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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데도보 국제공항은 모스크바 시 남동쪽 42킬로 떨어진 러시아의 주요 국제 공항이다. 2010년도 이용객이 2,200만이 넘었는데, 당시 20곳의 러시아 국제공항 중 최대 규모였다. 러시아 수도를 방문하는 외국인 여행자나 근로자들이 이용하는 러시아의 관문이었다.
도모데도포 공항
2011년 1월 24일 오후 4시 30분, 20살의 잉구쉬인이 공항 대기실에 나타났다. 마고메드 예브로에프로. 잉구세티아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이었다. 2010년 6월에 잡힌 잉구세티아 반군 수장인 알리 타지에프(아미르 마가스)의 가명 중 하나도 마고메드 예브로에프였다.
도모데도포 공항 라운지
흔한 이름의 잉구쉬인은 비행기를 기다리던 외국인과 러시아인 관광객 사이에서 ‘자폭 조끼’에 차고 있던 쇳조각과 구슬을 철사로 동여맨 5킬로의 TNT를 터트렸다. 러시아, 영국, 독일 등 14개국에서 온 37명이 죽고 173명이 부상을 입었다. 공항 전체가 아비규환이었고 러시아 정부는 도모데도보 공항에 착륙하기로 했던 모든 비행기를 모스크바 남서쪽 28키로 떨어진 브누코보 국제공항으로 유도해야 했다.
도모데도포 공항 폭발 순간
이 사건은 러시아 전역에 엄청난 충격을 줬고, 러시아 주요 증시인 모스크바 은행 간 외환거래소(MICEX)가 즉각 2퍼센트 하락하는 등 심리적인 타격을 줬다. 당시 러시아 대통령 메드베데프는 러시아 내무부 교통국장인 안드레이 알렉세프를, 내무부장 라시드 누갈리에프는 모도메도보 공항 경비대장을 각각 해임했다.
공항 테러 조사 위원장에게 지시하는 메드베데프 대통령
한동안 러시아 정부는 범인의 국적, 인원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점차 코카서스 반군의 짓으로 수사 방향이 잡혔고 이에 대해 도쿠 우마로프는 2011년 2월 4일에 ‘카프카즈 센터’ 사이트에 비디오 한편을 공개해서 이를 확인시켜줬다. 검은색 성전 깃발 앞에 앉은 도쿠 우마로프의 오른쪽에는 ‘리야드 알 살리힌’(자폭 부대)의 수장인 함자트가, 왼쪽에는 마고메드 예브로에프가 앉아 있었다.
좌측부터 함자트, 도쿠 우마로프, 마고메드 예브로에프
영상 속의 우마로프는 “러시아에게 올해는 피와 눈물의 해가 될 것이다.”고 경고하며 더 많은 테러 공격을 약속했다. 자신을 리야드 알 살리힌 부대원으로 소개한 예브로에프도 자폭 테러를 결심하며 “많은 사람이 내 뒤를 따를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
러시아 정부로서는 그저 허풍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었다. 1년 전인 2010년 3월 29일에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자폭테러가 발생한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당시 2명의 다게스탄 여자들은 출근 시간대의 루비양카역(07시 56분)과 쿨투리 공원역(08시 38분)을 40분 간격으로 자폭해서 40명이 죽고 100명이 부상을 입게 만들었다.
쿨투리공원역 테러 현장
도쿠 우마로프는 어느 때건 모스크바 지하철과 러시아 최대 공항에서 무차별 테러를 가할 수 있었다. 분열 와중에도 코카서스 반군들은 각각의 조직이 러시아에게 큰 위험이 되었고 상당한 부담을 안겨줬다. 러시아 군과 정보부는 추가 테러를 막기 위해 도쿠 우마로프의 흔적을 찾고자 더욱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리야드 알 살리힌 자폭 테러 요원
2010년 3월 28일, 러시아군은 도모데도포 공항 테러와 관련된 반군의 실마리를 잡았다. 잉구세티아 순젠스키 지역 베르히니 알쿤 마을 근처에 해당 반군의 은신처가 있다는 첩보가 입수 된 것이다. 러시아 대테러 부대는 완벽한 보안을 유지한 채 지상군과 공습을 병행한 작전으로 17명의 반군을 죽이고 2명을 생포하였다. 러시아측 발표로는 이 과정에서 FSB 요원 2명과 내무군 장교 1명이 죽었다.
베르히니 알쿤 전투 현장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주변이 페허가 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사살된 반군 중에 도쿠 우마로프의 시신이 있기를 기대했지만 우마로프는 없었다. 2000년이후 벌써 7번이나 러시아군은 우마로프의 사살을 발표했지만 번번이 빗나갔다. 대신에 그에 준하는 반군의 죽음이 확인되었다. 코카서스 에미레트 전체 서열 2위이자 우마로프의 후임이었던 수피얀 압둘라예프였다.
수피얀 압둘라에프
붉은 수염으로 ‘붉은 수피얀’이란 별명이 붙었던 수피얀 압둘라에프는 이미 1980년대 후반 소련공화국 내 ‘이슬람 부흥 정당’에 참여하였고, 1차 체첸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94년 11월 26일 반 두다에프군이 그로즈니를 공격했을 때 이에 대항한 전투(1차 그로즈니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후 1차와 2차 체첸전의 모든 그로즈니 전투에 참전하여 살아남았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반군들의 전설적인 존재였다.
1994년 겨울 2차 그로즈니 전투 당시의 체첸군
17년의 전투 경험을 갖고 있던 수피얀 압둘라에프는 가장 노련한 지휘관이자 이슬람 학자로서 카바르다의 세이풀라와 함께 코카서스 에미레트의 설립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며 시스템을 갖추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2010년 도쿠 우마로프가 체첸 반군들의 요구에 따라 코카서스 에미레트 수장을 물러났을 때 이를 번복하도록 설득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좌측이 수피얀 압둘라에프
오랜 전투 경력과 ‘다다(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반군 내 인망이 높은 점을 고려할 때 수피얀 압둘라예프는 도쿠 우마로프의 든든한 후임이었다. 도쿠 우마로프가 체첸 반군의 반발을 사고 있는 상황에서 수피얀의 죽음은 체첸인 중에 코카서스 전체를 아우를 수장 후보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는 코카서스 반군 내의 체첸 반군의 입지를 매우 약하게 만들었다.
잉구세티야에서 큰 작전을 끝낸 러시아는 체첸 산악지대에도 결코 눈을 떼지 않았다. 3주 뒤인 2011년 4월 21일, 체첸 공화국 서전 유르트 마을의 동쪽 산악 지대에 여러 지역의 체첸 정부군이 집결했다. 카디로프가 자랑하는 ‘유르그(남쪽)’ 대대, ‘테레크’ 특수부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체첸 정부군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듯 산악 지대에서 수색 작전을 벌이며 점점 포위망을 좁혀갔다.
체첸 정부군 유르그 대대
오전 11시 50분, 6명의 반군이 토벌대와 접촉했다. 반군들은 신속하게 2-3명으로 나눠서 흩어졌는데 그중 2명은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 친러시아 특수부대는 반군들을 사살했고 신원을 곧 확인. 이레즈 술티고프라는 잉구쉬 출신의 반군과 체첸 외국인 무자헤딘의 수장인 무하나드였다.
무하나드. 반군들은 아부 아나스라고도 불렀다.
본명이 할리드 유슈프 무하마드 알 에미레트로 알려진 무하나드는 1999년 2차 체첸전 때부터 체첸에 온 사우디인으로 요르단 공군에 복무하고며 미군 군사 훈련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우수한 지휘관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그를 ‘북코카서스의 알카에다 대사’로 불렀으며, 람잔 카디로프는 ‘가장 악명 높은 반군 두목 중 한명’이며 특히 ‘반군의 자금줄을 담당하고, 반군 훈련 및 테러 계획 수립을 주도했다’며 매우 기뻐했다.
무하나드는 체첸 내 가장 경력이 오래된 아랍 무자헤딘이었지만 2010년 도쿠 우마로프와 체첸 반군의 분열의 핵심 인물이기도 하였다. 수피얀과 무하나드의 죽음은 체첸 반군 양쪽에 각각 큰 타격을 입혔고 서로 교섭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도쿠 우마로프와 독립한 체첸 반군 입장에서는 자금 지원을 담당하는 무하나드의 죽음은 보급을 매우 힘들게 만드는 원인도 되었다. 우마로프도 어쨌든 가장 전투력이 우수한 체첸 반군이 필요했으니 교섭이 이뤄졌다.
우마로프에게 반기를 들 당시의 무하나드
결국 2011년 7월, 체첸 반군의 수장인 후세인 게카에프와 아슬란벡 바달로프, 그리고 몇몇 체첸 반군 지휘관들은 도쿠 우마로프와 만났다. 평소와 같은 ‘작전 회의’ 목적의 회합이 아니라 도쿠 우마로프가 분열의 책임을 묻기 위한 ‘샤리아 법정’을 열기 위한 자리였다.
'샤리아 법정'을 주재한 도쿠 우마로프
이 ‘법정’을 주재한 도쿠 우마로프는 체첸 반군 지휘관들에게 기존의 충성 맹세를 반복할 것을 요구했고, 출석한 반군 지휘관들은 다시 충성을 맹세하고 이를 영상으로 기록했다. 이후 도쿠 우마로프는 체첸 서부 전선 지휘관으로 리야드 알 살리힌의 부대장인 함자트(아슬란 부투카에프)로, 동부 전선 지휘관을 후세인 게카에프로 임명했다.
아슬란 부투카에프
2010년도 체첸 반군이 반기를 든 시점에 갑자기 등장하여 도쿠 우마로프의 심복이된다.
우마로프는 동시에 체첸 반군의 부 지휘관으로 후세인 게카에프를 임명했다. 수피얀 압둘라에프의 사후 공석이었던 자리로, 명목상 체첸 반군 지휘관을 우마로프가 겸했는데 사실상 후세인 게카에프에게 중임을 줘서 다시 지휘 하에 들어온 반군들을 다독이려는 목적이 강했다.
후세인 게카에프
도쿠 우마로프도 체첸 반군 내의 그의 위치를 존중했다
다만 잠시나마 우마로프로부터 ‘코커서스 에미레트’의 수장 자리를 넘겨받았던 아슬란벡 바달로프에게는 별다른 직책이 없었고, 기존 서부 전선 지휘관인 타르칸 가지에프는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영상에 나온 게카에프와 바달로프가 매우 위축된 것이 확연하여 결코 대등한 관계의 화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좌로부터 아슬란벡 바달로프, 도쿠 우마로프, 후세인 게카에프
참석하지 않은 타르칸 가지에프가 과연 도쿠 우마로프에게 다시 충성을 맹세했는지 논란이 분분했다. 체첸 서부에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던 타르칸 가지에프는 2010년도 4월 중순부터 6월 말까지 그로즈니 남서부 지역에서 14-15회나 전투를 벌일 정도로 활발한 지휘관이었고 작전 수행을 위해 불참한 것일 수 도 있었다.
맨 좌측이 타르칸 가지에프
하지만 그 뒤에도 충성 맹세를 하지 않았고, 도쿠 우마로프도 기존의 타르칸의 자리인 체첸 남서 전선 사령관 직책을 없애고 서부 전선으로 통합한 뒤 자신의 심복인 함자트를 임명한 것으로 볼 때 석연치는 않았다. 그 뒤로 코카서스 에미레트의 공식 발표 및 영상에는 타르칸의 이름 및 활동이 없어졌고 타르칸 역시 체첸 내에서 잠적하였다.
2013년 초부터 타르칸 가지에프는 체첸을 떠났다는 소문이 돌더니, 결국 2014년 8월 라디오 리버티 인터뷰에서 본인이 직접 이를 시인하였다. 당시 시리아 내전이 활발하여 시리아로 건너간 체첸인들이 많았는데, 보통 기존 반군 세력과 합류하거나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었다. 이 중에는 ‘타르칸즈 자마트’라는 소규모 부대도 있었는데 타르칸에 충성하는 체첸 반군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었다.
2015년 시리아 이들리브의 타르칸즈 자마트
결국 도쿠 우마로프와 체첸 반군의 분열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억지로 봉합된 것이었다. 체첸 반군들의 요구 사항이 관철되지 않은 채 도쿠 우마로프가 다시 수장이 된 셈인데, 체첸 반군들은 이를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하거나 복종할 수 없다면 체첸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일련의 분열과 봉합은 코카서스 에미레트 내 다른 반군의 발언권이 체첸 반군보다 더 강해지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직까지는 도쿠 우마로프가 어쨌든 전체 수장이니 무게 중심이 체첸에 있었지만, 우마로프의 사후에는 전체 반군이 어떻게 흘러갈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체첸 반군들의 열의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반기를 든 세력을 결국 제압한 도쿠 우마로프
코카서스 에미레트와 이치케리아 공화국의 오랜 싸움이 막을 내렸다.
https://www.longwarjournal.org/archives/2011/07/caucasus_emirate_cla_1.php#ixzz1TKEnDQLI
https://vz.ru/incidents/2011/3/29/479495.html
https://en.wikipedia.org/wiki/Muhannad_(jihadist)
http://www.kavkazcenter.com/russ/content/2011/04/22/80927.shtml
https://en.wikipedia.org/wiki/Domodedovo_International_Airport_bomb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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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차 2차 체첸전의 용사이자 모두의 교집합인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사살된 뒤로는 뭐...
체첸민족의 독립항쟁도 슬슬 바람이 빠지기 시작한거 같습니다.
코카서스의 항쟁이 항쟁이 아닌, 이슬람 극단주의와 손잡은 과격분자들의 과격한 똥칠이 된다고 느끼는건 왜일까요.
점차 민족주의보다 이슬람 성전의 색이 강해졌습니다.
선댓글후감상♡
감사합니다
도쿠 우마로프에 의한 체첸반군의분열이 완전히 봉합된게 아니었군요 억지로 봉합된것이니...
예 아무래도 앙금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