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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忠)과 의(義) 그리고 효(孝)를 곰곰히 생각케 하는 노들나루길이다.
여기서 검은 돌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흑석동(黑石洞)이다.
흑석 4동에서 검은 돌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바둑에서 꼭 있어야 하는 검은 돌이다.
흰돌은 옛 반포섬(碁島)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
충효(忠孝)와 의(義)를 곰씹어 보면서 나서는 탐방길은
흑석역 1번 출구 앞 작은 광장에서 출발한다.
웬지 마음이 묵직하기만 했다.
백두산에서 개마고원 원산을 지나 속리산까지 뻗어내려간 백두대간이다.
그 산줄기는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남정맥으로 북상했다.
한남정맥은 관악산에서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과천현 고사리 한강으로
고개를 밀어넣고 있다.그 산마루에 효사정(孝思亭)이 있다.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극진히 치렀다.
그래도 아쉽고 또 효(孝)를 다하지 못한 죄책감에 빠진 아들이다.
그는 이곳에 정자를 마련하고 어머니를 그리며 못다한 효심(孝心)을 새기고 또새겼다.
그 주인공은 조선초 우의정 효사당(孝思堂) 노한 (盧閑)이다.
효사당(孝思堂) 노한(盧閑)이 그토록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못하다한 효심(孝心)을 달랬던 효사정이다.
노한(盧閈)이 어머니 왕(王)씨의 상을 당하여 장례를 마친 다음
집의 북쪽 언덕에 정자를 지어 여막을 삼고 올라 바라봄으로써
부모님을 사모하는 회포를 풀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효사정이라고 한다.
노한의 어머니 왕씨가 돌아간 것은 세종 21(1439)년의 일이고,
그 때 노한의 나이는 64세였다.
노한은 고려후기 명문가 교하(交河) 노씨(盧氏)의 후손으로
조선왕실과는 혼맥으로 끈끈한 인연을 맺는다.
노한은 민제(閔霽 1339~1408)의 세째 사위이다.
조선 3대 왕 태종은 그의 둘째 사위다.노한은 태종과 동서간이다.
아들 노물재(盧物載?∼1446)는 심온(沈溫)의 둘째 사위다.
그의 첫째 사위는 세종이다.노한 부자는 두 왕의 아랫동서가 된다.
심온의 막내 사위 강덕석이다.강덕석이 효사정의 이름을 짓는다.
강덕석에게는 그 유명한 강희안 강희맹 두 아들이 있다.
강희안은 시서화(詩書畵)가 능한 삼절(三節)로 유명하다.
그는 문종 세조 안평대군과 이종사촌간으로 단종복위에 관련되어
이종사촌형 세조에게 국문을 당한다.
춘원 이광수는 소설 <단종애사>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그렸다.
'때에 제학(提學) 강희안
(姜希顔)이 불려들어온다.
왕은 그를 고문하였으나
그는 모른다고 한다. 왕이
삼문을 보고 "희안도 네당
이지?"하고 물었다.
"희안은 참말로 애매하오.
나으리가 선조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인제 이 사람 하나
남아 있으니 이 사람일랑
죽이지 말고 쓰시요.
현인이 멸종되면 나라꼴
이 되겠소?희안은 현인
이요.또 애매하니 후일에
죽이더라도 아직은 살려
두고 쓰시요."하는 삼문
의 말은 실로 간절하다.
왕은 삼문의 말을 옳이
여겨 희안을 놓기로 하였다.'
안평대군 성삼문 박팽년 강희안이
모두 동갑내로 시서화에 출중한
인물들이다. 성삼문 덕에 목숨을
구한 강희안이다.그는 정치가라기
보다는 유능한 행정관료로서
많은 활약을 했다.
관직으로는 이조정랑, 집현전
직제학, 부지돈령부사를 지냈으며,
세조가 집권하자 원종공신으로
책봉됐다.
그는 학문이 깊고, 상식이 풍부
하고 박식했으며, 재능이 출중했다.
서거정은 그를 평하여 '재주와
덕을 겸하였으니 진정한 대인군자'
라고 했다. 강희맹이 효사정기문을
짓는다.
노물재에게는 노회신(盧懷愼)
노유신(盧由愼) 노사신(盧思愼)
노호신(盧好愼) 네 아들이 있었다.
많은 문인들이 노한의 효성을
기리는 시문을 남겼다.
서거정의 글을 옮겨 음미하려고 한다.
효사정이 노량 나룻머리에
있다. 바람과 나무를 생각한
마음 어느 날에 그치랴.
무덤엔 송추가 합쳐져서 서리
와 이슬에 느낌이 일고,
시골은 상재(桑梓)가 무성
한데 세월이 흘렀다.
감호(鑑湖)에 주인 되어
사람이 길이 있고, 반곡(盤谷)
을 전해 받아 지역이 그윽하다.
벼슬에서 물러나 여가가 많아서
난간에 기대니, 산과 물 푸름이
둥실 하네.
-서거정(徐居正)의 시에서
효사정 현판 '孝思亭'은
노한의 17대 손인 노태우
(盧泰愚) 대통령의 친필이다.
효사정 서북쪽으로 난 나무계단길에서 심훈(沈熏 1901~1936)을 만난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시인 언론인 영화배우 영화감독 각본가로
활발하게 활동한 인물이다.
“일본의 한국 통치는 가혹했으나, 민족의 시는 죽이지 못했다.”
영국의 비평가이며 옥스퍼드대학 부총장이었던 C.M 바우러(Bowra) 박사는
그의 <시와 정치>에서 심훈의 저항시 <그날이 오면>을 세계 저항시의 한 본보기로 들었다.
이 시는 민족 해방에 대한 강렬한 공상이 ‘감상적 착오’에 쾌적한 변형을 가져옴으로써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시가 “설령 가까이 있을 것 같지 않더라도, 감격적인 미래가 환기하는 격렬하고도
숭엄한 정서”를 잘 그려내고 있다고 했다.
서울 흑석동 천주교성당 입구 왼쪽에 '심훈생가터(沈薰生家址) 표석이 있다.
심훈은 1901년 9월12일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태어난다.
조상 숭배의 관념이 철저한 지주 집안의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에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어머니는 조선조 말 중류가정의 출생으로 온후한 성품을 지녔고
뛰어난 재질을 지닌 여인이었다.
심훈의 본명은 대섭(大燮)이고 소년 시절에는 금강생,
중국 유학 때에는 백랑(白浪), 1920년 이후에 훈(熏)이라고 썼다.
1915년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하여,
작곡가 윤극영과 은행가 윤기동과 함께 미남 행렬 속에서 명석함을 자랑했다.
1917년 3월 중매로 왕족인 이해승의 누이 전주 이씨와 혼인하여
심훈이 해영(海映)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한 뒤
4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나오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퇴학 처분을 당했다.
모교인 서울 경기고에서 제적된 지 86년 만인 2005년 명예 졸업장을 받는다.
심훈의 경기고보 동창의 면면은 참으로 화려했다.
한국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은 심훈의 동기다.
영화 <박열>의 주인공으로 1923년 관동대지진의 와중에서 일왕(일본 천황) 폭살계획
모의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돼 해방된 이후인 1945년 10월까지 무려 26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무정부주의자 박열은 심훈의 경기고보 1년 후배다.
심훈은 서대문감옥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양한묵(천도교, 1862~1919)과
천도교경성교구장 장기렴의 순국을 목도하면서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더 불태우게 된다.
감옥에서 나와 한강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던 심훈은 얼마 안 있어 중국으로 망명한다.
어색한 청복으로 변장하고 만주 봉천을 거쳐서 북경에 도착한 심훈은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유명한 우당 이회영(1867~1932)과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1880~1936)를 만난다.
흑석동 집에서 가까운 고사리 언덕을 자주 찾은 심훈이다.
그의 고향 흑석리를 그리워하는 시를 담는다. 바로 <고향은 그리워도>다.
나는 내 고향에 가지를 않소.
쫓겨난 지가 10년이나 되건만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소,
멀기나 한가, 고개 하나 너머련만
오라는 사람도 없거니와 무얼 보러 가겠소?
개나리 울타리에 꽃 피던 뒷동산은
허리가 잘려 문화주택이 서고
사당 헐린 자리엔 신사神社가 들어앉았다니,
전하는 말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데
내 발로 걸어가서 눈꼴이 틀려 어찌 보겠소?
나는 영영 가지를 않으려오
5대나 내려오며 살던 내 고장이언만
비렁뱅이처럼 찾아가지는 않으려오
후원의 은행나무나 부둥켜안고
눈물을 지으려고 기어든단 말이요?
어느 누구를 만나려고 내가 가겠소?
잔뼈가 굵도록 정이 든 그 산과 그 들을
무슨, 낯짝을 쳐들고 보드란 말이요?
번잡하던 식구는 거미 같이 흩어졌는데
누가 내 손목을 잡고 옛날 이야기나 해 줄상 싶소?
무얼 하려고 내가 그 땅을 다시 밟겠소?
손수 가꾸던 화단 아래 턱이나 고이고 앉아서
지나간 꿈의 자취나 더듬어 보라는 말이요?
추억의 날개나마 마음대로 펼치는 것을
그 날개마저 찢기면 어찌하겠소?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소
빈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겠소
그 산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고
우리 집 디딤돌에 내 신을 다시 벗기 전엔
목을 매어 끌어도 내 고향엔 가지 않겠소
심훈의 흑석동 집 후원에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나 보다.
손수 가꾸던 화단도 있었던 것 같다. 개나리 울타리에 꽃피던
뒷동산이 있던 흑석동은 1930년대 당시 신혼부부의 선망의 대상이던
문화주택도 등장하고, 지금의 효사정 자리에 있던 신사(한강신사 또는 웅진신사)도
등장하면서 변해간다.
고향에 대한 실망감을 절절하게 표현하면서
'고향은 그리워도 내 고향엔 가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해방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는 집에서 가까운 효사정 언덕 넘어 한강을 즐겨 찾아
젊은 날을 보낸 것으로 전한다.
1920년 1월, 그때는 한강이 꽁꽁 얼어 붙었다.
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 밑을 넘나들면서 스케이트를 즐겼다.
그 겨울철의 추억은 그의 일기에 나온다.
그때 한강은 여름에는 수영장이었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서울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효사정이 있던 한강가 고사리 언덕은 일제 강점기에는 <한강신사>가 자리했다.
1970년대까지는 한강에서 '에어쇼'를 벌일 때
대통령등 주요 인사들의 관람석으로 기능을 했다.
효사정 언덕 북서쪽으로 난 나무계단 끝자락에 학도의용군 현충비가 있다.한국전에 참전한 중고등학생의 넋을
기리는 현충비이다.이곳 학도의용군 현충비에 새겨진 48명의 학도의용군은 영화 ‘포화속으로’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실제 ‘포항여중 전투의 희생자들’이다. 영화 속 김승우씨가 맡았던 역할은 故 김석원 장군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김석원 장군은 효사정의 ‘학도의용군 현충비’ 건립 하고자 추진하기도 했고, 서울 대방동에 있는 성남중고등학교 설립자이다.
1950년 6월 북한 김일성의 불법남침으로 국가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하자 책과 씨름하던 학생들이 자진하여 일어섰다.
징집대상이 되지 않던 14세에서 19세의 어린 나이 학생들, 이름 하여 계급도 군번도 없는 ‘학도병’이다. 무려 30만 학도들이
나라위해 총칼을 거머쥐었다.
수많은 전투가 이어졌지만 학도병 참여 전투 중 유명한 전투가 2010년 6월 영화로도 개봉된 ‘포화 속으로’의 포항전투다.
당시 육군 제3사단 소속 김춘식 학도병 등 71명은 1950년 8월 낙동강 최후 방어선인 포항에서 인민군을 맞았다. 낙동강 방어선마저
뚫리면 북한군은 포항을 장악해 경주, 울산을 통해 부산으로 가는 길을 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학도병들은 북한군의 공격을 4차례에 걸쳐 온몸으로 막아냈지만 김춘식 학도병 등 48명이 전사하고 23명만 살아남았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학도병 전투이기도 했다. 이들 꽃다운 청춘의 희생으로 3사단 후방사령부를 포함한 병력이 반격의
시간을 벌일 수 있었으니 영원한 이 땅의 수호신이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일어났다.
한국군은 속절없이 허망하게 밀려나 서울을 3일만에 북한군에 넘겼다.
한국전쟁 초기 한강에서는 북한군을 결사적으로 막아내는 '한강방어선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서 맥아더 장군은 한국군의 용맹성과 강한 전투의지를 확인하고 미국정부에
한국전 참전을 요청하기에 이른다.그 한강방어선전투의 전개상황은 이렇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다.
국군은 계속 북한군에 밀려 개성 철원 의정부 방어선이 차례로 무너졌다.
19050년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도 무너졌다.
국군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철수를 시작한다.
28일과 29일 사이 한강 남안에서 철수병력의 집결을 완료할 수 있었다.
서울을 상실한 국군에게 한강은 방어에 가장 양호한 지형이었다.
이제 한강선은 국군이 적을 어떻게 방어하느냐에 따라 이 국가의 존망이
결정될 만큼 중요하게 되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을 연한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결심한다.
육군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강선 방어임무를 맡겼다.
서울이 함락되자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6월 28일 낮 12시.
육군본부를 수원으로 이전하고 한강방어를 위한 조치를 취한다.
채 총참모장은 육군참모학교교장인 김홍일 장군을 총장실로 불러 한강방어를 요청한 것이다.
“선배님! 아군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길은 한강을 방어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참모장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총장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소관이 신명을 바쳐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8.15광복 당시 채병덕 총장은 일본군 소령 계급이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의 장개석의 신임을 받았던 중국군 소장 출신이었다.
채 총장은 김홍일 장군이 나이로도 약 20년 차이가 났기 때문에
군의 대 선배로 깍듯이 대접한 것이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장의 진정성이 넘치는 부탁에
승산이 없는 싸움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국가를 위해 그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최악의 상황과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김홍일장군은 한강선 방어를 책임지는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강선 방어의 책임을 수행하게 된다.
개전 3일 후인 6월 29일 도쿄에서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그 상공에서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는 수원비행장에 착륙했다.
맥아더 원수는 수원비행장에까지 친히 영접을 나왔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요담을 나눈 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김종갑 참모장의 안내를 받아
곧장 70세 노구로 지프차를 몰아 한강방어선을 시찰하였다.
그의 방문목적은 한국전황을 직접 살펴보고 지상군 파병의
필요성을 검토하기 위함이었다.
북한군의 막강한 일방적 포격을 받고 있는 영등포의
제8연대본부에 와서 적진을 쌍안경으로 직접 관찰하기도 하였다.
개인호에서 진지를 지키고 있던 병사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
그 병사는 맥아더 원수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직책이 무엇인가?"
"분대장입니다."
"언제가지 여기를 지킬 것인가?"
"소대장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지킬 것입니다."
"명령이 생명보다도 중요한가?"
"네. 그렇습니다."
"끝까지 명령이 없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싸우겠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두렵지 않습니다."
"음.. 알았다. 무엇인가 필요한 것은 없는가?"
"네. 우리는 지금 (M1)소총밖에 없습니다.
적의 전차와 대포를 때려잡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밖에는?"
"없습니다."
"음... 내가 여기 온 보람이 있었다.
내가 돌아가서 바로 미군 자상병과 병기를 보내주겠다.
용기를 잃지 마라."
맥아더 장군은 그 병사와의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한강선 시찰을 마치고 김홍일 장군에게 묻는다.
“김 장군! 지금 한강방어선은 언제까지 방어할 수 있습니까?”
김홍일 장군은 자신 있게 결연한 의지로 답변했다.
“공격과 방어의 배수 원칙을 감안할 때
앞으로 열흘 정도는 지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한강선 도처에서 한국군이 적의 보병이 도하해 오는 것을
단호하게 격퇴시키고 있습니다.
보병끼리의 전투에서 한국군이 적에 비해 단연 우세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김홍일 장군의 정연한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듯 했다고 한다.
맥아더장군은 한강선 시찰결과 전문을 30일 새벽 3시 미 국방부에 보낸다.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
백악군은 그날 오전 11시 공식성명을 발표한다.
“북한 침략자를 격퇴시키고 한국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데
대한민국을 지지해 달라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요청에 응하여
트르먼 대통령은 미 공군에게 군사적으로 필요하다면
북한의 어떤 군사목표에 대해서도 공격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한반도의 전 연안의 해상봉쇄를 명령했다.
맥아더 장군에게는 확실한 지상부대를 사용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다음날 맥아더 원수는 긴급전보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재일(在日) 제8군의 2개 사단 병력 출동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맥아더 원수가 아니고서는 미국의 본격적 참전이
이렇게 급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 30분 한강 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됨으로써
한강 이북의 수도 서울은 완전히 북괴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군은 한강이라는 자연적인 장애물을 이용하여
저지선을 구축하고 북괴군의 도하를 막게 되었다.
김홍일 사령관은 유재흥 준장을 제7사단장에 임명하여 노량진 방면에 배치했다.
이종찬대령을 수도사단장으로 임명과 동시에 영등포 방면에 포진케 하였다.
한강 저지선의 서쪽에서는 김포지구 전투사령부가 김포 비행장과 오류동 일대에서
북괴군의 진출을 억제하며 측면 지원을 하고 있었다.
서울을 점령한 북괴군은 제3사단 제4사단 제105 전차여단에게
‘서울사단’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등 기세가 등등했다.
미군을 포함한 국제연합군이 내원하기 전에 국군의 주력 부대를 섬멸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6월 29일 밤부터 북괴군은 한강 도하작전을 시작하였다.
북괴 제3사단은 30일 새벽에 서빙고에서 도하하여
동작동과 흑석동을 잇는 고지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들의 계획은 노량진 부근의 고지대를 장악하여
그 엄호 아래 폭파에 실패한 한강철교를 이용하여 전차를 도하시키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북괴군이 전차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고무된 우리 국군은 대등한 조건 속에서 북괴군 제3사단을 공격하여
커다란 타격을 가하면서 7월 3일까지 그들이 한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저지하였다.
영등포 방면에서는 국군 제8연대와 제18연대의 일부 병력이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수차례에 걸쳐 북괴군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여의도를 확보하고 있었다.북괴군은 불완전하게 파괴된 한강의 복선철교를 수리한다.
마침내 7월 3일을 기하여 전차를 도하시키고 이를 앞세워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국군의 한강 저지선은 붕괴되고 서울은 완전히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홍일장군의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한강방어선을 6일동안이나 지켜냄으로써
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미국이 한국전에 참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어내는 기대이상의 큰 성과를 거둔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1살 어린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참극을 겪은 정조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으려고 몸부림도 쳤지만 어린 세손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아버지 사도세자의 편에서 그 참삼을 막아보겠다고 나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참담하고 처절하게 죽어간 아버지 사도세자다.
그 아들 정조에게는 아버지의 처절한 죽음은 평생 한(恨)으로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정조는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고모부 박명원과 함께 그로부터 14년동안 풍수지리 공부와
왕릉 명당을 답사를 다녔다.
양주 땅 천하의 흉당 배봉산 자락 수은묘(垂恩墓) 에서 신음하고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좋은 자리로 옮겨 잘 모시고 싶어서다.
고산 윤선도가 효종의 왕릉 터를 잡았던 옛 수원읍치 화산자락에서 현륭원(顯隆園) 의
천하의 명당을 찾아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명당으로 모셨다.
그 무덤도 수은묘에서 현륭원으로 격상해 원래 세자의 무덤 원(園),
제 자리를 찾아드렸다.
정조는 옛 수원읍치 명당 현륭원에 계시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몹시 그리웠다.
그럴 땐 불쑥 아버지를 뵈러 현륭원으로 거둥했다.이른 아침 창덕궁을 떠난 왕의 행차는
점심나절 과천 땅 노량진에 이른다.능행길에 나선 이들이 점심을 들며 잠시 휴식할 수 있는
행궁을 마련했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다.
그 정자의 이름에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의 한(恨)을 읽을 수 있다.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난다."용과 봉황은 바로 왕을 상징한다.아버지 사도세자는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러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왕으로 모시고 싶었다.
아버지를 뵈러가는 길목에 잠시 쉬어가는 행궁의 이름에 용과 봉황을 넣어 아버지 사도세자를
왕으로 정중하게 모셨다.아들 정조는 한 맺힌 아버지에 대한 효심(孝心)이 짙게 배어있다.
점심을 들고 잠시 휴식을 취한 정조의 일행은 남태령을 넘어
저녁나절 과천에 도착해 행궁 온온사에서 하루밤을 묶는다.
정조 일행은 이튿날 행궁 온온사를 떠나 안양을 거쳐
수원 융릉을 찾아 아버지 사도세자를 뵙는다.초기 능행길이었다.
능행 길의 정조는 과천 갈현동 고개근처에서 몹시 갈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 부근의 우물에서 물을 떠서 왕에게 올렸다.
정조는 "그 우물 물이 아주 차고 맛이 좋구나!"라며 우물에
가자(加資)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갈현동 지(誌)는 주민 김석근 옹의 구술을 인용하여
이 우물의 전설을 전한다.
"그 얘기는 (정조가) 여기 지나가다 물맛을 보구 물이 차서 찬우물이라 이름을 지었다구
노인네들이 그래요. 벼슬을 가잿물루 가재라구 벼슬을 줬대는 거예요.여기 지나가다가."
정조는 가자우물의 물맛이 참으로 좋아 처음에는 능행길의 필수코스였다.
어느날 정조는 가자우물에서 참으로 소름끼치는 끔찍한 말을 들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가담한 김상로의 형 김약로 묘소가
가자우물에서 머지 않은 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정조는 즉각 능행코스를 바꿔지다고 했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끈 숙의 문씨를 즉시 주살하고 자주 이 곳에 내려와
아버지의 능을 참배하였다.
참배 행렬은 초창기에는 한양을 떠나 노량진·과천·수원을 거쳐
화산에 이르는 지름길을 이용했으나, 과천 가자우물에 사도세자
죽음에 가담했던 김상로의 묘가 있어 그 길을 피하고
노량진·시흥·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바쁘지 않고 늘 한가한 벼슬아치로 소문난 능참봉도
잘못 걸리면 한 달 29일을 제사지낸다는 말이 생겨났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소원대로 수원 화산 명당자리에 옮겨 제대로 모시게 되었다.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그래도 보고싶은 아버지다.왕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뵈러 수원으로 거둥했다.
그때마다 6천여명의 일행이 왕을 따랐다.
그때 한강을 건너는 일이 능행길에 가장 큰 문제였다.
아버지 3년상을 치르고 있는 다산 정약용을 불러 올렸다.
그에게 강을 쉽게 그리고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배다리(舟橋)를 놓도록 어명을 내렸다.
다산 정약용은 배다리를 놓을 자리로 노량진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결정한다.우
선 600여척이나 되는 배를 확보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그때까지는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배를 징발해서 배다리를 만들었다.
다산 정약용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왕의 애민(愛民) 위민(爲民)사상을 생각해서다.
밤섬에 있는 경강상인들의 조선소를 찾아 협상을 했다.
배다리용 배를 공급해주면 세금으로 거두는 곡식을 운반할 수 있는 일체의
권한을 경강상인들에게 주는 조건을 걸었다.배는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가장 웅장하고 안전하면서도 아름다운 배다리를 노량진에 건설할 수 있었다.
정조는 자신을 그렇게 따르던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고 제작한 배다리를 이용해
마음껏 능행길에 나설 수 있었다.
강폭이 좁고 물의 흐림이 느린 노들나루다.
그 노들나루에 배들을 옆으로 나란히 대고 그 위에 나무판을 얹어 연결했다.
다리의 좌우에는 난간도 만들고 왕의 위엄을 보이고자 화려한 것발도 꽂았다.
배다리 가운데 부분이 가장자리 부분보다 약간 높게 만들어졌다.
다리 양쪽과 중앙에는 홍살문이 세워졌다.수많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행차하는 왕의 모습을 보며 백성들은 왕의 존재와 권위에 경외심을 느꼈을 것이다.
배다리의 건설 수리 관리 등을 전담하는 특별기구 주교사(舟橋司)다.
용양봉저정 앞에 그 푯석이 있다.
‘주교사는 임금이 행차할 때 한강에 부교(浮橋)를 놓는 일과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의 조운(漕運)을 맡아보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정조 13년(1789)에 설치되었으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된 후
업무가 금위영(禁衛營)에 이관되었다’
왕이 관심을 갖고 직접 관리하는 배다리이고 주교사다.
그 주교사의 우두머리로는 당상관(정3품 상관)을 임명했다.
정조시대에는 김조순 등 앋대 최고의 실세들이 주교사 당상관으로
활동해서 주교사의 위상과 파워는 가히 조선 최고였다.
1907년(융희 1)에 순종이 일본에서 귀국한 유길준(兪吉濬)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용양봉저정을 하사하면서 군주가 이곳에 머무는 일은 없어졌다.
유길준은 옛 이름 용양봉저정을 사용하지 못하고 조호정(詔湖亭)이라고 고친다.
유길준은 용양봉저정을 하사받고 이렇게 그 감회를 밝힌다.
"강호에서 흰 머리카락이 내 마음 마냥 기다란데/
만년의 은거할 게획은 아직 세울 겨를 없었다네
화산의 세 봉우리는 진단이 은거하던 곳/
섬계 한 구비는 하지장이 하사받은 땅/
도성의 남쪽에서 재산 일굴 마음이 없는데
무슨 공이 있어 대궐 곁에서 광영을 가까이 하랴!/
묽은 죽도 원래 임금님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
이 몸이 대대손손 성은을 차마 잊을 수 있겠는가."
김윤식은 조호정기(詔湖亭記)에서 그 사연을 이렇게 전한다.
“이부(吏部)의 구당(榘堂) 유공(兪公)이 일본에서 돌아오자
황제께서 그가 오랫동안 외국에서 나그네 생활을 한 것을 생각하여
특별히 노호(鷺湖 노량진) 가에 집을 하사하셨으니 옛날 행행(行幸)하실 때
쓰던 별관인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이것이다.
구당은 임금의 특별한 은총에 감격하여 그 정당을 봉인하고 감히 거처하지 않았다.
그 집의 현판에 ‘조호정(詔湖亭)’이라 하였으니 하지장(賀知章)의 감호(鑑湖)
고사를 취한 것이리라........“
유길준은 감히 왕이 머물던 정당(正堂)에 기거하지 않고
조호정(詔湖亭)이라는 현판을 단 별채에서 살았다.
유길준은 여기에 살면서 <대한문전>을 쓰고 사범학교를
세우고 흥사단을 만들었다.
그는 1915년 노량진에서 마지막까지 살다가 59세에 용봉정에서 죽었다.
일본이 일찍이 남작의 작위를 주었으나 거절했다.
죽을 때 나라에 공이 없으니 묘비를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1937년 《대경성사진첩(大京城寫眞帖)》에서 용양봉저정은
일본인의 위락시설 용봉정(龍鳳亭)에 포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용양봉 저정 왼쪽으로 새로 조성된 각종 유원지 시설이 보인다.
요정 용봉정은 1932년 개업하였다. 주인 이케다 나가지로(池田長次朗)가
용양봉저정을 중심으로 더 확장해 약 5,300여평의 지역에
유원지 시설(온천, 무도장, 식당, 운동장, 꽃밭 등)을 추가하여
거대한 환락장소를 만들었다.요리 료칸과 대중목욕탕을 시간제 대여 방식으로
운영하여 고객들의 호평을 얻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