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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장 마독화편(魔毒華扁)
①
위지강이 항주에 온 후 이틀이 지났다.
황약충은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위지강은 틈틈이 운공을 하고 미랑과 바둑도 두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야외에서 봄햇살을 받으며 대국하고 싶어졌다.
항주성 외곽의 한적한 숲 속.
오월의 햇살이 푸르른 신록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쪼르릉... 쫑쫑!
산새들은 지저귀며 날고 있었고 벌과 나비는 이 꽃 저 꽃으로 분주히 옮겨 다니고 있었다.
참으로 좋은 날씨였다.
훈풍이 사르르! 불어오는 풀밭에서 딱! 딱!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위지강과 미랑이 바둑돌을 내려놓는 소리였다.
그들은 호선으로 대국을 하고 있었다. 풍운곡을 떠날 당시에 이미 그들은 흑백을 번갈아 쥐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아무튼 상공처럼 빠른 속도로 느는 분은 처음 봤어요."
미랑이 반상에 시선을 둔 채 한 말이었다.
위지강은 담담히 말을 받았다.
"그래도 아직은 낭자의 승률이 높지 않소?"
미랑은 고개를 들며 웃었다.
"호호! 욕심이 많으시군요."
진면목의 그녀가 웃자 추악한 얼굴이 더욱 해괴하게 변했다. 하나 마주보고 있는 위지강의 시선은 따스하기만 했다.
딱! 딱!
두 사람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반상 위에는 흑백의 그림이 절묘한 모양을 이루며 그려졌다.
한 시진쯤 지났을까?
위지강이 고개를 저으며 돌을 거두었다.
"졌소. 서너 집 부족하구려."
미랑은 배시시 웃으며 그의 얼굴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위지강은 면구를 벗고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본 얼굴에 햇빛을 받으니 기분이 상쾌한 듯 미소가 입가에 머물러 있었다.
"상공의 웃는 모습은 참 보기 좋군요."
"고맙소."
그들은 따뜻한 대화를 나눈 후 다음 판을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해가 서산에 걸린 채 땅거미를 깔기 시작했다. 미랑은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기다리세요."
위지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랑은 천천히 걸어 숲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녀가 사라진 얼마 후였다.
"꺄악!"
느닷없이 숲 속에서 미랑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위지강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녀가 들어갔던 숲 속으로 쏜살같이 신형을 날렸다.
조금 달려가니 그녀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왼발 허벅지를 꽉 조이고 있었다.
"삼목혈린사(三目血麟蛇)에 물렸어요."
그녀 바로 옆에는 눈이 세 개 달린 붉은 빛의 작은 뱀이 머리가 터져 죽어 있었다.
삼목혈린사였다.
크기는 작지만 무서운 극독을 품고 있어 물리면 호랑이도 순식간에 황천으로 간다는 독사였다.
미랑은 볼일을 보고 막 일어나다 일을 당한 것이었다. 위지강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혈액이 몸으로 퍼지지 않도록 다리를 계속 꽉 조이시오."
미랑의 왼발 허벅지에는 핏기가 배인 작은 구멍이 세 개나 있었다.
위지강은 그녀의 옷 위에 그대로 입을 대고 피를 빨아 뱉기 시작했다.
뱉어진 피는 색깔이 시커맸고 독한 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수십 번쯤 같은 행위를 반복했을 때 피 색깔이 차츰 연해지더니 정상적인 피가 뱉어졌다.
"이제 됐어요."
미랑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위지강은 그제야 입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설 수 있겠소?"
그가 염려스런 표정으로 묻자 미랑이 스스로 일어나려다 기우뚱했다. 위지강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
"소생에게 기대시오. 방으로 돌아가 약을 바릅시다."
"......!"
미랑은 전신에 가는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기댔다. 위지강은 인피면구를 꺼내 쓰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술시(戌時) 무렵.
위지강과 미랑은 비로소 영취객잔으로 돌아왔다.
미랑은 피를 많이 흘려 어지러웠는지 침상에 눕히자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위지강은 봇짐에서 금창약을 꺼내 그녀의 다리에 발라주며 중얼거렸다.
"피를 많이 흘렸는데... 아무래도 뭔가를 먹어야 할텐데... 으응... 왜 이렇게 졸립지?"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눈꺼풀은 거의 감겨 있었다.
"아함...! 미치겠군."
그는 비실비실 주저앉더니 바로 드러누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위지강은 전신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으... ! 몸이 왜 이리 불덩이 같은 걸까?"
동시에 묘하게 간지러운 느낌도 있었다.
그것은 결코 처음 겪는 느낌은 아니었다. 옷차림이 단정치 못해 속살이 보이는 여인들을 우연히 봤을 때 느꼈던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 지금의 느낌은 그에 비해 수십 배 이상 강렬했다.
그 때였다.
"아... 아아......!"
미랑의 숨결이 커지며 묘한 콧소리로 변하고 있었다.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위지강의 하근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미랑에게 욕정을 느끼다니......!'
그는 너무도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침상에서 미랑이 마구 뒹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지강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져 버렸다.
놀랍게도 미랑이 자신의 옷을 마구 찢어대며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여기저기 찢겨져 나간 옷 사이로 그녀의 속살이 내비치고 있었다. 그녀의 속살은 얼굴과는 달리 눈부시게 희었다.
위지강은 다급히 그녀를 붙잡고 물었다.
"낭자! 어디가 아프오?"
그때 미랑이 돌연 눈을 뜨더니 그를 와락 껴안아 버리는 것이었다. 위지강은 엇! 하고 당혹성을 터뜨렸다.
더욱 황당한 것은, 여체를 느낀 그의 양물이 한층 더 성을 내는 것이었다.
미랑은 이성을 잃은 듯 그를 사납게 끌어안으며 꿈틀거렸다.
흡사 육욕에 눈이 뒤집힌 요부 같았다.
위지강도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휘말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미랑은 눈이 반쯤 돌아간 채 그의 얼굴에 마구 입술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문득 위지강의 몸이 경직되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생각했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그녀와 내가 동시에 욕정을 일으키고 있구나. 누군가 우리 몰래 춘약(春藥)을 먹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는 호흡을 가라앉혀 욕화를 진정시켰다.
이때 미랑은 숨을 헉헉! 거리며 위지강의 옷을 찢으려 들었다.
그녀의 상황은 위지강에 비해 훨씬 심각해 보였다.
'야단났군. 일단 혈도를 짚어 발광은 못하게 해야겠군.'
그는 그녀의 혈도를 여러 군데 짚어놓고 이불을 덮어준 다음 방을 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와보니 동녘에서 어스름 붉은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새벽도 막바지에 이른 모양이었다.
위지강은 객잔 사람들이 자는 후원 별채 쪽으로 달려갔다.
항주가 초행인 그로서는 어디에 의원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객잔 사람들을 깨워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가 별채 앞으로 다가 갔을 때였다.
"아이고!"
창문 하나가 덜컹! 열리더니 청년 하나가 튀어나와 고꾸라졌다.
동시에 창 안쪽에서 차가운 코웃음이 들려왔다.
"흥! 알고 봤더니 고자 녀석이었어!"
나가떨어진 청년은 바로 영취객잔의 점소이인 오팔이었다.
아마도 그는 밤새도록 헛고생을 하다 쫓겨난 모양이었다.
위지강은 오팔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이보시오! 손님 중에 급한 환자가 있소. 빨리 의원으로 안내해 주시오."
오팔은 엉금엉금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지금 시각에 문을 연 의원은 없습니다. 또 항주에는 그리 신통한 의원도 없지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하지만 제가 아는 노인 한 분은 의약(醫藥)에 기이한 재주를 갖고 계시지요."
위지강은 다급히 말했다.
"어서 그분에게 데려다 주시오."
오팔은 긴 한숨을 내쉰 다음 애원하듯이 말했다.
"손님께서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신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위지강은 오팔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가면서 얘기합시다."
오팔은 위지강에게 끌려 객잔 밖으로 나왔다. 일단 밖으로 나오자 그는 스스로 앞장 서 걸었다.
"손님! 그 노인에게서 악취가 나는 반죽 하나를 제발 얻어주십시오. 어찌 된 사연이냐면... 크흑......."
오팔은 그 반죽을 먹고 겪은 일을 떠벌이기 시작했다.
오팔은 졸지에 정력남(精力男)으로 변해 여인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런데 가지고 있던 반죽이 다 떨어지자 그만 발기조차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는 꼽추노인에게 통사정을 해봤지만 노인은 두 번은 줄 수 없다며 냉랭하게 고개를 가로젓고 만 것이었다.
오팔의 입 안으로 콧물, 눈물이 범벅이 되어 흘러들고 있었다.
"으흐흑... 손님! 제발 이 불쌍한 것을 어여삐 여기시어 그 반죽을 구해 주십시오."
위지강은 화급한 상황이었지만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그 노인 말대로 한 달만 꾹 참았으면 진짜 정력가가 됐을 텐데....... 어쨌든 빨리 갑시다.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소."
두 사람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탕! 탕!
위지강과 오팔은 어느 허름한 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후미진 골목 끝에 마당도 없이 달랑 한 채의 건물만 있는 집이었다.
"영감님! 오팔입니다."
오팔이 한참 동안 목이 터져라 외치자 그제야 문이 삐꺽 열렸다.
"웬일로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떠는 게냐?"
한 꼽추노인이 눈꼽을 떼며 고개를 문 밖으로 내밀었다. 키는 작달막했고 노리끼리한 얼굴에 눈이 가느스름한 노인이었다.
노인의 왼뺨에는 커다란 사마귀가 달려 있었고 피부가 너무 쭈글쭈글해 최소한 백여 세는 되어 보였다.
오팔이 입을 열었다.
"이 손님의 일행 중에......."
위지강은 다급히 오팔의 말을 가로챘다.
"뱀에 물린 후 춘약에 중독된 것 같은 증상을 보이는 여인이 있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뱀?"
"삼목혈린사입니다."
돌연 노인의 눈이 커졌다.
"삼목혈린사! 그것에 물리고도 죽지 않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면......."
위지강이 지난 경과를 간략히 얘기하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수가 좋았군. 삼목혈린사에 물리고 살아나다니......! 보아하니 내공이 중후한 무림인들인 모양이군."
노인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삼목혈린사의 독을 극미량만 흡입하면 강력한 최음효과를 일으키지. 어제 그 시각에 물렸다면 아직 시간 여유는 충분해."
그는 위지강의 얼굴을 뚫어질 듯 쳐다보며 불쑥 물었다.
"그건 그렇고 자넨 왜 얼굴이 그 모양인가?"
위지강은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꼽추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얼굴에 찰색(察色)이 너무 강해. 시체 껍데기를 뒤집어썼던지 죽음이 임박했단 뜻이지."
위지강은 간이 덜컹! 할 정도로 놀랐다.
아무도 못 알아보는 사실을 이 노인은 한눈에 간파해 버린 것이었다.
'대관절 이 꼽추노인이 누구이기에?'
위지강은 노인이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가서 치료해 줄 테니까."
노인은 그의 전신을 훑어본 다음 등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오팔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손님! 제 얘기는 왜 안 하십니까?"
위지강은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염려 말고 기다리시오. 이 몸은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외다."
잠시 후 꼽추노인은 비단화복을 의젓하게 차려입고 나왔다. 노인의 몸에서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나고 있었다.
위지강은 앞장서 걸으며 내심 실소를 지었다.
'환자를 치료하러 가면서 향수를 뿌리고 가다니... 진정 기이한 양반이군.'
오팔은 불안한 눈빛을 발하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길을 가던 중 위지강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 최음증상은 시간이 가면 절로 해소되는 것 아닙니까?"
꼽추노인은 돌연 껄껄 웃었다.
"물론 그냥 놔둬도 죽지는 않아. 하지만 욕화(慾火)가 뇌에 이르면 백치가 되기 십상이지."
"저런......!"
위지강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물었다.
"그렇다면 살을 섞어 욕화가 해소되면 아무 문제도 없겠군요?"
"맞았어. 자네는 한 바탕 운우(雲雨)를 치렀으면 여기 올 필요도 없는 거야. 하지만 노부에게 일을 맡겼으니 이제는 내가 책임지고 치료해야지. 안 그런가?"
위지강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보수는 후히 치르겠습니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보수는 치료 후 나의 만족도에 따라 결정해야 돼."
"만족도?"
위지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학식은 뛰어나지만 술수나 교묘한 언사에는 어두웠다. 그것은 솔직 담백하고 강직한 그의 성품 탓이었다.
노인은 그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헛기침을 했다.
"어험! 그런 게 있어. 기분이 좋으면 공짜도 되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비록 고지식한 위지강이지만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저... 어르신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치유하실 것인지요?"
노인은 짜증스런 어투로 말을 받았다.
"약을 쓸 수도 있고 침을 쓸 수도 있다. 노부는 침술을 쓸 작정이다."
위지강은 노인의 빈손을 흘낏 보며 물었다.
"하면 침통은 어디에 있습니까?"
노인은 손에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옷에 침통을 넣을만한 호주머니가 달려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허! 걱정 말라니까......! 노부는 아홉 종류의 침을 몸에 부착해 갖고 다닌단 말이다."
노인은 언성을 높이고는 돌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왜 그 여인과 살을 섞지 않고 욕화를 참았나?"
위지강은 정색했다.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절대로... 암! 절대로 아니지요."
노인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가는 어투로 슬쩍 말했다.
"그럼 그 여인이 장차 다른 남자와 사랑한다 해서 충격 받을 일도 없겠군."
위지강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지었다.
"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말을 할 때 문득 미랑의 낭군은 장차 누가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동시에 노처녀로 늙을 그녀의 처지가 예상되자 왠지 마음이 아팠다.
그들이 영취객잔에 도착했을 때는 사위가 환히 밝아져 있었다.
정말 싱그러운 오월의 아침이었다.
②
삐꺽!
방문을 열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위지강과 꼽추노인이었다. 오팔은 복도에서 불안한 눈빛을 발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꼽추노인은 침상 위에 놓인 이불 밖으로 상아빛 팔다리가 나와 있는 것을 보고 탄성을 발했다.
"오우∼ 예! 피부 한 번 죽이는군."
실로 경망스럽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위지강은 개의치 않고 재촉했다.
"어서 치료해 주십시오."
"걱정 말아. 노부는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야!"
노인은 음험한 눈빛을 발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시술을 하는 동안 쉬는 게 좋겠네."
그와 동시에 노인의 우수가 벼락같이 움직여 위지강의 혈도를 짚었다.
예기치 못한 암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극히 빨랐다.
위지강은 너무도 뜻밖의 일을 당하자 어! 하는 사이에 혈도를 짚이고 쓰러졌다.
노인은 쓰러진 그를 흘낏 보며 중얼거렸다.
"염려 말고 구경이나 해! 아니지. 바닥에 누워 있으니 침상 위가 보일 리 없지. 하지만 귀라도 즐거울걸."
위지강은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이보시오. 당신은 지금 그녀를 겁탈하려는 거요?"
"겁탈이라니! 신성한 치료를 행하려는 신의 어른보고 그런 경망한 말을 하다니......!"
위지강은 격분했다.
"이 찢어 죽일 꼽추 노괴야! 당장 혈도를 풀지 못하겠느냐?"
그 순간 노인의 손이 위지강의 아혈마저 봉해 버렸다.
"시끄러우면 시술을 제대로 할 수 없지."
위지강은 졸지에 사지가 마비된 데다 벙어리 신세가 되어 버렸다. 노인은 그를 흘겨보고는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반쯤 드러난 미랑의 팔다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느 크기의 침을 쓰지? 대소(大小)를 써야하나 대중(大中)을 써야 하나?"
이 말을 듣고 위지강은 자신이 오해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침술로 치료하려는 거잖아. 역시 나는 너무 경솔해.'
그 때였다.
꼽추노인이 돌연 자신의 바지를 아래로 까내리는 게 아닌가?
'앗! 결국 그 짓을......!'
위지강은 자신이 또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누워있는 그의 시야에 번데기 만한 노인의 양물이 들어왔다. 그것을 보는 순간 위지강은 놀람과 동시에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였다.
"흐업!"
노인은 기마 자세를 취하며 짤막한 기합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의 양물이 한 자 가까운 크기로 팽창하는 것이었다.
위지강은 간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노인은 바지를 벗고 미랑의 왼쪽 다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흐흐... 감촉 한 번 죽이는군."
그러다가 노인의 고개가 갸웃했다.
"발의 크기를 보니 아무래도 대소보다는 대중을 써야 꽉 끼는 맛이 있을 거야."
꼽추노인은 두 발을 모두 내리더니 다시 기마 자세를 취했다.
"흐업!"
위지강은 아연실색했다.
노인의 양물이 한 자가 넘어 보이는 크기로 팽창한 것이었다. 꼽추노인은 번들거리는 양물을 앞세우고 침상으로 올라갔다.
위지강은 눈 앞이 아득했다.
'하늘이시여! 추한 용모를 줘서 재녀를 괴롭히더니 어찌 이런 몹쓸 짓을 당하게 한단 말입니까?'
그때 노인이 외마디 경호성을 터뜨렸다.
"헛! 수궁사(守宮絲)!"
수궁사란 순결한 여인의 상징으로 손목에 나있는 불그스름한 실같은 반흔(瘢痕)을 의미했다. 하나 그것을 식별하는 안목을 가진 자는 결코 흔치 않았다.
그런데 미랑의 왼쪽 팔목에 바로 그것이 있었다.
꼽추노인의 얼굴에 고뇌의 빛이 어리더니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 숫처녀를 유린할 수는 없지. 암! 그건 못할 일이야. 가서 약을 가져오도록 하지."
꼽추노인은 침상에서 내려가 벗어놓은 바지를 천천히 주워 입었다. 마음을 정한 탓인지 그의 양물은 이미 식어 있었다.
방을 나가는 듯하던 그가 중얼거렸다.
"아니야! 저런 눈부신 피부를 가진 여인이 순결하다니! 세상에 이런 홍복이 어디 있단 말인가?"
꼽추노인은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런 여인의 개통식을 해주는 것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는가? 이는 불쌍하게 살아온 내게 하늘이 준 선물이야."
꼽추노인은 바지를 벗어 던지고 다시 기마 자세를 취했다.
"숫처녀니 크기를 좀 더 줄여야겠군. 중중(中中)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지. 흐업!"
노인은 무기를 앞세우고 침상으로 올라갔다. 그러다 다시 멈칫했다.
"기녀도 아닌 어린 처자의 순결을 어떻게 내가......!"
그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침상에서 물러났다. 하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노인은 변덕을 부리며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맞아! 이건 하늘이 날 위로하기 위해 보낸 선물이야. 흐업!"
"아니지. 이 처자가 추한 노물에게 순결을 잃고 자결이라도 하면 어떡한단 말이냐?"
"아니야! 행위 중에 혈도를 풀어주고 사내의 진정한 맛을 안겨주면 내게 홀딱 반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아이를 마누라로 삼으면 될 일 아닌가? 흐업!"
"잠깐! 이 아이를 마누라로 삼으면 수아는 어떡하지? 아아! 나의 귀여운 수아! 수아를 마누라로 삼기로 결심하지 않았던가?"
"그렇군, 이 아이를 첩으로, 수아를 정실로 삼으면 되겠군. 고민할 필요가 없어. 흐업!"
"아니다. 이 아이와 먼저 교합하고 어찌 첩으로 삼는단 말이냐? 당연히 정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 수아는?"
꼽추노인은 반은 울먹이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오오!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크흑! 둘 중 누구를 택해야 한단 말입니까?"
잠시 후 그의 외침이 잦아들더니 두 눈에서 비장한 빛이 흘러나왔다.
"자고로 영웅은 삼처사첩을 마다하지 않았다. 계집들도 내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다. 그래! 누굴 소실로 할 것인가는 일단 둘 다 접수한 후 생각할 일이지. 으흐업!"
이윽고 그는 결연한 눈빛을 발하며 침상 위로 올라갔다. 이어 한 동작에 이불을 걷어 내렸다. 그런데 이불을 내렸나 싶은 순간 도로 끌어 올려 버리는 게 아닌가?
동시에 그의 양물은 피시식 식어 버렸다.
노인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세상에 이런 상판이 있단 말이냐?"
그는 낯짝을 험하게 구긴 채 툴툴거리며 내려와 바지를 걸쳤다.
"저 놈이 정사를 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는 흘낏 창 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의원으로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으니 약이나 가져와야지. 정오까지만 먹이면 되니 시간은 충분하군."
꼽추노인은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갔다.
객실에는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위지강과 미랑.
그들은 나란히 혈도가 제압된 채 누워있는 중이었다. 반쯤 열린 창을 통해 봄바람이 흘러들고 있었다. 창 너머에는 나뭇잎들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휘이잉.......
돌연 바람이 거세졌다.
가을도 아닌데 나뭇잎 하나가 춤을 추며 떨어져 내렸다.
그 때였다. 죽은 듯이 누워있던 위지강이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마에 난 진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다. 그녀의 순결이 보존되어서......."
그는 담담히 중얼거린 후 침상으로 걸어가 이불을 걷고 미랑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얼굴이 붉어진 채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
위지강은 다시 이불을 덮어준 후 중얼거렸다.
"그녀의 외모가 순결을 지켜 주었군. 어쨌든 괘씸한 늙은이야!"
그는 뒷짐을 지고 방 안을 서성이며 말을 이었다.
"아주 나쁜 노인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그가 누굴까? 오면 한 번 물어봐야겠군. 아차! 그 점소이는?"
그는 방문을 열고 복도를 살펴보았다. 오팔은 일 때문에 일층 대청으로 간 모양이었다.
그는 문을 닫고 다시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혈도가 제압되었던 그가 스스로 일어나 걸어다니고 있는 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내막은 다음과 같았다.
위지검문의 소책자에는 혈도를 운용하는 비결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른 바 점혈(點穴), 해혈(解穴), 이혈(移穴)이 그것이었다.
그 중 해혈법은 혈도를 스스로 푸는 묘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과거 천존문 북경 분타에 납치되었을 때 이 내용을 떠올린 적이 있었다. 하나 내공이 너무 부족해 제대로 시도할 수가 없었다.
책자에는 최소한 3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을 때 일다경 이내에 스스로 혈도를 풀 수 있다고 쓰여져 있었다.
위지강은 자신의 내공이 얼마인지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빨리 일어나 미랑의 순결을 지키고 노인을 끌고 가서 약을 가져오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는 책의 내용대로 필사적으로 마음을 모아 시도했다. 정녕 혼신의 힘을 다한 노력이었다.
마침내 그는 비록 일다경은 지났지만 제압된 혈도를 스스로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위지강은 조금 전의 일을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확실히 놀라운 책이야. 필경 천지쌍존 중 하림이 남긴 것일 거야. 그 나머지 부분도 찾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기실 위지강은 유선영을 통해 장공, 검공, 경신술도 하나씩 익힌 상태였다. 그녀는 그것들의 명칭을 무영장(無影掌), 무영검(無影劍), 무영비행(無影飛行)이라 명명해두고 있었다.
"흐음!"
위지강은 뒷짐을 지고 차분한 시선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그는 달라 보였다.
③
항주성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가옥.
꼽추노인의 집이었다. 꼽추노인은 미랑에게 먹일 환약을 만들어 막 나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요?"
노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연남색 도포에 학우관(鶴羽冠)을 쓴 중년인이 서 있었다. 키도 훤칠하고 널찍한 이마에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졌으며 눈빛이 매섭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꼽추노인을 발견한 순간 그 눈빛은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사부님!"
꼽추노인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네... 네 녀석은?"
중년인은 포권했다.
"사부님! 불민한 제자 감규형(甘圭亨)이옵니다."
그는 바닥에 오체복지(五體伏地)했다. 꼽추노인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빛을 드러냈다.
"네 녀석이 여기 웬 일이냐? 노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중년인 감규형은 꾸벅 큰절을 한 다음 몸을 일으켰다.
"그 동안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꼽추노인은 눈을 부라렸다.
"뭐라고? 평안히 지냈냐고? 네 입으로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중년인은 부드럽게 웃었다.
"과거의 잘못은 뼈저리게 뉘우치고 있습니다. 부디 노기를 푸시기 바랍니다."
꼽추노인은 말없이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중년인은 송구스런 표정이었지만 넉살좋게 입을 열었다.
"간만에 찾아온 제자에게 차 한 잔 대접하지 않으시렵니까?"
"으음......."
꼽추노인은 침음성을 발하며 노려보다가 냉랭하게 내뱉었다.
"한 잔 마시고 바로 꺼져!"
허름한 방이었다.
꼽추노인과 그의 옛 제자는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뭐라고? 날더러 구패련(九覇聯)의 고문으로 취임해 달라고?"
꼽추노인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이 놈아!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신약들을 몽땅 훔쳐 도망갔던 녀석이 무슨 염치로 찾아와서 고문이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들을 늘어놓는 게야?"
감규형이란 중년인은 조심스런 손길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부님께서 본련의 고문이 되어주시면 상상도 못할 융숭한 대우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보수는 연 백만 냥이며......."
꼽추노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중년인의 말이 이어졌다.
"매일 밤 절세미녀들이 번갈아 가며 시중을 듭니다. 사부님의 취향을 살려 중원의 미녀 뿐 아니라 색목여인(色目女人), 남만여인(南蠻女人), 동이여인(東夷女人) 등... 각처의 미희들이 교대로 시중을 들 것입니다."
꼽추노인의 입이 딱 벌어지며 목울대가 세차게 떨렸다.
"그... 그게 정말이냐?"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의 얼굴에서 노기는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어험! 거 일 년에 백만 냥이 한 사람의 보수로 쓰이면 조직의 자금이 모자라지 않겠느냐? 그래갖고 구패련인지 뭔지 하는 곳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겠느냐?"
그는 한껏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수염도 별로 없는 턱을 쓰다듬었다. 중년인은 반색했다.
"역시 황금을 돌같이 여기시는 사부님의 인품은 여전하시군요."
"허허! 뭘!"
꼽추노인은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며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십만 냥이면 충분하다. 그 대신......."
중년인은 짐작이 간다는 듯 씩 웃었다.
"말씀만 하십시오. 저의 재량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꼽추노인의 눈매가 가볍게 붉어졌다.
"거 왜 매일 밤 침소에 든다는 미희들 말이다."
"네! 말씀하십시오."
"그 왜 낮거리라고 있지 않느냐? 점심 식사 후 소화도 시킬 겸 가벼운 운동 삼아... 으흠......!"
중년인은 빙그레 웃었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그녀들은 몽땅 사부님의 소유물이 되는 것입니다. 낮이건 아침이건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노시면 됩니다."
꼽추노인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떠올랐다.
'이런! 데리고 있다 매일 밤을 보내주는 줄 알았더니. 빌어먹을... 구십만 냥을 날렸잖아!'
그의 의중을 알아챈 중년인이 말했다.
"보수는 처음 얘기대로 그냥 백만 냥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사부님을 위해 백 이십 명의 미녀들을 수집해 놓았지만 수를 더 늘릴 계획입니다. 그 문제는 홍당(紅堂)에서 알아서 할 것입니다."
"홍당?"
"사부님을 위해 특별히 설치한 채홍사(彩紅師) 조직입니다."
꼽추노인의 입이 함지박보다 크게 벌어졌다.
"헉! 그렇게까지!"
꼽추노인은 감격어린 표정을 지었다.
벌써 아랫도리에 힘이 팍 들어감을 느끼고 있는 그였다. 동시에 온갖 해괴한 공상들이 그의 뇌리를 스쳐가고 있었다. 입을 헤 벌리고 몽상에 잠긴 듯하던 그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구패련이 뭐하는 곳이야?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다."
중년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본련에 가입하신 후 자연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꼽추노인의 눈꼬리는 가늘게 올라갔다.
"지금은 말해줄 수 없다는 거냐?"
"그냥 아홉 세력이 뭉쳤다는 것만 알아두십시오."
꼽추노인은 의심스런 눈빛을 발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 녀석이 도망친 후, 수 년 뒤 청악도란 문파의 수괴가 바로 도사 흉내내기를 즐기는 네놈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데 이젠 또 구패련이냐?"
청악도(淸岳道).
이는 일도이전(一道二殿)으로 불리는 문파 중 하나였다.
도주의 이름은 감규형(甘圭亨)이었다. 바로 꼽추노인의 앞에 앉아있는 중년인이었다.
감규형은 불노장생(不老長生)의 단술(丹術)에 일가견이 있고 탁월한 무공을 지녔다고 알려진 자였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작년부터 청악도의 활동은 눈에 띄게 뜸해진 상태였다.
감규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더 큰 물에서 놀게 되었다고 할까요."
꼽추노인은 눈을 치뜨고 물었다.
"구패련에서 네 신분은 무엇이냐?"
"구패 중 하나라고만 알아두십시오."
"구패 중 하나? 그럼 너희 아홉이 다스리는 문파로군."
감규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구패 위에 한 분의 천패(天覇)가 계십니다."
"천패? 신비한 느낌을 주는군. 그가 누구지?"
감규형은 돌연 낯빛을 바꾸며 정색했다.
"더 이상은 묻지 마십시오. 본련에 가입하시면 당연히 천패님을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꼽추노인은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불쑥 물었다.
"구패련에서는 내가 무슨 일을 해주길 바라는 거냐?"
감규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며 무거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공 증진에 탁월한 효험을 가진 신약들을 제조해 주십시오. 우선 잠력을 일시적으로 크게 격발 시킬 수 있는 약들을 빠른 시일 안에 제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
꼽추노인의 양미간이 좁아지며 눈이 가늘어졌다.
"잠력을 일시적으로 크게 격발 시키는 약?"
"사부님의 능력이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으음!"
꼽추노인은 침음성을 발하며 생각에 잠겼다.
골똘한 표정을 짓던 그는 아차!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이런! 환자에게 약을 가져가려던 참이었는데... 내 정신 좀 봐. 벌써 정오가 다 되어 가잖아."
그는 몸을 일으켜 허둥지둥 문 앞으로 달려갔다.
"기다리고 있어."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의 신형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문 앞에 생면부지의 두 인물이 서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은 육 척의 당당한 체구에 반백의 귀밑머리가 중후한 풍채를 더해주는 황포(黃袍)의 초로인이었다.
또 한 명은 소름끼치는 붉은 안광에 쭉 째진 눈매를 가진 적의(赤衣)의 중년인이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꼽추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황포인이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비천태사전의 양염초가 마독화편 선배를 뵈오."
그렇다.
꼽추노인은 그 유명한 괴의(怪醫)이자 신의(神醫)인 마독화편(魔毒華扁) 탁중산(卓中山)이었다.
핏빛 눈동자가 보기만 해도 섬뜩한 중년인이 차가운 음성을 발했다.
"잔혼마전의 상립이외다."
놀랍게도 두 인물은 청악도와 더불어 일도이전으로 불리는 집단의 수괴들이었다.
양염초(梁廉哨).
그는 비천태사전(飛天太獅殿)의 전주였다.
나이는 60세였으며 성명절기인 대라검법(大羅劍法)으로 대강남북을 한때 울린 호랑이가 바로 양염초였다.
상립(常立).
그는 잔혼마전(殘魂魔殿)의 전주였다.
그는 사십대의 중년인으로 잔혼아수라도결(殘魂阿修羅刀訣)이라는 잔인무도한 도법으로 유명했다.
청악도의 도주인 감규형에다 이들까지 나타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좀 비켜주구려. 노부는 갈 곳이 있소."
탁중산이 이들 옆으로 돌아가려 하자 양염초가 가로막았다.
"저희들과 같이 동행하시지요."
탁중산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입술을 비집고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환자가 있어 가는 길이니 어서 비키라!"
탁중산은 냉갈을 터뜨리고 반대쪽 옆으로 돌아가려 했다.
상립이 그를 가로막았다.
"구패련의 이름을 들은 이상 함부로 자리를 뜨실 수 없소이다."
상립은 냉막한 음성을 발하며 떡 버티고 섰다.
"뭐라고?"
탁중산의 볼이 가볍게 경련했다.
그 때였다.
감규형의 웃음 섞인 음성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사부님! 그냥 들어오시지요. 저 사람들 성질 건드리면 별로 좋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하! 저들이 화를 내면 제자도 어쩔 수 없다니까요."
탁중산의 안면이 검붉어졌다.
"구패련은 예를 모르는 집단이로군. 노부는 무례한 것들과는 상종치 않아!"
그는 고개를 홱 돌려 의자에 여유있게 앉아있는 감규형을 바라보았다.
"규형! 이것들을 데리고 썩 꺼져라!"
감규형이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저들이 섭섭해하지요."
그리고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서서히 걸어 나왔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원하신다면 떠나드리지요. 그리고, 다시는 이곳을 찾아오지 않으렵니다."
순순한 말에 탁중산은 의아심이 치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러나 빈 손으로 가서야 되겠습니까?"
"빈 손?"
양염초가 탁중산의 한 손을 낚아채며 말했다.
"순순히 동행하시지요."
상립이 나머지 손을 붙잡은 것은 동시였다.
"혈도를 짚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게 해주시오."
탁중산은 근력만으로는 두 손을 꼼짝할 수 없음을 느꼈다.
"이것들이!"
노성을 터뜨리며 공력을 끌어올리려는 찰나였다. 그의 신형은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
섬뜩하게 차가운 기운이 목덜미에서 느껴진 것이다.
어느 틈에 빼들었을까? 감규형은 탁중산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음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용서하시구려, 사부."
탁중산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네놈이 정말......."
감규형은 억양 없는 음성을 발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부의 내공이 저희들보다 나을지는 몰라도 실전무예는 전혀 다르니까요."
탁중산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첫댓글 사부가 참 너그럽네요. ㅎㅎ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