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강 탐사기행을 나선지 어느덧 2년이 되어간다. 마을마다 골짜기마다 쉴 날 없이 찾아다녔다. 어느 날은 모 심는 논두렁에서 마을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어느 날은 여물 끓이는 부엌에서 언 발을 녹이며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서석 내촌 두촌 등 화양강의 상류지역을 둘러보며 마을의 유래와 지명과 이야기로 전해오는 설화 등을 채집하고 쓰면서 힘든 만큼 즐거움도 컸다. 말(이야기)이 기록으로 남겨진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이 기록은 홍천의 자연과 삶을 보여주는 역사가 될 것이다. 홍천강 발원지인 '미약골 모두부치'부터 시작하여 출발점에 섰던 '연봉다리'를 건너고 있으니 참 오래도록 걸어온 셈이다. 그때도 봄이었고 얼음이 녹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렇게 길을 나섰고 그렇게 지나고 있는 동안 변할 것은 변하고, 사라질 것들은 또 사라졌지만 마음의 골방 같은 삶의 기억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현재라는 시점은 그래서 생동감이 넘친다. '연봉'이 그런 곳이다. 예전에 홍천읍내와 연봉을 이어주던 다리는 '연봉다리(지금의 홍천교 구다리)' 말고 또 하나 있었다. '홍천문화원' 옆 골목으로 빠져 나와 제방 돌계단을 내려와 강을 건너 '절골(남산골)'로 가던 '섶다리'였다. 다리를 건널 때 달강달강 소리가 난다하여 '달강다리'라 이름을 붙인 시인도 있는 이 다리의 추억을 불러낸 것은 강경보 시인의 첫 시집 <우주물고기>였다. 홍천 연봉 출신의 강경보 시인(홍천출생.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당선)은 <시인의 말>에서 강물소리를 빌어 운을 떼고 있다. 이런 일들이 생각난다 화양강 물안개 자욱한 아침 그대 건너오는 다리를 나는 건널 수 없어 강변 뚝방 풀길 따라 한참을 돌아 남산 건너는 나무다리에서 흔들렸지 또 이런 일들이 생각난다 하찮은 것들이 가장 아름다울 때 그대는 떠났고 내 몸에서 봄을 맞은 풀벌레 이파리 푸른 날들 내 가시에 한없이 질렸던 일 그것이 바로 어제였다
강경보 < 우주물고기 중에서 시인의 말>
시인의 말처럼 '바로 어제였다'는 말이 추억이다. 바람이 왼쪽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그 다리는 마음의 눈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고 길과 길을 이어주고 이별을 인연으로 맺어주기도 했던 다리였으니 '달강다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물소리처럼 지나가는, 아니 겨울바람처럼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여 추억의 발자국 소리를 들어야 한다. 홍천 읍내를 돌아 흐르는 '화양강'은 추억으로 가는 강이다. 한때는 시인묵객들이 찾아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며 머물렀던 '범파정'이 있었고, 서울을 오르내리던 새나루가 있었으며, 겨울이면 썰매타기 대회가 열렸던 강이다. 장마가 오고 물이 많아지면 아이들은 화양교(동면다리)에서 물로 뛰어내려 헤엄을 쳤다. 강물과 함께 떠내려가다가 보면 어느새 '개때배기 당간지주'께에 닿았다. 불알을 움켜쥐고 달아났던 어린시절을 강물은 기억한다. 강가에는 '아갈바위'와 갈미바위(연봉다리 부근)가 있었고, 낚시꾼들만 아는 '붕어굴'이 있었다. '붕어굴'은 지금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낚시를 한다. 연봉 '밤나무골'에서 흘러내리던 개울은 삼호아파트를 지나 '홍천교(연봉다리)'로 흘러들었다. 삼호아파트가 들어서고 연봉 택지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지금은 삼호아파트 앞 삼거리 근처로 퇴수구가 생겼는데 '붕어굴'은 바로 그 아래쯤이다. 연봉을 가로막은 것은 홍천 연봉의 제사 공장이었다. 홍천의 상징처럼 거대한 굴뚝이 서 있었다. 그 후 고려가구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아이파크와 태영임대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그 뒤로 옛날에는 '에기골'로 이어지는 둔덕 어귀에 '학교연못'이라 불리던 연못도 있었는데, 지금은 44번 외곽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산 뒤로 '남산등산로'가 이어진다. 남산등산로는 '밤나무골'에서 시작된다. 어귀에는 '홍천세무소'와 '생명과학관'이 자리하고 주차장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산림욕장'과 '숲체험장'이 이어진다. 한때 서쪽으로 이어진 '밤나무골'에는 '영안모자'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전자 부품공장이 들어서 있다. 연봉은 홍천 발전의 모델이 되고 있다. 연봉이 깨어난 것은 삼호 아파트의 건설과 맥을 같이한다. 연봉 강변에 임대아파트인 삼호아파트가 들어서고 또 그 일대에 택지개발이 이루어지면서 홍천의 강남으로 급성장을 한다. 그 후 현대아파트, 청솔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많은 인구가 유입된다. 홍천에서는 홍천초등학교가 제일 컸다. 연봉이 점차 커지면서 1971년 9월18일 남산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그 후 학급수가 늘어나 지금은 홍천에서 학생 수가 제일 많은 학교가 되었다. '연봉'은 버덩보다는 골짜기가 많은 구릉이었다. '연봉'은 '오음산' 자락의 끝을 이루는 봉우리가 연이어 둘러서있는 마을이다. '무화궁화공원'이 자리 잡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둘러선 봉우리들이 연꽃잎처럼 감싼다. '연봉'에는 조선시대 보안도에 딸린 '연봉역'이 있었다. '관텃골 <관대(官垈)>'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지금의 '무궁화공원'과 '연봉 사거리'로 5번 국도와 44번 국도가 만나는 곳쯤이다. 홍천에는 '연봉역'과 '천감역(천현리)', '창봉(당시는 홍천 땅. 지금은 횡성군 공근면 창봉리)역이 있었다. 중심역은 본래 보안역(保安驛:춘천)이었으나 뒤에 단구역(丹丘驛:원주)으로 옮겼다. 이 역도(驛道)에는 찰방(察訪)이 있었으며, 춘천-홍천-횡성-원주-강릉 방면, 원주-평창-정선-강릉 방면, 평창-영월-정선-강릉 방면으로 이어졌던 역로는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지속되었다. 연봉에는 봉우리들이 둘러서있어 골짜기가 많은듯하지만 큰 골짜기는 없다. '관터골'과 '절골', '밤나무골' 정도이고, '배무기'와 '안말'을 중심으로 인가를 이루었다. '절골'은 지금의 '남산골(백정골)'이라 불리는 골짜기로 '홍남사'가 자리하고 있다. 홍천 KBS 중계소가 있었던 그 일대는 '옹기가마터'였다. 홍천에서 제일 큰 가마가 있어 '점말'이라고도 했다. '배무기'는 '포항촌'이라고도 하는데 서울을 오르내리던 배들이 쉬어가던 곳이었다. 지금의 '연봉검문소'가 자리한 일대로 '삼마치'-'장전평'개울이 흘러드는 내치기이다. '안말'은 지금의 '홍천기상대' 일대가 되고, '새말'은 '신촌(新村)', '간촌' 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지금의 남산초등학교 아래쪽 일대가 된다. '홍천교(연봉다리)'근처는 '오리나무정'이라 하고, 특히 '화양제재소'자리는 마방이 있던 곳이며, 건너편 터미널일대( 윤성일 정형외과)는 '오리정'이라 했다. 뱃터도 있었고 '오리정'이란 정자가 있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사람을 보내고 맞이하던 곳에 터미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홍천은 '무궁화 메카도시'다. 홍천을 찾는 사람을 반겨주는 것도 무궁화 꽃이다. 무궁화라는 상징적인 우리나라 꽃의 이야기는 한서 남궁억 선생이 홍천에 자리 잡았던 모곡을 중심으로 다시 둘러보며 이야기하기로 하고, 무궁화공원으로 들어섰다. 지금 무궁화공원이 들어서 있던 곳은 작은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고, 포도원이었다. 포도가 익는 팔월이면 놀러가던 작은 동산이었다. '무궁화 공원'은 일제강점기에 무궁화를 널리 보급한 한서 남궁억 선생을 기념하여 세운 공원이다. 지금은 홍천 향토사료관과 무궁화 꽃을 테마로 한 광장이 자리하고 있고, 울타리를 돌아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운동장과 남궁억의 시비와 군민헌장 기념비, 충혼탑,3·1만세탑, 6·25전쟁 홍천지구전투 전적비, 전 국회부의장 동은 이재학 기념비, 반공희생자위령탑, 통일정 등이 있다. '연봉사거리'에서 원주로 넘어가는 고개를 '관터고개'라 한다. '관터고개'를 돌아가면 '장전평'으로 이어지는 '장승배기'다. 길가에는 부엉바위가 있고 홍천도축장이 자리 잡은 장전평어귀의 큰골은 미루나무골이라 하여 여름에는 물놀이를 다니던 곳이다. 바로 어제의 일처럼 스치는 '삼마치'와 '장전평'은 숨을 고른 다음 길을 나섰다. 화양강 상류지역이 산촌마을의 소박하고 정적인 삶이라면 연봉부터 마곡으로 이어지는 홍천강 하류지역의 이야기는 순수하고 역동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역동적인 삶의 중심에는 강이 있다. 강은 생명이자 삶의 근원이다. 상류지역의 화양강이 거친 숨을 내뿜으며 승천하는 용의 형상이라면 연봉부터 이어지는 홍천강은 잔잔하면서도 속 깊은 재즈 같은 강이다. 보헤미안의 여유를 가지고 그 물결에 몸과 마을을 실어 보내며 돌아봐야 하는 강이다. 홍천군이 추진하고 있는 홍천강 테마 로드는 자연을 가슴에 품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작업이다. 강에 발을 담그고 물속에서 전해오는 소리를 듣는다. 흘러가면서 물의 이야기를 만들고 물의 소리를 만들고 물의 몸짓과 물의 그림을 만든다. 강이란 악기는 자연이 우리에게 베푸는 오케스트라이며 고전적이고 또한 전위적인 삶의 문을 열어준다. 물은 만물의 원형질이며, 모든 신과 사물의 뿌리가 된다. 물을 보고 있으면 스스로 고독해지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홍천강을 따라 떠나는 재즈 같은 여행은 연봉나루 부터 시작된다. 연봉과 읍내를 이어주던 유일한 다리였던 연봉다리는 바로 '연봉나루'였다. 지금은 옛 연봉다리 옆에 4차선의 교량이 놓여있다. 서울에서 올라온 배는 이 연봉나루와 강건너 '화양강진'에서 머물렀으며 겨울이면 다리를 놓아 건너다녔던 곳이다. 다리를 건너 제방을 따라 내려가면 수중보가 있고 긴 여울을 지나면 '송학정(松鶴亭)이다. 두개비산의 한 자락이 북방 '새둔지(사둔지)'로 이어지며 '작은솔밭'을 이루었고, 그 능선을 넘는 고개는 북방면 하화계 '새터'에서 홍천읍 희망리 '성여동'으로 가는 '잣고개'다. 홍천현의 '사직단(社稷壇)'이 있었다고 하는 이 고갯마루에서 '작은솔밭' 쪽으로 내려가면 화양강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절벽위에 송학정(松鶴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소나무가 많고 학들이 쉬어가던 곳인데 이곳에 정자를 짓고 시를 읊고, 활을 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머문 선비나 시문을 찾지 못해 아쉽다. 또한 정자는 한국 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그 터에서 기왓장만 뒹굴고 있다. 송학정 아래는 특별한 지명은 없고 '송학정께'라 한다. 강 건너 제방길은 화랑아파트 뒷쪽을 지나 '배무기'까지 이어진다. '배무기'는 지금 검문소가 자리하는 곳 일대가 된다. '배무기'는 또한 '삼마치개울'이 '화양강'으로 흘러드는 함수머리다. '오음산'의 '싸리재골'과 '솔골', '귀영고개' 밑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삼마치 -장전평을 지나며 '삼마치약수터'를 비롯하여 '옥류동계곡'을 이룬다. 삼마치계곡이라 하면 '삼마치약수터'를 두고 말하는데 너럭바위와 맑은 물로 찾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펜션이 들어서고 오염되어 찾는 이들이 많지 않다. 삼마치 계곡의 백미는 '옥류동'이다. '옥류동'에는 '옥류동천(玉流洞天)'이라는 글귀가 바위에 음각 되어 있었고, 옥류동에는 정인보 선생의 시가 남아있지만 5번국도 확포장 공사로 자취를 감추었다.' 성산터'로 이어지는 '옥류계곡'에는 폭포가 있어 한 여름에는 물과 그늘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계곡 안으로 들어가면 '금룡사'라는 절이 있고, 그 위쪽은 신선들의 놀이터이며 무릉도원 같다는 '성산터'다. 앞으로는 '오음산'이 뒤로는 '봉화산'이 감싸 안은 마을이다. '버덩고개(성산터고개)를 오르는 길이 만만치 않지만 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서면 정말 아늑하고 고요하다. '삼마치'로 이어지는 '터개울'과 '봉화산'에서 이어지는 '쇠미답골'에서 샘이 흐른다. 골막에서 서낭당이 있던 '먹실고개'를 넘어 '먹실 응달말'로 가기도 하고, '갈골 진둔지'로 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길이 끊기고, '산지당골'과 '멍달이', '여우박골'의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성산터 골짜기의 물이 금룡사를 감고 돌아 흐르면서 '옥류동계곡'을 이룬다. 큰길가에서 '삼마치 개울'과 만나는 합수머리 아래쯤에 바위가 단애를 이루었고 장전평의 명소였다. '장전평'은 '봉화산'을 중심으로 '갈골', '논골', '큰골(미루나무골)','성산터' '안흥', '먹실' 등이 작은 부락을 이루고 있다. 5번 국도를 따라 길게 이어진 '장전평'의 '긴밭뜰'은 '장전분교'터를 중심으로 '검둥애골' 어귀까지 이어지는 뜰을 두고 부르는 지명이다. '장전평'의 '갈골' 안막에는 '진둔지(榛屯地)'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고개만 들면 봉화산이 눈앞에 다가서는 '진둔지'에는 '상원조경'이라는 정원공원이 있다. '갈골'에서 고개를 넘으면 '안흥'이다. '안흥'과 '먹실', '너븐터(높은터)'는 '오안리 양지말'에서 오르는 길을 권하고 싶다. '삼마치개울'이 화양강과 만나는 '배무기'는 '오안리'와의 경계이다. 지금은 검문소가 자리하고 있고, 5번 국도와 44번 국도가 만나는 교차로이기도 한 이곳은 '무궁화 공원'이 있다. 다리를 건너면 '둔지'다. 그러나 '둔지모퉁이'로 더 알려져 있다. 이곳은 한때 산 밑에 무허가 주택을 짓고 몸을 파는 성인 업소가 자리했던 곳이다. 왼쪽으로 들어서면 '열산골(여산골, 을산골, 개산골(呂山谷, 開山谷)'이다. 말을 풀면 깊은 의미가 담긴 곳이지만 이곳에 도살장이 들어선 이후 을씨년스런 마을로 바뀌었다가 도축장이 '장전평 미루나무골( 큰골)'로 이전한 후, 한전이 들어서면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마을 뒤로는 고속도로가 지나고, 앞으로는 5번 국도가 지나는 '을산골' 안막은 '구시울'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나있다. '오안리'는 '상오안', '하오안리'로 나누어지는데 그 경계는 '양지말 개울'이다. 홍천에서 서울로 가는 길가에 자리잡은 '오안리'는 물줄기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오안천의 물줄기는 '너븐터'와 '공골'이다. '너븐터'는 '삼마치2리'다. '높은터'라 해야 금방 알아듣는다. '삼마치 솔골'로 들어서서 '귀영고개'를 넘으면 '너븐터'다. '귀영고개'는 '조치(槽峙)'라고도 하는데 고개 모양이 구유같이 생겼다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넘었지만 가파르고 구비가 많다는 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을 만큼 험난하다. 원래의 '귀영고개'는 '솔골'에서 '산창분교(폐교)'뒤로 넘는 길이었으나 임도를 개설하면서 '웃너븐터'로 다시 길을 냈다. 임도는 '웃너븐터'를 가로질러 '삼막골'로 이어지고, 그 끝은 옛 삼마치 고개를 넘어 터널 아래쪽으로 이어진다. 보기보다 임도가 길다. 넉넉잡고 두 시간 쯤 산행한다고 마음먹고 들어서면 치악산, 태기산, 금물산 등이 펼쳐놓은 영봉들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양지개울'은 바로 '솔골재(너븐터에서 귀영고개를 부르는 이름) 밤나무골'에서 시작한다. '웃너븐터'는 '솔골재'를 비롯하여 '밤나무골' '서낭당골' ‘소죽은골' '삼막골'을 품으며, 뒤로는 '영산재'를 능선으로 하여 너른 둔덕을 이룬다. 골프장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많은 집들이 비어있다. 다 떠난 것이다. 그래도 마을을 지키고 있는 집이 있어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홍천의 오지중의 오지로 버스도 들어오지 않지만 떠날 수 없는 까닭은 고향이기 때문이다. 선대의 묘지가 산 아래 있고, 선대가 물려준 땅인데 쉽게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분명 골프장은 들어올 것이지만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무엇으로 감싸 안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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