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리왕 21년(서기 2년) 봄 3월에 하늘에 지내는 제사인 교제(交祭)에 쓸 돼지가 달아나 버렸다.
이 일은 2년 전에도 한번 있었던 일이다. 교제는 하늘의 아들을 자부하는 천자인 왕이 하늘에 지내는 제사다.
이 제사에 제물로 쓰이는 돼지는 특별히 관리 사육되고 있었다. 그만 일을 맡은 자들의 잘못으로 놓치고 말았다.
유리왕은 장생(재물을 맡은 관리) 설지(薛支)를 시켜 쫒아 가게 하였더니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돼지를 잡았다. 설지는 그 돼지를 그곳에 살던 어느 농부에 맡겨두고 돌아와 왕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제가 돼지를 쫒아 국내위나암에 갔더니 그곳의 산과물이 깊고 험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면 물고기도 풍부하더이다.
왕께서 만일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면 나라가 크게 번성하고 백성들이 풍요를 누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산세가 험준하여
적을 막기도 용이로울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후 유리왕은 9월에 직접 국내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사물이라는 신하를 얻었다.
왕은 이듬해 즉 유리명왕 22년 10월에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에 성을 쌓았다.
즉 유리명왕 22년의 일이다. 이후 장수왕대에 들어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무려 400여년을 고구려의 수도가 된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도읍 졸본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중 제물인 돼지가 달아나 국내 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붙잡았은 것이다,
“그곳의 땅이 비옥하여 산물이 풍부하고 지세가 험해 병란의 걱정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성을 쌓고
도읍을 옮겼다는 곳이 바로 국내성이다. 이 말은 졸본에서 국내성은 돼지가 달아나다 잡힐 정도로 그리 멀지 않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국내’(國內)는 불이성·불내(不而城·不耐)라고도 하였다.
옛말로 나라(國)라는 말은 ‘불’이었다. 나머지 글자 內·而·耐(내·이·내) 가운데 內와 而는 비슷한 글자로 본다면
셋의 소릿값은 ‘노/나이’다.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불이(不而)를 함흥의 옛 땅이름으로 보았으며,
〈삼국사기〉가 중국의 사서를 추종하는 데 머물렀다고도 하였다. 고구려의 서울 국내성의 본디 이름은
‘불노/불나이/부노/부나이’ 중 하나다. 평양(平壤)은 요즘의 ‘벌’(平)과 고구려말 ‘노’(壤)로 보면 ‘벌노/버노’로 볼 수 있는데,
국내성과 평양은 위치는 다르나 같은 소리인 ‘불노/부노’였을것으로 보인다. ‘불노/부노’는 단지 ‘서울’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였다.
‘골본/졸본’(忽本/卒本)의 ‘본’도 아마 서울과 관련된 말인 듯하다.
압록강 건너 길림성 집안현 위나암성은 전란에 대비한 국내성 북쪽에 있는 산성이다.
삼국사기에서 위나암성이란 말은 서기 28년까지만 나타나고 환도성은 142년 뒤부터 나타난다.
2세기에 위나암성을 환도성으로 바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