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순식(王順式), 이총언(李悤言), 견금(堅金), 윤선(尹瑄), 흥달(興達), 선필(善弼), 태평(泰評)
#高麗史92卷-列傳5-王順式-001
○王順式溟州人. 爲本州將軍久不服太祖患之侍郞權說奏曰:
왕순식은 명주(溟州) 사람이다. 그 고을의 장군으로 있었는데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으므로 태조가 이를 근심하고 있었는데 시랑 권열(權說)이 아뢰기를
"父而詔子兄而訓弟天理也順式父許越今爲僧在內院宜遣往諭之." 太祖從之順式遂遣長子守元歸款賜姓王仍賜田宅.
“아비가 아들을 명령하고 형이 아우를 훈계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왕순식의 부친 왕허월(王許越)이 지금 중이 되어 내원(內院)에 있는바 그를 파견하여 개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그 말을 쫓았다. 왕순식이 드디어 장자 왕수원(王守元)을 보내 항복하므로 태조는 순식에게 “왕”씨(王)라는 성을 주고 이어 전답과 주택을 주었다.
又遣子長命以卒六百入宿衛後與子弟率其衆來朝賜姓王拜大匡.
왕순식은 또 아들 왕장명(王長命)을 파견하여 병졸 6백 명을 거느리고 숙위하려 들어 왔으며 그 후 그는 자제들과 더불어 그 부하들을 인솔하고 입조하였으므로 “왕”씨 성을 주고 대광으로 임명하였다.
長命賜命廉拜元甫小將官景亦賜姓王授大丞. 太祖討神劒順式自溟州率其兵會戰破之.
그리고 장명에게는 염(廉)이라는 이름을 주고 원보로 임명하였고 소장(小將) 관경(官景)에게도 역시 “왕”씨로 사성하였으며 대승(大丞)으로 임명하였다. 태조가 신검을 토벌할 때 왕순식은 명주로부터 자기 군대를 인솔하고 와서 합동하여 싸워 신검을 격파하였다.
太祖謂順式曰: "朕夢見異僧領甲士三千而至翼日卿率兵來助是其應也." 順式曰:
이때 태조가 왕순식에게 말하기를“나는 꿈에 이상한 중이 갑옷을 입은 병자 3천 명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 그대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도와 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감응이다”라고 하니 왕순식이 대답하기를
"臣發溟州至大峴有異僧祠設祭以禱上所夢者必此也." 太祖異之. 又有李悤言堅金尹瑄興達善弼泰評等皆歸附太祖.
“제가 명주에서 출발하여 대현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중의 사당(異僧祠)이 있기에 제사를 차리고 기도하였습니다. 상감께서 보신 꿈은 반드시 이것일 것입니다.”라고 하니 태조도 이상히 여겼다. 또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이란 사람들도 모두 다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高麗史92卷-列傳5-王順式-002
李悤言史失世系新羅季保碧珍郡時群盜充斥悤言堅城固守民賴以安.
이총언은 ≪사기≫에 그의 세계(世系)를 전하지 않았으나 신라 말기에 벽진군(碧珍郡)을 지키고 있었는데 당시 도적의 무리가 충만하였으나 총언이 성을 견고히 수리하고 고수하니 백성들이 그 덕으로 편안하였다.
太祖遣人諭以共戮力定禍亂悤言奉書甚喜遣其子永率兵從太祖征討.
태조가 사람을 보내 손을 잡고 협력하여 화란을 평정할 것을 개유하였더니 이총언은 글월을 받고 심히 기뻐서 그 아들 이영(李永)에게 군대를 인솔 파견시켰으며 태조를 따라 정벌에 참가하였다.
永時年十八太祖以大匡思道貴女妻之拜悤言本邑將軍加賜傍邑丁戶二百二十九.
당시 이영은 18세 었는데 태조는 대광사도귀(思道貴)의 딸로써 그의 처를 삼게 하고 이총언을 본읍(本邑) 장군으로 임명하고 이웃 읍의 정호(丁戶) 229호를 더 주었다.
又與忠原廣竹堤州倉穀二千二百石 一千七百八十五石且致手札示以金石之信曰:
또 충주, 원주, 광주(廣州), 죽주, 제주(堤州) 창고의 곡식 2천 2백 석, 소금 1천 7백 85석을 주고 친필로 편지를 써서 금석 같이 굳은 신의를 표하였다.
"至于子孫此心不改." 悤言乃感激團結軍丁儲峙資糧以孤城介於羅濟必爭之地屹然爲東南聲援.
그 글에 이르기를“후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고 하였다. 이총언은 이에 감격하여 군정(軍丁)들을 단결하고 기물과 양식을 저축하였으므로 외로운 성으로써 신라와 백제가 반드시 서로 쟁취하려는 지대에 껴있으면서도 엄연히 동남을 위하여 성원하고 있었다.
二十一年卒年八十一子達行及永.
태조 21년에 향년 81세로 죽었으며 아들은 이달행(李達行)과 이영(李永)이다.
#高麗史92卷-列傳5-王順式-003
堅金靑州人. 爲本州領軍將軍太祖卽位以靑州人多變詐不早爲備必有後悔乃遣州人能達文植明吉等往 之能達還奏:
견금(堅金)은 청주(靑州) 사람이다. 이 고을의 영군 장군(領軍將軍)으로 있었는데 태조가 즉위한 후 청주 ‘사람들은 변심하는 일이 많으니 제때에 방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가 생길 것이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그 고을 사람 능달(能達), 문식(文植), 명길(明吉) 등을 보내 엿보게 하였더니 능달은 돌아 와서 보고하기를
"彼無他志足可恃也." 唯文植明吉私謂州人金勤謙寬駿曰:
“그 사람은 다른 뜻이 없으니 족히 믿을 만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오직 문식과 명길은 은밀히 고을 사람 김근겸(金勤謙)과 관준(寬駿)에게 말하기를
"能達雖奏無他然新穀熟恐有變."
“능달은 비록 그에게 다른 마음이 없다고 보고 하였지만 앞으로 햇곡식이 익으면 변이 생길 우려가 있다.”라고 하였다.
堅金與副將運翌興鉉來見太祖各賜馬綾帛有差.
견금이 부장(副將) 연익(連翌), 흥현(興鉉)과 함께 와서 예방하니 태조는 이들에게 각각 말과 비단을 차등 있게 주었다.
堅金等上言: "臣等願竭愚忠庶無二心但本州人與勤謙寬駿金言規等在京都者其心異同. 去此數人可無患矣."
견금이 태조에게 말하기를“저희들은 충성을 다하기를 원하며 두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본 고을 사람인 흥근겸(興勤謙), 관준, 김언규(金言規) 등 서울에 있는 자들은 마음이 같지 않습니다. 이 몇몇 사람만 없애버리면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太祖曰: "朕心存止殺. 有罪者尙欲原之 此數人皆有宣力扶衛之功欲得一州而殺忠賢朕不爲也." 堅金等 懼而退.
태조는 말하기를“나의 마음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 데 있다. 비록 죄 있는 자라도 오히려 용서하려 하거늘 하물며 이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 역량을 국가 보위에 바친 공로가 있는 사람들인데 한 고을을 얻자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죽이는 일은 내가 하지 않겠다.”라고 하니 견금 등이 부끄럽고 송구하여 물러 갔다.
勤謙言規等聞之奏曰: "日者能達復曰無他臣等固以爲不然今聞堅金等所言不可保其無他請留之以觀變." 太祖從之旣而謂堅金等曰:
근겸, 언규등이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전일(日者), 능달이 복명하기를 딴 마음이 없다고 하며 저희들도 꼭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더니 지금 견금 등의 말을 듣건대 딴 마음이 없다고 보장할 수 없으니 청컨대 그들을 체류시키면서 변화를 관찰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태조도 그 의견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견금 등에게 이르기를
"今雖不從爾言深嘉爾忠可早歸以安衆心." 堅金等言:
“지금은 비록 그 애의 말대로 하지 않으나 나는 그대들의 충성을 깊이 가상히 여기고 있다. 그대들은 일찍 돌아 가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좋다”라고 하니 견금 등이 대답하기를
"臣等欲露忠 輒陳利害反類誣 不以爲罪惠莫大焉. 誓赤心報國. 然一州之人人各有心如有始禍恐難制也. 請遣官軍以爲聲援."
“저희들이 충직한 마음을 괴력하고자 이해 관계를 말씀드린 것이 도리어 무고하고 참소한 것처럼 되었으나 이것을 죄로 삼지 않으시니 은혜가 막대합니다. 일편 단심, 보국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고을 사람들이 저마다 각자의 뜻을 품고 있으니 만약 난리가 난다면 제기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청컨대 관군을 파견하여 성원하여 주십시요”라고 하니
太祖然之遣馬軍將軍洪儒庾黔弼等率兵千五百鎭鎭州以備之.
태조는 이 말을 옳게 여기고 마군 장군 홍유, 유검필 등을 파견하여 병사 1천 5백 명을 인솔하고 진주(鎭州)를 지킴으로써 이를 방비하였다.
未幾道安郡奏: "靑州密與百濟通好將叛." 太祖又遣馬軍將軍能植將兵鎭撫. 由是不克叛.
미구에 도안군(道安郡)에서 아뢰기를 “청주가 비밀히 백제와 내통하니 장차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조는 또 마군 장군 능식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高麗史92卷-列傳5-王順式-004
尹瑄 州人爲人沈勇善韜鈐.
윤선은 염주(鹽州) 사람이니 위인이 침착, 용감하고 병법에 정통하였다.
初以弓裔誅殺無厭慮禍及己遂率其黨走北邊聚衆至二千餘人.
당초에 궁예가 사람들을 서슴 없이 죽이는 것을 보고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드디어 자기 동류를 거느리고 북방 국경으로 도망해 가서 부하를 모집하였더니 2천여 명에 달하였다.
居 城召黑水蕃衆久爲邊郡害及太祖卽位率衆來附北邊以安.
골암성을 근거지로 삼고 흑수(黑水)의 미개인들을 불러 들여 오랫동안 국경 고을들에 해를
끼쳤는데 태조가 즉위하자 부하들을 거느리고 귀순하여 왔으므로 북방 국경이 편안하게
되었다.
#高麗史92卷-列傳5-王順式-005
興達爲甄萱高思葛伊城主.
흥달(興達)은 견훤의 고사갈이(高思葛伊) 성주(城主)었다.
太祖徇康州行過其城興達遣其子歸款.
태조가 강주(康州)를 순행할 때 그 읍을 지났더니 흥달이 자기 아들을 파견하여 귀순의 뜻을 표명하였다.
於是百濟所置軍吏皆降附太祖嘉之賜興達靑州祿子俊達珍州祿雄達寒水祿玉達長淺祿又賜田宅以賞之.
이백제가 배치한 군인과 관리들이 모두 다 항복 귀순하니 태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흥달에게 청주(靑州)를 녹읍으로 주고 아들 준달(俊達)에게 진주(珍州)를, 아들 웅달(雄達)에게 한수(寒水)를, 아들 옥달(玉達)에게 장천(長淺)을 각각 녹읍으로 주었으며 또한 전답과 주택을 주어 표창하였다.
甄萱將攻其城興達聞之欲出戰而浴忽見右臂上有滅字. 怪而禳之至十日病死.
견훤이 장차 그 성을 공격하려고 하는 데 흥달이 이 소식을 듣고 출정하려고 목욕을 하다가 갑자기 바른 팔에“멸(滅)”자가 나타났다. 이상히 여기고 기도를 한 지 10일이 지나서 병으로 죽었다.
#高麗史92卷-列傳5-王順式-006
善弼爲新羅載巖城將軍時群盜競起所至奪掠.
선필(善弼)은 신라 재암성(載巖城)의 장군으로 있었는데 당시 사방에서 많은 도적이 다투어 일어 나서 이르는 곳마다 약탈이 감행되었다.
太祖欲通好新羅以路梗患之. 弼觀太祖威德遂歸款. 以計使通好新羅. 因 賊屢有功後以其城內附. 太祖厚加待遇以年老稱爲尙父.
태조는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으으나 길이 막힌 까닭으로 그것이 곤란하였었다. 이때 선필은 태조의 위력과 덕행을 보고 드디어 귀순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는 계책을 써서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도록 하였다. 그는 적과 싸워 누차공로를 세웠으며 후에 그 성을 바치고 귀순해 왔다. 태조는 그를 후하게 대우하였으며 그가 연로하였다 해서 상부(尙父)라고 불렀다.
#高麗史92卷-列傳5-王順式-007
泰評 州人博涉書史明習吏事. 初爲其州賊帥柳矜順記室弓裔破矜順評乃降裔怒其久不服令屬卒伍. 遂從太祖開國之際與有力焉. 擢授徇軍郞中.
태평(泰評)은 염주 사람이니 경서와 역사에 대하여 광범히 연구하였고 행정 실무에 능숙하였다. 당초에는 그 고을의 도적 두목 유긍순(柳矜順)의 기실(記室)로 있었으며 궁예가 유긍순을 격파하니 태평이 항복하였으나 궁예는 그들이 오랫동안 복종하지 않은 것에 노하여 그를 졸병으로 배속시켰다. 그는 드디어 태조를 따르게 되었는바 건국할 당시에 그의 힘이 이에 기여한 바 있었다. 그래서 그를 순군 낭중(徇軍郞中)으로 등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