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셸 푸코,『비정상인들』, 박정자 옮김, 동문선, 2001.

1.
미셸 푸코가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 75년 1월부터 3월까지 일반청중들을 상대로 강의한 것을 토대로 묶어낸『비정상인』은『감시와 처벌』의 "권력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만한 책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고문서학자인 푸코 연구의 스펙트럼은 매우 방대하다. 정신의학의 형성과
법의학 제도의 성립, 사회의 재생산을 위한 생체정치학의 탄생, 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 등등. 푸코의 이 강의록은 그의 후기 저서들 중에서『감시와
처벌』과『성의 역사』1권의 주요한 모티브들을 전부 담고 있으며, 강의 형태가 가져오는 현장성과 푸코 특유의 바로크적인 서술이 가진 긴박감으로
인해, 앞서의 다른 두 책들보다 내용 면에서도 훨씬 재미있고 또 신랄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이 책에서 특히 재미있게 본 부분은, 특히 프랑스 혁명 혼란기에 수많은 소설들과 잡지의 기사들로 가시화된 범죄자와 전제 군주 사이의 유사성,
푸코가 "정치적 괴물"(75년, 1월 29일 강의 제목)이라고 부른 전제 군주에
대해 다룬 곳이다. 얼마 전, 린 헌트의『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를 읽으면서도 제일 흥미로웠던 곳도 바로 전제군주가 가진 독특한 표상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푸코의 간단한 설명에 따르면, 전제군주 자신은, 법의 바깥에 놓여 있으면서 법을 위반해도 무죄이기 때문에, 괴물이다. 근대 이후,
정확히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범죄가 갖는 사법적, 의학적 개념의 탄생을
서술하면서 푸코는 근대 이전의 범죄가 "그것이 군주를 다치게 하는 한에
있어서 범죄"였으며, 또한 이때 범죄는 "법을 침해하고, 법 안에 구현된 군주의 의지를 침해했다"고 말한다. 결국, 근대 이전의 범죄는 "군주의 힘에
대한 대항이고, 군주에 대한 저항이자 반란이었다."(104쪽) 푸코의『감시와
처벌』을 읽은 독자라면, 이 책의 첫 장에서 군주를 살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다미앙이라는 중죄인을 처벌하는 광경(사지를 찢어내고 뼈를 추리면서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도록 만드는 처벌)에 대한 놀랄 만한 묘사를 기억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때, 다미앙의 처벌을 지켜보던 군중들의 양가감정,
다미앙에 대한 최대한의 잔인한 처벌을 요구하는 한편, 처벌이 극에 달하자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왕의 절대적 자비를 바라는 군중들의 양면적인 모습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기를 전후로 한 민중 전체의 반항이란, 위 전제군주-괴물 스펙트럼에 맞춰본다면, 민중-괴물이라는
또 다른 스펙트럼을 만들어낸다고도 볼 수 있다.
푸코는 대혁명기 당시의 공포소설들을 분석하면서 민중의 이미지가 늑대나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을 지적해낸다. "민중은 사회체를 공격하는 하이에나이다."(122쪽) 몇 년 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 <늑대의 후예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영화는 바로 대혁명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공포소설들에서 그 모티브를 따왔다. 영화 자체는 대단히 보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영화의 간략한 스토리는 이렇다. 대혁명 바로 직전의 프랑스의 어느 마을에 출현해서 사람들을 해치는 늑대가 나타났다는 전갈을 받고 왕의 특사로 파견된 사제와 청년장교는 늑대를 퇴치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늑대와 늑대를 부리는 마술사, 그리고 그들 주위로 몰려들어 비밀스런 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밝혀내면서 사제와 청년장교는 정체 모를 늑대의 비밀이란 바로 절대왕정을 공격하기 위한 민중들의 반란이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한다. 영화는 이 이야기를 서술한 사람, 괴물을 퇴치하고 이제는 노년을 맞이한 장교가 화염 속에서 자신의 집 바깥을 둘러싼 분노에 찬 민중들을 향하여,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푸코가 "공포소설은 정치 소설로 읽혀야 한다."(124쪽)고 쓴 것처럼, <늑대의 후예들> 역시
공포영화가 아니라, 정치영화로 볼 수 있다. 사실, 근대 이전의 군주와 범죄자, 그리고 프랑스 혁명기의 두 괴물인 전제군주와 민중들은 푸코가 자신의 강연에서 중요한 목표로 삼은 것, 근대의 형성이나 계몽 프로젝트 자체가 만들어낸 괴물들, 비정상인들 형성의 역사를 서술하다가 만나는 하나의
중요한 접점일 뿐이다.
비정상인들, 광인들, 비밀스러운 성욕을 가진 행려병자들, 변태성욕자들,
손장난이 못된 아이들 등등을 만들어내는 권력-제도의 복잡한 형성과 그것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 이 출발점엔 정신의학이 사법권과 결탁해서
만들어내는 것, 즉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과 관리, 그리고 이를 통한 사회의
총체적 발전과 (재)생산을 위한 도구적-규율적 장치들을 만들어내는 '생체
권력'의 핵심 개념이 숨어 있다.
그 한쪽의 '병적 악의'라는 개념은 일련의 사법적 개념과 의학적 개념들을
하나씩 봉합하는 것을 허용해 주고, 다른 한쪽의 '위험' 또는 '위험한 인물'의 개념은 의학 제도와 법학 제도의 단절 없는 연결고리를 이론적으로
정초하고 합리화하는 역할을 한다. 위험과 변태, 이것이야말로 법-의학감정의 이론적 핵을 이루는 본질적인 핵이다.(53쪽)
따라서 정신의학은 국가와 다양한 사회체 중간의 무수한 법과 제도들과 결탁한 생산 권력이 되는데, 이것은 정신의학의 앎에 대한 열정, 즉 어떤 것이 정상이며 어떤 것이 질병인지에 대한 앎의 체계적 과정, 분류, 사례, 실험, 통계 등등의 갖가지 코드화 작업을 통해 그 존립을 당당하게 인정받는다. 그때, 정신의학은 18세기 유럽 사회의 근본적인 목표 중의 하나인 사회의 발전과 그를 위한 노동에 따른 생산의 가속화를 위한 "실질적인 공중보건학의 기능"(145쪽)을 자연스럽게 떠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신의학은
이때 체계적으로 사회적 생산의 저편에 멀리 있는 광인, 부랑자들, 신체 불구자들을 체계적으로 수용하고 관리해서 그 중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 쓸 만한 자들은 다시 사회로 내보내고, 교정 불가능한 불구자들을 정신의학의 앎의 의지를 위한 영원한 실험 대상으로 삼게 된다. 18세기 유럽 사회의 휴머니즘이란, 바로 그 이면에, 인간을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적극적인 앎이 필요하다는 과정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한편, 19세기로 접어들면, 정신의학은 정신병이나 성적 변태 등에 대한 앎의 제도적 확립을 통해 비정상을 낳은 인간의 어두운 본능에 대한 제어를
위해 두 개의 이론을 추출해내는데, 그것은 본능의 두 종들, 즉 유전과 인종의 문제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는 두 개의 근대적 학문의 탄생을 알린다.
바로 본능의 기술에 접근하는 정신분석학과 본능의 인종적 유형에 관심을
갖는 우생학이 그것이다. "우생학과 정신분석학은 본능의 세계에 대한 장악력을 통정신의학에 주기 위해 19세기말에 수립된 양대 기술이다."(163쪽)(이때 푸코의 서술은, 사실은 교묘한데, 그것은 한 문장 안에 정신분석학과 우생학을 나란히 평등하게 '배치'하는 전술을 통해, 내가 보기에 비대칭적인 학문인 정신분석과 우생학을 같은 동류로 여길 수 있도록 하는 상당한 '효과'를 낳는다. 하지만, 푸코의 중요한 목표는, 정신분석학의 권력 생성에 대한 오랜 제도적 역사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다).『비정상인』에서는
19세기의 핵가족의 구조와 구성원들의 행동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광범위한
통제의 권리를 갖는 정신의학을 위해 체계적으로 봉사하는 정신분석학을 우생학보다도 더 자세히 다룬다(그의 또 다른 강연 모음집인『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바로 우생학의 발생과 인종주의, 나치즘에 대한 분석에 더 많은 할애를 한다). 정상과 비정상, 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 이것은 푸코에
따르면, 인간의 비밀스러운 본능에 대해 다루는 정신분석이 밝혀야 마땅한
비밀이 아니라, 바로 정신분석 탄생의 비밀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더 이상 푸코의 서술에 대한 요약이 아니라, 푸코의 정신분석 비판에
가할 수 있을 법한 몇 가지 간단한 이의제기다.
2.
푸코에 따르면, "서구에서 성은 침묵의 대상이 아니고, 다시 말해서 반드시
침묵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고백해야만 하는 어떤 것"(203쪽)인데, 여기에서 푸코는 죄인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게 만드는 고해라는 제도의 죄인-사제의 비대칭적 권력을 정신분석학의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의 원천으로 보고 있다. 정신분석은 오랜 기독교적 전통의 고백의 기술(그것은 신체의 비밀을 폭로하는 "살의 기술"이기도 하다)이 19세기에 세속화된 판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중세에 죄인들이 품었던 "음욕은 죄짓는 영혼이 살의 형태로 나타난 것"(266쪽)이고, 교인들의 히스테리성 발작인 신들리기란 기독교가 "자신의 권력과 통제의 메커니즘을 뿌리박으려하는 곳"(246쪽)에서 모습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의 제도적 메커니즘은 인간 본능의 비밀인 성과 그에 따른 증상을 생산해내는 기제인 것이다. 이때, 푸코의 서술에는 기독교적 사제 권력에 대한 니체적 비판, 근대적 인간의 음울한 내면성과 그에 따라 통제된 육체를 형성해낸 서구 역사에 대한 비판이 숨겨져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아마 이쯤에서 푸코가 비판하는 정신분석, 엄밀하게
프로이트-라깡에 이르는 정신분석의 역사를 기독교적 원한과 고백의 기술과
관련시키려는 명백한 (푸코적) 의도가 (비로소!) 성공했다고 보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을 정신분석의 실천 그 자체에 대한 혐의로 연결짓는다.
하지만, 이것은 정신분석 실천에 대한 (푸코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는) 기본적인 무지를 반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간단히 말해, 푸코 이후, 정신분석의 연원이라 생각되는 죄인과 고해신부를 둘러싼 중세의 권력관계가 19세기의 정신분석의 탄생과 그것을 둘러싼 제도적 관계의 근대적
반영이라고 보는 견해는 매우 지배적이 되었다. 더 단순화하면, 현행 클리닉에서 일어나는 정신분석가와 환자(분석주체)와의 관계는 바로 중세의 고해신부와 죄인과의 관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분석적 실천에서 분석주체(환자)는 분석가에게 고백을 행하는 자의 역할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이미 환자, 신경증자란 정신분석에서 큰 타자(The Other)라고 말하는 기존의 사회질서, 제도, 습관에 예속된 자이다. 그들에게 내면의 고백이란, 큰 타자의 질서 내부에서의 억눌린 욕망의 고백에 다름 아니다. 고백은, 그가 속해있는 사회질서라는 큰 타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주체의 신경증적 미봉책에 불과하다. 고백은, 기본적으로 큰 타자를 향한 것이며, 큰 타자를 위한 것이다(여기까지가 실제로 정신분석 실천에 대한 푸코의 비판이지만, 이것은 정신분석 실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고백을 하는 신경증자를 양산해내는 사회적 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에 불과하다). 분석가의
임무란, 이렇게 큰 타자에게 예속된 분석주체의 억눌린 욕망을 변증법화하여 분석주체가 그 과정에서 욕망의 원인을 찾아내고, 이에 대해서 주체적
위치를 갖도록 하는 능력의 첫걸음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푸코가 심리학, 혹은 정신분석학의 비밀 중의 하나로 예를 드는 정신병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광기가 심리학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아르토와 니체, 고흐의 예술로
나아간다. 푸코의 이런 태도엔 근본적인 애매함이 담겨 있다. 그런 예술이
광기의 진실을 보유하지만, 즉 광기 그 자체는 바로 예술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그 자신의 어둠을 드러내지만("광기는 예술작품과의 절대적인 단절이다"), 이때 푸코에게 예술은 어쨌든 광기와의 유일한 소통로로 실체화하려는 욕망의 산물로도 읽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푸코의 말처럼 "이성이 근본적으로 미친 것"이라면, 광기에 대한 이성적 서술이 불가능하리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바로 명료한 이성의 언어로『광기의 역사』를 서술한
푸코 자신처럼!) 이 지점에서 푸코는 광기에 대한 낭만적=문학적 근대적 인습의 유혹으로부터 결코 빠져나가지 못한다. 푸코가 정신병의 영역을 그의
작업에서 은밀하게 배제시킨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정신분석 일반을
비판의 타켓으로 겨냥한 것은 분명 핵심을 찌른 것이지만, 푸코가 이를 확대해서 라깡 정신분석에 대한 일반적 비판으로 겨냥했을 때, 바로 그가 배제시킨 것은 라깡 정신분석 실천에서 정신병의 영역을 배제시키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아마, 푸코의 관심은 정신병자들을 수용하는 근/현대적
의학, 감옥 시설과 인도주의와 박애로 이루어지는 제도적 억압의 문제에 더욱 초점이 모아져 있겠지만, 정신분석적 실천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정신병에 대한 실제적인 치료와 같은 생산적인 활동, 정신병자의 주체화 과정,
정신병 예방과 보호의 긍정적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물론, 푸코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푸코는 이런 점에서 철저하게 수동적이다. 무엇에 대해? 바로, 주체의 문제와 능력에 대해. 그에게는, 근대적 권력의 배치와 배치의 전략적 결과에 따른 주체라는
효과에 대해 서술하지만, 그때 주체란 근대적 제도가 낳은 수동적 산물로서
자연화되는 측면이 많다. 주체는 없고, 단지 사방에서 몰려드는 벌떼같은
미시 권력의 배치만이 있을 뿐이며, 주체란 배치의 효과이다. 이 점에서 푸코가『성의 역사』1권을 출판하고 나서 라깡학파 정신분석학자인 자크-알랭
밀레 등과 나눈 대담인「육체의 고백」(콜린 고든 편,『권력과 지식』, 홍성민 옮김, 나남, 1991)은 대단히 중요하게 읽힌다. 대담에서 밀레는 신경질적으로 푸코를 물고늘어지지만, 밀레의 질문은 사실 간단하고 또 유력하다. 그는 주체를 권력-제도적 효과의 산물로 놓는 푸코의 권력 분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또한 푸코가 사용하는 미시-권력이라는 일견 촘촘해 보이는 걸개가 실제로는 스스로 비판의 효과를 무력화시키는 너무 헐렁한 개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책에서 저자의 개념을 삭제시키는 푸코에게 밀레는
푸코의 미시-권력이라는 개념이 푸코 자신의 주체적-자의적 관점의 산물임을 지적하는데, 옳은 지적이다. 이제, 더 이상 효과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주체가 발생시킬 수 있는 효과가 관건이 되어야 한다. 여전히 푸코의 구조주의적 사유는, 실천적으로는 아나키즘으로 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푸코가 정신병과 광기의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보낼 수 있는 곳은, 실제로는 예술작품 밖에는 없는 것이다(솔직히 말하면, 이는『안티-오이디푸스』의 들뢰즈/가타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물론 여기서 멈추는 것은, 푸코에 대한 정신분석측의 일반적 비판으로 머물 수 있다.
문제는 푸코가 급작스럽게『성의 역사』2, 3권에서 권력 배치의 효과로서의
주체의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논하지 않고, 기독교적(=서구적) 권력과 제도의 형성 '외부'의 주체와 주체화의 과정과 실천의 역사를 재점검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그는 그가 비판했던 정신분석과 매우 가까워진다. 바로 주체의 능력과 주체화 과정에 대해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는, 니체가 플라톤 이전의 그리스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듯,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로마의 주체형성의 역사까지 올라간다. 푸코가 서술하는 그리스-로마의 주체의 윤리학이란 자기 구성과 조절의 윤리학이며, 기독교 이전의 금욕주의이며, 적절한
쾌락의 유지와 더 좋은 쾌락을 위한 엄격하고도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식이요법적 실천이다. 여기서 정신분석이 기대하는 주체와『성의 역사』2, 3권에서의 푸코의 주체는 매우 상관적이지만, 이 둘의 차이가 중요해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더 자세히는 라깡(정신분석적 실천)과 푸코(주체형성과 구조의 효과를 고려하는 권력 분석) 사이에 생길 법한 이론적 대결은, 그 둘이 가장 가까이 맞닿는 지점인 주체의 자기형성에 관계된 부분에서 논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주어지면, 다른 곳에서, 이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