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움이 만든 착시의 효과일까요? 벌렁덩 눈 메트레스에 눕습니다. 여름엔 계곡물에 텀벙을 좋아하고 가을엔 오색단풍 숲 속에 빠지기를 좋아하고, 겨울엔 벌렁덩 눈메트레스에 눕기를 좋아하고 봄엔 진달래 꽃밭에 숨기를 좋아하는 리 모니카 자매 회장님!
눈밭 삼매경에 빠지셨습니다. 소녀같은 열정이 만드는 행위 예술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자연이란 켄바스에 마음껏 마음을 그려 놓으시기를 항상 응원합니다. 그리고 기대합니다. 자연과 함께~~
눈의 유혹이 만든 조난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긴급한 구조의 손 길이 모든 것을 금새 해결합니다.
해단식 때 이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 아 이제서야 고백하지만 함부로 눈 속에서 장난할 것이 아닙니다. 눈 속에 빠지니 발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도록 발이 돌아 가고 신발이 벗겨지고 ... 대단히 위험합니다. 이후는 생략....
사건 후 다시 일상의 즐거움 속으로 녹아듭니다. 오후로 갈수록 빛이 참 곱게 변하고 있습니다. 아침 빛은 잰 걸음으로 다가 온다면 오후 빛은 느릿함으로 멀어져 갑니다. 오는 것은 살아 있고 가는 것은 무엇이든 온유합니다.
깊은 눈밭을 돌아 나오면 다시 아름다운 삼나무 풍경을 만나게 됩니다. 오후 빛은 낮고 길게 드려지는 속성으로 삼나무 숲을 오전과는 매우 다른 아름다움으로 일행을 맞아 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단체, 개인의 추억을 남기려 조금 더 머물며 추억을 몽조리 쓸어 담았습니다.
우선 단체의 추억을 세우고.
그룹으로 추억을 모으고...
개별적인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등고선 1000m 를 회귀하는 단체 사진으로 한라 등반 추억 기록 사진은 마감하였습니다. 빛이 사라지기 전 열심히 걸어 성판악에 도착해야 합니다. 1차적 등반 맺음은 성판악이지만 완전한 등반의 끝은 귀가 까지 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계속)
성지순례~~
편입견 이라도 좋다! 믿음을 주는 주체나 따르는 무리들이 일반적 인성과 다르지 않다면 무슨 믿음이 깃들어 있겠는가! 달라야 한다. 분명 달라야 한다. 仁 어질어야 하고 禮 모든 행위에 예절이 있어야 한다. 義 진리 안에 항상 머물러야 한다. 知 복음을 읽고 깨달아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처럼 스스로 이뤄나가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본성이다. 본성을 잘 지키면 평화가 하늘의 빛처럼 곱고 맑고 아름다워 진다.일정한 선의 선율이 흐르는 곳, 그곳은 바로 평화가 깃든 아름다운 참 모습으로 누구에게나 기쁨을 준다. 제주에는 목장도 많다. 그런데 성 이시돌 목장에만 오면 평화의 주체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울타리에 갇힌 말과 소와 그 밖에 것들 한가롭고 평화롭다. 얽매임이 없어 보기가 좋고 느낌이 좋다. 그래서 우선 선입견이 아닐까 하는 고백을 먼저 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절 때 아니라고 단언한다.
아침을 제주 용두암 부근에서 해결 한 후 차를 이시돌 목장 부근으로 몰았다. 그리고 초입에 세워진 데쉬폰을 보기 위하여 잠시 내렸다. 절제 된 생활 가옥 데쉬폰, 경이롭다. 안으로 들어가 창문 바짝 붙어 서서 창문 밖 풍경을 보면 풍경이 전부 시야에 들어 온다. 그리고 풀잎으로 만든 가마니가 지붕 내부에 접착 되어 있다. 보온성과 연결을 도모해 주고 있다. 단순함이 돋보이는 가옥에서 자연에 순치 되도록 노력한 부분이 돋보인다.
테쉬폰(ctesshon)이란 이라크 바그다드 부근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곳에서 성 이시돌목장 초입에 세워진 건축물의 기원을 찾을 수 있어 이런 양식의 건축물을 테쉬폰이라 부릅니다. 이라크 테쉬폰에서는 지금도 2000년전부터 내려오는 유사한 형태의
건물을 볼 수 있는데, 그 오랜 세월을 지진과 태풍과 각종 기후의 악영향에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곡선형으로 연결된 쇠사슬형태의 구조 때문입니다. 이시돌에 목장에는 1961년
성 골롬반 수도자들의 숙소로 사용하기 위함하여 세워졌으며. 추후 돈사로 사용하기 위하여 건축되기도 하였으며
1963년 사료공장, 1965년 협재성당을 신축 봉헌하여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성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건축물은 우리나라에서 성 이시돌 목장에서만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입니다.
실내를 돌아 보고 연신 감탄을 하며 창가에 서서 멋진 풍경을 마음에 담았다.
목장 내부를 보기 위하여 접근하다 서쪽에서 바라보는 한라산 풍경을 발견하고 어제 등반의 추억을 떠올렸다. 어제가 바로 금새 추억이 된 것이다. 시간은 이렇게 매일 매일 흘러간다. 목장 내부는 구제역 여파로 입장할 수 없었다.
돌아 서서 초원을 배경으로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늘 찍는 자로서 찍히는 자로 초대 받는 시간을 모처럼 갖었다. 총무님이 찍어 주고 성 선생께서 찍어 주었다.
데쉬폰을 구경하며 단순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굿간에서 탄생하여 인류를 구원하려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 싶었다. 도로 가까이 모이시도록 한 후 주차장으로 가 차를 몰고 돌아왔다. 다시 차를 움직여~~
제주도에 목축업을 시작한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다음과 같은 발자취를 갖고 있습니다.(골롬반 홈페이지에서 캡처)
성 골롬반은 560년경 하느님께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치기 위해서 집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서말씀에 따라 부모와 집뿐만 아니라 고향까지도 떠나기로 결정하고 12명의
동료와 함께 배를 타고 목적지도 없이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떠났습니다. 그 배는 프랑스의 해안에
도착하였고, 그는 프랑스의 외딴 시골 지역에서 수도원을 건립하여 발전시켰으며, 획일적인 교회의 문화에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교황에게 직접 호소하여 각자의 방식에 따라 부활절을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그 지역 정치가들의 불의한 일을 반대하여 추방을 당했지만, 그가 20년 동안 지도했던 수도자 중에서 20명의 성인이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의 발전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한 나그네'가 되기 위하여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가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유럽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선교를 하였고, 615년 11월 23일
자신이 마지막으로 설립한 북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선종하였습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1933년 6월
교황청으로부터 전라남도에서 일할 것을 제의받고 1933년 10월 29일 최초로 10명의 회원을 한국에 파견하였습니다.
한국에 파견된 최초의 회원들은 대구교구 신학교에서 한국말 공부를 마치고 전라남도로 파견되었다. 당시
그곳에는 6명의 한국인 신부가 3000 여명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골롬반회는 목포, 노안, 순천, 광주, 제주, 서귀포 등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다른 지역에서도 사목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938년에는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 그해 11월 2명의 회원이 춘천에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강원도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강원도에는 한국인 신부 11명이 9,000여명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전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1939년 6명의
골롬반 신부가 합류하여 춘천, 원주, 홍천, 이천, 평강 등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41년 12월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합세하면서 신부들을 모두 체포하여 골롬반 회원들 가운데 미국,
호주, 뉴질랜드 출신의 7명의 신부는 본국으로
송환시켰고, 아일랜드 신부들은 가택연금 시켰습니다. 제주도에서
사목하던 3명의 골롬반 회원들은 첩보활동 및 불온사상 소지자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후 45년까지 사실상 선교 사업이 중단되다시피 하였습니다.
삼위일체 성전으로 왔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계신 성자께 인사를 드린 후 입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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