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봄비가 잦다 했더니 고사리 장마란다. 제주도 지방에서 해마다 고사리가 필 시기면 유독 비가 잦아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 봄비라고 생각했다. 꽃이 하마 피었을라나. 대한민국 매화 1번지 전남 광양시 다압면에 있는 쫓비산(538m). 막 피기 시작한 매화는 어제 내린 눈으로 설중매가 되었겠다.
산 이름이 고맙다. 한자로 쓸 수 없는 순 우리말이다. 흔치 않다. 산이 다른 산에 비해 뾰족(쫓빗)하다고 해서 쫓비산이라고 한단다.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섬진강의 푸른 물길이 쪽빛이어서 그렇다는 좋은 해석도 있다. 호남정맥의 막내길. 매화가 막 필 무렵 찾은 갈미봉~쫓비산 능선은 어머니 품같이 온화하다. 바야흐로 본격 봄맞이 산행이다.
보통 쫓비산을 찾는 산꾼들은 단번에 오르는 산행 계획은 잘 만들지 않는다. 주로 관동마을에서 갈미봉(葛美峰·520m)을 오른 후 호남정맥을 따라 남쪽으로 걷다가 쫓비산에서 매화마을이 있는 곳으로 하산하는 길을 택한다. 산행도 하고 꽃구경도 실컷 하는 '합리적인 산행'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산행팀은 욕심을 좀 냈다. 부산에서 접근하기가 좋아 시간 여유도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충분히 걷는 코스를 도상 연습했다. 결론은? 요즘 모 인터넷 서점 광고에서 부산 사람은 짧고 간단한 걸 좋아한다는데 그 버전으로 대답하면 "뭐!" 쯤 되겠다.
관동마을~(공포의)밤나무밭~512봉~천황재~게밭골 이정표~갈미봉~바람재~전망바위~쫓비산~536봉~매화마을 이정표~청매실농원으로 이어지는 12㎞를 쉬어가며 6시간 동안 걸었다. 걷는 동안 나뭇가지에 걸린 물방울에 바지가랑이가 젖었다가 또 말랐다.
산행 들머리는 광양시 다압면 고사리 관동마을 버스 정류장이다. 매화마을에서 관동마을 못미쳐 섬진강변 도로 곳곳에 무료 주차장을 잘 만들어 놓아 차를 대놓기는 쉽다. 정류장에서 관동 1길을 통해 동네를 지난 후 매봉 쪽을 향한다. 호남정맥 마루금으로 올라서야 하기 때문이다.
매실나무, 배나무, 감나무, 차나무, 밤나무 밭을 차례로 지나 왔다. 전형적인 과수 농촌이었다. 관동마을은 전라남도 지정 제1호 유기농 생태마을이다. 유기농은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것은 물론 일절 유독성 농약을 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과수원 곳곳에는 생태형 해충 방제 시설인 포충장비가 설치돼 있다. 불빛으로 해충을 유도해서 잡는 모양이다.
애초 산행 계획은 천황재에 올라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관동마을에서 갈미봉으로 직등하는 길이 잘 안내되고 있어 이 길을 피하려는 지나친 견제가 화근이었다. 자꾸 오른쪽으로 붙다보니, 매봉을 거쳐 백운산으로 이르는 산길을 탔다. 천황재로 오르려면 두번째 삼거리에서 좌직진 방향의 계곡을 타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 했다. 이용하는 사람도 없고, 일대가 다 농장이어서 농로와 등산로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40분이 지나자 능선에 다달았고, 잘록한 안부가 천황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날 내린 비로 안개가 짙어 열걸음만 떨어지면 동료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안부에 도착한 후 오르막길이 이어지는 능선을 탔다. 낙엽이 젖어 미끌거렸다. 멧돼지를 막기 위한 전기 울타리가 설치돼 있었다. 농작물이 없는 겨울에야 전기를 흘려보내지 않겠지만, 전기 울타리를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할 때는 오싹했다. 그런데 이런 가슴졸임이 갑자기 확 풀렸다.
연노랑 종 모양의 꽃나무 한 그루. 노란 꽃망울이 막 벌어지고 있었다. 흔히 보이는 생강나무도 산수유도 아니었다. 지리산에서 자생하는 우리나라 특산종 히어리. 돌아와 식물도감을 펼쳐 비교해보니 같은 종으로 판단된다. 농장과 산의 경계에 두어 그루 서 있었다. 정확한 수종에 대한 산꾼들의 후속 조사와 보호가 절실하다.
갈미봉으로 가는 길은 조금 희미했지만, 곳곳에 산죽이 잘 자라 있어 무채색의 겨울에 산행 재미를 더하게 했다. 천왕재로 추정되는 능선에 오른지 거의 한 시간만에야 512봉에 도착했다. 산행 당시엔 갈미봉으로 착각했다. 최초 오른 능선을 천왕재로 착각했으니 지금껏 걸어온 길은 호남정맥이 분명했다. 한데 우리가 갈미봉이라고 오른 512봉에서 정맥은 별도의 길이 잘 나 있었다. 아무리 나침반을 갖다대고 짚어봤으나 모를 일이었다. 지도가 잘못됐다고 결론 내렸다.
정상에서 뺑 돌아보면 사방은 안개구름이었다. 철저한 고립. 이런 절대 고독감에서 인간의 오만은 GPS도 나침반도 지도도 다 무시했다. 우리만 맞고 다른 것은 다 틀렸다고 단정지었다. 결론은 우리만 틀렸다.
1시간을 걸어 게밭골 이정표에 도착했는데, 관동마을로 가는 표지와 쫓비산 방면 표지가 있었다. "쫓비산이 코앞인데 관동마을이라니 흥~. 하여튼 틀린 이정표 때문에 문제라니까." 철석같이 착각을 하고 간 길의 정체는 20분이 더 지나고서야 밝혀졌다.
삼각점이 있는 갈미봉을 지났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쫓비산을 향하고 있는데 오름길이 조금 가파른 봉우리에 오르니 이미 1시간 20분 전에 지나온 갈미봉이 떡 하니 있는 것이다. 지도도 정상이었고, 나침반도 GPS도 다 정상이었다. 쩝. 그래도 갈미봉은 넉넉해서 100여명이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어도 좋을 장소였다. 보온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갈미봉에서 쫓비산까지는 정맥의 넉넉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산길이다. 옹기종기 바위도 있고, 비에 젖어 제 색깔이 선명한 나무는 바라보기에 좋다. 특히 수피의 무늬가 독특한 노각나무는 아름다운 무늬가 돋보였다. 20분을 걸으면 바람재에 도착해 다사 마을로 하산할 수 있으나 별도의 이정표는 없다. 30분이 지나 전망바위에 도착했으나 지리산, 억불봉, 매봉, 백운산의 자태는 비안개에 꼭꼭 갇혀 있었다. 50분을 더 걸어 쫓비산에 다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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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비산은 산꾼이 직접 만들어 걸어놓은 나무 문패만 덩그렇다. 오른쪽 어치계곡 물놀이객의 안전을 위해서 설치한 강수량 자동계측 설비만 징징거린다. 13분을 걸어 삼거리 이정표에서 정맥과 이별하고 1시간이면 매화마을로 내려선다. 사방이 온통 진달래밭이다. 출발신호만 떨어지면 꽃 필 준비는 다 해놓았다. 매화마을도 이번 주말 매화축제 준비를 다 해놓았다. 출발신호를 쏘아야 하는데 눈이 와 버렸다. 설중매다. 그래도 봄은 온다. 산행 문의: 라이프레저부 051-461-4164. 홍성혁 산행대장 010-2242-6608.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 산행 들머리 관동마을 이정표. 관동 1길을 따라 동네를 지나며 산행이 시작된다.
▲ 홍매화는 이미 피었다. 비가 그친 뒤 꽃잎이 더 맑다.
▲ 온통 매실 과수원이다. 호남정맥의 산줄기는 구름에 숨어 있다.
▲ 시멘트 농로가 밤나무 밭 사이로 본격 산길이 시작된다.
▲갈미봉에서 쫓비산으로 가는 호남정맥 길에 있는 널찍한 식탁바위. 여나믄 명이 둘러앉아 도시랄을 먹을 수 있겠다.
▲ 호남정맥을 걸어 갈미봉으로 가는 길에 있는 관동마을 이정표. 관동마을에서 갈미봉 등산로로 오르면 이 이정표와 만난다.
▲ 쫓비산도 따로 정상석이 없고, 소나무에 누군가 사재를 들여 나무문패를 붙여 놓았다. 오른쪽에 보이는 구조물은 호우가 내리면 자동 통보하는 비상 시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