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들 중에 청년백범을 찾아서 상해임정(상해임시정부) 유적지를 찾아 답사를 가는 팀이 있다고 들었다.올봄에 심산 김창숙 선생의 흔적(심산바로알기 역사투어)을 찾아 봉화 해저리 만회고택에서 만난 어떤 젊은이들이 했던 말이다. 그런데 국내항일 독립투쟁 전적지와 유적지는 다 외면하고 국외로 나가면 무엇을 보고 온다는 말인가?
백범 김구선생의 젊었을 때 국내를 유랑하면서 고민하던 그 때 생각과 환경을 조금이라도 살펴봤던가?기본도 모르는 사람들이 국외로 나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기가 막힌다.지자체 멍청한 공무원과 의원 개나리들이 외국에 관광하러 나가서 국민세금을 낭비하고 오는 것이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그런 멍청한 공무원과 의원개나리들과 비교해서 무엇이 더 나은 것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2015.9.9일 경남 거창군 웅양면과 경북 김천 대덕면 사이의 경계인 임진왜란 전적지인 '우두령' 에서 거행된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기념공원' 명명식에 다녀왔다.
그 때 행사가 끝난 후,동행한 김천시 향토사학자이신 이갑희 선생과 함께 김구 선생 은거지인 부항면 월곡리에 가서 김구선생을 1달간 숨켜주며 보살펴준 성태영 선생의 집터와 '金龜'라는 이름을 얻은 '거북바위'를 보고, 6.25전쟁 유물로서 등록문화재인 김천시 부항면 지서 망대등을 답사하고 왔다.여중룡선생의 기념비도 봤는데 밧데리가 없어서 사진을 더 못 찍엇는데,나중에 김천은 다시한번 더 답사해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늦었지만 당시의 사진을 올려본다.답사를 안내해주신 이갑희 선생께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내가 김천 향토사회원이신 이갑희님께 부항면 월곡리 김구선생은거지와 성태영 선생 집터를 답사하고자 제안 한 이유는 하나 더있는데 바로 성태영 선생 때문이다.
3.1 만세의거때, 심산 김창숙 선생이 성주의 본집에 있을 때 서울에 있던 '성태영'이란 분의 연락을 받았다.빨리 서울로 빨리 올라오라는 전갈을 받았으나 모친의 병수발을 들고 있던 터라 지체하였는데 ,나중에 서울에 올라가보니 3.1만세의거에 민족의 지도자로서 서명자란에 이미 서명도 끝나있엇고,유림들의 조직적인 동참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그래서 성태영선생으로 부터 크게 질책을 받았는데,3.1만세의거에 유림들의 불참을 한탄한 심산 김창숙과 해사 김정호,기암 이중업 ,면우 곽종석,회당 장석영선생등이 유림의 독립투쟁의 일환으로 파리평화회의에 한민족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청원하기로 계획하여 올린 연명서가 '파리장서'인 것이다.
서울에서 심산에게 연락을 준 성태영이란 분이 바로 김구 선생을 보호해준 부항면 월곡리의 성태영이란 분과 동일인이라고 나는 추측을 한다.왜냐하면 당시 지례군 부항면 월곡리의 성태영은 재력도 있고 명망도 있는 분인데 이웃고을 성주의 동강 김우옹의 종손인 김창숙과 교류를 한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있는 것이다.교류를 안했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당시에 성주에서 서울을 가자면 김천으로 가서 교통편을 이용하는 것이 지름길이고 돈도 덜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심산 김창숙 기념관은 김구가 관심없고,백범기념관은 심산이 관심 밖이다.김천시도,김천문화원,김천 시민들도 관심이 없는데 그것이 안타깝다.
김천역사문화는 무주,성주,상주,선산(구미)과 연결돼있다고 생각한다.
첨언)글을 써놓고 얼핏 생각이 들어 얼마전 서울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입한 '김창숙 문존'(심산사상연구회)이란 책을 펴보앗더니,知禮 (경북 금릉군)川谷에 살던 분이라고 각주가 있군요...성균관대 심산사상연구회는 성태영이란 분이 김천 월곡(천곡)리에 살던 분이라고 알았는데,다른 분들은 다 몰랐다.
김구선생이 인천감옥에서 탈주한 뒤 삼남을 유랑할 때 무주를 거쳐서 지례군 부항면 월곡리 성태영 선생으로 부터 환대를 받았는데, 유인무와 성태영이 김창수라는 본명을 '김구金龜'로,자를 연상(蓮上),호를 연하(蓮下)로 지어준 현재 김천시 부항면 월곡리 거북바위가 냇가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새마을운동 때 도로를 내면서 거북바위가 도로에 묻혔다고 한다.
성태영의 자는 능하요 호는 일주이다.성태영 선생을 성씨 일문과 마을 이장등을 통해서 추적을 해보았지만 결국 실패했다.그러나 아직 추적의 끈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이유는 언젠가는 나타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족보에서 성태영을 찾아야 한다.그러자면 원주문화원에서 도움을 받아서 원주목사를 하셨다는 성태영선생의 조부를 확인해서 족보를 추적해야겠다.김천분들이 해야 하는데 관심을 촉구한다.거북바위를 복원하면(도로를 달리 내고) 김천으로서는 관광자원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현재 심산바로알기 역사투어를 심산기념관이 진행하고 있다.심산기념관과 협조하여 부항면 월곡리를 경유하도록 하면 김천시는 역사투어 관광자원을 하나 더 얻을 수 있다.
아래 ,위 사진 두장은 이갑희님이 찍은 사진을 빌렸다.내가 찍은 사진은 잘안나왔다.
김구라는 이름을 얻은 내력과 유인무와 지례 월곡(천곡)에 살던 성태영에 관한 백범일지의 기록
이천경,이시발,유인무,주진사 등등의 인물도 추적해봐야 한다.백범 김구기념사업회가 나서야 하는데...안움직이는 것 같다.백범 김구를 알기위해서는 관련된 인사들을 조사해야하고,관련지역의 역사인물을 조사해야 하는데,향토사학자와 군청과 시청의 지자체,문화원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그런 의욕과 관심과 정열을 가진 독립투사가 우리곁엔 잘 없다.
위사진은 내가 찍은 사진이 있을 것인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그래서 이갑희님이 찍은 사진을 빌려왔다.
김창숙 문존에 있는 파리장서에 관한기록과 성태영 선생에 관한 기록 .
심산사상연구회도 성태영이 김구를 보호해준 인물인 것은 몰랐던 모양이다.각주 내용에 없으니.
위와 아래 책 내용을 보면 파리장서운동의 첫장면이 있다.
벽서장은 벽서 성태영 선생이다.심산을 이끌만한 명망과 추앙을 받는 인물인데 연구자도 대학도,기념관들도 추적조사 안했다.'성태영 선생의 집'에 모여 파리장서운동(파리국제평화회의에 제출할)을 시작한다.성태영 선생을 왜 우리가 몰라야 하는가?
기암장은 기암 이중업 선생인데 향산 이만도 선생의 아들이고 나의 고조부인 박주대,박주학 형제의병장(예천)의 생질서이다.안동 내앞마을의 유명한 '백하 김대락' 선생의 매제가 되는데 부인이 바로 유명한 '김락'여사이다.기암 이중업 선생의 가문은 독립유공훈장을 3대가 6분이나 받은 ,애국혼이 서려있는 명문가이다.기암의 아들이 '이고 이동흠' 인데 상해군자금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대한광복회의 박상진 의사를 숨겨주고 보호해준 동지이다.안동 퇴계종택에 가면 '설암체'로 유명한 이고 이동흠 선생이 쓴 '퇴계선생구택','추월한수정'이란 현판이 입구에 걸려있다.
1951년 10월 20일 북한의 인민군 유격대가 부항지서를 습격했고, 주민과 경찰이 사수한 곳이다.주민과 경찰관 5명이 숨졌다.
당시 전투중에 숨진 ,자유와 평화를 사랑했던 이름모를 분들께 삼가 위로의 묵념을 드린다.
김천시 향토사학자인 이갑희 선생은 나를 데리고 대자연가든으로 데려가서 꺼먹돼지 삽겹살을 사주셨다.김천에서는 아주 유명한 맛집이라고 한다.
감호여선생창의비- 감호 여대로 선생 창의비
임진왜란때 성산 여씨 문중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의병도대장 김면과 곽재우,권응성등과 협력하여 지례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여대로의 창의비.
개설
여대로(呂大老)는 성산여씨 여응구(呂應龜)의 아들로 1552년(명종 7) 구성면에서 태어났다. 호는 감호(鑑湖)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고향에서 집안의 노복과 마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켜 김면(金沔), 곽재우(郭再祐), 권응성 등과 지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후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형조랑(刑曹郞)에 올랐고, 이내 지례현감에 제수되어 의병장을 겸하여 낙동강 서쪽의 여러 고을을 다스렸다.
1594년(선조 27)에 의성현령, 1600년(선조 33) 이후에 예조좌랑·병조좌랑·충청도사·고산찰방·대구판관·종묘서령(宗廟署令)·성균관직강·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1607년(선조 40) 합천군수가 되었을 때 정인홍(鄭仁弘)의 행위를 반대하여 파직되었고, 이이첨(李爾瞻)의 원한을 사서 요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정인홍과 광해군 옹립 등의 문제로 고향에 돌아와 있던 중 1619년(광해군 11) 세상을 떠났다. 경양사(鏡陽祠)에 배향되었다.
건립 경위
여대로 창의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여대로의 공적을 기리고자 왜군과 전투를 벌인 곳에 후손들이 세웠다.
위치
송죽리 송죽휴게소에서 약 200m 떨어진 국도변에 있다.
형태
크기는 높이 210㎝, 너비 75㎝이며 재질은 오석이다.
금석문
여대로 창의비 비문은 여대로의 공적을 기리고 혼을 위로하는 글로,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맑고 맑은 감천은 쉬지 않고 흘렀다. 이곳 옛 전쟁터에 빗돌을 높이 세워 만민이 우러르니, 아아 감호 여 선생, 나라 위한 붉은 충혼, 오늘도 상양하리. 길이길이 돌보시어 호국신이 되옵소서.”
참고문헌
- 『금릉승람(金陵勝覽)』
- 『김천군지(金泉郡誌)』
- 『속수상강록』
- 『조선역대명신록(朝鮮歷代名臣錄)』
- 『품천사집(品川史集)』
- 『내고장 우리향토』(김천시, 1983)
- 『김천의 금석문』(김천문화원, 1997)
- 관광지식정보시스템(http://www.tour.go.kr/)
[네이버 지식백과] 여대로 창의비 [呂大老 倡義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