가루로 변해 버렸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