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원망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10:10-13(민수기 20 : 2 - 13)
사람들에게 나쁜 성품 중에 하나가 원망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원망을 쉽게 잘합니다. 잘못되었을 때 자기의 잘못으로 하지 않고 누군가를 원망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원망하는 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결혼생활이 즐겁지 못하면 중매한 사람을 원망합니다. 원망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원망’은 반항하는 마음을 갖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원인을 다른 사람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10)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지만 나아가서 모든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멸망한 자’들입니다. 성도는 원망하다가 멸망한 자들 같이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광야에서 ‘원망하다가 멸망한’ 사건을 기록한 목적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라고 말씀했습니다(11). 우리는 그 가르침을 배우고 깨우쳐야 합니다.
광야에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다가운데로 지나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이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1-4)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홍해를 건너고 반석으로부터 나오는 생수를 마시며 만나를 먹었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원망을 하다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사탄의 종으로 살다가 교회에 나와 세례를 받고 생명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어떤 어려움도 없는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 사흘 길을 걸었지만 마실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뜨거운 햇볕이 내려 쬐이는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물을 발견했는데 그 물은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물이 써서 마실 수 없게 되었을 때 백성은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출15:24).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며 그것을 물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시키는 대로 나무를 물에 던졌더니 물이 달게 되어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물을 마시고 또 다시 광야를 갑니다.
두 달 반 정도를 지나 엘림에 도착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라고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원망하는 말을 분석해 보면 애굽에서 종살이로 고생했던 것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은혜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은혜를 안다면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하는 백성들은 몸은 애굽을 떠났지만 정신은 애굽에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몸은 자유하지만 마음은 노예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몸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성품이 바뀌어야 합니다. 노숙생활에 익숙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데려다 목욕을 시키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고 따뜻한 방에 잠을 자도록 해 주었는데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노숙했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을 때’란 애굽 사람이 내려치는 채찍을 맞고 발에 밟히고 채였던 때였습니다. 가마 곁에 노래 부르고 춤추던 때가 아닙니다. ‘언제 이 고통에서 벗어날 꼬’하며 괴로워 울부짖던 때를 좋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하나님은 다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고기와 떡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출16:1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메추라기(고기 중에 제일 맛있다고 합니다)를, 아침에는 만나(과자도 되고 떡도 되고 맛이 있어서 이것이 무엇이냐 고 하여 만나라고 했습니다)를 주셨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해도 하나님은 원망의 소리를 다 듣고 쓴 물도 달게 해 주셨고, 고기와 떡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메추라기와 만나를 40년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주셨습니다.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것은 원망하는 소리를 듣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을 주시고자 계획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고 조금만 기다렸다면 주실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원망을 한 것입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조급하기 때문에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참아 기다리는 자 이기 때문에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참으시고 들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두 번 원망한다고 그때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벌을 주신다면 우리는 매일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습관적으로 원망하는 것은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 온 열명의 정탐군이 가나안에 거민은 강하고 견고하여 그들 앞에 우리는 메뚜기 같다는 악평하는 소리를 듣고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고 원망하며 한 지휘관을 세워 애굽을 돌아가자고 하며 모세와 아론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지켜보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가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14:11)고 하시며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원망은 믿음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베푸신 이적을 체험하고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게 해주신 것을 체험했습니다. 쓴 물을 달게 해 주는 물을 마셨습니다. 메추라기와 만나를 날마다 먹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베풀어주시는 축복을 받으면서 원망하는 것입니다.
어려웠던 일이 있을 때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면 다음에도 도와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 날에 도움 받았던 것을 잊어버리고 원망하는 것은 믿음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원망’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라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원망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멸시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원망하는 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원망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통하여 믿음을 시험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만 우리의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망하는 소리를 하나님은 다 들으시고 원망하는 백성을 더 이상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원망하는 그들 모두를 광야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원망에 대한 무서운 징벌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지나게 된 것은 그들이 원망했던 댓가였습니다. 정탐군들이 가나안을 정탐한 날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다가 광야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원망이란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도전입니다. 엄청난 화를 가져오게 하는 죄가 됩니다.
원망은 습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원망에 대한 무서운 댓가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지만 원망하는 습관은 쉽게 버리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이 신광야에 도착했을 때 마실 물이 없으므로 또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합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하며 원망을 하였습니다(민20:2-5).
원망은 할수록 향상됩니다. 처음보다 더 원망의 조건들이 많아졌습니다. 처음에는 물이 쓰다고, 마실 물이 없다는 정도였지만 나아가면서 고기도 없다 떡도 없다 하더니 이제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광야를 여행하는 백성들에게는 원망의 조건이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파종할 곳이 없다’고 하는 것은 가나안에 가지 않고 광야에서 살겠다는 말입니다. 원망을 하다보니 말도 안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망은 자기를 저주합니다. ‘우리 형제들이 죽을 때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원망은 자신을 저주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저주하는 말대로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죽음입니다. 광야를 유리하다가 죽어 짐승들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자는 이처럼 매우 불행한 죽음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광야의 죽음은 고통스러운 죽음입니다. 오랫동안 굶고 병들어 혼자 고통당하다 죽는 것입니다.
원망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은 성도들에게 원망을 하게 하여 엄청난 죄에 빠지게 하고 결국 망하도록 합니다. 그뿐 아니라 원망을 통해서 다른 사람까지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모세 같은 분도 원망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백성들 앞에 화를 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반석 앞에 모으고 “반역한 너희여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내게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다’(106:33)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민20:10-12).
모세는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원망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모세도 누구 못지않게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백성들의 원망의 소리를 듣고 참지 못해 화를 내고 반석을 두 번 친 것이 화근이 되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원망은 다른 사람들까지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원망을 하게 되는 중요한 동기는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원망의 반대는 감사입니다. 감사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원망입니다. 감사를 하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해 보십시오. 원망은 언제 사라져 버렸는지 모르게 간데 온데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반대로 원망을 하면 감사가 없어져 버립니다. 감사하면 원망할 일이 없습니다. 원망하면 감사할 일이 없습니다.
원망하여 멸망한 자들에게 감사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쓴 물을 단물로 고쳐주신 물을 마시고서도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메추라기와 만나를 날마다 주셨지만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반석을 쳐서 생수를 마실 수 있도록 해 주었지만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마땅히 감사할 일이 있음에도 감사하지 않고 원망을 했습니다.
원망을 누가 합니까? 감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원망하면 심령이 병들고 다른 사람까지도 어렵게 만듭니다. 원망은 무서운 독성이 있는 사탄의 도구입니다. 믿음의 사람까지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원망입니다.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대신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원망 할 일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는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원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원망대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멸망하는 자들처럼 원망하는 자가 되지 말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