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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섶길 중 덕암산길 1구간 모선재길
역사탐방로 유적지 안내
□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 ; 원균장군 사당 외 11
□ 민간의 애환과 전설이 있는 곳 ; 콩나물샘 외 10
□ 설명 안내
① 원균장군 사당 ; 원균장군의 사당인 원릉군사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3년여의 공적심사 끝에 선무1등공신에 책록된 선조 37년(1604년)
건립되었으며, 이듬해인 선조38년 1월 18일(1605년) 선조임금이 치제문을 내려 장군의 혼령을 위로하기 시작하여
불천위로서 지역기관장 및 지역유지, 장군의 후손들이 제향을 올린다. (평택시 향토유적 제6호/1991.7.6)
② 원균장군 묘 ; 원균장군의 묘이다. (경기도 향토유적 제57호/1980.6.2)
애마 총 ; 원균장군이 타던 애마의 묘. 원균장군이 전사하자 그의 애마가 천리 길을 달려와 주인에게 일어난 일을 알리고
죽었다고 한다.
③ 안양공(수성군) 최경의 묘 ; 조선시대 도화원에서 인물화에 뛰어난 화가였으며, 안양공 최경이 그린 의경세자의 영정을 성종(成宗) 임 금이 보고 감격에 겨워했으며 성종15년 당상관인 절충장군 사과(司果)에 올랐으며, 실록에도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도 오르지 못한 대단한 지위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의 큰아들 최유림을 진주 소씨와 결혼시켰으며, 그 인연으로 이 곳에 입향 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순충보조공신으로 병조판서에 추중되었고, 수성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안양공이다. 평택지역 수성 최씨의 뿌리이기도하다.
④ 하마석 ; 원전 장군이 고성현령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말을 타고 내릴 때 딛고 내리던 디딤돌.
⑤ 원전장군 집 터 ; 원균장군의 둘째 동생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수사인 원균장군과 함께 전장에 선전관으로 임하였다. 전쟁이 끝 나고 고성현령을 지냈으며,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 의병장 원연장군 집 터 ; 원균장군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큰아버지 수량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사마시 문과에 급제후 전국을 유랑하였으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재를 털어 진위 누산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용인 김량장리에 와카자키 병사 3천명을 유인하여 햇골에서 격파하였다. 그가 의병을 모집할때의 격문이 지금도 남아있으며, 용인시 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에 햇골전투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양세충효 정문에 안내 책자가 비치되어 있다.
○ 400여년 모과나무 ; 원연장군의 집터 옆에 있는 나무로 최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위하여 뜻있는 유지가 추진중이다.
⑥ 콩나물 샘 ; 지금은 논 옆에 위치하지만 예전에는 논이 함께하지 않았고 주변의 아낙네들이 나물이나 쌀을 씻는 곳으로 이용하였는데 이 웅덩이에는 항시 콩나물이 자라고 있어 풍수에 능한 사람을 데려와 물어본 즉 산너머 진위현을 흐르는 장호천에서 콩나물을 씻는 중 떠내리던 콩나물이 산 밑 수로를 통해 이곳에까지 올라와 자라고 있다고하여 이후 콩나물 샘이라 불렸으며, 사시사 철 마르지 않아 샘주변이 화전으로 개발되고 논이되어 지금에 이르렀다한다.
⑦ 원균장군 생가 터 ; 원균장군 그의 6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원균장군의 생가터이다.
⑧ 울름 밭 ; 원균장군이 타던 애마가 장군이 전사하자 천리 길을 달려와 주인에게 일어난 일을 알리고 죽었다고 전하는 밭
⑨ 산~골 능선 ; 능선으로 오르면 정사각형의 금속체를 볼 수 있는데 지금처럼 의학이 발전되지 않았던 그 옛날 일반 백성들이 허리 아플 때 민간요법으로 사용하던 정사각형의 자연동으로 한방명으로는 산골(자연동)은 예로부터 그 효능이 입증되어 한의원에서 지금까 지 계속 사용되고 있고 드시는 분마다 효과가 뛰어나 어느정도 연세가 드신 어르신은 거의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이며 골절(뼈가 금이가거나 부러짐)은 물론, 골다공증 치료에 매우 효과가 빠르다고하며 또한 퇴행성 관절염. 디스크. 풍치. 키 안 크는 어린이.뼈 와 근육을 튼튼하게 하고 싶은분(운동선수) 협착증. 갑상선 질환, 심장 두근거림. 어혈통. 화상등 여러 질환에 사용된다고함.
⑩ 정골 ; 정골은 서기 1728년 3월 청주성을 점령한 이인좌의 난과 관련된 전설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인데 ‘노적가리가 지금의 평택시내에서도 보였을 정도의 부자인 원만주는 지금 도일동에 거주하는 원씨들과는 인척 간 이었으며 준비과정 중에 원씨의 사위 인 지금의 원곡면 지문리 세종시대 최만리의 후손인 해주 최씨가 처가인 원씨 집에 왔다가 모의 사실을 알았고, 그가 한양으로 올 라갔다는 정보를 알아챈 혁명군들이 지금의 노량진까지 말을 달려 쫓아가 가마를 세워 검문(?)을 하였으나 가마 안에서 손을 내밀 며 여성임을 말하는데 그 손이 여성의 손처럼 고와서 그대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후 토벌 관군이 내려와 온 마을이 초토화 되는 과정에서 가담치 않았다는 원씨들의 변론을 어부원군(경종의 장인)이 조정에 까지 올라가 변호하였다고 한다. 그 후 죽산에서 이 인좌가 생포되어 난은 종료되었다. 지금도 원곡면 지문리에는 그때 가마에서 고운 손을 내민 그의 공적비가 있다고 하며, 그때 혁 명군들의 병장기를 만들었던 대장간 터가 정골이다.
후손이 없는 어부원군의 묘를 최근까지 원씨들이 벌초도하고 제를 올려주었다고 전한다.
⑪ 양세충효정문 ;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용인 김량장리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원연의 정려와 원연의 둘째 아들 원 사립의 정려와 원연의 셋째 아들인 원종공신 원사달의 후손 원길상의 효자 정려가 모셔진 정려이다.
원연은 원균장군의 첫째 아우로 1567년 사마시(문과)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있다가 1592년 왜적이 쳐들어와 경 기도로 올라오자 진위가 한양남쪽의 요충이니 지켜야한다 하고 가산을 털어 진위현 내의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였다. 진위현 남쪽 누산에 진을 치고 적을 방비하던 중 용인의 김량장리에 왜적이 들어와 머문다는 소식에 의병들을 거느리고 기습하여 크게 승 전하였다. 이후 각 현에서도 군사를 모집하여 왜적을 물리치니 왜적은 경기 좌도를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였다. 왜적이 어느정도 물 러가자 연기현감에 제수되었고 적성(지금의 경기도 연천)현감 겸 양주진관병마절제도위를 지냈다. 적성현감 재직시 고을에 불이나 서 농사가 황폐되고 촌락이 비게되자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였고 황무지를 개간하는등 정사를 잘 돌보아 칭송이 자자했다. 숙종 5년 (1679년)에 임진창의훈에 들어 충절정려가 내려졌고, 순조 29년(1829년)에 통정대부 이조참의로 추증되면서 다시 충철정려가 내려 졌다.
원사립은 원연의 둘째 아들이다. 숙부(작은 아버지)였던 원전의 양자로 들어갔다. 1592년 23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군기시 부정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정유재란때는 서천군수로 있으면서 왜적의 양탈을 방어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1594년 친부인 연의 사망에도 상복을 입지 않고 임무에 전념하여 완수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진주목사 겸 진주첨병마절제사와 만포 방어사에 임명되었 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여막을 짓고 3년 시묘를 했다. 그 뒤 모친상을 당해서도 3년 시묘를 지냈으며 이로 인 하여 건강을 해쳐 병사했다. 이와 같은 효성이 나라에 알려져 순조5년(1805년) 효자 정려가 내려져 아버지와 아들이 나라에 충성 하고 부모에 효도를 다하였다 하여 양세충효(兩世忠孝)정문이라한다.
원길상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성심을 다하였다. 13세에 어머니가 병이나자 극진히 간호하 였으나 더욱 위독하여서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입에 넣어드려 드시게하였으며 그 지극한 효심에 병이 낫게 되었으나 이듬해 돌아가시자 3년상을 정성껏 모셨다. 그 후 아버지와 계모를 모시면서도 항상 집안이 화기애애하게 정성을 다하였으며 계모상을 당 하여서도 친어머니와 다르지 않게 3년상을 모시었다. 그가 사망하자 진위 유림이 조정에 효자정려를 청하여 고종31년(1894년) 조 봉대부 동몽교관에 추증되고 효자 정문을 하사 받았다.
⑫ 원연, 원전, 원길상묘 ; 양세충효 정문을 보고서 왼쪽의 산에 위 3분의 묘가 산재해 있다.
⑬ 부인터 ; 양세충효정문 뒷길로 올라가면 임진왜란 때 부(지아비)군들은 전장에 나가고 그 부인들만이 모여 살았던 집터이다.
⑭ 서낭당 ; 부인터를 지나 고갯길 정상에 있는 200년(?) 이상된 참나무가 서낭나무이며, 돌맹이들이 원탑모양으로 쌓여있고 오다가다 지 나며 그냥 지나가기는 꺼름직하여 돌맹이 세개 올려놓고 소원빌며 깨금발 세 번뛰던 기억이 난다. 더군다나 제가 어렸을 때는 서 낭나무 위에 숨어있던 반란군이 쇠도리깨로 맞아 죽었다는 전설을 들었던 터라 무섭기만하여 잽싸게 돌 세개 올려놓고 침밷고 깨끔 발 세번 뛰고 도망(?) 갔었던 황당한 기억이 새롭다, 무당의 구역이다. 정작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하며 마을의 안녕을 비는 신은 산 신이어서 덕암산 아래 지금도 산신각이 있다.
⑮ 고갯길 ; 서낭당 고갯길은 임진왜란때 이여송이 군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넘어 왔다고 한다. 여기서 산을 올라 등산로를 따라 가면 왼쪽 은 송탄쪽이요 오른쪽은 휴암산(부엉바위 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로서 은산리까지 갈 수 있다.
⑯ 덕암산 ; 사실 마을 사람들은 덕암산에 올라서는 오물을 버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대,소변 금지다. 마을사람들에게 덕암산은 신성시되었 었으며, 산신령의 힘으로 6.25전쟁시에도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산신의 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지금도 산아래 산신 각이 있으며, 그 옛날 제주를 맏으셨던 아버지, 마을 사람들이 돼지를 잡고 찬물에 목욕재계하시고...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롭다.
⑰ 휴암산 ; 부엉바위 산(휴암산)의 용우물이라 불리는 샘에는 풍수지리의 전설이 있다. 샘 아래 풍수지리상 괘등형의 혈이 있으며 두 개의 샘은 괘등의 기름이며 앞의 산은 괘등에 불을 당기는 부싯돌 격이다. 따라서 기름이 마르거나 흐려지면 불을 계속 밝힐 수 없 으므로 지금도 1년에 한번씩 샘을 청소하고 있다.
⑱ 은산리 방촌 ; 봉화정씨 집성촌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겠지만 그 옛날에도 주위의 가까운 곳에서 연을 맺고 살아 왔으므로 한 민족이라 불렸지는 모르지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제 집안 역시 인근의 정씨 집안 봉화정씨 할머니가 계시다. 가을 시향 때 방문하면 외 손 왔다고 극진히 대접 받았다는 어른들 그러나 제기중 종지라는 말은 금지하였는데 정도전 선생의 호가 종지였었던가보다. 경 북 봉화가 그 분의 고향이지만 후손이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⑲ 정도전 사당 ;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사당 경기도 유형문화재 132호(삼봉집목판), 평택시 향토유적 제2호(사당)
⑳ 사창 ; 조선시대 지방의 촌락에 설치한 일종의 곡물 대여기관의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다. 아산만이 축조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바닷 물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21)이성부 정문 ; 원연의 외손자인 이성부는 정종의 9세손으로 참봉을 지낸 문익의 아들이다. 1608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도총부 도 사 문천군수등을 역임했다. 북청지방의 성 쌓는 일을 잘 감독하고 전선을 수리한 일로 가선대부로 승진하고 만포첨사와 상로대장 을 겸직하여 서쪽 변경을 방어했다. 1623년 인조반정에 이괄과 함께 선봉이 되어 공을 세웠고 강화부사에 임명되어 수군의 반발 을 평정하였다. 이듬해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황해도 평산의 저탄에서 반란군과 대치했지만 싸움에서 패하자 강물에 투신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인조 2년(1624년) 충신정려가 내려졌다.
첫댓글 훌륭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