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물들다
정주용
정서 심리학에서 중독(Addiction)은 단지 물질이나 행동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감정, 기억, 혹은 특정 인물에 대한 정서적 중독(Emotional Addiction) 역시 인간의 정서 체계 안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그리움의 중독성은 특별하다.
그리움이 정서적 중독이 되는 것은 결핍의 감정이다.
역설적으로 그 결핍을 반복하고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1)“정서적 강화 루프”를 가진다. 내담자의 70%가 과거를 떠올릴 때 사용하는 표현은 이러했다. “잊고 싶은데 자꾸 생각이 납니다.”이다.
이 현상은 학술적으로 2)“정서적 자극 회귀(Evocative Feedback Cycle)” 라 부른다. 사람은 사라진 대상이 남긴 감정의 잔향에 반복적으로 노출된다. 그리고 중독적 사고를 더 높이거나 그 수준을 뚜렷하게 하는 것이다.
상담을 마칠 쯤 동료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교수님, 그리움과 사람의 마음도 중독이 될까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무엇에 중독 되셨습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대답을 서둘러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흔들고 있던 내 안의 어떤 감정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오래된 중독의 잔재를 건드린 것이다. 동료 교수가 다시 말을 건넸다. “그리움은 왜 중독처럼 느껴지는 것일까요?”
“그리움은 사실 결핍에서 비롯되는 감정이지요. 사라진 것, 닿지 않는 것, 잃어버린 것, 너무 좋아서 다시 만나고 싶은 것, 이러한 감정이 오래 계속되면 기대, 안정감, 애착 등이 미세하게 나와 그리워하는 순간조차 달콤해져 그 감정을 계속 반복하게 만드는 것 같네요.”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리움은 감정이 아니라 습관, 더 나아가 정서적 중독이 되기도 하는 걸까요?”하고 그가 다시 물었다.
“사람 그 자체보다도, 그 사람이 나에게 주었던 감정에 중독되는 경우가 많은 것같네요.”“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깊이 이해해줬던 경험, 나를 특별하게 바라봐줬던 눈빛, 나에게 안전함을 주었던 존재감, 나를 살아 있게 만들던 대화, 이런 정서적 경험이 아주 강하게 각인된 것 같네요.”하고 말하자 그가 “교수님 저 생각에는 그 사람은 떠났는데도 그 사람에게서 느꼈던 온도, 향기, 위안, 울림은 마음속에서 계속 재생되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의 중독성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답변을 했다.
뜻하지 않게 중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정리할 겸 신천둔치 산책길을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걸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감정을 자극했고 바람은 오래된 기억을 이음새처럼 하나씩 꺼내놓았다. “교수님, 걸음이 왜 이리 느리십니까?”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돌아보니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웃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생각을 좀 한다고요”하고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분이 피식 웃었다. “그리움의 중독 걸린 거 아입니까?”
그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중독”이라는 단어가 바람 속에서 훅 들어왔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중독 하나쯤 있지요?.”
“맞다 아입니까? 살아보면 그리움이 제일 무서운 중독 아이긋나예?”
“사람이 뭘 그리워하면 그리 중독이 되는지 예삿일이 아닙디다.”
그분의 사투리가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이 말에 오래전에 놓아버렸다고 믿었던 한 사람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나는 인사드리고 그 말을 되뇌며 신천둔치 산책길을 걸었다.
그때 눈앞에 작은 들꽃 하나가 보였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꽃잎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낙엽 사이에서 한 마리의 새가 파닥이며 날아올랐다.
날개에서 일어난 바람이 내 손등을 스쳤다. “뭐꼬, 이건?”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감촉은 아주 짧았지만, 그 짧음 속에 깊이가 있었다.
바람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리움의 중독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그리움의 중독이라는 것은 파괴나 붕괴로 가는 중독이 아니라,
삶의 결을 더 촘촘하게 만드는 3)정서적 집중 현상(Emotive In fixation) 같은 새로운 형태의 마음 작용이다. 그리움은 사라진 대상에 애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이 특정 패턴에 중독되는 것이다. 그 패턴을 지속해서 재생하는 감정의 회로이다. 나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리움이 아니고 이건 중독이네. 감정 중독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오래전 인연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이 화면에 떳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가슴 밑바닥이 쿵 내려앉았다.
그 이름은 내가 ‘이제는 잊었다’라고 믿어왔던 사람의 이름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잊었다고 믿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나는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잊은 게 아니라
그리움의 농도를 희석해 두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조용히 말했다.
“그리움이 중독이라더니만, 참말이네.”
도시의 바람이 갑자기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움의 중독이란 것은 대상을 잊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 감정이 나를 다시 살아 있게 했던 순간을 내가 놓지 못해서 생긴 중독이었다. 나는 상담자로서의 시선이 아니라, 오랫동안 감정을 회피해온 한 사람으로서의 시선으로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 사람에게 중독된 게 아니라 그 사람과 있었던 “나의 감정”에 중독되는 것이다.
그 감정의 온도, 그 감정의 색, 그 감정의 잔향에 중독된 것이다.
이것은 내 자신이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진짜 정체를 드러내 준다.
나는 그리움은 “정서적 중독”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 말은 더 높은 차원에서 완성된다. 그리움 중독의 본질은 인간의 감정이 특정 기억에 대해
“존재적 지속성(Existential Emotional Persistence)”을 유지하려는 심리함수다.
그리움은 결핍의 정서도 아니고 감정의 파괴적 노출도 아니다.
정서의 “
구조적 기억(Affective Structural Memory)”이다.
결국, 그리움은 내 안에서 멈춘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 덕분에 만들어진 나의 감정의 밀도다.
그리고 이 밀도는 지워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리움에 물드는 것이
곧 삶을 더 깊이 경험하게 하는 정서적 중독의 최종 형태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움은 왜 중독이 되는가?” 이제 나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리움은 인간이 끝까지 붙잡고 싶은 감정의 가장 순수한 결이다
그 결을 잃지 않기 위해 영혼이 스스로 선택하는 고귀한 중독이다.
나는 오늘도 조용히 그 중독에 다시 물 들어간다.
(20251117.)
1) 어떤 감정이 행동을 불러오고, 그 행동이 다시 같은 감정을 더 강하게 만드는 순환 구조를 말합니다. 심리 상담이나 심리학에서 자주 다루는 개념.
2) 심리상담·심리치료에서 특히 중요한 개념이며, 감정이 어떻게 다시 감정을 불러오며 반복되는 순환 구조를 만드는지를 설명하는 이론
3) 어떤 감정 하나가 마음속에서 **비정상적으로 강하게 고정(Fixation)**되어 그 감정이 모든 인지·해석·행동을 지배하게 되는 상태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