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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김두식,『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홍성사, 2010.
1장 교회 속의 세상: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일인 독재를 ‘인본주의’에 대항한 ‘신본주의’라 부릅니다. 세상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목사 1인 중심의 인본주의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받는 신본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28
갈수록 힘을 잃어 가는 데 위기감을 느낀 기독교인들은 더욱 ‘독선적인 사람들’이 되어 갑니다. 자신감을 잃고 나니 소극적인 자세로 뭔가를 지키는 데 온 힘을 집중하게 된 것이지요. 불행히도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 정의, 평화, 자유, 진리 같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주일 성수, 십일조 등 외형적인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 대신 구약의 율법들이 날로 강조되고, 신약성경보다 구약성경이 설교 본문으로 더 자주 인용되는 현상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창을 통해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대신 율법의 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약하는 일부 설교자들의 태도는 우리 신앙의 근본을 흔드는 위험한 것입니다. 31
물신숭배, 목회자 일인 독재, 세습에 의한 독재 권력 이양, 그에 따른 전반적 부패로 상징되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비기독교인들이 가진 이런 부정적 이미지들을 더욱 강화합니다.
이기적이고 말과 행동이 다른 데다가 독선적이기까지 한 기독교인들의 자화상은 한마디로 ‘생명력을 잃은 공동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이렇게 무너져 가는데도, 서점의 기독교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보면 온통 부자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이상한 책들만 넘쳐 납니다. 흔하디흔한 처세술 책 내용에 적당히 성경 구절을 끼워 맞추어 놓은 책들입니다. 기독 청소년들에게 공부 잘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어떤 책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판매 부수를 기록합니다. 이 정도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요? 32
문제는 많은데 대책은 없어 보입니다. 이런 교회의 현실을 알고 나서 슬픔과 탄식을 느끼지 않을 기독교인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이런 슬픔과 탄식 속에서 대부분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침묵하는 길을 택합니다. 기도 외에는 해답이 없다고 느끼는 까닭이지요. 그러다 보니 교회 문제에 대한 침묵은 신실한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표지처럼 자리 잡았고, 교인들은 갈수록 개인화, 파편화되어 갑니다. 교회 문제에 대해 교회에서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 독특한 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문화를 깨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33
2장 비전과 욕심: 방향을 거꾸로 잡은 교회
저는 제 간증을 듣고 예수 믿기로 결심했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전하고자 한 것은 시험 준비 과정에서 들었던 “너는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는데, 사람들은 ‘예수 잘 믿으니 고시 붙더라’는 껍데기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청중들을 볼 때마다, 저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신앙심도 훨씬 좋았지만 사법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많은 선후배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이후의 성경에는 어디에도 고시에 합격했거나 고위 공무원이 되었거나 사업에 성공한 것이 간증거리가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도 없지요. 38~39
하나님의 영광은 1차적으로 ‘나타난 영광’, 즉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무게, 탁월함, 훌륭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거나, 우리가 뭘 한다고 해서 양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의 영광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 중보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세상에서 뭘 잘함으로써 얻게 되는 명예와는 반대되는 개념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한국 교회에는, 시험 합격이나 승진 등의 개인적인 성공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신성모독적 가치관이 독버섯처럼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광을 결정하는 기준은 세상에서 성공을 가늠하는 기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세상에서 더 잘되고 더 높이 올라가는 만큼, 딱 그만큼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준의 일치는 ‘세상 속의 교회’에서 생명력을 앗아간 대신 ‘교회 속의 세상’을 번성케 만들었습니다. 40
다른 사람들 앞에서 포장된 거짓 비전을 선전하며 자기가 마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처럼 착가하다 보면, 나중에는 아예 자기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여전히 이기적인 인간이지만 성령 안에서 이웃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자 노력하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고 나면, 결국 언제나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면서도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위선적 기독교인만 남습니다. 41
요셉은 능동적으로 ‘비전’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수동적으로 ‘꿈’을 꾸었을 뿐입니다.(···) 백 보 양보하여 그가 비전을 가졌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비전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형들을 자기 지배하에 두는 것이 요셉의 비전이었을 리는 없습니다.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는 꿈을 가졌을 리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명확한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요셉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지, 모든 기독교인에게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반화 덕분에 기독 청년들은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아니, 꾼 적 없는 꿈을 꾸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국무총리의 꿈을, 어떤 사람은 변호사, 의사, 교사의 꿈을 갖습니다. 각자 기도하고 꿈을 갖고 그걸 믿기만 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한 번도 “민족의 지도자가 될 비전을 달라”거나 “국무총리가 될 꿈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형통한 사건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설명은 바로 성경의 한마디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이걸로 충분합니다. 여기에 뭔가를 자꾸 덧붙이려는 시도는 위험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이끌어 가는 역사를 자꾸 인간의 노력의 결과로 바꾸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5~47
‘선교지에서 목사는 안 받는다더라. 선교를 하려면 전문적인 지식과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러니 선교사가 되려면 전문인이 되어야겠다. 대표적인 전문직은 바로 의사다. 주께서 내게 의사가 되라는 비전을 주셨다. 기도하고 의사가 되자. 열심히 공부하자.’
저는 이런 논리 전개를 통해 의사의 꿈을 가진 많은 젊은이들을 알고 있고, 대학 입시에서 그 꿈이 좌절되어도 몇 번이고 의대에 도전한 젊은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막상 의사가 된 후 처음 꿈을 이어가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천막장이가 의사 직업으로 바뀌게 되는 과정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선교가 정말 최종 목적이라면 왜 그 나라에 가서 막노동을 하거나, 철공소에서 일하거나, 자동차 정비사가 될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의사가 되고 싶어서 선교사를 미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정말 선교사가 되고 싶어서 의사를 지망하는 것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는 누구 한 사람, 자기 노력으로 열심히 일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은 원래 그런 사람,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고, 모세가 민족을 이끌게 되고, 다윗이 왕이 되고, 다니엘이 예언하게 된 것은 자기가 소망해서, 비전을 가져서, 열심히 공부해서 그리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들 중 누구 하나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사람조차 없습니다. 누가 국무총리를 할지, 누가 민족의 지도자가 될지를 선택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었습니다. 49~50
요엘서의 예언이 성취된 예로 평가받는 초대교회에서는 누구도 로마의 지도자가 되거나 의사, 변호사, 교수 등 전문직으로 나가는 비전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했고,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으며,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끝없이 낮아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하게 보여 주신 방향은 아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헨리 나웬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길이 세상의 길과 다른 것은 그 방향성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올라가라고 말하고, 더 높이 올라간 그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속 낮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요즘 교회에서 가르치듯이 “더 높이 올라가야 더 많이 베풀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즘 목사님들이 가르치는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로마 황제로 세상에 오시는 것이 가장 편했을 겁니다. 가장 높은 자리, 가장 영향력이 큰 자리에서 한 방에 전 세계를 복음화하실 수 있었을 테니까요. 51
성경 인물 중 누구도 어떤 직장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어떤 직장을 가야 내가 행복할지를 점치는 식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예언이나 표적보다 훨씬 더 선명한 방식으로 이미 계시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을 하라”는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는 것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계명으로 하나님의 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잘 요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뿐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보다 더 명확한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생의 계획과 불명확성 앞에서 고민하느라, 정작 명확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고민할 여유가 없습니다. 54~55
근본적으로 진로 문제가 우리 청년들에게 그렇게 깊은 고민거리가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상향성의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야 더 많이 베풀 수 있고, 더 많은 걸 가져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 마음을 점령해 버린 것입니다. 더 나아가 ‘높이 올라가야 많이 버릴 수 있다’는 이상한 믿음까지 생겼습니다. 56~57
3장 진보와 보수: 세상과 똑같은 좌우 대립
낮에는 전쟁터에 나가서 무고한 조선의 백성들을 학살하던 사람들이 밤이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한 셈입니다.(···) 예수회 신부들의 전도를 받아 일찍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가톨릭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해서, 십자가 군기를 달고 전쟁에 나섰다고 해서, 가토의 군대에 비해 노략질을 비교적 덜 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할렐루야’로 맞아들일 수 있을까요?(···)
복음은 십자가를 높이 든 군대가 칼을 들고 오락가락한다고 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군기를 높이 들든 말든,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은 우리에게 그저 침략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니시의 십자가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이순신 장군 입장에서는 쳐부수어야 할 침략자를 상징하는 공격 목표물에 불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71~73
우리가 알다시피, 조선에 복음을 전한 것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침략군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복음은 그보다 200년 가까이 지난 후, 가난한 이웃과 함께 호흡하며 자기 목숨을 바친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과 선교사들에 의해 이 땅에 꽃을 피우게 되지요.(···) 고니시의 십자가는 ‘예수 없는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할 뿐(마 26:52)입니다. 74
이라크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 땅의 교회 지도자들은 이라크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도 전투병을 보내야 한다는 부끄러운 주장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역사와 전통이 가르치는 전쟁에 관한 입장은 ‘평화주의’와 ‘정당한 전쟁’ 딱 두 가지뿐입니다.(···) 어떤 신학자가 제시한 요건에 의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이 이라크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보수 교회 지도자들 중 누구도 이라크 전쟁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의 빈곤한 신학의 뿌리에는 ‘한미동맹’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74~75
그날 그 자리에 앉아 계시던 분들은 대부분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땅에 떨어졌던 그 시절, 그분들이 저에게 가르쳐 준 유일한 ‘사회복음(?)’이 있다면 그것은 로마서 13장이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 정하신 바라”(롬 13:1). 매일 같이 안기부, 보안사, 경찰 대공분실, 부천경찰서 등의 인권 유린이 이어지던 상황에서, 목사님들은 언제 어디서나 로마서 13장이라는 칼과 방패를 들고 나와 청년 학생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도 목사님들께는 의심할 바 없는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권세’였던 것입니다.(···)
로마서 13장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네로 치하에서 첫 대규모 박해를 받던 시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런 시대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을 실제적 혹은 잠재적 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기독교인들을 향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면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권면합니다.(···) 이 성경 말씀이 쓰이기 전에도 후에도, 교회는 로마제국의 모든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한 적이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복종했다면 아예 박해를 당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교회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국가 권력을 ‘박해자’로 상정한 뒤, 그런 박해자가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정당방위나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그를 사랑함으로써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라”(롬 12:20)고 가르칩니다. 77~78
똑같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라고 밝힌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통치자들, 권세들, 세상 주관자들이 우리 싸움의 대상임을 분명히 할 뿐 아니라, 이들을 하늘에 있는 영과 동렬에 두고 있습니다. 79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분들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보수와 진보 교회 어느 쪽에도 ‘국기에 대한 경례’ 또는 ‘국기에 대한 맹세’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습니다. 1970년대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다 퇴학당한 고신파 학생들의 이야기는 그저 경상도의 몇몇 교회에서 화자될 뿐입니다.(···)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토론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97~98
애국주의의 바탕에는 국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의존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지속적인 박해를 받고 있던 시절, 누가 자신들을 지배하는가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아닌 다른 누가 지배한다 한들 형편이 더 나빠질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은 것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는 기독교인들에게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주었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니라 무력에 의한 ‘로마의 평화’였지요. ‘로마의 평화’를 누리기 시작하면서 국가 방위와 통치라는 새로운 ‘사회적 챔임’이 기독교인들의 어깨 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정의, 평화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공동체의 ‘존재 그 자체’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초기 기독교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제는 목숨을 건 개인적 신앙고백 없이도 태어나면 저절로 기독교인이 되는 ‘기독교시대(Christendom)’가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98
사랑과 정의, 평화를 실천하는 ‘교회의 교회됨’,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거룩한(구별된) 공동체의 존재’를 통해 사회에 충격을 던지는 방법이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는 생각은 보수 쪽에서도 진보 쪽에서도 별로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건국과 함께 벌어진 동족상잔의 참극 속에서도 교회는 평화와 사랑을 지키는 독자적인 입장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저 남들과 똑같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육체적 생존을 추구했을 뿐입니다. 그 기나긴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서구 기독교 전통 속에 살아 있는 그 흔한 양심적 병역 거부자 한 명 제대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존 스토트, 대천덕 등 한국 교회에서 존경받는 서양 출신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였다는 사실은 아예 언급도 되지 않았습니다. 99
예수님이 심어 놓고 가신 하나님 나라의 씨앗은 교회였습니다. 예수님도 초대교회도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구호를 외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 ‘세상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교회’ 그 자체로 언제나 정치적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제국을 향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내 가르침에 바탕을 둔 정당을 만들어 복지와 통일에 우선권을 두어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복지 국가가 아니라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100~101
우리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그 존재 자체를 세상을 향해 대안이 될 수 있는 정치적인 공동체여야 합니다. 초월성과 영원성의 입장에서 세상의 시스템 자체를 비판하고,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 세상을 향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살인적인 경쟁 시스템 속에서 ‘적자생존’의 논리를 진리로 믿고 있을 때,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고, 슬퍼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고,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만족을 얻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자비를 입고, 화평케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며,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의 체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것을 더 늘리고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정치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고 희생함으로써 세상에 충격을 던지는 정치여야 하는 것입니다. 105
4장 콘스탄틴누스: 세상을 교회 속으로 끌고 들어온 사람
기독교 전통이 탐욕과 이기심으로 얼룩진 상향성의 모습으로 변하게 된 뿌리는, 가장 자랑스러운 기독교인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교회가 평화주의 전통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하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의 일입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시대를 제대로 알기 전에는 초기 기독교와 오늘의 기독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112
밀비우스 다리에서의 승리를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 환영의 진실 여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도 아니고, 콘스탄티누스 당사자도 아닌 이상 어차피 이 사건의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군기와 방패의 문양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형틀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결코 칼과 창에 의해 이룩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를 군기와 방패의 문양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근본적으로 그가 기독교를 오해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평화의 왕을 전투 한복판에 끌어들여 자신의 정치적 · 군사적 야심을 이용한 그의 태도는 제대로 된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에서 필요로 한 것은 새로운 문양이었습니다. 막세티우스는 다신교 로마의 전통을 콘스탄티누스보다 훨씬 잘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고, 세례도 받지 않았으며, 교회 공동체의 일원도 아니었던 콘스탄티누스였지만, 그는 자신을 지원해 줄 새로운 신이 필요했고, 그 신으로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를 믿기로 했다기보다는, 예수를 헤라클레스나 아폴로보다 더 강한 신으로 간주하고 단순히 그 강한 신을 택한 것입니다. 제국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억압 시스템(Domination System)을 예수님이 가르친 사랑의 법으로 바꾸려한 것이 아니라, 그 억압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동맹자를 선택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동맹 관계를 나타낼 상징물을 필요로 했습니다. 121~122
초대교회 신자들은 나무 십자가보다는 오히려 세례의 상징인 물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4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카타콤 지하 묘지의 벽에서 발견되는 상징들은 주로 종려나무 가지, 비둘기, 물고기 등입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상징들이 시대에 따라 기독교인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십자가는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콘스탄티누스의 승리 이전까지는 말이지요. 기독교의 상징으로 십자가가 다른 모든 것을 대신하도록 한 사람이 바로 콘스탄티누스였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한 상징으로 십자가는 새로운 종교를 대표하게 된 것입니다. 123
교회를 왜곡시킨 ‘십자가 없는 예수’만큼이나 전쟁터로 달려 나간 ‘예수 없는 십자가’도 우리에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이 본질을 압도하는 왜곡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십자가는 바로 이런 왜곡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28
교회와 관련해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을 교회 내부의 주교들과 구분되는 ‘교회 외부의 주교’로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중앙 집권적인 통일국가를 유지하고자 한 그의 열망은 성직 위계를 통해 교회 전체를 하나로 묶고 싶었던 교회 지도부의 열망과 일치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교회의 위계질서를 그대로 인정한 대신 교회 내에서 황제의 위상을 확실하게 확보했습니다.
기독교를 인정하는 다른 한편으로 콘스탄티누스는 321년에 일주일이 시작되는 첫날을 국정 공휴일로 선포합니다. 일주일의 하루를 휴식하게 됨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좀더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주일(主日)’을 공휴일로 공포한 것이 아니라 ‘Sunday’, 즉 태양의 날을 공휴일로 공포한 것이었습니다. 아폴로 숭배의 정신에 따라, 태양의 날이 되면 점쟁이들에게 정기적으로 자문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황제가 된 지후 그는 아폴로 신에게 막대한 예물을 갖다 바쳤습니다. 제국에 어려움이 닥칠 때면 태양의 날을 맞아 점쟁이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물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황궁을 비잔티움으로 옮길 때도 ‘순교자들의 하나님’과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에게 함께 가호를 빌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이교 최고 사제의 칭호와 위엄을 유지했고, 그가 발행한 주화의 한쪽 면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다른 쪽 면에는 태양신의 형상과 ‘정복되지 않은 태양’이라는 문자를 새겨 넣습니다. 337년 임종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세례를 미룬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신앙심이 거의 없었던 것일 수도 있고, 당시 교회가 가르친 대로 세례가 과거의 모든 죄를 씻어 준다고 믿고 모든 죄를 다 저지를 때까지 세례를 미룬 것일 수도 있습니다. 130~131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교회는 박해의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던 대신, 통치자가 져야 할 국가 방위의 책임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주변 족속이 변방을 침범하든 말든 기독교인들과는 직접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4세기와 5세기를 거치면서 로마제국 전체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기독교화되었고, ‘기독교의 국가 종교화’는 과거와 같은 속 편한 입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했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 자체에도 지켜야 할 것이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우선 국가로부터 돌려받은 재산도 지켜야 했고, 교회 위계질서 내의 신분도 지켜야 했습니다. 144~145
‘국가 경배’와 ‘살인 명령’ 두 가지가 특별히 문제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두 가지는 모두 국가가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경우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146~147
기독교 내부의 신앙 차이는 초대교회 때부터 늘 존재한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설명하는 ‘지체’ 개념을 소개하고 나서 바울이 제시하는 가장 좋은 길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다양성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결국 ‘그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이런 다양성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의 기독교였고, 차이와 다양성 그리고 선택을 의미하는 ‘이론(異論)’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단은 단순한 소수파가 아니라 반역과 동일시되었고, 정치적 범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50
무엇이 전통이고 무엇이 이단이냐를 본격적으로 정하기 시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걸고 소수의 길을 걸었고 대부분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통과 이단을 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양한 네 개의 이야기(4복음서)를 생산해 낸 초대교회도 아니었습니다.(···) 전통과 이단을 정하는 최초의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이들 중 누구도 아닌,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누스의 칼에 의하여 기독교는 로마제국을 정복했지만, 동시에 콘스탄티누스의 칼에 의하여 교회도 로마제국에 정복 당했습니다.(···)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사라지고, 십자가 군기를 들고 적군을 격파한 콘스탄티누스의 새로운 길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온몸으로 가르치셨습니다. 폭력으로 폭력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폭력을 이기는 새로운 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습을 대체함으로써, 이전 로마 황제들이 무식한 박해 방법으로는 결코 얻어 내지 못했던 기독교의 세속화라는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151~152
5장 16세기: 세상이 교회를 지배한 시절
개신교인들은 16세기를 나쁜 교황들과 그에 맞선 착한 종교개혁자들이 존재했던 단순한 시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교회 내부의 분쟁 혹은 고상한 신학 논쟁으로 잘못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6세기는 그야말로 피가 철철 흐르는 시대였고, 그렇게 피나 넘쳐 흐르는 중심에는 언제나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유럽의 아무 나라나 찍어서 16세기 역사를 공부해 보면, 도대체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인가하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이 어떤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159
나는 혐오스런 마음으로, 그러나 진실하게 말하는 바이다. 박해자였던 사람은, 도살자이며 살인자였던 사람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교도들이다. 누구를 박해했는가. 다름 아닌 우리의 형제들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에서부터 세벤 지방의 광적인 살육에 이르기까지 손에 십자가나 성서를 든 채 수많은 도시를 파괴했고, 끊임없이 피를 뿌리고 화형대의 장작에 불을 붙여 온 사람은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볼테르) 178
프랑스의 종교전쟁은 ‘이성’이라는 새로운 신에게 모든 주도권을 넘겨주고 난 뒤에야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185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이런 극렬한 대립을 보이고 있던 시절에도 엘리자베스 여왕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막내아들이던 알랑송이나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 등과 끊임없이 결혼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가 모든 분쟁의 원인이었지만, 다른 한편 종교가 아무것도 아니기도 했던 시절이었지요. 188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이 끔찍한 종교개혁 이야기는 전혀 들을 수 없습니다. 시민들이 종교에 목숨을 걸었던 시대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았는지 교인들은 알 수 없습니다. 목사님들이 잘 모르기도 하고, 잘 알더라도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안은 역사니까요. 그저 종교개혁 주일을 맞아 루터나 칼뱅을 기념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가 초대교회 시절의 원형을 회복했다고 믿는 것도 착각입니다. 폭력성과 공격성, 자기중심성이라는 면에서 프로테스탄트도 가톨릭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이 세계사에 끼친 선한 영향은 어쩌면, 그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잔인하게 죽고 죽임으로써 더 이상 종교와 양심을 이유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겠다는 반성과 계몽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언제나 종교적 불관용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종교, 다른 교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공격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16세기에 주로 화형이나 학살로 상대방을 처리했다면, 오늘날에는 말이나 글로 상대방의 영혼을 죽이지 못해 안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상대방과 자신이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순수한 것에 집착하는 이들의 결벽증은 1퍼센트의 차이 때문에, 실제로는 같은 편인 사람들을 죽도록 만듭니다. 189~191
정치권력과의 결탁은 어떨까요?(···) 왕들은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를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했습니다. 루터도 칼뱅도 종교개혁 과정에서 철저하게 세속 권력에 의존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 왕국은 구별된다는 신학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정치권력의 그늘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세속 권력인 독일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토마스 뮌처의 반란이 시작되자, 루터는 완전히 군주들 편으로 입장을 선회하여 무고한 농민들의 처형을 묵인했고, 심지어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영주 여러분, 반란자들을 죽이고 쳐부수고 목 조르십시오. 더 축복된 죽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며 그들의 행위가 정당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은 사탄의 손에 들어갈 것입니다.”
루터의 주장에 고무된 자들의 손에 7만 5천여 명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네바를 정치적으로 장악하여 하나님의 도시로 만들려고 했던 칼뱅도 루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그노 전쟁을 통해 조국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를 획득하려 했고, 신학적인 반대파를 화형으로 제압했습니다. 정치권력과 손잡은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칼뱅이었지만, 정치적 기반 없이 투쟁에 나선 농민반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츠빙글리는 군목으로 전쟁에 참가한 뒤 취리히에서 정치적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이웃 가톨릭 지역으로부터 공격받기 전에 선제공격을 감행하자고 주장한 것이나, 가톨릭군과의 싸움에서 그야말로 ‘장렬히’ 전사한 것은 츠빙글리의 신학적 입장을 잘 보여 줍니다. 191~192
프로테스탄트들이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아마도 올바른 목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한 것은 정당한 것이었을까요?(···) 창검을 손에 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이 자신들의 승리를 기원할 때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드셔야 했을까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현장에서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이런 폭력이 하나님의 이름 아래 자행된 것은 ‘나는 언제나 정의의 편’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의 편’이라는 확고한 믿음은 기독교인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근원인 동시에 남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193~194
6장 중세의 이단: 먼저 실험을 시작한 사람들
한국이나 미국에는 킹제임스 성경만이 진짜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간단한 영어 문장 하나라도 번역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번역에 ‘유일, 무오류, 순수’ 같은 표현이 쓰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또한 성경은 ‘원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자기 손으로 직접 쓴 원본이란 게 존재하지 않음은 물론,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베드로, 바울 등 비교적 후대의 저자들이 자기 손으로 직접 쓴 원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예외 없이 모두 후대의 필사가들이 엄청난 노력을 들여 손으로 옮긴 사본들뿐입니다. 그 사본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고, 그중 어떤 것이 원본에 가까운지 판단하는 것은 신학자들의 오랜 과제와 논쟁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책이 필사를 거듭하며 수천 년이 흐르고 새로운 언어로 번역까지 되다 보면, 그 많은 번역본 사이에는 수많은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킹제임스 성경만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킹제임스 성경 이후 서구 신학이 쌓아 온 놀라운 발전을 완전히 무시하고 17세기 초반으로 자신의 사고를 고정시키게 됩니다. 197~198
이야기를 들은 발도는 자신이 그동안 쌓아 온 부귀영화가 어쩌면 영혼을 팔아먹은 대가로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고민에 빠집니다.(···) 그동안 축적해 놓은 재산이 있었기에, 그는 성직자 두 명에게 돈을 주고 성경의 일부를 프랑스어로 번역시킬 수 있었지요. 그 일부의 복음만 읽고도 그는 자신의 지난 인생이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이 그의 영혼을 깨웠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그 말을 들은 부자 청년은 재산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근심하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청년을 보고 예수님이 남긴 유명한 말씀이 바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마 19:24)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받아들인 발도는 곧 자기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사도들의 본을 따라 일종의 방랑 설교자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지요.
그러나 그의 아내는 남편의 이런 급진적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리옹의 대주교에게 알리고 도움을 구하지요. 대주교는 발도에게 허락 없이 설교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발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아내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집을 떠나지요. 이미 설교를 듣고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사람들이 동행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 대부분이 극빈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곧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립니다.(···) 발도파는 일체의 서약을 금지하고, 군복무를 거부할 뿐 아니라, 레퀴엠, 연옥, 면죄부 등의 가톨릭 교리에 반대했지만, 근본적으로 기독교 교리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성경,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복음서는 발도파 신앙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었습니다. 이들이 볼 때 복음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분명하여 해석이 필요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문제는 해석이 아니라 적용이었습니다. 이러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분명한 의무이고, 따라서 설교는 성직자의 전유물일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은 곧 가톨릭교회와 충돌합니다. 우선 청빈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긴 발도파의 태도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한 가톨릭교회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거기다가 ‘만인 제사장주의’를 내세워 평신도 설교권을 인정하는 입장은 가톨릭교회의 기존 제도를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발도파는 어떤 이유로든 살인을 거부했습니다. 살인을 거부하는 그들의 태도는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아서 전투에서의 살인이나 사형 집행 등도 모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교황에게 승인을 거절당한 발도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전 5:29)는 베드로의 말에 의지하여 설교를 계속합니다.(···) 발도파는 남부 프랑스와 북부 이탈리아로 빠르게 퍼져 나갔고, 1184년 교황 루키우스 3세는 이들을 파문하고 철저히 탄압할 것을 명령합니다. 파문 뒤에는 종교재판과 엄청난 박해가 따라왔습니다.(···) 오해의 결과로 1211년 한 해 동안 스트라스부르에서만 약 80명의 발도파가 화형을 당했고, 14세기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진 심각한 박해로 발도파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합니다. 이들 중 일부는 마지막에 알프스 산속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16세기까지 버티게 되지요.
(···) 1545년 프랑스의 루앙 지역에 남아 있던 무려 3,600여 명의 발도파 신자들이 프랑스군에 의해 학살당하자 칼뱅은 발도파를 위한 탄원서를 국왕에게 제출하고 많은 사람들이 스위스로 피신하도록 돕습니다. 이로써 발도파는 프로테스탄트에 합류하고, 평화주의자로서의 발도파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지요. 203~209
1330년경 출생한 위크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수를 지내며 여러 편의 논문을 남겼습니다. 성경이 교황, 교회, 교부들의 어떤 가르침보다도 우월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200년 후에나 나타날 프로테스탄트의 선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교황을 포함하여 모든 성직자들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돈과 소유만을 가지고 ‘사도적 빈곤’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한 교황은 결국 적그리스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당연히 그의 주장들은 교황청의 주목을 받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이단으로 규정되었으나, 영국의 주교들은 그를 보호하였지요.
1370년대에 그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수의 평신도들이 라틴어 성경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현실 속에서 성경이 교회의 유일한 권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국어 성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옥스퍼드에서 위클리프를 따르던 사람들은 나중에 박해가 시작되자 자신들의 믿음을 대부분 철회합니다.
위클리프가 한 세기 앞서 존재했던 발도파에 대해 얼마나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롤라드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발도파와 동일한 전도 전략을 취했습니다. 위클리프는 자신의 제자들로 두 명씩 전도 팀을 구성하여 검소한 옷을 입고 청중을 찾아 유랑하며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롤라드파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없는 이상, 전투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위반하는 죄라고 보아 평화주의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
영국은 1401년 헨리 4세의 지시에 따라 롤리드파를 포함한 이단들을 화형에 처할 수 있도록 조치를 갖추었습니다.(···) 존 올드캐슬 경의 반란 이후에는 이 법률에 따라 도피 중인 롤라드파를 본격적으로 색출하여 처벌함으로 롤라드파는 급격히 약화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적대감,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 자국어 성경에 대한 집착은 모든 면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위한 씨앗을 남기게 됩니다. 215~217
위클리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바로 보헤미아의 얀 후스입니다. 1369년 보헤미아에서 태어난 후스는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동시에 체코어 설교자로 명성을 떨칩니다.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나중에 함께 화형당한 프라하의 제롬인데, 제롬은 영국 옥스퍼드에 유학하면서 위클리프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신학자였지요. 후스는 대부분의 신학적 논점에 대해 위클리프와 거의 비슷한 입장을 취하면서, 특히 교황청의 면죄부를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루터처럼 면죄부 교리 전체를 비판하지 않았지만, 면죄부가 자금 마련을 위한 장치로 이용되고, 그렇게 모아진 돈이 교황의 전쟁 비용으로 지출된다는 사실에 격분하여 이를 맹렬히 공격했지요. 그러다가 결국 교수직에서 잘리고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뒤 은거하면서 남긴 대작이 <<교회론>>입니다.(···)
후스파 중에서 끝까지 평화주의의 원칙에 따라 폭력 사용을 거부했던 것은 페트르 첼치스키가 이끄는 일파였습니다.(···) 후스 등의 선각자들이 번역한 보헤미아어 성경을 통해 복음을 접한 그는 1420년경 일단의 농부들을 이끌고 프라하에 나타납니다. 첼치스키는 원수를 사랑하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몇 년 후 다시 남부 보헤미아로 돌아간 첼치스키는 중세의 사회적 질서가 기독교 원칙과 완전히 반대되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음을 입증함으로써 기사도의 근간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합니다. 그 주장의 핵심은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시작된 ‘교회와 국가의 연합’이 진정한 기독교의 타락을 가져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폭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국가는 기독교에 어떤 관여도 해서는 안 되며, 기독교도 국가로부터 손을 떼고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구별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첼치스키를 따르던 사람들이 결성한 것이 체코 형제회입니다.
1480년에는 박해를 피해 독일을 탈출한 수백 명의 발도파들이 체코 형제회에 합류합니다. 계속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크게 성장한 체코 형제회는 16세기에 여러 형태로 프로테스탄트 그룹과 연합하게 되지요.(···) 체코 형제회는 제자도를 강조하고, 늘 순교할 각오를 하고 있었으며, 특정한 신학자나 부자, 권력층의 배경 없이 주로 민중에 기원했고, 교단 또는 종파를 거부했으며, 평화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루터파나 칼뱅파보다는 재세례파 쪽에 훨씬 가깝습니다. 217~219
콘스탄티누스 이후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총체적 평화를 포기하는 대신, 현실 세상에서의 단기적 안전을 선택했습니다. 누구도 이들을 쉽게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까요. 그래도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은 목숨과 안전을 포기하고 영원한 평화와 안식의 길을 택했습니다. 주류 교회가 국가와의 연합 속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며 ‘선(線)’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써 나가는 동안, 비주류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은 박해 속에 끊임없이 소멸되면서도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억세게 다시 살아나는 ‘점(點)’의 역사를 써나갔습니다. ‘점’으로 쓰는 역사는 자기희생과 피의 역사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피로 십자가 군기를 물들이는 기독교’와 ‘자신의 피로 십자가를 물들인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227
7장 질문 바꾸기: 고통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교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가 소수자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야기 속 착한 사람의 위치에 사마리아 사람을 가져다 놓음으로써, 출생 배경이나 출신 지역, 신분 등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웃이 누구인지 개념 논쟁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가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역으로 “네가 가서 이런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바로 이 이야기가 소수자 문제에 대한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243
8장 샬롬의 공동체: 교회의 교회됨을 위하여
쪽방에 사는 분들, 노숙인, 새터민, 장애인을 위한 지원에 많은 돈을 쓰고 있는 ‘그나마 괜찮은’ 우리 교회에서 제가 느낀 또 다른 불편함은 우리 교인들 중에 쪽방에 사는 분들, 노숙인, 새터민, 장애인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필요한 곳에 돈을 보내고 여러 가지 사업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그분들을 우리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교인들 모두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어 주자는 메시지는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자는 메시지는 없었습니다. 269
예수님 주변에는 실제로 늘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 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괜찮은’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기독교인 대부분이 가난 문제가 더 이상 교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개인 구원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가난한 사람의 구제가 교회의 책임도 국가의 책임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일 뿐이므로 각자 알아서 하면 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271
남겨진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현실적 생계의 문제는 더 이상 교회의 책임이 아닙니다. 교인들은 누구도 그런 부담을 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보험이나 많이 들어 놓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272~273
한번 이런 상상을 해봅시다. 여기 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사람들은 보험을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갑자기 죽거나 다치거나 직장을 잃게 되면 당연히 교회의 모든 사람이 달려들어 남은 가족을 돕고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교회에는 예수님이 그토록 경계하셨던 부자도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성도들 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과 물질을 나누다 보면 엄청난 부를 축적할 길이 없는 까닭입니다.(···) 모일 때마다 음식과 함께 삶을 나누고 어려움에 처한 성도를 돌보는 이 사람들에 관한 소문은 곧 세상에 널리 퍼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분명한 복음이 없습니다.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다 보니 곧 잡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처음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 주로 전라도 지역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경상도 출신 사람들은 구제에서 소외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러자 전라도 출신이 많았던 교회 지도자들은 경상도 출신의 신뢰받는 성도들을 뽑아 과감하게 구제 사역을 넘겨 버렸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고 성도들은 더 늘어나기만 합니다. 사람이 늘어나다 보니, 식사 때는 자기 몫부터 챙기려는 사람이 생기고, 새치기하는 사람도 늘어납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는 조심스럽게 사람들에게 권고합니다. “이렇게 밥을 먹을 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합당하지 않게 주의 떡이나 잔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를 잘 살펴보고 나서 떡을 먹고 잔을 마십시다.” 그만큼 먹는 일이 중요한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교회가 있을 수 있냐고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공동체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제가 언급한 교회 이야기는 모두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의 모습을 그저 조금 각색한 내용입니다. 274~275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피는 그냥 피가 아니라 ‘언약’의 피입니다.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언약에 동참하는 것이며 공동체의 나눔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삭사 때마다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증인됨을 다짐합니다. 식사 그 자체가 기독 공동체를 세우고 유지하는 실천의 행동인 것입니다. 이런 실천은, 가진 사람은 더 부자가 되고 없는 사람은 갈수록 더 가난해지는 세상의 법칙을 뒤흔들게 됩니다. 이런 교회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세상을 향해 굳이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떠들 이유가 없어집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그 존재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276~277
예수님은 샬롬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고 진리를 말하며 원수를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의를 위해 고난받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그 존재 자체로 이미 정치적이며, 그런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소문만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