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3)-‘패왕별희’

1.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받아 ‘경극 배우’ 훈련소에 들어오게 된 청데이(장국영)에게 삶은 오로지 ‘경극’과 관련되어 있다. 훈련소에서 만나 든든한 도움을 주었던 단샬로(장풍의)는 청데이(장국영)와 함께 성인에 되어서 경극 ‘패왕별희’의 초패왕(항우)과 우희로 성장하게 된다. 경극 ‘패왕별희’의 내용은 영화 ‘패왕별희’ 속 청데이와 단샬로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을 상징한다. 초왕 항우와 우희가 전쟁의 패배 속에서 몰락하듯이, 현실의 패왕과 별희 또한 중국의 현대사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의 꿈을 파괴하고 서로를 증오하게 하였으며 가장 가까운 관계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린다.
2. 혹독한 체벌과 지독한 반복을 통해 청데이와 단샬로는 최고의 경극 배우로 성장하게 되고 수많은 대중들의 인기를 독차지 한다. 어렸을 적부터 시작된 이들의 끈끈한 동지애는 시간이 지날수록 청데이의 동성애적 감정으로 전환된다. 파국은 단샬로가 여인을 만나고부터 시작된다. 홍등가의 최고 매춘부였던 주샨(공리)과 결혼을 약속한 단샬로에게 청데이는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며 질투에 휩싸인다. 청데이에게 ‘함께’는 경극 속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도 한순간 떨어지지 않는 일치된 삶이었던 것이다. 반면 현실과 경극을 구분하지 못하고 집착하는 청데이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단샬로는 여인과의 결혼 생활이 시작되면서 청데이와 조금씩 소원해져 간다.
3. 이들의 개인적 관계는 중국을 휩쓴 시대적 변화 속에서 더욱 극적으로 전환된다. 중국을 지배하는 권력이 일본, 국민당 정부, 공산당 정부로 바뀔 때에도 이들은 경극을 계속 공연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권력층에게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때론 동료의 죽음을 막기 위해, 사적인 공연도 감행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우희 역을 맡은 청데이는 음흉한 관리들의 유혹의 대상이 되었으며 ‘경극’과 ‘동료’를 위한 결단은 오히려 청데이에게 잔인한 주홍글씨처럼 저주의 주문으로 따라다니게 되었다. 선택할 수 없는, 오직 순응할 수밖에 없는 시간 속에서 그들은 그들의 뜻과는 달리 민중을 배반하고 적에게 결탁한 매국노로 전락한 것이다.
4. 청데이와 단샬로의 관계 속으로 들어온 여인 주샨은 처음에는 사랑과 미움의 삼각관계를 가져오는 대상이었다. 청데이는 주샨의 존재를 참을 수 없었고 주샨 또한 집착하는 청데이의 모습을 보며 단샬로에게 관계를 끊으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들은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으며 서로가 역사의 희생물이 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잃고 경극에서의 위상도 상실한 청데이가 아편에 빠지게 되자 주샨도 그의 외로움을 이해하게 되고 홍등가에서 살았던 자신의 원죄와 연관시키면서 동지애적 애정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는 세 사람의 사랑과 미움에서 촉발된 적대자 관계에서 고통의 동반자이자 서로를 위한 협력자로 바뀌는 모습을 조금씩 보여준다. 특히 적대적이었던 청데이와 주샨의 갈등은 서서히 완화된다.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5. 하지만 운명은 인간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는 겨우 찾기 시작한 삶의 가능성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무너뜨리며 비극적인 결말로 치달린다. 공산당 치하 소위 ‘문화혁명’은 예술에 종사한 사람들을 반동으로 모독하고 그들의 죄상을 자아 비판하도록 강요한다. 광장으로 끌려나온 경극 배우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상대에 대한 저주를 퍼붓기 시작한다. 단샬로는 청데이가 일본군과 자본가 권력층에게 노래와 몸을 팔았으며 자신의 아내 또한 매춘부로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분노에 찬 청데이도 단샬로에 대한 비난을 토해내는 모습을 통해 영화는 인간이 인간에게 지옥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이 상대의 상처를 파헤치고 모욕과 저주의 말을 퍼붓는 것이다. 거대한 군중에 휩싸여 벌어지는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말살하는 현장은 영화 <패왕별희>의 가장 슬프고도 잔혹한 장면이다.
6. 이 날의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결별과 증오를 선언 받은 주샨은 결국 집으로 돌아와 자결하고, 문화 혁명의 암흑이 지나간 후 ‘패왕별희’ 공연연습을 하기 위해 다시 모인 청데이 또한 단샬로 앞에서 경극의 마지막 장면처럼 칼로 목을 찔러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충격적이고도 경악스런 결말이었다. 곧이어 중국에서 경극 200주년 기념 공연이 있었다는 자막은 인간의 삶을 우롱하는 아이러니이자 개인의 하찮은 소모성을 증언하는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평생을 경극을 위해 살았던 개인의 명예와 가치가 파괴된 현장에 세워진 모조품은 참다운 예술의 복원이 아닌 국가의 거짓된 허영을 위한 선전장에 불과한 것이다. 왜 이 영화가 중국에서 공연금지 되었는가를 이 장면이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7. 영화는 사랑에 목마르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얻지 못한 한 남자의 슬픈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추운 겨울날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경극 훈련소’에 온 이후, 청데이는 유혹의 대상이었지 진정한 사랑의 대상은 될 수 없었다. 삶의 영원한 동반자로 믿었던 단샬로도 현실 속에서는 다른 여인에게 가야했고 남은 것은 짙은 고독뿐이었다. 역사는 그에게 원치 않은 선택만을 강요했으며 그는 사랑을 위해서 그것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남은 것은 짙은 허무뿐, 삶은 결국 의지와 희망과는 별개로 진행되고 있음을 청데이는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주샨이 자살한 모습을 보면서 청데이는 진심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녀 또한 자신과 유사한 고독의 존재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7. 이 영화는 장국영의 고독하고 유약하면서도 강렬한 예술적인 이미지가 아름답게 표출된 작품이다. 단샬로가 자신을 떠났을 때 망연히 앉아 거울을 바라보는 우희 분장의 장국영의 모습은 그 자체로 눈부시다. 영화 속 남성들의 간장을 애달게 하는 이중적인 매력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사내이면서도 계집인, 여자이면서도 남자인, 청데이(장국영)의 모습은 어쩌면 곧이어 벌어지는 장국영의 자살과도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거대한 역사의 참혹함에서 무너져 버린 우희의 슬픈 눈동자처럼 현실의 또 다른 무게 속에서 사라져버린 장국영의 깊은 울림의 눈동자가 오버랩된다. ‘죽음’은 비극적이지만 그 자취의 선명함과 충격 때문에 깊은 아름다움과 결합된다. 슬픈 아이러니이다.



첫댓글 신기한 교성이 기억나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