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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선종사상
1. 중도법문
1) 육조스님 2) 마조스님 3) 백장스님 4) 대주스님 5) 교외별전
2. 견성의 본질
1) 견성성불(見性成佛) 2) 무념무심(無念無心) 3) 오매일여(寤寐一如) 4) 사중득활(死中得活) 5) 대원경지(大圓鏡智) 6) 상적상조(常寂常照) 7) 아난의 득도
3. 돈오점수사상 비판
1) 돈오돈수(頓悟頓修)
2) 돈오점수(頓悟漸修)
1) 수심결(修心訣) 2) 절요(節要) 3)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1. 중도법문
1) 육조스님
보통 삼론종°법상종°천태종°화엄종이라고 하면 교가(敎家) 이론을 총망라한 것인데, 이 모두는 중도(中道)에 입각하여 법을 설한 것입니다. 따라서 중도를 내놓고는 각 종(宗)은 성립되지 못할 뿐 아니라 중도의 이론이 불교교리의 최고원리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하는 선종(禪宗)에서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았는가. 선종도 불교에 속하는 이상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역대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육조(六祖)스님의 어록인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면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육조스님이 돌아가실 임시에 하신 법문을 살펴봅시다.
조사께서 어느 날 문인(門人)인 법해(法海)°지성(志誠)°법달(法達)°신회(神會)°지상(智常)°지통(智通)°지철(志徹)°지도 (志道)°법진(法珍)°법여(法如) 등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내가 죽은 후에는 각각 한 지방의 스승이 될 것이니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설법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리니 내 근본 종지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여라.
먼저 삼과(三科)법문과 동용(動用) 36대(十六對)를 들 것이니 드나듦에 양변을 떠나 일체법을 설할 때 자성을 떠나지 마라. 홀연히 어떤 사람이 너희들에게 법을 묻거든 말함에 모두 쌍(雙)으로 하여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며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되어도 마침내는 두 법을 다 없이 하여 다시 갈 곳이 없도록 하라.
삼과법문이란 음(陰)°계(界)°입(入)을 말한다. 음(陰)이란 곧 오음(五陰)으로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말하고, 입(入)은 12입(十二入)으로서 외육진(外六塵)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과 내육문(內六門)인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가 그것이다. 계(界)는 18계(十八界)로서 6진(六塵)․6문(六門)․6식(六識)이다. 자성(自性)이 능히 일체만법을 포함하는 것을 함장식(含藏識)이라 하는데 만약 사량(思量)을 일으킬 것 같으면 곧 전식(轉識)이다. 육식(六識)을 일으켜 6문(六門)으로 나아가서 여섯 객관[六塵]을 보니 이와 같이 18계가 모두 자성을 따라 작용을 일으킨다. 만약 자성이 삿되면 열여덟 가지 나쁜 것을 일으키고 자성이 올바르면 열여덟 가지 올바름을 일으킨다. 만약 악하게 작용하면 곧 중생의 작용이요, 착하게 작용하면 곧 부처의 작용이다. 작용(作用)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가. 자성(自性)으로 말미암아 대법(對法)이 있다. 외경(外境)의 물질세계에 다섯 상대[五對]가 있으니 하늘과 땅이 상대요, 해와 달이 상대요, 밝음과 어두움이 상대요, 음과 양이 상대요, 물과 불이 상대이다. 이것이 다섯 상대[五對]이다.
법상(法相)의 말에 열 두 상대가 있으니 말․법[語法]이 상대요, 유°무(有無)가 상대요, 유색°무색(有色無色)이 상대요, 유상․무상(有相無相)이 상대요, 유루,무루(有漏無漏)가 상대요, 색,공(色空)이 상대요, 동,정(動靜)이 상대요, 청°탁(淸濁)이 상대요, 범,성(凡聖)이 상대요, 승,속(僧俗)이 상대요, 노,소(老少)가 상대요, 대,소(大小)가 상대이다. 이것이 열두 상대[十二對]이다.
자성이 작용을 일으키는 데 열아홉 상대가 있다.
장단(長短)이 상대요, 사°정(邪正)이 상대요, 치°혜(痴慧)가 상대요, 우°지(愚智)가 상대요, 난°정(亂定)이 상대요, 자°독(慈毒)이 상대요, 계°비(戒非)가 상대요, 직°곡(直曲)이 상대요, 번뇌와 보리가 상대요, 상°무상(常無常)이 상대요, 비°해(悲害)가 상대요, 희°진(喜瞋)이 상대요, 사°취(捨取)가 상대요, 진°퇴(進退)가 상대요, 생°멸(生滅)이 상대요,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이 상대요, 화신(化身)과 보신(報身)이 상대이니 이것이 열아홉 상대 [十九對]이니라.”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이 36대법(三六對法)을 잘 쓸 것 같으면 도(道)가 일체경법(一切經法)에 관통하고 출입할 때 양변을 떠나 버려 자성작용과 여러 사람의 말에 밖으로 상(相)은 있지만 상을 떠나고 안으로 공(空)은 있지만 공을 떠난다. 만약 상(相)에 집착할 것 같으면 곧 사견(邪見)을 기르게 되고, 만약 공(空)에 집착하면 즉, 무명(無明)을 기르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너희들에게 뜻을 물을 때 유(有)를 물으면 무(無)로써 대하고 무(無)를 물으면 유(有)로써 대답하며 범(凡)을 물으면 성(聖)으로써 대답하고 성(聖)을 물으면 범(凡)으로써 대답하여 이도(二道)가 서로 인(因)해서 중도(中道)가 성립된다. 한 번 물으면 한 번 대답하고 나머지 물음도 한결같이 이렇게만 하면 곧 이치를 잃지 않으리라.
가령 어떤 사람이 묻되 ‘어떤 것을 어두움이라 합니까’ 하면 ‘밝음은 인(因)이 되고 어두움은 연(緣)이 되어 밝음이 없어지면 곧 어두움이다’라고 대답하여 밝음으로써 어두움을 나타내고 어두움으로써 밝음을 나타내서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되게 하여 중도의 진리를 이루게 해야 한다. 나머지 물음도 다 이와 같이 할 것이다. 너희들이 나중에 법을 전함에 있어서도 이렇게 하여 번갈아 서로 가르쳐 줌으로써 종지(宗旨)를 잃지 말 것이니라.”
付囑第十(法門對示等九)
師一日에 喚門人法海志誠法達神會智常智通志徹志道法珍法如等曰 汝等은 不同餘人이라 吾滅度後에 各爲一方師하나니 吾今敎汝說法하야 不失本宗케 하리라. 先須擧三科法門과 動用三十六對하리니 出沒에 卽離兩邊하고 說 一切法호대 莫 離自性하라. 忽有人이 問汝法이어든 出語盡雙하야 皆取對法하여 來去相因하야 究境에 二法을 盡除하여 更無去處하라.
三科法門者는 陰界入也라 陰은 是五陰이니 色受想行識이 是也오 入은 是十二入이니 外六塵色聲香味觸法과 內六門眼耳鼻舌身意가 是也오 界는 是十八界니 六塵六門六識이 是也니라. 自性이 能含万法을 名含藏識이니 若起思量하면 卽是轉識이라 生六識出六門 見六塵하나니 如是一十八界가 皆從自性起用하나니라. 自性이 若邪면 起十八邪요 自性이 若正이면 起十八正이라.
若惡用이면 卽衆生用이요 善用이면 卽佛用이니라. 用由何等고 由自性하야 有對法하나니.
外境無情이 五對니 天與地對며 日與月對며 明與暗對며 陰與陽對며 水與火對라 此是五對也오.
法相語言에 十二對니 語與法對며 有與無對며 有色與無色對며 有相與無相對며 有漏與無漏對며 色與空對며 動與靜對며 淸與濁對며 凡與聖對며 僧與俗對며 老與少對며 大與小對라 此是對十二對也라.
自性起用이 十九對니 長與短對며 邪與正對며 痴與慧對며 愚與智對며 亂與定對며 慈與毒對며 戒與非對며 直與曲對며 實與虛對며 險與平對며 煩惱與菩提對며 常與無常對며 悲與害對며 喜與嗔對며 捨與慳對며 進與退對며 生與滅對며 法身與色身對며 化身與報身對니 此是十九對也라.
師言 此三十六對法을 若解用하면 卽道 貫一切經法하여 出入에 卽離兩邊하야 自性動用과 共人言語에 外於相에 離相하고 內於空에 離空이니 若全着相하면 卽長邪見이오. 若全執空하면 卽長無明이니라.
若有人이 問汝義호대 問有어든 將無對하고 問無어든 將有對하며 問凡이어든 以聖對하고 問聖이어든 以凡對하야 二道相因하야 中道義니라. 如一問一對하고 餘問을 一依此作하야 卽不失理也리라.
設有人이 問호대 何名爲暗고 答云明是因이요 暗是緣이니 明沒卽暗이라. 以闇顯明하고 來去相因하야 成中道義니라. 餘問을 悉皆如此니 汝等이 於後傳法에 依此轉相敎授하야 勿失宗旨어다. [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 48, p. 360]
육조스님을 모시고 있던 스님 중에서 남악 회양(南嶽懷讓)스님이나 청원 행사(靑原行思)스님은 딴 곳에 나가서 법을 펴고 있었지만 법해(法海)스님 등은 육조스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있었습니다. 스님을 모시고 있는 스님들 가운데 수승한 10대 제자를 모아 놓고 무문자설(無問自說)로 이렇게 유촉하였습니다.
본래 수법제자(受法弟子) 같으면 이러한 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또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비록 안다고 해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또 그 당시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 중생들을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육조스님이 하고 싶은 말씀이 선종에 있어서 근본 원리이기 때문에 특별히 불러서 유촉한 법문입니다.
언제든지 설법을 할 때는 양변을 떠난 중도(中道)에 입각해서 설법을 하되 자성(自性)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자성이란 불성(佛性)을 말하는데 불성이란 비유비무(非有非無)이고 역유역무(亦有亦無)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누가 유(有)로 물으면 무(無)로 대답하고 무(無)로 물으면 유(有)로 대답해야 합니다. 유(有)란 스스로가 유가 아니고 무(無)도 스스로가 무가 아닙니다. 무(無)가 있기 때문에 유(有)이고 유(有)가 있기 때문에 무(無)가 있습니다. 따라서 유를 떠나서 무가 없고 무를 떠나서 유가 없습니다. 이것을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된다[來去相因]’고 합니다. 그리고 구경에 두 법을 모두 버리라고 한 것은, 다시 말하면 무를 떠나서 유가 없고 유를 떠나서 무가 없다면 이것은 생멸법(生滅法)이지 절대법(絶對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두 법을 다 버려야 됩니다. 생멸법을 버려서 다시 갈 곳을 없게 해야 합니다. 결국 양변을 여의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누가 법문을 묻든지 간에 반드시 양변을 여읜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설해야 되지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근본 불법이 아닐 뿐 아니라 육조의 아손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교외별전이라고 하는 조계 선종(曹溪禪宗)의 근본 입장도 중도에 서 있지 중도를 떠나서는 조계선종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계선종을 바로 알려면 중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천태종이나 삼론종이나 법상종이나 그 근본은 중도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첨가해서 설명할 것이 있는데 육조스님이 의발(衣鉢)을 전한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혹자는 행사스님에게 육조스님이 의발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 본 것입니다. 그 부분을 ꡔ대장경ꡕ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전에는 옷과 법[衣法]을 함께 실행하여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았으니 옷을 가지고 믿음[信]을 표시했다. 내가 이제 사람을 얻었는데 어찌 믿지 아니함을 걱정하겠느냐. 내가 옷을 받은 이래로 고생을 많이 했다. 하물며 후대에서랴. 반드시 경쟁이 많을 것이다. 옷은 산문(山門)에 두고 너는 마땅히 각 지역에 나누어 교화하여 이 법을 단절케 하지 마라.
從上에 衣法雙行하여 師資가 遞授거든 衣以表信이요 吾今得人인데 何患不信이리오 吾受衣以來로 遭此多難이요 況乎後代리오 爭競必多하나니 衣卽留鎭山門하고 汝當分化一方하야 無令斷絶케 하라. [景德傳燈錄 5;大正藏 51, p. 240上]
이 대목은 『전등록』, 청원행사(靑原行思)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즉 6조대사 이전에는 옷과 법[衣法]을 서로서로 쌍행해서 전해 내려왔는데 이것은 옷을 가지고 신(信)을 표시한 것이고 법은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을 얻었는데 어찌 믿지 아니함을 겁낼 것이 있겠는가.’ 즉 네가 지금 법을 성취하였는데 그 신(信)을 표시함에 있어서 옷은 필요가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옷을 전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옷을 전해 받은 이래로 옷을 서로 뺏으려고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하물며 후대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즉 옷 때문에 싸움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은 조계산에 그대로 두고 너희는 마땅히 딴 곳으로 가서 교화를 하라’며 이 법을 단절치 않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기서 옷은 ‘산문에 두라[留鎭山門]’ 함은 조계산에 그대로 두라는 뜻입니다.
또 『육조단경』에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법해(法海) 상좌가 재배하고 여쭈었다. “스님께서 입멸하신 후에 옷과 법은 마땅히 어떤 사람에게 맡기십니까.”
“내가 대범사에서 설법한 이래 지금에 이르도록 기록하여 유통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법보단경』이라 한다. 너희들이 수호하여 번갈아 전해 주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되 다만 이 단경에 의지하여 설하면 이것이 정법(正法)이다. 지금 너희들을 위해 법을 설하고 옷은 전해 주지 않는다. 너희들의 신근(信根)이 순숙(淳熟)하기 때문에 결정코 의심이 없으며 큰 일을 감당할 만하다. 그러므로 이전 조사인 달마대사께서 붙이신 게송의 뜻에 의거하여 옷은 전하지 않을 것이다” 하시고 그 게송을 말씀하셨다.
내가 본래 이 땅에 와서
법을 전하고 어리석은 중생을 구하니
한 꽃에 다섯 잎 피어
열매가 저절로 이루리라.
法海上座가 再拜問曰하기를 和尙入滅之後에 衣法當付何人하니이고 師曰 吾於大梵寺에 說法해서 以至于今이라 抄錄流行하니 目曰法寶壇經이라 汝等이 守護하여 遞相傳授하라 度諸群生일댄 但依此說이요 是名이 正法이라. 今爲汝等說法하야 不付其衣라 蓋爲汝等 信根이 淳熟하야 決定無疑거든 堪任大事라 然이나 據先祖達磨大師가 付授偈意에 衣不合傳 偈曰.
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花開五葉 結果自然成.
[法寶壇經;大正藏 48, p. 361上]
이것뿐만 아니라 육조스님이 옷을 조계산에 두고 전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글을 지은 것이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불의명(佛衣銘)입니다. [劉禹錫撰;大正藏 48, p. 364中] 여기의 첫머리에 ‘부처님 말씀은 행하지 않고 옷이 싸움의 근본이 된다[佛言不行佛衣乃爭].’ 그래서 옷을 전하지 아니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현종(玄宗) 초 육조스님이 돌아가신 뒤 얼마 안 되어 현종이 육조스님의 의발을 청해서 궁중에 모셔 놓았는데 그 아들인 숙종이 죽고 난 뒤에도 옷을 조계산에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숙종 아들 대종(代宗)이 꿈을 꾸었는데 육조스님이 의발을 조계산으로 도로 돌려보내 달라고 현몽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태(永泰) 원년 5월 5일에 조칙을 내려 조계산에 돌려보냈다는 대목이 육조스님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짐이 꿈에 혜능대사를 보았는데 전해 내려온 옷 가사를 조계로 보내달라고 청하니 내가 진국 대장군 유순경을 시켜서 받들어 모시고 보내며, 이것은 나라의 국보이니 본사에게 여법하게 잘 보관하라 하였다.
朕이 夢感能禪師 請하건대 傳衣袈裟에 却歸曹溪라 今遺鎭國大將軍劉崇景해서 頂戴而送하니 朕謂之國寶니 卿可於本寺如法安直하라. [六祖大師緣記外記;大正藏 48, p. 364中 °下]
이러한 여러 가지의 증거를 보아서 육조스님이 옷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제8장 선종사상
1. 중도법문
1) 육조스님 2) 마조스님 3) 백장스님 4) 대주스님 5) 교외별전
2. 견성의 본질
1) 견성성불(見性成佛) 2) 무념무심(無念無心) 3) 오매일여(寤寐一如) 4) 사중득활(死中得活)
5) 대원경지(大圓鏡智) 6) 상적상조(常寂常照) 7) 아난의 득도
3. 돈오점수사상 비판
1) 돈오돈수(頓悟頓修)
2) 돈오점수(頓悟漸修)
1) 수심결(修心訣) 2) 절요(節要) 3)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2) 마조스님
마조(馬祖道一)스님은 지금부터 1200여 년 전 당(唐) 정원(貞元) 4년(AD.788) 80세에 입적하였는데 육조스님 제자되는 남악 회양선사의 제자입니다. 마조스님이 법을 깨치게 되는 기연[得法機緣]은 잘 알려진 것이지만 이것을 보면 선(禪)이란 활동하는 원동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 것과 같이 한 군데 체재하여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마치 죽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낙오되기 마련이고 도태됩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논과 밭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시장바닥에서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합니다. 수행(修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단히 정진하는 사람은 향상의 분(分)이 있거니와 정진하지 않고 방일하는 사람은 결국 전에 닦았던 경계조차도 미하고 맙니다. 모든 것은 쉬지 않고 변천하기 때문에 우리도 이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쉬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선(禪)은 활동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참선을 한다는 것은 좌선한다고 말하는 이가 많은데 좌선만이 참선(參禪)이 아닙니다. 참선은 곧 선을 참구하는 것인 만큼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에 오로지 마음을 순일히 하여 자기가 의심하는 화두(話頭)에 몰두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마조스님의 득법기연인 남악선사와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선의 진의(眞意)를 알 수 있습니다.
남악스님이 숭산(嵩山)의 전법원(傳法院)에서 수도하는 도일스님의 법기(法器)를 알고 도일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바로 방문 앞으로 갔습니다.
“대덕(大德)은 무엇 하려고 좌선을 하십니까.”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하루는 남악스님이 기왓장을 가져와서 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방문 바로 앞에서 기왓장을 숫돌에 갈고 있었다.
“큰스님은 무얼 하시려고 기왓장을 갈고 계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갈고 있습니다.”
“기왓장을 갈아서 어찌 거울을 만들려고 합니까.”
“그러면 좌선을 해서 어찌 부처를 이루려고 합니까.”
이 한마디에 도일은 큰스님이 기왓장을 갈고 있는 진의(眞意)를 알았습니다. 다시 남악스님이 물었습니다.
“우마차가 가지 않을 때 소를 때려야 옳은가,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
“부처를 찾는 데에 있어 좌선만 고집하면 설사 만 겁을 지내도 깨치지 못한다.”
도일스님은 남악스님의 말씀을 듣고 이내 마음을 깨쳐서 뒷날 남악스님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ꡔ경덕전등록ꡕ 남악회양장(南嶽懷讓章)에 나오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은 강서성(江西省)을 중심으로 교화를 하였기 때문에 강서마조(江西馬祖)라고 불리며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교화를 한 석두 희천(石頭希遷)과 더불어 당시 선계(禪界)의 쌍벽이라 불리었습니다. 마조스님 밑에 139명의 대선지식이 있고, 그 중에서 뛰어난 이가 88명인데 이 88명이 천하에 흩어져서 육조 조계선을 천하에 유포시켰습니다. 선종을 천하에 유포시켜서 알게 한 것은 마조스님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조스님 밑에서 임제종(臨濟宗) 위앙종(潙仰宗)이 나고 조동종(曹洞宗)도 이와 관련이 많습니다. 마조스님의 성품은 인자하며 얼굴이 특이하고 소걸음에 호랑이 눈길이었으며 혀를 내밀면 코를 덮고 발바닥에는 두 개의 고리 문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조스님은 종문(宗門)의 걸출로서 천하에 선을 유포시킨 제일의 공로자라고 평하는 동시에 큰제자를 많이 두기로 마조스님 만한 이가 없다고도 평합니다. 그래서 마조스님의 법문이라고 하면 종문의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문이 많이 없고 ꡔ마조어록(馬祖語錄)ꡕ이라고 하는 간단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도(道)를 알려고 할진대는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이다. 평상심이란 조작(造作)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범성(凡聖)이 없고 단상(斷常)이 없다. 경에 말씀하시길 범부행(凡夫行)이 아니며 현성행(賢聖行)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라 하니라. 단지 지금과 같이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할 때 전체가 다 도(道)이다. 도(道) 이대로가 법계(法界)이니 내지 항사사 같은 묘한 작용이 법계를 벗어나지 아니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진댄 어찌 이것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하며 무진등(無盡燈)이라 할 것인가. 일체만법이 다 심법(心法)이요 모든 이름이 심명(心名)이니 만법이 마음을 따라서 일어난다. 마음이란 만법의 근본이다. 경에 말씀하셨다. 마음을 알아 본원(本源)에 통달하는 까닭에 사문(沙門)이라 한다.
若欲直會其道인댄 平常心이 是道이다 謂平常心이 無造作하야 無是非 無取捨하며 無斷常 無凡無聖하니라 經에 云하대 非凡夫行이며 非賢聖行이 是菩薩行이라 하니라 只如今 行住坐臥와 應機接物이 盡是道라 道卽是法界니 乃至 河沙妙用이 不出法界니라 若不然者인댄 云何言心地法門이며 云何言無盡燈이리요 一切法이 皆是心法이요 一切名이 皆是心名이니 萬法이 皆從心生이라 心爲萬法之根本이니 經云 識心達本源故로 號 沙門이라 하니라. [馬祖語錄;傳燈錄 28, 大正藏 51, p. 440上]
도(道)란 평상심(平常心)을 말합니다.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고 하니까 평상심이란 일상 보통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옷 입고 밥 먹고 성내고 좋아하는 마음 그대로의 활동이 도라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마조스님이 말씀하시는 평상심(平常心)이란 조작이 없고 시비도 없고 취사도 없고 범부와 성인과 단멸과 상주가 없는 마음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곧 양변을 여읜 중도가 평상심이라는 말입니다. 생멸심을 가리켜 평상심이라고 한 것은 아닌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가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기틀에 대응하고 물건을 접촉함[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업식망견(業識妄見)을 말하는 생멸심이 아니고 진여대용(眞如大用)을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마조스님이 말씀한 도란 생멸견해라고 잘못 오해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그것은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를 도라고 한 마조스님의 뜻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도 이대로가 법계라 하였습니다. 법계란 연기를 말하는 것이고 연기는 중도입니다. 일체법이 마음법이라고 하는 이 마음이란 자성이라 해도 진여라 해도 뭐라 이름붙여도 괜찮은데 양변을 여읜 중도 즉 불성(佛性)입니다. 그래서 천태종에서 주장하는 한 개의 색, 한 개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다[一色一香無非中道]는 것과 같은 말이며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중도 아님이 없다는 것이니, 이 마음이라는 것이 중도불성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알아 본원에 도달한 사람, 즉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이 사문의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즉 출가한 사람은 누구든지 평상심, 말하자면 양변을 여읜 중도를 깨쳐야지 이것을 깨치기 전에는 사문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道)라 한다고 생멸의 변견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자기의 망견이요 곡해지 마조스님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규봉스님이 4종복기를 비판할 때도 생멸견해에서 마조스님을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그 뒤에 홍각범(洪覺範)스님이 “규봉은 절대로 마조스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다”고 했고, 영원 청(靈源淸)스님도 “규봉이 생멸°변견적인 해석을 한 망견이지 마조스님이 뜻은 모른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라 하는 것은 양변을 여읜 중도에 입각한 평상심의 진여대용이지 생멸망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능인(能仁)이니 지혜가 있고 기정(機情)을 잘하여 능히 일체중생의 의심그물을 부수어서 유(有)°무(無) 등의 속박을 벗어나며 범․성(凡聖)의 망정이 다 없어져서 인(人)과 법(法)이 모두 공(空)하다. 최상 법륜을 굴리어 범위를 벗어나니 짓는 바가 걸림이 없어 사(事)와 이(理)가 함께 통달하니라.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홀연히 있다가 도리어 없어지며 종적이 없으니 비유하면 물에 글씨를 쓰는 것과 같다. 불생불멸은 대적멸(大寂滅)이니 속박 속에 있으면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하고 모든 속박을 벗어났을 때를 대법신(大法身)이라 한다. 법신(法身)은 다함이 없어서 체(體)는 증감이 없고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능히 모가 나고 능히 원만하여 사물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니 물 속의 달과 같다. 도도히 운용하여 뿌리를 세우지 않아 유위(有爲)를 다하지 않고 무위(無爲)를 취하지 않는다. 유위(有爲)는 무위(無爲)집의 용(用)이고 무위는 유위집에 의지하나 의지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 까닭에 저 허공같이 의지하는 바가 없다고 한다.
佛是能仁이니 有智慧善機情하야 能破一切衆生의 疑網하야 出離有無等縛하야 凡聖情盡하며 人法이 俱空하니라. 轉無等輪하야 超於數量하니 所作無礙 事理雙通 如天起雲 忽有還無 不留礙迹 猶如 畵水成文이니라. 不生不滅이 是大寂滅이니 在纏에 名如來藏이오 出纏에 名大法身이니라. 法身은 無窮하야 體無增減하야 能大能小하며 能方能圓하야 應物現形하야 如水中月하니라. 滔滔運用하야 不立根裁하야 不盡有爲하며 不在無爲하나니 有爲是無爲家用이며 無爲是有爲家依니 不住於依故로 云 如空無所依라 하니라. [馬祖語錄;傳燈錄 28, 大正藏 51, p. 440上․中]
능인(能仁)이란 석가(釋迦)를 의역한 것이고, 기정(機情)을 잘한다고 함은 중생제도를 함에 있어서 부처님은 응기접물(應機接物) 외 수단이 묘하여 능히 일체중생의 의심그물을 부수고 유°무에 묶인 변견을 벗어나게 합니다. 결국 중도를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입니다. 유․무의 속박을 벗어나서 중도를 성취할 것 같으면 범성(凡聖)의 정(情)이 없어져서 법공(法空) 아공(我空)이 됩니다. 진여대용의 무애자재한 법을 쓰게 되면 쌍차쌍조해서 무장무애한 법계가 현전하게 되어 범주를 완전히 떠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사(事)와 이(理)가 서로 함께 통하여 이사무애 사사무애의 무장애법계가 됩니다. 이것이 불법의 진수입니다. 중생이든지 보살이든지 아직 대법(大法)을 성취하지 못한 때를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는데 아직 유․무 양변을 해탈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을 성취한 것을 대법신(大法身)이라 합니다. 법신(法身)은 무궁하여 다함이 없고 체(體)는 증감이 없어서 대소(大小)가 완전히 원융자재하게 됩니다. 체에 증감이 없다 함은 양변을 여읜 쌍차(雙遮)를 말하는 것이고 능소능대(能小能大)란 쌍조(雙照)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법신은 주처(住處)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위(有爲)를 다하지 않고 무위(無爲)에 주(住)하지 아니하며 유위를 버리지 않고 무위를 취하지 않습니다. 유위는 무위집의 작용이고 무위는 유위집에 의지합니다. 하지만 의지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 까닭에 저 허공같이 의지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중도라는 것은 원융자재해서 머무르는 곳이 없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고 부처 밖에 다른 마음이 없다.
선(善)도 취하지 아니하고 악(惡)도 버리지 아니하여,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양변에 함께 의지하지 아니하여, 생각생각에 죄성이 공함을 얻어 보려고 해도 얻어 볼 수 없음을 통달한다. 자성(自性)이 없는 까닭에 삼계(三界)가 유심(唯心)이다. 삼라만상이 한 법의 인(印)이니라. 무릇 색을 보는 이것이 모두 마음을 보는 것이니. 마음은 스스로 마음이 아니요 색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다.
너희가 때를 따라 말로써 설명하되 사(事)에 즉하고 이(理)에 즉하여 모두 조금도 막히는 바가 없으니 보리도과(菩提道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마음에서 나는 바를 색(色)이라 이름하고 색(色)이 공함을 아는 까닭에 생(生)이 즉 불생(不生)이다. (中略)게송을 들어보아라.
심지법문을 때에 따라 설하니
보리도 이와 마찬가지다.
사(事)와 이(理)가 다 거리낌이 없어
생(生)이 즉 불생(不生)이니라.
心外에 無別佛이요 佛外에 無別心이라.
不取善不捨惡하야 淨穢兩邊俱不依怙하야
達罪性空하야 念念不可得이니 無自性故로 三界唯心일새 森羅萬象이 一法之所印이니라 凡所見色이 皆是見心이니 心不自心이요 因色故有(心)이니라. 汝但隨時言說하대 卽事卽理하야 都無所碍니 菩提道果도 亦復如是하야 於心所生에 卽名爲色이오 知色空故로 生卽不生이니라.……
偈曰
心地를 隨時說하니
菩提도 亦只寧이라
事理俱無碍하야
當生卽不生이니라. [傳燈錄 6;大正藏 51, p. 246上]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고 부처 밖에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취사(取捨)를 하게 되면 변견에 떨어지기 때문에 선악을 다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양변에 함께 의지하지 아니하여 죄의 본성이 공함을 통달하여 생각생각에 죄성이 공함을 얻어 보려고 해도 얻어 볼 수 없습니다.
왜 죄의 본성이 공함[罪性空]을 말하느냐 하면 보통 자성청정(自性淸淨)을 말하면 알기 쉬운데 죄라 하면 다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자성청정이나 죄성청정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魔)와 불(佛)이 같다는 의미입니다. 중생이 모르고 변견으로 볼 때는 마군은 나쁘고 부처는 좋고 선은 좋은 것이고 죄는 나쁘다고 보지만 죄성이 본래 청정하여 공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성청정이나 죄성본공(罪性本空)이라는 것을 확철히 깨칠 것 같으면 이것이 부처이고 이것이 도(道)입니다.
자성이 공했기 때문에 삼계가 유심입니다. 삼계유심이란 자성청정심을 말하는 것인데 일체만법이 다 공하여 쌍차쌍조하며 진공(眞空)이 묘유(妙有)한 것인데 이것을 마음이라 하고 중도라 합니다. 앞에서 선도 취하지 않고 깨끗하고 더러움의 양변을 버린 것을 마음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삼라만상이 모두 쌍차쌍조해서 차조(遮照)가 동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삼라만상이 일법지소인(一法之所印)으로 중도와 자성청정 내놓고는 하나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일법(一法)이란 마음°법계°연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결국 마군이라고 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모든 것이 융통자재하기 때문에 무슨 말로 표현하든 흠이 되지 않습니다. 왜 흠이 되지 않느냐 하면 쌍차한 쌍조, 즉 원융자재한 곳에서 말하기 때문에 중생의 변견과는 틀리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색을 보는 이것이 모두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색 다르고 심(心)이 따로 없습니다. 색이 즉 심이고 심이 즉 색입니다. 색이 즉 공이고 공이 즉 색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원융무애합니다. 전부가 하나입니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따라서 색이 즉 심이고, 심이 즉 색이며, 색이 즉 공이고, 중생이 즉 불이고, 불이 즉 중생입니다. 그래서 색을 바로 보면 마음을 보는 것이고 중생을 바로 보면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중생을 변견으로 보게 되면 영원히 중생으로 되고 말지만 중도정견으로 중생을 바로 보게 되면 이것이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마음은 스스로 마음이 아니요, 색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습니다. 너희가 때를 따라 연설할 때 사(事)에 즉하고 이(理)에 즉하여 조금도 막힌 바가 없으니 우리의 대법(大法)도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막힌 데가 없이 무애해서 조금도 안 통하는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나는 바를 색이라 이름하고 색은 공함을 아는 까닭에 생(生)은 불생(不生)입니다. 마음이 즉 색이고 색이 즉 마음입니다. 마음이 공한 동시에 색이 공했고 색이 공한 동시에 마음이 공했다는 말입니다. 색이 공했기 때문에 아무리 색이 생하고 마음이 생한다고 해도 생(生)을 내놓고 불생(不生)이 따로 없고 불생(不生)을 내놓고 생(生)이 따로 없습니다. 생과 불생이 언제든지 원융무애합니다. 생(生)이란 쌍조(雙照)를, 불생(不生)이란 쌍차(雙遮)를 말하는 것인데 언제든지 서로 통한 것으로 보아야지 서로서로 막힌 것으로 보면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게송으로 말하기를 양변을 여읜 중도에서 법을 설하면 사(事)와 이(理)에 걸림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제까지 마조스님의 어록을 살펴보았는데 이 설법의 중심사상도 양변을 여읜 중도의 입장에서 설한 것이지 원융무애한 중도를 떠나서는 한번도 설법을 한 일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禪)이라고 해도 불법 가운데 말하는 것이지 딴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설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제8장 선종사상
1. 중도법문
1) 육조스님 2) 마조스님 3) 백장스님 4) 대주스님 5) 교외별전
2. 견성의 본질
1) 견성성불(見性成佛) 2) 무념무심(無念無心) 3) 오매일여(寤寐一如) 4) 사중득활(死中得活)
5) 대원경지(大圓鏡智) 6) 상적상조(常寂常照) 7) 아난의 득도
3. 돈오점수사상 비판
1) 돈오돈수(頓悟頓修)
2) 돈오점수(頓悟漸修)
1) 수심결(修心訣) 2) 절요(節要) 3)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3) 백장스님
백장스님은 마조(馬祖)스님의 제자입니다. 마조스님 제자 가운데 뛰어난 제자가 많았지만 그 중에서 마조정안(馬祖正眼)을 전해 받은 사람은 백장스님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 그의 제자 가운데 후세의 선가(禪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스님은 선문에 들어오기 전에 경․율․론의 삼장에 능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학다문하였습니다. 어느 날 마조스님이 남강(南康)에서 교화한다는 말을 듣고 마조스님 처소에 찾아가 마음을 기울여 의지하니 마조스님이 보자마자 공손히 맞이하여 입실케 하였다고 합니다. 스님은 현현한 관문을 깨달은 뒤에도 다시 딴 곳에 가지 않고 그곳에서 살았으며 마조스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8년 동안 마조스님의 탑을 모셨습니다.
백장스님의 성격은 겸양하고 하심(下心)을 많이 하여 다른 사람한테는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는 취급을 받았고, 마조스님의 인가를 받아 마조정안(馬祖正眼)을 전했지만 마조스님 생전에는 드러나지 않아서 마조스님이 돌아가신 후 마조스님의 비석을 세우는 데 그 당시 유명한 스님들의 이름이 비문에 모두 올라 있지만 백장스님의 이름은 그 비문에서 빠질 만큼 밀행(密行)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심하면서 숨어 살았지만 공부하는 스님들이 찾아와서 법(法)을 물어보면 외모와는 다르게 해박하게 지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어 곳곳에서 대중들이 모여들게 되어 처소가 협소하게 되었으므로 백장산(百丈山)으로 처소를 옮겼습니다. 여기서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는데 선문에서 총림(叢林)이라고 하는 것이 백장스님부터 시작이 됩니다. 선종(禪宗)이 달마대사부터 시작하였지만 마조스님 때까지도 선종을 표방하는 가람을 특별히 따로 정한 것이 아니라 대개 율종 사찰에 더부살이로 지냈으며, 혹 따로 선가(禪家)를 이루고 사는 사찰도 있었지만 선종에 특별한 규율도 없이 지냈습니다. 그래서 백장스님이 백장산에 가서 대중을 많이 거느리고 살게 되니 무질서하게 생활할 수 없었으므로 대°소승의 경(經)° 율(律)을 참작하여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선종 최초의 법규이며 그 이후 천하 총림에서 시행하게 된 거룩한 법이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백장스님께서 평생 동안 행한 철저한 수행정신은 이루 형용하기 어렵거니와 그 위에 날마다 운력을 할 때 남보다 먼저 나섰습니다.
스님 밑에는 황벽(黃檗)이라든가 위산(潙山)이라든가 하는 천하의 대종사들뿐만 아니라 수백 명이 넘는 우수한 제자들이 함께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찰은 깊은 산 속에 있었으므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낮에는 매일 밭일을 하고 밤에만 앉아서 정진을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백장스님은 연세가 많아도 매일 대중들과 함께 밭에 나와서 일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함께 일을 하던 제자들이 늙은 노스님의 일하는 모습이 보기가 민망스러워 일하는 도구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연장을 찾지 못한 스님은 하루종일 방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고 공양도 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찾아가서 공양 드시기를 청하니 “내가 아무런 덕(德)도 없는데 어찌 남들만 수고롭게 하겠는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니 여기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천하에 유명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선(禪)을 참구한다든지 도(道)를 구한다든지 총림(叢林)을 한다든지 할 때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정신이 근본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원칙이 기본적으로 이행되지 않으면 총림이란 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요즈음 우리 대중들은 옆에 있는 사람이 눈만 한번 흘겨도, 아니 무슨 꾸중이라도 하려고 하면 “내가 해인사 아니면 굶어죽는가, 해인사 오기 전에도 여태까지 먹고 살았는데 …….”
이런 사고방식으로 수행을 하고 있으니 만약 백장스님이 지금 살아 계신다면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한번 돌아보고 정진하는 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다시금 다져야 하겠습니다. 백장스님은 서기 814년 당(唐) 원화(元和) 9년 정월 세수 95세로 입적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출가하기 전부터 원대한 포부를 가졌는데 한 일화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스님이 어릴 적에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 절을 하고 나더니 갑자기 불상을 가리키면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저것이 무엇입니까.”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시다.”
“부처님 모습이 사람과 같아서 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고는 ‘나도 반드시 부처가 되리라’라는 서원을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도 다음 생에서 또다시 사람의 몸을 받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법(佛法) 또한 듣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무쇠를 씹는 것과 같은 불퇴전의 참구심으로 화두를 들어 이생에 반드시 부처를 이루겠다는 서원을 세워서 불철주야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일체 유°무(有無)의 제법에 의지하고 머무르지 아니하며 또 의지하고 머무름이 없는데도 머무르지 아니하며 또 의지하고 머무르지 아니한다는 생각도 하지 아니하면 이것이 대선지식(大善知識)이다. 또한 부처님 한 분만이 대선지식이니 두 사람이 없으며 나머지 사람은 모두 다 외도며 또 마군의 말이니 지금 다만 두 극단[兩頭句]인 일체 유․무의 대경법(對境法)을 말해 부수는 것이다.
但不依住一切有無諸法하야 亦不作住無依住하며 亦不作不依住知解하면 是名大善知識이요 亦云唯佛一人이 是大善知識이니 爲無兩人하야 餘者는 盡名外道며 亦名魔說이니 如今祗是說破兩頭句인 一切有無境法이니라.
백장스님의 어록(語錄)으로 백장광록(百丈廣錄)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른 조사스님들보다 유독히 드러나게 유°무의 양변을 여읜 이것이 불법(佛法)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중도(中道)라는 말은 없지만 유․무 양변을 여의는 것이 중도이므로 그 뜻은 부처님이 유°무 양변을 여읜 중도를 정등각했다는 것을 바로 전하고 있으며 육조스님이 유촉했던 것, 즉 언제든지 양변을 여읜 중도로써 설법하라는 유촉을 그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처음 유법(有法)의 제법을 여의었으면 그만인데 왜 유°무 양변을 여읜 여기에도 주하지 말라고 하느냐 하면 실지로 유°무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주(住)할래야 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생이란 항상 집착이 많기 때문에 유․무 양변을 여읜다고 하면 양변을 여읜 여기에 머물러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병을 고치기 위하여 유°무 양변을 여읜 곳에도 주하지 말고, 또 주하지 아니하는데도 주하지 아니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내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유°무 양변을 여읜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유°무 양변을 여읜 사람을 대선지식이라 하고 부처님 한 분만이 대선지식이어서 두 사람이 없으며 유․무 양변에 머물러 있는, 즉 변견을 가진 사람은 외도이며 그 사람의 말은 마군의 말이니 양변을 여읜 중도의 법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 백장스님의 근본 입장입니다.
“몸이 가이없는 보살이 여래의 정수리는 보지 못한다 하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유변에서 보고 무변에서 보기 때문에 여래의 정수리는 보지 못하니 지금 일체 유°무 등의 견해가 모두 없고 또 견해가 없다는 생각도 없으면 여래의 정수리를 본다.”
無邊身菩薩이 不見如來頂上(相)이라 하니 如何오 師云 爲作有邊見無邊見일새 所以로 不見如來 頂上이니 祗如今에 都無一切有無等見하야 亦無無見하면 是名(如來)頂上(相)現이니라.
무변신(無邊身)보살, 즉 몸이 가이없는 보살이라 하면 무변신에 머물러 있음을 말하니 유견(有見)은 넘어섰지만 무견(無見)에 집착한 사람을 경계한 말입니다. 무변신보살이 여래의 머리 위를 보지 못하는 것은 무변에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변에 떨어진 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다운 여래의 이마 위를 보려고 하면 유변과 무변을 여읜 중도를 성취해야 합니다. 중도를 성취하려면 유°무 양변을 버려야 하고 또 버렸다는 생각도 없어야 함을 여기에서 철저히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란 구함이 없는 사람이니 지금 일체 유°무의 제법에 탐착하여 구하면 있는 바이고 짓는 바가 되어 모두 어긋나니 도리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佛是無求人이니 如今에 貪求一切有無諸法하면 但是所有所作이리 皆背也니 却是謗佛이니라.
실지로 불법(佛法)을 알려면 유°무 양변을 여읜 중도를 바로 깨쳐야 합니다. 만약 유°무 제법을 탐착하여 구하게 되면 부처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유°무가 일체법을 주관한다.
有無가 管一切法하나니라.
무슨 견해 무슨 견해 할 것 없이 모두가 유°무에 얽혀 이어지니 유°무의 견해만 없으면 일체의 상대적 견해가 없어지는 것이므로 여기서 유°무를 대표로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일체 유°무의 제법에 탐착하여 물들지 아니하면 무생(無生)이라고 한다.
但不貪染一切有無諸法하면 是名無生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무생(無生)은 8지(八地) 자재위보살이나 10지(十地) 등각(等覺)을 벗어난 부처님의 무생(無生)입니다. 왜냐하면 자재위보살들도 침공체적(沈空滯寂)해서 엄격히 보면 무견(無見)에 집착해 있는 사람들이니 유․무 양변을 완전히 여읠 것 같으면 대원경지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무생(無生)이라고 하고 부처의 지위의 무생입니다.
일체 유․무 등의 견해가 없으며 또한 견해가 없다는 것도 없으면 바른 견해라고 한다.
都無一切有無等見하야 亦無無見하면 名正見이니라.
유°무 등의 견해가 없고 없다는 생각도 없음을 바른 견해[正見]라 하니 바른 견해를 완전히 얻으면 이것이 무생(無生)이고 대선지식이고 부처입니다.
일체 유°무 등의 법과 유․무 등의 견해가 없어서 낱낱이 삼구(三句) 밖을 벗어나면 여의보(如意寶)라고 한다.
但無一切有無等法하야 有無等見하야 一箇箇透過三句外하면 是名如如寶니라.
무릇 가르치는 말이 모두 삼구(三句)에 서로 관련하니 초선°중선°후선이다. 처음에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곧바로 선심(善心)을 내게 하고 가운데서는 그 선심을 부수고 마지막에는 비로소 좋은 선이 된다고 이름한다. 보살은 보살이 아니므로 보살이라 한다 하며 법은 법이 아니므로 법 아님이 아니라고 함과 같이 모두 이러한 것이다.
夫敎語皆三句相連이니 初中後善이니라. 初直須敎渠發善心이요 中破善心이요 後始名好善이니 菩薩이 卽非菩薩일새 是名菩薩이라 하며 法非法 非非法일새 總與麽也니라.
여의(如意)란 내 마음대로 됨을 말하니 여의보란 내 뜻대로 되는 보배, 즉 마음이 무애자재함을 비유한 것입니다. 유°무 등의 법과 견(見)을 여의었으면 그만이지 다시 왜 삼구(三句)를 말했는가 하면 유°무 등을 더욱 철저하게 여의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보살은’은 초구(初句), ‘보살이 아니므로’는 가운데 구[中句], ‘보살이다’는 후구(後句)입니다. 보살은 보살이 아니라는 것은 부정하는 것이니 쌍차(雙遮)를 말함이고, 보살이 아니므로 보살이라는 것은 긍정하는 것이니 쌍조(雙照)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정과 긍정, 즉 쌍차쌍조한 이것이 내포되지 아니하면 변견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에 특별히 삼구로 나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구(三句)란 쌍차쌍조(雙遮雙照) 차조동시(遮照同時)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이렇게 말하면 여기에 집착하고 저렇게 말하면 저기에 집착하는 병을 철저히 깨뜨리기 위하여 말한 것이니, 이렇게 하여 중도를 성립시킨 것입니다. 언제든지 유․무 등의 법을 여의는 데 있어서는 삼구가 서로 이어져서 철두철미하게 유°무 양변을 여의어야 합니다.
일체 유°무의 제법에 막히지 않고 또 막히지 않음에 의지하고 머무르지 아니하며 또 의지하고 머무르지 아니한다는 지해(知解)도 없으면 이것을 신통이라 한다.
不被一切有無諸法閡하며 亦不依住不閡하며 亦無不依住知解하면 是名神通이니라.
일체 유°무 등의 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사구(四句) 밖을 떠나면 비고 비었다 하고 불사약이라 한다.
不納一切有無等法하야 離四句外하면 名空空이며 名不死藥이라 하니라.
일체 유°무 등의 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옛날과 지금을 주관하면 부처님이 이 사람이고 사람이 이 부처님이며 또 삼매정(三昧定)이라 한다.
不被一切有無等法하야 管自古自今하면 佛祗是人이요 人祗是佛이며 亦是三昧定이니라.
남악 회양스님이 마조스님을 평할 때 ‘그대는 고금에 좋다[善古今]’고 했는데 이 말은 바로 여기서 말하는 옛날과 지금을 주관한다는 말과 같이 쌍조(雙照)를 표현한 것입니다. 양변을 부정하고 양변을 긍정하는 쌍차쌍조(雙遮雙照)하는 이것이 부처이며 삼매(三昧)입니다.
일체 유°무의 제법과 세간․출세간법을 의지하고 머무르지 아니하며 또 의지하고 머무르지 아니한다는 지해(知解)도 짓지 아니하며 지해가 없음에도 의지하고 머무르지 아니하면 자기 마음은 부처이며 조용(照用)은 보살에 속한다.
不依住一切有無諸法과 世間出世間法하야 亦不作不住知解하며 亦不依住無知解하면 自心是佛이요 照用이 屬菩薩이니라.
보살이라고 하니까 부처님보다 낮은 것같이 생각하기 쉬운데 낮은 것을 뜻함이 아닙니다. 체용(體用)으로 볼 때 부처님은 체(體)이며 보살은 용(用)으로서 조용(照用)이라는 것은 진여대용(眞如大用)을 말한 것이니 부처가 즉 보살이며 보살이 즉 부처입니다.
먼저 종지를 깨친 사람은 일체 유․무의 제법상에 구속되지 아니하며 때묻은 옷을 씻은 것과 같으므로 모양을 떠났다고 말하며 부처님이라 이름한다.
先悟宗人은 不被一切有無諸法相拘하야 如浣垢依故로 云離相이며 名佛이니라.
일체 유°무의 제법에 탐착하여 물들지 아니하면 이것을 사구게를 가진다고 말한다.
不貪染一切有無諸法하면 是名受持四句偈이니라.
일체 유°무의 제법을 구하면 중생의 무리[衆生數]요, 일체 유무의 제법에 의지하여 머무르지 아니하면 중생의 무리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求一切有無諸法하면 是衆生數요 不依住一切有無諸法하면 是名不入衆生數이니라.
다만 지금 일체 유․무의 제법을 모두 보지도 듣지도 아니하며 이렇게 경을 가지면 비로소 수행의 자격[分]이 있다.
祗如今에 但是一切有無諸法을 都不見不聞하야 與麽持經하면 始有修行分이니라.
다만 지금 일체 유°무의 제법을 떠나고 또 떠났다는 데서도 떠나 삼구(三句) 밖을 뛰쳐나가면 자연히 부처와 더불어 차이가 없다.
祗如今에 但離一切有無諸法하야 亦離於離 透過三句外하면 自然與佛無差니라.
다만 일체 유․무의 모든 경계에 구르지 아니하니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이 일체 유․무 경계의 법을 능히 비추어 부수니 곧 금강(金剛)이다.
但不被一切有無諸境轉이니 是故導師 能照破一切有無境法이 是金剛이니라.
일체 유․무 등의 법을 떠나며 또 떠남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며 또 머무르지 아니한다는 지해도 없으면 이 사람은 모든 죄의 때가 쌓일 수 없다.
離一切有無等法하야 亦不住於離하며 亦無不住知解하면 此人은 一切罪垢 不能相累니라.
옳음과 그릇됨, 고움과 추함, 옳은 이치와 그릇된 이치의 모든 지견(知見)을 몽땅 버려서 얽히어 묶이지 아니하여 곳곳에서 자재하면 초발심 보살이 곧바로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고 한다.
是非好醜와 是理非理 諸知見이 總盡하야 不被繫縛하야 處處有在하면 名爲初發心菩薩이 便登佛地니라.
다만 일체 유°무의 모든 경계에 혹란되지 아니하며 또 혹란되지 아니함에도 의지하고 머무르지 아니하며 또 의지하여 머무르지 아니한다는 지해도 없으면 이것이 널리 배움이며 부지런히 생각함이며 널리 유포하는 것이다.
但不被一切有無諸境惑亂하야 亦不依住不惑亂하며 亦無不依住知解하면 是名遍學이며 是名勤護念이며 是名廣流布니라.
일체 유°무 경계의 법에 탐착하고 물들어 일체 유․무의 경계에 혹란되면 자기의 마음은 마왕이며 조용(照用)은 마군이 백성에 속한다.
貪染一切有無境法해야 被一切有無境惑亂하면 自心은 是魔王이요 照用은 屬魔民이니라.
이와 같이 교외별전을 표방하는 선종에 있어서도 초군정안(超群正眼)을 가졌다는 백장스님이 항상 유°무를 여의는 중도법문을 했으니 불법의 근본이 중도에 있음을 증명하는 천고만고의 산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선을 해서 부처님 마음을 증득하는 것이고 부처님 마음이라는 것은 중도를 정등각하는 것이지 불법 밖의 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뭣고’ 하는 것을 깨쳐서 중도를 정등각해야 합니다. 말로만 중도 중도 하지 말고 실지로 중도를 깨쳐야 합니다.
제8장 선종사상
1. 중도법문
1) 육조스님 2) 마조스님 3) 백장스님 4) 대주스님 5) 교외별전
2. 견성의 본질
1) 견성성불(見性成佛) 2) 무념무심(無念無心) 3) 오매일여(寤寐一如) 4) 사중득활(死中得活)
5) 대원경지(大圓鏡智) 6) 상적상조(常寂常照) 7) 아난의 득도
3. 돈오점수사상 비판
1) 돈오돈수(頓悟頓修)
2) 돈오점수(頓悟漸修)
1) 수심결(修心訣) 2) 절요(節要) 3)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3) 대주스님
마조스님의 84명 큰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고 하는 분이 대주 혜해(大珠慧海)스님입니다. 스님의 저술로서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이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선문에서 표본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마조스님이 이 책을 보고 법을 자유자재하고 융통자재하게 구술했다고 크게 칭찬하고 ‘대주(大珠)’, 즉 큰 구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이 근거가 되어 스님을 ‘대주(大珠)’스님이라고 했습니다. 전등록에도 대주스님의 법문이 가장 많이 실려 있는데 선문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전체를 상세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우선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에서 몇 가지 법문을 인용하여 대주스님의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것이 중도(中道)입니까.”
“중간이 없으며 또 양변이 없는 것이 중도이니라.”
“어떤 것이 양변입니까.”
“저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있음이 곧 양변이다. 밖으로 소리와 색에 묶이는 것을 저 마음이라 하고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이 마음이라고 한다. 밖으로 색(色)에 물들지 아니하면 저 마음이 없다고 하고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이 마음이 없다고 하는데 이것이 양변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이미 양변이 없거니 중간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얻은 것을 중도(中道)라 하며 참 여래도(如來道)라 한다. 여래도란 일체 깨친 사람의 해탈경계이니 경(經)에 이르되 ‘허공이 가운데도 없고 가도 없으니 모든 부처님 몸도 또한 그렇다’ 하였다. 그러므로 일체 색이 공(空)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곳에 무심함이며 모든 곳에 무심함이란, 즉 일체 색의 성품이 공함이니 두 가지 뜻이 다르지 아니하다. 색이 공했다고 하며 또 색에 법(法)이 없다고 한다. 만약 네가 모든 곳에 무심함을 떠나서 보리°해탈°열반°적멸°선정°견성을 얻으려고 한다면 틀린 것이다.”
問, 云何是中道오 答 無中間하며 亦無二邊이 卽中道也니라.
問, 云何是二邊고 答 爲有彼心하고 爲有此心이 卽是二邊이니 外縛聲色이 名爲彼心이요 內起妄念이 名爲此心이라 若於外에 不染色이 卽名無彼心이요 內不生妄念이 是名無此心이니 此非二邊也라 心旣無二邊이어니 中亦何有哉이 但得如是者는 卽名中道니 眞如來道니라 如來道者는 卽一切覺人解脫也니 經에 云하매 虛空이 無中邊하니 諸佛身도 亦然이라 하니라. 然하니 一切色空者는 卽一切處無心也오 一切處無心者는 卽一切色性空이니 二義無別하야 亦名色空이며 亦名色無法也라 汝若離一切處無心하고 得菩提°解脫°涅槃°寂滅°禪定 °見性者는 非也라. [頓悟入道要門]
중도란 중간도 없고 또 양변이 없는 것입니다. 양변을 여의면 중간이 설 수 없습니다. 이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무엇을 양변이라 하는가. 피차심(彼此心)이 있는 것이 양변이니 예를 들면 주관과 객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밖으로 성색 경계에 속박되는 것을 저 마음[彼心]이라 하고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이 마음[此心]이라 하는데 밖으로 성색에 물들지 아니하고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 즉 인°경(人°境)을 함께 없애면 이것이 양변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경(境)이 즉 심(心)이고, 심(心)이 즉 경(境)이기 때문에 가운데 또한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이렇게 된 사람을 중도를 깨친 사람이라 하고 이를 여래도라 하고 조사도라고 합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몸이고 불도를 증등각한 심지(心地)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색(色)이 빈 사람은 일체 심(心)도 공합니다. 결국 피심과 차심이 없는 동시에 일체색이 공이 되고 일체법이 공이 되며 따라서 색공(色空)인 동시에 법공(法空)입니다. 이것이 일체처에 무심(無心)입니다. 유심°무심을 다 떠났으니 진무심(眞無心)이라 합니다. 즉 중도무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참 몸을 볼 수 있는가. 유․무를 보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참 몸을 보는 것입니다. 왜 유°무를 보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참 몸을 보는 것인가. 유는 무를 원인으로 하여 설 수 있고 무는 유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본래 유를 세우지 아니하면 무도 또한 있을 수 없고 이미 무가 있을 수 없으면 유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유와 무가 서로 의지해서 있으니 이것은 이미 의지해서 있으므로 모두 생멸입니다. 다만 양 견해를 떠나면 곧 부처님의 참 몸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경에서 부처님이 말하기를 유°무를 보지 않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유무를 보지 않는 것인가? 자성청정심을 증득한 것을 유(有)라고 하고 자성청정심을 얻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유(有)를 보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자성청정심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무(無)를 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ꡔ능엄경ꡕ에는 이러한 견해를 세우면 무명이요, 이런 견해를 보지 않으면 열반이고 해탈이라고 합니다. 즉 유견무견을 떠난 중도를 해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오문(頓悟門)은 무념(無念)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무념이란 사념(邪念)이 없다는 것이지 정념(正念)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념(邪念)이란 유(有)를 생각하고 무(無)를 생각하는 것이고 유°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정념(正念)입니다. 선(善)°악(惡)을 생각하는 것이 사념이고 선°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념이요, 고°락, 생°멸, 취°사, 원°친, 애°증을 생각하는 것은 사념이고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정념이라고 하는데 정념이란 곧 중도입니다. 정념이란 보리만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즉 자성청정만 생각하되 보리도 가설로 세운 것입니다. 실지로는 자성청정을 깨쳐서 양변을 여읜 것이 쌍차쌍조가 될 때를 말하는데 이는 부처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이심전심(以心傳心) 할 뿐입니다. 그런데 표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가설로 보리라고 세운 것입니다.
이는 어떻게 얻을 수 없으므로 유념이 아니고 진념(眞念)입니다. 이와 같이 양변이 없고 따라서 중간도 설 수 없는 것이 중도(中道)입니다. 허공이 가운데도 없고 가도 찾아볼 수 없듯이 양변을 찾아볼 수 없는 동시에 가운데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정등각한 심지(心地)입니다. 그러므로 양변을 떠날 것 같으면 부처의 참 몸을 보는 것이요, 중도를 내놓고는 부처님의 참 몸이 없는 것입니다. 표현은 이리도 하고 저리도 하지만 모두 다 중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8장 선종사상
1. 중도법문
1) 육조스님 2) 마조스님 3) 백장스님 4) 대주스님 5) 교외별전
2. 견성의 본질
1) 견성성불(見性成佛) 2) 무념무심(無念無心) 3) 오매일여(寤寐一如) 4) 사중득활(死中得活)
5) 대원경지(大圓鏡智) 6) 상적상조(常寂常照) 7) 아난의 득도
3. 돈오점수사상 비판
1) 돈오돈수(頓悟頓修)
2) 돈오점수(頓悟漸修)
1) 수심결(修心訣) 2) 절요(節要) 3)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5) 교외별전
불교에 있어서 이론은 교(敎)라 하고 실천은 선(禪)이라 하는데, 특히 선을 교외별전(敎外別傳), 즉 교(敎) 밖에 따로 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예전 조사스님들의 말씀을 살펴볼까 합니다.
오직 일승도만 있고 나머지 둘은 참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끝내 일심법을 나타내지 못한 까닭에 가섭을 불러 법좌를 같이하여 일심을 따로 전하였으니 말을 떠난 법이다. 이 한 갈래 법을 따로 행하게 하니 만약 일심법을 능히 깨치는 사람은 곧바로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唯有一乘道하야 餘二則非眞이나 然終未能顯一心法故로 召迦葉同法座하야 別付一心하야 離言說法하야 此一枝法을 令別行하니 若能契悟者는 便至佛地矣니라. [傳心法要;大正藏 48, p. 382中]
원교 일승도(一乘道)는 교리로서는 가장 발달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언어문자의 이론에 그칠 뿐, 일심을 바로 깨치지는 못합니다. 일승법을 설명만 해서는 소용없는 것이니 일심을 바로 깨치지 못하면 공리공론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가섭에게 말을 떠나서 설법하여 일심(一心)을 따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교(敎)와 선(禪)을 구분하여 말할 때 교는 이언전언(以言傳言), 즉 말로써 말을 전하는 것이고, 선은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것이니 마음과 말이 다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을 떠나 설법한다[離言說法]’는 것이 곧 이심전심인 것입니다.
‘일심법을 깨친 사람은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고 한 것은 누구든지 일심법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구경각을 성취하여 부처님과 같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하고 가섭존자가 아난에게 전한 것은 구경각을 전한 것이지 다른 무슨 중간법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동시에 삽삼조사(卅三祖師)나 그 밑으로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정통법맥을 이은 스님들도 모두 구경각을 성취한 사람들이지 무슨 중간을 성취한 스님들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일심법을 말하고 또 교외별전을 말할 때는 구경각인 부처님 지위를 말하는 것이지 무슨 중간을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니만큼 이 점 특별히 유의해야 됩니다. 혹 어떤 사람이, 아무리 그렇지만 조사스님들이 어찌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한 것과 같을 수 있나 하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이심전심해서 삽삼조사로 계계승승해서 정법이 전해 내려온 것을 근본적으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섭을 불러 법좌를 같이했다”는 말에 대해서 조금 설명하고자 합니다. 선종(禪宗)의 대표적 책인 전등록(傳燈錄)이나 선문염송(禪門拈頌) 같은 것을 보면 부처님과 가섭존자가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법상에 같이 앉았다고 되어 있으며 이것이 소위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伴座)’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에 볼 것 같으면 부처님이 가섭존자를 불러 법상에 나누어 같이 앉자고 하니 가섭존자가 사양하여 “부처님과 같이 앉을 수 없습니다”고 하였고, 또 부처님께서 내 대신 설법하라고 하여도 사양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가섭존자가 부처님과 같이 앉았느냐 안 앉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일심법을 전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의 모든 조사가 오직 일심법만을 전하고 다시 두 법이 없어 마음이 부처임을 가리키니 등각․묘각 두 지위를 단박에 뛰어넘고 결정코 제 이념에 흘러들어서는 안 된다.
從上祖師가 唯傳一心法이요 更無二法하야 指心是佛하니 頓超等妙二覺之表하야 決定不流第二念이니라. [宛陵錄]
예전부터 조사스님들이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전해 내려온 것은 일심법, 즉 구경법을 전했지 딴 법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구경법, 일심법에 있어서는 등각이니 묘각이니 하는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것이며 하물며 십지(十地) 등은 말할 것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조사스님들이 전해 내려온 일심법은 부처와 부처, 조사와 조사가 스스로 각각 전할 뿐이지 그 이외의 깨치지 못한 사람은 그 경계를 모릅니다. 그런데 묘각이 즉 구경각인데 어째서 일심법이 묘각의 위에 있다 하여 묘각을 부인하느냐 하는 의심이 들지도 모르겠으나, 이것은 예전 조사스님들이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전한 것이 최후 구경이라는 것을 강력히 표현하기 위해서 한 것이지 딴 뜻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하고 가섭이 아난에게 전하고 그 밑에 내려와서 삽삼조사에게 전하고 또 오가칠종에 전한 근본은 모두 다 등각․묘각의 지위에 있는 구경의 불지(佛地)입니다. 그리 되면 결정코 제 이념에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일승교에서 설명하는 바는 사사무애하여 법계원융이니 이 사사무애법계는 바야흐로 한 맛으로 돌아가니 이 한 맛의 자취까지를 털어 버려야만 조사가 보이신 일심이 나타난다.
一乘敎中所說者는 事事無碍하야 法界圓融이니 此事事無碍法界―方歸一味라 拂此一味之跡하야사 方現祖師所示一心이니라. [順德]
일승교에서 말하는 구경법은 사사무애, 즉 한 맛[一味]인데 이 사사무애의 알음알이가 있을 것 같으면 일심(一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선종의 조사들이 이심전심한 것은 사사무애의 자취도 쓸어 버리고 그 자취가 조금도 미치지 못한 구경의 일심을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무애라든지 일미라든지 이것은 결국 이론에 그치고 말지만 일심(一心)을 깨치는 것은 구경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불단 가운데 하나의 해인삼매여
삼종세간이 모두 포함되었네
다함없는 성품바다 한 맛을 머금으니
한 맛의 모양도 없음이 나의 선이다.
十佛壇中一海印이여
三種世間總在焉이라
無盡性海含一味하니
一味相沈하야사 是我禪이로다. [眞淨]
이 말은 앞의 한 맛의 자취를 다 털어 버려야만 조사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진법계연기 전체가 자취를 감춰서만 비로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알 수 있고 선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승도로서는 일심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교(敎)와 선(禪)의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밥을 먹고 살지만 그 밥맛을 팔만대장경 이상으로 기록하고 설명해 놓는다 해도 실지 밥맛은 거기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밥 한 숟가락을 딱 떠먹으면 찰나간에 그 밥맛을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敎)는 밥맛을 얘기하는 것이고 선(禪)은 밥을 한 숟갈 떠먹는 것과 같습니다.
원교에는 무애연기의 견해가 있고 돈교엔 이름을 떠나고 모양을 끊는 견해가 있으나 선종은 더듬어 찾을 수 없고 고삐를 잡을 수 없다.
圓敎엔 有無碍演起之解하고 頓敎엔 有離名絶相之解하나 禪宗은 無摸索沒巴鼻니라. [淸虛]
원교나 돈교 위에 따로 선종(禪宗)이 있다.
圓頓之上에 別有一宗하니라. [華嚴疏-淸凉]
한 스님이 묻기를 “무엇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하니 조주스님이 “뜰 앞의 잣나무니라”고 대답한 이 한마디는 용궁해장에는 아직 없는 것이다.
僧問如何是祖師西來意오 趙州云 庭前栢樹子라 하니 此一句龍宮海藏所未有底니라. [寂音]
적음(寂音)존자는 홍각범(洪覺範)을 말하는데 그는 송나라 사람으로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고 선(禪)과 교(敎)를 회통한 유명한 스님입니다. 화엄경을 저 용궁에서 가져왔다고 ‘용궁해장(龍宮海藏)’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ꡔ화엄경ꡕ을 다 뒤져 보아도 ‘뜰 앞의 잣나무’라는 도리는 없다는 말이니 결국 일승 원교의 도리로서도 ‘뜰 앞의 잣나무’라는 도리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교 밖에 따로 전했다는 뜻은 하늘 밖을 뛰어나니 오교(五敎)의 학자들도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선종의 근기가 낮은 사람도 망연히 알지 못한다.
敎外別傳之旨―逈出靑霄之外하야 非徒五敎學者難信이요 亦乃當宗下根도 茫然不識이니라. [看話決疑-普照]
이처럼 교외별전이라는 것이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여 비밀한 뜻을 전하여 주는 곳은 지금 편지나 종이로 논의할 바가 아니다.
以心傳心하야 密意傳授之處는 非今簡牘所論이니라. [淸凉°圭峯]
밀의(密意), 비밀한 뜻을 전하여 준다 하니 비밀히 무엇을 숨겨서 전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뜻이 하도 깊어서 전하여 주는 사람과 전하여 받는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공개해 놓고 전하여도 눈먼 사람은 모른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전한다[以心傳心] 함은 달마대사의 말씀이다. 혜가스님이 “이 법은 어떤 문자와 교전으로 배우고 익힙니까?” 하고 물으니 달마대사가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며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以心傳心者는 是達磨大師之言也라 因可和尙이 問此法이 有何文字敎典習學고 大師答云 我法은 以心傳心하야 不立文字라 하니라. [都序]
달마스님이 처음으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다[以心傳心]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설명할 것은 선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달마스님이 능가경(楞伽經)을 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것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는 틀리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중국 선종 사서(史書) 가운데 오래된 것으로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라는 책이 있고, 거기에서 달마스님이 중국에 와서 자기의 법을 전하는 데 있어서 문자법사들이 자기를 믿지 않기 때문에 능가경을 전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별전(別傳) 소식을 믿지 않기 때문에 능가경을 믿음으로 삼은 것이며, 방편으로 한 것이지 근본 내용은 ‘문자를 세우지 않는 데’ 있습니다. 만약 능가경이 근본 경전이 되었다면 달마스님 이후 오가칠종(五家七宗)에서 능가경을 근본으로 삼아야 되는데 혜가스님 이후에는 능가경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不立文字],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것[以心傳心]이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오조 홍인대사가 육조 혜능에게 말씀하였다.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은 하나의 큰 일인 까닭에 근기의 크고 적음을 따라서 중생들을 인도하여 마침내 십지°삼현°돈점 등의 뜻이 있으니 교문(敎門)이라 한다. 그러나 가장 미묘하고 비밀스럽고 원명하고 진실한 정법안장으로써 대가섭존자에게 부촉하여 거듭거듭 서로 전해 주어 달마대사에 이르러 중국에 오고 혜가대사를 얻어 대를 이어서 나에게 이르렀으니 지금 너에게 부촉하노니 단절치 않게 하라.”
五祖忍이 告六祖能曰 諸佛이 出世에 以一大事故로 隨機大小而引導之하야 遂有十地三賢頓漸等旨하야 以爲敎門이라 然이나 以無上微妙秘密圓明眞實正法眼藏으로 付于大迦葉하야 展轉相傳授하야 至達磨하야 屆于此土하니 得可大師하야 承襲以至于吾라 令付於汝하노니 無令斷絶케 하라. [傳燈錄]
오조스님이 육조스님에게 전하는 것은 삼현(三賢)°십지(十地)°돈점(頓漸)°대소승(大小乘)의 교문(敎門)이 아니고 분명히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 별전소식인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너에게 전하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교리를 하는 사람은 오직 점차의 뜻을 드러내고 참선하는 사람은 오직 순식간에 깨침을 펴니 선과 교가 서로 만남은 북쪽 끝과 남쪽 끝의 간격이 있다.
講者는 備彰漸義하고 禪者는 偏播頓宗하니 禪講이 相逢에 胡越之隔이라. [都序]
경에서 ‘삼아승지겁 동안을 점차로 닦아서 비로소 보리를 깨친다’고 하고, 선종은 찰나간에 문득 정각을 이룬다고 한다. 경은 부처님 말씀이고 선은 스님네 말이니 부처님을 어기고 스님네를 존중하는 것은 극히 의심스럽고 옳은 것이 아니다.
經에 云漸修祗劫하야사 方證菩提라 하고 禪稱刹那에 便成正覺이라 하니 經是佛語요 禪是僧言이니 違佛遵僧은 切疑未可니라. [都序]
이것은 규봉스님이 점문(漸門)으로 가야 하고 돈종(頓宗)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점차문만 말씀하시고 순식간에 깨치는 돈문은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문경에서 말하였다. ‘바깥 모양에서 구하면 비록 몇 겁을 지내도 끝내 이루지 못한다. 안으로 마음을 깨쳐 보면 한 생각에 보리를 증득한다.’
禪門經에 云 於外相求하면 雖經劫數나 終不能成이요 於內覺觀하면 如一念頃에 卽證菩提라 하니라. [頓悟要門]
이와 같이 부처님이 오로지 점차문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돈문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흔히들 육도만행(六道萬行)을 닦아서 성불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밖으로 모양을 구하는 일입니다. 연수(延壽)스님은 그의 보살계 서문에서 육도만행을 닦아서 성불하려는 것은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깨치지 않고 밖에서 무엇을 구하면 성불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점(漸)이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말이고, 돈(頓)이란 시간이 극히 짧게 걸린다는 말이니, 안으로 참선하는 화두를 부지런히 하면 시간이 적게 걸리고 밖으로 모양을 구하여, 염불하든지 주력하든지 경만 보든지 하면 삼아승지겁이 벌어져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노력 같은 시간일진댄 어떻게 해서든지 빠른 길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힘센 장사가 이마의 구슬을 잃어버리고 밖으로 찾아서 시방을 두루 다녀도 마침내 찾지 못하지만, 지혜 있는 사람이 그것을 가르쳐 주어 본래 구슬이 여전함을 스스로 보는 것과 같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의 본 마음을 잃어버려 자기가 부처임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바깥에서 찾으려 모든 노력을 다하고 차제(次第)로 증득함에 의지하여 역겁 동안 부지런히 구하여도 영원히 도를 이루지 못하니 곧바로 무심함만 같지 못하다. 결정코 일체법이 본래 있는 것이 없으며 본래 얻을 것이 없고 의지할 것도 없고 머무를 것도 없고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음을 알아 망념이 움직이지 않으면 문득 보리를 증득한다. 또 도를 성취한 때엔 다만 본 마음의 부처를 증득하는 것이요, 역겁의 노력은 모두 헛고생이니 흡사히 힘센 장사가 구슬을 얻는 것은 다만 본래 이마의 구슬을 얻은 것이요, 밖에서 구해 찾은 노력과는 관계없는 것과 같다.
如力士가 迷額內珠하야 向外求覓하야 周行十方호대 終不能得이러니 智者指之하야 當時에 自見本珠如故니라 故로 學道人이 遂自本心하야 不認爲佛하고 遂向外求覓하야 起功用行하야 依次第證하야 歷劫勤求호대 永不成道일새 不如當下無心이니라 決定知一切法이 亦無所有하며 本無所得하야 無依無住하며 無能無所하야 不動妄念하고 便證菩提니라 及證道時엔 祗證本心佛이요 歷劫功用은 並是虛修니 如力士得珠時에 祗得本額珠요 不關向外求覓之力이니라. [傳心法要;大正藏 48, p. 380下]
우리가 마음을 깨치면 부처인데 마음 밖에서 구해 보았자 부처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성불이 목적이고 부처란 마음속에 있으니 내 마음속 부처를 찾아야지, 마음 밖의 부처를 찾아서 시방세계를 돌아다닌들 헛고생만 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마에 본래 있는 구슬을 찾듯이 우리도 내 마음속에 있는 부처를 찾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시방여래의 십이부 경의 청정하고 묘한 이치를 항하수 모래알같이 기억하여도 다만 희론만 더할 뿐이다. 네가 비록 결정코 명료하게 인연과 자연을 설명하므로 사람들이 네가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칭찬할지라도, 여러 겁 동안 쌓아 온 다문의 훈습으로는 마등가의 난을 면할 수 없었느니라. 이런 까닭에 아난아, 네가 비록 역겁 동안 여래의 비밀스럽고 미묘한 법문을 기억하더라도 하루 동안 무루업을 닦아서 세간의 미워하고 사랑하는 두 가지 고통을 멀리 벗어남만 같지 못하느니라.”
佛告阿難호대 雖憶持十方如來十二部經의 淸淨妙理를 如恒河沙하나 只益戱論이니라 汝雖談說因緣自然하야 決定明了하야 人間稱汝多聞第一이나 以此積劫多聞熏習으로 不能免離摩登伽難하니라 是故로 阿難아 汝雖歷劫憶持如來秘密妙嚴하야도 不如一日에 修無漏業하야 遠離世間의 憎愛二苦니라. [首楞嚴經;大正藏 19, p. 121下]
억천만겁토록 팔만대장경을 환히 외운다 해도 잠깐 동안 선정을 익히는 것만 못하다는 부처님의 간절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살펴보았는데 교 밖[敎外]이라 한다고 해서 불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을 바로 말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봐서는 아난존자같이 그렇게 총명이 절륜하고 박학다문하며 부처님 법문을 한 자 한 구도 빼지 않고 다 외우는 사람이 없지만 결국은 부처님 당시에도 마등가난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돌아가신 뒤에 경전(經典)을 결집할 때도 가섭존자에게 쫓겨난 후 비사리성으로 가서 깨쳐 다시 와서 결집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한편으로 보면 아난존자가 대화현보살로서 일종의 연극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앞으로 누구든지 언어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참으로 바로 깨쳐야 한다는 것을 모범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아난존자가 그런 연극을 벌였다고 볼 수 있지마는 나는 연극이 아니고 사실이라고 봅니다. 아난존자 아니라 아난존자보다 몇백 배나 나은 총명을 가진 사람이라도 실지 마음을 깨치지 못하면 불법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불법이란 오직 마음을 깨치는 데 있지, 언어문자를 익히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대중들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견성의 본질
1) 견성성불(見性成佛)
불교에서는 ‘마음을 깨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깨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는 선종에서는 이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합니다. 곧 자성을 보아[見性] 부처를 이룬다[成佛]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견성이라는 것은 중생의 자성, 즉 불성(佛性)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견성을 한 후 성불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선종에서 말하는 견성성불이 아닙니다. 그리고 ꡔ열반경ꡕ에서는 중도(中道)를 불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견성한다는 것은 중도를 바로 본다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나는 중도(中道)를 정등각했다’는 그 말씀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성불하려고 하면 자성을 바로 보아야 되는데 자성이란 곧 중도이므로 중도를 바로 깨쳐야 견성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서 자성을 보아 스스로 부처님 도를 이룬다.
識心見性하야 自成佛道이니라. [六祖壇經]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면 견성을 종취로 하여 법을 설했습니다. 그 중심사상은 마음을 알아서 성품을 본다[識心見性]는 것인데 마음을 안다는 것이 견성한다는 것이고 견성한다는 것은 마음을 안다는 것이니 마음 다르게 성품이 없고 성품 다르게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진여심(眞如心)을 말하고 성품이란 불성(佛性)을 말합니다. 또 진여심이란 유°무를 여읜 중도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안다든지 성품을 본다든지 하는 것은 바로 유°무를 여읜 중도를 아는 것이며 중도를 본 사람이 부처님 도를 성취한 사람입니다.
즉시에 확철대오하여 돌이켜 본래 마음을 얻는다.
卽時豁然하야 還得本心이니라. [六祖壇經]
누구나 공부를 한다거나 법문을 듣는다든가 무슨 기연을 만나 어떤 기회에 즉시로 크게 깨친다는 것은 자기의 본래 마음을 본다는 것이지 딴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다 같이 가지고 있는 본래 마음, 즉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本有佛性]을 얻는 것이지 깨쳤다고 해서 딴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에게 있는 물건을 도로 찾았을 뿐입니다. 육조스님도 “내가 5조 홍인화상 밑에서 한번 듣고 말끝에 크게 깨쳐서 진여본성을 찰나간에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진여본성을 찰나간에 보았다고 하였는데 찰나간[頓]이란 시간 간격을 두지 않는 눈 깜짝할 사이를 말합니다.
그리고 견성하여 대지혜의 진여대용이 현전되는 것을 반야삼매에 든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요,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바로 반야삼매이고 무념이다. 무념법을 깨치면 만법을 두루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사람은 모든 부처님 경계를 보고, 무념법을 깨친 사람은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若識本心하면 卽本解脫이요 若得解脫하면 卽是般若三昧이고 卽是無念어니라 悟無念法하면 萬法을 盡通이요 悟無念法者는 見諸佛境界요 悟無念法者는 至佛地位니라. [六祖壇經]
여기서 말하는 무념(無念)은 제8 아뢰야의 망념까지도 다 떨어진 구경의 진여무념입니다. 따라서 견성이란 해탈이라고도 하고 반야삼매라고도 하고 무념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바로 성불(成佛)을 말하는 것입니다.
견성을 하면 부처님 경계를 볼 수 있는 것이고 부처님 지위에 이른 것이니 결국은 성불이 견성이고 견성이 성불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견성하면 이것이 바로 성불인 것입니다. 견성을 해서 그 다음에 성불을 한다는 그런 견해를 가지고 불교라고 주장한다든가 선종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불교를 팔아먹는 대도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한국 불교계에 이러한 견해가 많이 유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니 시정되어야 합니다.
성문은 부처님 마음을 알지 못하니 공정(空定)에 머물러 있다. 모든 보살은 공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서 불성을 보지 못한다. 상근기의 중생은 지위를 거치지 않고 찰나간에 본성을 깨친다.
聲聞은 不知聖心이니 住於空定이요 諸菩薩은 沈空滯寂하야 不見佛性이요 上根衆生은 不歷地位하고 頓悟本性이니라. [馬祖語錄]
견성이 성불임을 강조하는 마조스님의 말씀입니다.
성문°연각이나 보살들이 공(空)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 있으니[沈空滯寂], 즉 제8 아라야 무기식(無記識)에 머물러 있으니 이것은 견성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직 상근(上根)중생이 삼현°십지를 뛰어넘어 자기 본성을 보게 되니 이것이 성불입니다.
침공체적(沈空滯寂)이란 멸진정(滅盡定)인 제8 아뢰야의 지위를 말합니다. 흔히 성문승의 멸진정과 자재위보살 이상의 멸진정을 분리해서 보기도 하지만 능가경 같은 데에서는 8지보살 이상이 깨친 멸진정과 성문°연각이 깨친 멸진정이 제8 아뢰야위라고 똑같이 보고 있습니다. 결국 양편이 다 침공체적이라는 큰 병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십지보살이 구름이 일고 비가 쏟아지듯 설법을 하여도 오히려 부처님에게 꾸중을 들으니 자성을 보는 것은 비단으로 가린 것과 같다.
十地聖人이 說法은 如雲如雨하야도 猶被佛呵호대 見性은 如隔羅縠이니라. [雲門․無業, 傳燈錄 19]
아무리 얇은 비단이라도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보면 정확히 앞을 보지 못합니다. 얇은 비단으로 보면 어렴풋이 무엇이 비치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하는데 어름하게는 비칠지 모르지만 정확히 물건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십지보살이 견성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종문정전의 통칙입니다. 구경각, 즉 여래지만이 견성을 성취한 것입니다.
보살이 십지에 올랐다 하여도 불성을 밝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하물며 성문․연각이리오. 있는 바 불성은 이렇게 깊고 깊어 알아보기 어려우나 오직 부처님만은 알 수 있느니라.
菩薩이 位階十地하야도 尙不明了知見佛性이어니 何况聲聞緣覺이리요 …… 所有佛性은 如是甚深 難得知見하야 唯佛能知니라. [涅槃經 8]
구경각을 성취해야 불성을 볼 수 있는 것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불성을 볼 수 없습니다. 십지보살도 견성이 아닙니다.
보살지가 다하고 방편이 원만구족하여 일념에 상응하여 망심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쳐 마음에 처음 모양이 없으면 미세망념을 멀리 벗어난 까닭에 마음의 성품을 보아서 마음이 상주하니 구경각이라 합니다.
如菩薩地盡하야 滿足方便하야 一念相應하야 覺心初起하야 心無初相하면 以遠離微細念故로 得見心性하야 心卽常住하나니 名究竟覺이니라. [大乘起信論]
십지보살이 수도(修道)의 방편을 원만구족하여 제8 아뢰야 미세망념까지 완전히 벗어난 구경각을 성취하면 이것이 견성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견성이란 구경각으로서 제8 아뢰야 미세망념까지도 떠나며 또 십지․등각보살도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명업상의 동념(動念)이 망념 가운데에서 가장 미세하므로 미세념이라 한다. 이 미세망념이 모두 없어져서 영원히 남은 자취가 없으므로 멀리 떠난다고 한다. 이 미세망념을 영영 떠난 때에는 정확히 부처님 지위에 머무르게 된다.
業相動念이 念中最微細할새 名微細念이니 此相이 都盡하야 永無所餘故로 言遠離요 遠離之時엔 正在佛地니라. [元曉°賢首, 起信論疏]
무명업상이 영원히 다하여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서 다시 일어나는 움직임이 없는 까닭으로 마음의 성품을 본다고 한다. 마음이 항상 머물러서 다시 나아갈 바가 없으므로 구경각이라 한다.
無明이 永盡하야 歸一心源하야 更無起動故로 言得見心性이니 心卽常住하야 更無所進일새 名究竟覺이니라. [元曉, 賢首, 起信論疏]
구경각을 성취하고 난 뒤에는 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십지°등각은 아직도 구경각이 아니기 때문에 묘각을 성취해야 되지만 견성이란 구경각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견성이 구경각이고 구경각이 성불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선이나 교나 할 것 없이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그 예를 살펴보면 ꡔ열반경ꡕ에서는 십지보살은 견성을 하지 못했고 오직 부처님만이 견성하였다고 했고, ꡔ기신론ꡕ에서도 구경각을 견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의 현수대사나 우리나라의 원효대사 같은 대논사들도 구경각이 견성이고 견성이 성불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선°교를 망라한 불교의 정통사상은 견성이 곧 성불이고 성불이 곧 견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견성을 했다는 것은 진여본성을 깨쳤다는 말인데 진여본성이란 어떤 것인가? 진여본성이란 억지로 말하려고 하니까 진여(眞如)라 하는 것이지 말로써 세울 수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 증(證)해서 깨쳐야만 알지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진여․법계․심지(心地)라고 말하기는 하나 이는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지 이름이 있다고 무슨 물건이 있는 듯이 알면 큰 오해가 됩니다. 말로는 진여라고 하지만 뜻은 오직 깨쳐야 알지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형용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그런 심오한 원리입니다.
마음의 성품인 근본자성은 항상 움직이지 아니하는 까닭에 불변(不變)이라 하고, 진여에 도달하지 못하면 마음이 상응하지 못합니다. 홀연히 생각이 일어남을 무명이라 하고 미세한 망념을 떠남을 들어간다고 하니 미세한 망념을 떠난 경계는 오직 깨달음으로써 상응한다고 합니다. 미세망념인 무명업상의 처음 일어나는 모양을 알았다고 말함은 곧 무념입니다. 그러나 망념의 구름이 덮여 있으면 진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열심히 수행하여 망념이 다 끊어지고 또 끊어졌다는 생각까지도 끊어져서 제8 아뢰야 미세망념까지 다 끊어지면 무명업상이 처음 일어나는 모양을 알게 되니 이것이 진여를 깨친 것이며 무념을 성취한 것입니다.
무념(無念)을 성취한 사람은 심상(心相)의 생°주°이°멸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주°이°멸이란 생멸(生滅)의 생°주°이°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도(中道)의 생°주°이°멸인 진여의 큰 작용[眞如大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주°이°멸 이대로가 무념이어서 일체가 공한 가운데에서 항사(恒沙)의 묘용(妙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멸의 생°주°이°멸을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불의 지위를 과지(果地) 또는 과상(果上)이라고 하는 데 대하여 부처님 도를 수행하는 지위를 인지(因地)라고 합니다. 십지․등각까지도 인지(因地)라고 하며 부처님 지위만이 과지(果地)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마음을 깨치실 때에 제8 아뢰야가 생기기 전 최초의 동상(動相)이 본래 깨끗함을 아시니 이런 까닭으로 무념(無念)이라 말한다.
如來覺心之時에 知初動相이 卽本來淨故이니 是故로 說言卽謂無念也니라. [元曉․賢首, 起信論疏]
결국 자성을 깨친다고 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제8 아뢰야 무기무념도 아닌 진여무념을 깨친 것이 견성이고 성불입니다. 진여무념을 깨치기 전에는 견성이라 할 수 없고 성불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생멸심°기멸심°망상이 그대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견성°성불했다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불법에서 공인된 견성과 성불은 제8 아뢰야 무기무념까지도 뽑아 버린, 근본 미세념까지도 뽑아 버린 무념이라야 견성이고 성불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혜능스님이 말끝에 일체만법이 자성을 떠나지 아니함을 크게 깨치고 5조 홍인대사에게 아뢰었다.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한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한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는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일체만법을 능히 내는 줄 알겠습니까.”
홍인대사는 혜능스님이 본성을 깨친 것을 아시고 혜능스님에게 말씀하셨다. “본 마음을 알지 못하면 도를 배워도 이익이 없으며 본 마음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보면 이를 조어장부․천인사․부처라 한다.” 삼경에 법을 받으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하였다.
惠能이 言下에 大悟一切萬法이 不離自性하고 遂啓祖言호대 何期自性이 本自淸淨이며 何期自性이 本不生滅이며 何期自性이 本自具足이며 何期自性이 本無動搖며 何期自性이 能生萬法이리요 祖知悟本性하고 謂惠能曰不識本心하면 學道無益이요 若識本心見自本性하면 卽名丈夫天人師佛이라 하고 三更에 受法하니 人盡不知니라. [六祖壇經]
육조스님이 홍인대사의 말끝에 일체만법이 자성 속에서 건립(建立)되어 있어 일체만법 이대로가 자성이고 자성 이대로가 일체만법임을 확철히 깨치고 감탄하였던 것입니다. 자성을 깨치기 전에는 자성이 본래 청정(淸淨)한 것을 몰랐는데 자성을 깨치고 나니 자성이 청정하더라는 놀라움과 감탄을 표현한 것입니다. 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허공도 삼십방을 맞아야 하는 청정’이라는 것입니다. 허공이란 본래 깨끗해서 무슨 때가 있을까마는 이 깨끗한 허공도 삼십방을 맞아야 한다는 것은 청정한 허공이라고 할지라도 청정이라는 상이 붙어 있을 것 같으면 진정한 청정이 아니므로 허공도 삼십방을 맞는 구경청정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를 자성이라 하는 것이며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견성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객진번뇌 번뇌망상이 왔다 갔다 하는 이런 경지를 어떻게 자성청정이니 견성이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체 망념이 다 떨어지면 자성청정이 안 될 수 없으며 자성청정은 곧 무념인 것입니다. 청정한 자성을 깨치고 보면 자성이 본래 생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멸이 없다고 하니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것인가 하겠지만 텅 빈 것이 아니라 일체만법이 원만°구족해 있다는 것입니다. 자성이 청정하고 생멸이 없다고 하니까 공한 것만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공한 가운데 무진묘용․항사묘용이 원만히 구족했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업견(業見)으로 볼 때는 일체만법이 동요를 하고 있으나 자성을 깨친 정견(正見)으로 보면 진여대용이어서 일체만법이 구족해 있지만 추호의 동요도 없습니다. 참으로 자성이란 청정하고 생멸이 없고 일체가 구족하고 본래 동요가 없으며 일체만법이 건립되어 있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 진여자성을 바로 깨친 것이지 조금이라도 치우치게 되면 자성을 깨치지 못한 동시에 변견에 떨어진 외도입니다. 자성을 깨치면 이 사람이 곧 조어장부이며 천인사이며 부처이며 세존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견성이란 성불, 즉 구경각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지 십지°등각°삼현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종문하(祖宗門下)에서나 교가에서나 어느 대법사, 대논사들도 구경각의 성취를 견성이라고 했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구경각 아닌 것을 견성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외도입니다.
왜 내가 이렇게 강력하게 주장하느냐 하면 선종에 있어서든지 교가에 있어서든지 불교의 근본 목표는 성불에 있는데 그 성불은 어디에 성립하느냐 하면 견성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대개 견성이라는 내용을 잘 모르고 공부하다가 이 생각 저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 같으면 견성했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폐단은 지금 이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견성의 내용과 성불의 내용을 잘 모르는 데서 생기는 폐단입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든지 교학을 연구하든지 견성의 내용과 성불의 내용을 분명히 알고 정진해야 한다는 뜻에서 되풀이하여 강조한 것입니다.
2) 무념무심(無念無心)
견성을 또한 무념°무심이라 하니 여기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나의 이 법문은 무념으로 으뜸을 삼는다.
만약 유념이 없으면 무념도 또한 서지 못합니다.
我此法門은 無念으로 爲宗하니라.
若無有念하면 無念도 亦不立이니라. [六祖壇經]
이 무념이란 제8 아뢰야 무기무념이 아니고 진여본성의 무념이니, 제8 아뢰야 무기무념으로써는 진여대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유념이 없다는 것은 일체 망념이 다 떨어져서 제8 아뢰야 무기무념까지도 끊어짐을 말합니다. 십지°등각의 대보살이 견성을 하지 못한 것은 마조스님 말씀과 같이 침공체적해 있기 때문입니다. 침공체적이란 내용으로 봐서는 무념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제6 의식의 생멸무념이 완전히 떨어졌다 해도 제8 아뢰야 무기무념이 남아 있으며, 제8 아뢰야 무기무념이 완전히 떨어진 데서만 진여무념 근본무념이 성립됩니다.
진여무심은 무주심(無住心), 즉 머무를 수 없는 마음이어서, 여기는 부처도 머무를 수 없고 조사도 머무를 수 없고 진여무념이라고 이름할 수도 없으되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 보고 차고 더운 것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직 증(證)해야 알지 증(證)하기 전에는 모릅니다. 무념을 으뜸[宗]으로 삼는다 하니 말뚝같이 무엇을 세워 놓고 으뜸[宗]을 삼는다고 오해하기 쉬워서 그래서 무념도 세울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무(無)라 함은 무엇이 없음이며 념(念)이라 함은 무엇을 생각함인가? 무라 함은 상대의 두 가지 상[二相]이 없으며, 모든 진로(塵勞)의 망심이 없는 것이다. 념이라 함은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진여는 곧 무념의 본체요, 생각[念]은 진여의 작용이다.
無者는 無何事며 念者는 念何物고 無者는 無二相이며 無諸塵勞之心이요 念者는 念眞如本性이니 眞如는 卽是無念之體요 念은 卽是眞如之用이니라. [六祖壇經]
무(無)라는 것은 차(遮:가리는 것)를, 념(念)이라는 것은 조(照:비치는 것)를 말합니다. 두 가지 상[二相]이 없다는 것은 양변을 떠난 중도를 뜻합니다. 무란 쌍차를 말하며, 양변을 떠나며 모든 진로의 망심이 없는 것이 진여입니다. 념이란 그 진여의 작용을 말하니 쌍조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심(無心)을 ‘마음이 없다’, 또 무념(無念)을 ‘생각이 없다’고 해석하였는데 ‘없다’고만 하면 그것은 단견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없는[無] 마음이요, 없는[無] 생각입니다. 일체 진로가 없고 두 가지 상이 없는 생각[念]이니 이 념은 진여의 작용이 됩니다. 즉 무념이라는 것은 양변이 떨어진 진여의 념이니, 이것이 실지로 쌍차쌍조한 중도정각입니다. 그러니 무념이 즉 중도이고 중도가 즉 무념이며, 진여가 즉 무념이며 무념이 즉 진여입니다. 다시 강조하면 무란 생멸의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쌍차가 되고 념이란 쌍조가 되어 항사묘용인 진여대용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법을 깨친 자는 즉시 무념이니 기억도 없고 집착도 없다.
悟此法者는 卽是無念이니 無憶無著이니라. [六祖壇經]
선종에서 표방하는 것은 견성성불인데 그 견성성불의 근본이 어디 있느냐 하면 무념을 성취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이 무념을 으뜸[宗]으로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념이라고 하여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단멸공(斷滅空)이 아니고 모든 두 가지 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진여의 항사묘용이 거기서 일어나는 무념이라는 것입니다.
용시비구가 중한 계를 범하였으나 무생을 깨쳐서 벌써 성불하여 지금까지 있느니라.
勇施犯重하나 悟無生하야 早時成佛하야 于今在니라. [證道歌]
무생(無生)이 성불이고 성불이 무생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무생(無生)과 무념(無念)이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같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것입니다.
자기의 본성을 깨치면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서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 해가 나올 때에 어둠과 합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지혜의 해가 뜨면 번뇌의 어두움과는 같이하지 아니하므로 마음과 경계를 함께 요달하여 망상이 나지 아니한다. 망상이 나지 아니하니 곧 무생법인이다. 본래 있는 것이 지금 있으니 수도와 좌선을 빌리지 않으니 닦지도 않고 좌선하지도 않는 것이 즉시 여래의 청정선이다.
悟自家本性하면 一悟永悟하야 不復更迷하나니 如日出時에 不合於冥이라 智慧日出하면 不與煩惱暗으로 俱니 了心及境界하야 妄想이 不生이니라 妄想不生이 卽是無生法忍이니 本有今有하야 不假修道坐禪이니 不修不坐가 卽是如來淸淨禪이니라. [馬祖語錄]
마조스님이 자성을 깨쳤다 함은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친 것이어서 다시 미혹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구경각을 성취한 것을 의미하며 참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는 것입니다. 무생법인을 성취하면 수도하고 좌선할 필요가 없이 언제든지 자유자재하게 활동할 뿐입니다.
무엇을 닦는다 하여, 닦을 것이 있는 사람이면 아직 병이 덜 나은 사람이니, 마조스님이 자성을 깨쳤다 하는 것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이 필요 없는 데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라 하며 부처님과 조사가 전해 내려온 조사선(祖師禪)이라 합니다. 그래서 육조스님뿐 아니라 그 이후 고불고조(古佛古祖)가 전해 내려온 선이라 하든지 도라 하든지 법이라 하든지, 완전히 구경을 성취해서 다시 닦을 것이 없는 데서 ‘자성을 깨쳤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 닦을 것이 있는 데서, 약을 아직 써야 하는 병이 있는 데서 ‘자성을 깨쳤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절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무생(無生)을 깨치는 것을 묘각이라고 한다. 한 생각에 단박 초월하는 것이니 어찌 번거로운 논의가 있으리오.
悟無生을 名爲妙覺이니 一念頓超어니 豈在繁論이리오. [馬祖語錄]
무생(無生)이라는 것은 구경각을 말합니다. 한 생각 잠깐 사이에 삼현°십지를 초월해서 구경각을 성취한 것이니만큼 이런저런 이론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쓸 것이 없으면 성불한다.
無心可用하면 卽得成佛이니라. [馬祖語錄]
모든 집착과 머무름을 완전히 떠나 순수한 무심이 되어서 마음을 쓸 것이 없음을 성불이라 합니다.
무심이 부처이니라.
無心이 是佛이니라. [馬祖語錄]
마음이 즉 부처며, 무심이 즉 도이니, 마음이 일어나거나 생각에 움직임이 없어, 유무(有無)°장단(長短)°피아(彼我)°능소(能所) 등의 마음이 없으면 마음이 본래 부처요 부처가 본래 마음이니라.
卽心是佛이요 無心是道니 但無生心動念하야 有無長短彼我能所等心하면 心本是佛이요 佛本是心이니라. [宛陵錄]
유°무, 능°소 등 양변을 다 여의면 순전한 무심이 되며 이것을 중도니, 부처니, 견성이니 합니다.
다만 바로 여기에서 무심하면 [진여자성의] 본체가 스스로 나타나서 마치 큰 해가 허공에 떠오르는 것과 같아서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다시 장애가 없느니라.
但直下無心하면 本體自現하야 如大日輪이 昇於虛空하야 徧照十方하야 更無障碍니라. [傳心法要]
무심이라는 것은 일체 마음이 없는 것이다. 여여(如如)의 체(體)가 안으로는 목석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과 같아서 막힘이 없고 장애가 없으며, 능소도 없고 방소(方所)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얻고 잃음도 없느니라.
無心者는 無一切心也니 如如之體가 內如木石하야 不動不搖하며 外如虛空하야 不塞不碍하야 無能所無方所하며 無相貌無得失이니라. [傳心法要]
무심의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심을 얻으려면 어느 지위에서 어떻게 얻게 되는가.
어떤 사람은 법문을 듣고 한 생각 동안에 무심을 얻고 어떤 사람은 십신°십주°십행°십회향에 이르러 마침내 무심을 얻습니다. …… 한 생각 동안에 얻는 사람과 십지를 거쳐서 얻는 사람과는 공용(功用)이 같아서 다시 깊고 얕음이 없으니, 다만 겁(劫)을 지나도록 공연히 심신만 수고롭게 할 뿐이다.
有聞法하고 一念에 便得無心者하며 有至十信十住十行十廻向 乃得無心者하나니 …… 一念而得과 與十地而得者로 功用이 恰齊하야 更無深淺이요 祗是歷劫枉受辛勤耳니라. [傳心法要]
누구든지 무심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바로 가는 길이 있으니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고 헛고생을 하지 않고 바로 깨치는 길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황벽스님의 말씀입니다.
망념이 나지 아니함이 선(禪)이요 앉아서 본성을 보는 것이 정(定)이다. 본성이란 너의 무생심(無生心)이며 정이란 경계를 대함에 무심하여 팔풍(八風)에 움직이지 아니함이다. 만약 이렇게 정을 얻은 사람은 범부일지라도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
妄念不生이 爲禪이요 坐見本性이 爲定이니 本性者는 是汝無生心이라 定者는 對境無心하야 八風에 不能動하나니 …… 若得如是定者는 雖是凡夫나 卽入佛位니라. [頓悟入道要門]
일체처에 무심이 즉 무념이니 무념을 얻었을 때에 자연히 해탈하느니라.
一切處無心이 卽是無念也니 得無念時에 自然解脫이니라. [頓悟入道要門]
일체처에 무심하면 즉 열반에 들어 무생법인을 깨치니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라 하며 다툼 없음이라 하며, 또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한다. 어떤 까닭이냐? 필경 청정하여 나와 남이 없는 까닭에 애증이 일어나지 아니하니 이것이 두 성품이 공함이며 무소견(無所見)이니 즉 진여의 얻음이 없는 말씀이다.
一切處에 無心하면 卽入涅槃하야 證無生法忍하나니 亦名不二法門이며 亦名無諍이며 亦名一行三昧니라 何以故오 畢竟淸淨하야 無我人故로 不起愛憎하야 是二性空이며 是無所見이니 卽是眞如無得之辯이니라. [頓悟入道要門]
무념을 얻은 사람은 자연히 모든 부처님 지견(知見)에 들어가니, 이런 법을 얻은 사람은 즉 불장(佛藏)이며, 법장(法藏)이라 한다.
得無念者는 自然得入諸佛知見이니 得如是者는 卽名佛藏이며 亦名法藏이니라. [頓悟入道要門]
마음이 일어난다 해도 가히 지각할 만한 최초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최초의 모습을 안다 한 것은 무념을 말한다.
心起者는 無有初相可知 而言知初相者는 卽 謂無念이니라. [起信論]
부처님 지위가 무념이니라.
佛地가 無念이니라. [元曉疏, 賢首義記]
여래가 마음을 깨칠 때에 최초의 동상(動相)이 본래 깨끗함을 아니, 이런 까닭에 무념이라고 한다.
如來覺心之時에 知初動相이 本來淨이니 是故로 說言卽謂無念也니라. [元曉․賢首疏]
제일의(第一義)를 세운다는 것은 오직 무여열반계(無餘涅槃界) 가운데를 말함이니 이것이 무심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이 계(界) 가운데에는 아뢰야식이 영원히 끊어졌기 때문이다.
第一義建立者는 謂唯無餘涅槃(佛地)界中이니 是無心地라 何以故오 於此界中에 阿賴耶識이 亦永滅故니라. [瑜伽論 一三]
제일의를 세운다는 것은 불교에 있어서 가장 구경도리(究竟道理)를 말합니다. 유식계통에 있어서는 무심을 무여열반이라 하고 정각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무생(無生)으로 생(生)을 삼고 머무르지 아니함을 머무름으로 삼는다.
佛은 無生으로 爲生하고 無住로 爲住니라. [攝論 十]
부처님의 무심은 구경각을 성취한 구경무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심이 도라고 말하지 말아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 관문이 사이해 있느니라.
莫道無心云是道하라 無心도 猶隔一重關이니라. [十玄詩]
이 무심이라는 것은 6식 경계와 7식 경계가 완전히 끊어진 칠지보살의 무상정(無相定)에서의 무심과 팔지보살 이상의 멸진정에서의 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멸진정의 무심도 제8 아뢰야 무기식을 의지한 것이지 진여본성을 본 구경무심은 아니니, 제8 아뢰야 무기식을 완전히 벗어나야 참다운 무심이지 그 이전의 무심은 거짓 무심입니다.
3) 오매일여(寤寐一如)
우리가 이제까지 좀 지루하지만 여러 조사스님네들의 말씀을 많이 인용해 보았습니다. 결국 견성성불이라는 데 있어서 진여무심 이것이 구경이라는 것을 다 알게 되었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진여무심을 성취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으른 중생은 삼아승지겁이 걸리는 일이며 참말로 많은 노력이 실지로 필요합니다. 노력에 따라서 시간문제는 변동될 수 있지만 그래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완전한 진여무심을 얻으려면 어떠한 난관이 하나 붙느냐 하면 자나깨나 한결같다[寤寐一如]라는 난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소소영령한 마음의 아는 성품이 있어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며, 오온의 몸 속에서 주인이 된다고 말하니, 이렇게 하여 선지식이 되면 사람을 크게 속이는 것이다. 지금 내가 너에게 묻노니, 만약 소소영령함을 인정하여 너의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잠잘 때엔 또 소소영령함이 없느냐. 만약 잠잘 때에 소소영령함이 없으면 이것은 도적놈을 자기 자식으로 오인하는 것이니, 이것은 생사의 근본이며 망상의 연기이다.
有一般昭昭靈靈靈臺智性하야 能見能聞하야 向五蘊身田裏 作主宰하나니 恁麽爲善知識하면 大賺人이로다 我今向汝하노니 汝若認昭昭靈靈하야 爲汝眞實이면 爲甚麽하야 瞌睡時에 又不成昭昭靈靈고 若瞌睡時에 不是면 這箇喚作認賊爲子니 是生死根本이요 妄想緣起니라. [玄沙―傳燈錄]
이렇게 말씀한 현사(玄沙)스님은 설봉스님의 제자로서 선(禪)에만 통달한 이가 아니라 경°율°론 삼장에 회통한 분입니다. 선과 교를 막론하고 의심나는 것이거나 논란이 있으면 현사스님에게 와서 의견을 구하고 판정을 얻을 만큼 당대의 권위자였습니다. 그런 현사스님 말씀이 우리가 아무리 부처님 이상으로, 달마대사 이상으로 큰 법을 성취한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도 잠이 꽉 들어서 공부가 안 되면 근본적으로 공부가 아닌 줄 아는 데 표준이 있는 것이라고 ꡔ전등록ꡕ이나 어록의 여러 곳에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자기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지만 잠이 꽉 들어서 공부가 안 될 때는 공부가 아닌 줄 알고 공부됐다는 생각을 아예 버려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보통 공부해 가다 이상한 경계가 좀 나면, 이것이 견성이 아닌가 성불이 아닌가, 또는 내 공부가 좀 깊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많이 일으키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공부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잠이 꽉 들어서도 공부가 되지 않거든 공부가 안 된 줄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도적놈을 잘못 알아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아서 손해만 봤지 이익은 없습니다.
박산스님이 평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망상연기의 사람이니 잠잘 때에 이미 주인이 되지 않는다면 생사가 닥쳐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한평생을 공연히 쓸데없이 보내니 다른 사람만 웃길 뿐 아니라 스스로도 웃길 뿐이다.”
評云此是弄糟魂漢이니 瞌睡時에 旣做不得主인댄 生死到來에 作麽生折合고 一生을 胡亂做去하니 豈但哄人이리요 亦自唭耳라. [博山―禪警語]
누구든지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잠이 꽉 들었을 때 공부가 안 되면 이것은 생사의 근본 해결에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 정도 공부를 가지고 아는 체 하다가는 저도 망하고 남도 망치는 것임을 알아서 일생을 공연히 쓸데없이 헛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담당 (문준)스님이 대혜에게 말하였다. “고상좌여, 네가 일시에 나의 선법을 이해하여 설법을 하라면 설법을 잘하고, 염고°송고°소참°보설 할 것 없이 네가 잘한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이 아직 있지 아니하다. 네가 성성(惺惺)히 생각할 때에는 문득 선이 있으나 겨우 잠들자마자 문득 없어지니 만약 이러할진대 어찌 생사를 대적하리오.”
대혜스님이 대답하였다. “참으로 이것이 저의 의심하는 바입니다.”
湛堂이 謂大慧曰 果上座야 我這裏禪에 你一時理會得하야 敎你說也說得하며 敎你拈古 頌古小參普說을 你也做得하나 祗是有一件事未在하니라 你惺惺思量時엔 便有禪호대 纔睡著하면 便無了하니 若如此인댄 如何敵得生死리요 杲曰正是某의 疑處니이다. [宗門武庫]
대혜스님은 17세에 출가하여 19세에 어록을 보다가 깨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큰스님들을 찾아뵙고 법담을 하며 물어보니 다 자기만 못한 것 같고 누구든지 그 말을 당하지 못하니 천하를 횡행하듯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정 극문(眞淨克文)선사의 제자인 담당 문준(湛堂文準)선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 천하에 이름난 다섯 큰스님[五大師]이 계셨는데, 오조 법연선사 밑의 불안 청원(佛眼淸遠)°불감 혜근(佛鑑慧懃)°불과 극근(佛果克勤=圓悟)의 삼불(三佛)과 황룡 사심(黃龍死心)과 담당 문준(湛堂文準)선사입니다.
위의 글은 그 당시 선계에 있어서 비중 높은 담당선사가 대혜스님에게 타이르신 말씀입니다. 사실 보면 자기가 아무리 아는 체하고 도도한 체하여도 자기 양심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어서 대혜스님처럼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발심해서 철저하게 공부를 해야 되지 자기가 공부 아닌 줄 알면서도 남을 속이려 들면 이것은 참 곤란한 일입니다. 이것이 천하에 유명한 대혜스님의 공부과정이니 앞으로 자세히 설명할까 합니다. 그 당시 대혜스님의 생각에 천하 선지식이라는 분들이 소용없고 오직 담당선사 한 분만이 눈 밝은 사람입니다. 다른 스님들은 잠이 꽉 들면 선이 안 되는 것을 지적하지 못했는데 담당스님 한 분만이 지적해서 자기의 잘못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평생을 시봉하고 여기서 공부를 성취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담당스님이 55세에 돌아가시게 되니 대혜스님이 낙담하여 여쭈되 “지금 스님께서 돌아가시면 제가 누굴 의지해야 큰 일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담당스님이 “서울에 원오선사라는 분이 있는데 내가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눈밝은 본분종사이니 그 스님을 찾아가면 네가 반드시 큰 일을 성취할 것이다”고 유촉했습니다. 그래서 담당스님이 돌아가신 뒤 모든 뒷일을 다 처리하고, 원오스님을 찾아가면서 혼자 생각에 만약 원오스님이 딴 선지식과 마찬가지로 자기 공부의 병을 지적해 내지 못하고 나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 주는 기미만 보이면 나는 ‘참선이란 말짱 거짓말이니 선이 없다는 논(論)이나 짓고 화엄경이나 한 부질 싸서 평생 경이나 읽고 말 것이다’고 하면서 원오스님을 찾아갔습니다. 그것도 얼른 가지 못하고 십 년이나 넘는 세월을 지내고 찾아갔습니다. 만나 보니 담당스님이 류가 아니었습니다. 이런저런 말을 붙여 볼 도리가 없었으므로 원오스님의 지시를 받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대혜가 원오스님에게 물었다.
“제가 잠이 들기 전에는 부처님이 칭찬한 바는 의지해서 그것을 행하고, 부처님이 꾸짖은 것은 감히 위반하여 범할 수 없습니다. 전부터 스님을 의지했던 바나 조금이나마 스스로 얻은 바를 깨어 있을 때는 모두 다 수용할 수 있으나 선상에 앉아 반이나 깨어 있다가 조금 졸기 시작하면 주재를 할 수 없습니다. 꿈에 금보배를 보면 꿈속에서 기쁨이 한이 없고 꿈에 모든 나쁜 경계를 보면 꿈속에서 겁이 나고 벌벌 떨고 하니 스스로 얻은 생각건대 이 몸이 아직 있어도 다만 꿈속에서도 주인을 하지 못하니 하물며 지․수․화․풍이 나누어 흩어지며 모든 괴로움이 불꽃같이 일어나면 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이르러서는 바야흐로 바쁠 뿐입니다.”
원오스님이 손으로 가리키며 “멈추고 멈추어라. 망상을 쉬고 망상을 쉬어라”고 하시고 또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말하는 허다한 망상이 다 끊어질 때에 스스로 오매항일의 곳에 이를 것이니라.”
처음 듣고는 믿지 아니하고 매일 스스로 생각하였다. “자고 깨는 것이 분명히 두 쪽이니 어떻게 입을 크게 열어 선을 말하리오. 부처님이 말씀한 오매항일(寤寐恒一)이 거짓말이면 내가 이 병을 고칠 필요가 없거니와 부처님 말씀이 과연 사람을 속이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아직 밝지 못한 것이다.”
뒤에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오는구나’라는 법문을 듣고 홀연히 마음 가운데 막혀 있던 물건을 버려 버렸으니 비로소 부처님의 말씀하신 바가 참 말씀이며 실재 말씀이며 여여한 말씀이며 거짓말이 아니며 속이는 말씀이 아니며,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대자비임을 알았으니, 몸을 가루로 내고 목숨을 바쳐도 부처님 은혜를 갚을 수 없다. 마음 가운데 걸리는 물건을 이미 없애니 바야흐로 꿈꿀 때가 문득 말할 때이고 말할 때가 문득 꿈꿀 때임을 알았으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오매항일을 바야흐로 스스로 알았다. 이런 도리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일 수 없으며 나타내 보일 수 없는 것이니 마치 꿈속 경계 가운데서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과 같다.
大慧問圓悟曰如宗杲未睡著時엔 佛所讚者는 依而行之하고 佛所呵者는 不敢違犯하야 從所依師及自做工夫 零碎所得者를 惺惺時에는 都得受用이나 及乎上牀하야 半惺半覺에 己作主宰不得이니어다. 夢見得金寶則夢中에 歡喜無量하고 夢見諸惡境界 卽夢中에 怕怖惺恐하니 自念此身이 尙存하야도 只是睡著에 己作主宰不得이어니 况地水火風이 分散하야 衆苦熾然하면 如何得不被回換이리오 到這裏하야 方始著忙이니이다 悟가 但以手로 指曰 住住하야 休妄想休妄想하라 하고 又曰待汝說底許多妄想이 絶時에 汝自到寤寐恒一處也리다 初聞亦未之信하고 每日에 我自顧컨대 寤與寐 分明作兩段이어늘 如何敢大開口說禪이리요 除非佛說寤寐恒一 是妄語則我此病을 不須除어니와 佛語果不欺人인댄 乃是我自未了로다 後因聞熏風이 自南來하고 忽然去却碍膺之物하고는 方知黃面老子의 所說이 是眞語實語如語며 不誑語不妄語라 不欺人이요 眞大慈悲니 粉身沒命하야도 不可得報니라 碍膺之物을 旣除에 方知夢時便是寤時底요 寤時便是夢時底니 佛說寤寐恒一을 方始自知로다 這般道理는 拈出하며 呈似人不得 如夢中境界하야 取不得捨不得이니라. [大慧廣錄]
6식 경계의 기멸이 완전히 끊어지고 7식 경계의 망상이 완전히 끊어져야만 꿈속이든지 잠잘 때든지 간에 오매일여가 되기 때문에 원오스님이 ‘망상을 쉬고 망상을 쉬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났다 없어짐이 여전한 데서는 절대로 오매일여가 되질 않습니다. 분명히 자기가 오매일여가 안 된 줄 알고 실지 공부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이 병을 고치지 못하고 큰소리를 치고 돌아다니면서 심지어는 부처님 말씀이 옳으면 자기 병을 고치고 부처님 말씀이 거짓말이면 자기 병을 고칠 필요 없다는 식으로까지 나오니만큼 그처럼 지견병(知見病)은 고치기 어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원오스님 같은 큰 선지식을 만났기에 이 병을 고치고 마침내 오매일여가 되어 구경을 성취할 수 있었지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이 병 고치기가 참 어려운 것입니다.
원오스님이 어느 날 상당하여 법문하시되, “운문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묻기를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몸이 나오신 곳입니까?’ 하니 운문스님이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고 대답하셨다는 법문을 들려주고는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으니 나에게 누가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몸이 나오신 곳이냐’고 물으면 다르게 대답하겠다고 하시고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오니 전각에 서늘한 기운이 나는구나’고 하시는 법문을 듣고 대혜스님이 마음 가운데 걸리는 물건이 없어지고 몽중일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매일여에는 꿈꿀 때에도 한결같은 몽중일여(夢中一如)와 잠이 깊이 든 때의 숙면일여(熟眠一如)의 두 종류가 있는데 꿈꿀 때의 오매일여는 제6식 경계의 영역으로 교가(敎家)의 칠지보살에 해당하고, 잠이 깊이 든 때의 오매일여는 제8 아뢰야 무기식에 머무르는 팔지 이상의 자제보살들과, 이 무기식까지 영원히 떠난 부처님 지위의 진여일여(眞如一如)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혜스님이 말한 바는 몽중일여입니다.
생각[想陰]이 다한 사람이란 이 사람은 평상시에 꿈이나 생각이 소멸하여 자나깨나 항상 같아서 깨달음의 밝음[覺明]이 비고 고요하여 마치 푸른 하늘과 같아서 다시는 거칠고 무거운 육식망상의 그림자 일이 없느니라.
想陰이 盡者는 是人이 平常에 夢想이 銷滅하고 寤寐恒一하야 覺明虛靜하야 猶如晴空하야 無復麤重前塵影事하니라. [楞嚴經]
능엄경에 있는 말씀인데 오매일여의 경지를 선종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인용하는 것입니다.
보살이 제7지에 머물러서 방편의 지혜와 수승한 도를 닦고 익혀 움직임 없이 편히 머무르며 한 생각도 쉬거나 버리거나 끊어짐이 없으니 행주°좌°와 내지 꿈에서도 장애와 상응하지 않는다.
菩薩이 住此第七地하야 修習方便慧殊勝道하야 安住不動하야 無有一念休息廢捨하야 行住坐臥와 乃至睡夢中에도 未曾與蓋障으로 相應하나니라. [華嚴經]
제6식 망상의 기멸이 끊어지면 육식이 무루(無漏)가 되어서 묘관찰지(妙觀察智)가 성립하는데 무상정(無相定) 또는 무상정(無想定)이라고 합니다. 그 무상정에 들어갈 것 같으면 공부에 끊어짐[間斷]이 없는데, 보통 일상에서만 간단이 없는 것이 아니고 꿈속에서도 간단이 없게 됩니다. 꿈속에서도 공부의 경계가 한결같으면 7지보살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화두공부가 잘된다 못된다 하는 것은 아직 6식 경계에 머무르고 망상의 기멸이 여전한 공부밖에는 되지 않는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몽중일여를 성취하면 그 사람이 남자든가 여자든가 병신이든가 뭐든가 가림 없이 7지보살임에는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예전 스님들이 공부를 해가다가 몽중일여의 경계를 성취하면 그 사람은 칠지보살이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보살이 칠지에 머무르면 행°주°좌°와 내지 꿈속에서도 장애를 멀리 떠난다.
菩薩이 住第七地하면 行住坐臥와 乃至睡夢에도 遠離障盖하나니라. [十地經]
제7지 가운데 순수한 무상관(無相觀)이 비록 항상 서로 이어질지라도 가행(加行)이 있으니, 무상관 가운데 가행이 있는 까닭에 아직 자재[任運]하지 못하나니라.
第七地中에 純無相上觀이 雖恒相續而有加行하나니 由無相中에 有加行故로 未能任運하나니라. [唯識論]
제7지의 보살도 퇴전하며, 제8지 멸진정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영원한 불퇴전이 됩니다. 제7지 무상정에 들어 몽중일여한 경계에 있다 해도 오래오래 가서 공부가 달리 나갈 것 같으면 퇴전해 버리고 맙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가행, 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지로 자기가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입니다.
제7지 가운데 비록 일체 상(相)에 움직이지 아니하여 일체 상이 현전하지 못할지라도 그러나 자재하고 임운하게 움직이지 못하니 가행이 있는 까닭이다. 제8지 가운데엔 임운하게 움직이니 가행을 짓지 않는 까닭이다. 이것을 제7지와 제8지의 차별이라 한다.
第七地中에 雖一切相所不能動하야 相不現得故나 然이나 不自在任運而轉하나니 有加行故며 第八地中엔 任運而轉하나니 不作加行故니 是名七, 八地差別이니라. [淸凉疏]
제7지는 무상정의 무심이고 제8지는 멸진정의 무심이며, 무상정의 무심은 뒤로 물러남[退轉]이 있으나 멸진정의 무심은 뒤로 물러남이 없으며[不退轉], 제7지는 근본적으로 말할 때 아직까지 범부의 지위에 속하나 제8지는 성인의 지위에 속하게 됩니다. 또 제7지나 제8지나 그 무심은 차별이 없는 것 같지만 실지로 수행을 해보면 제7지에서는 공용(功用)이 있는 동시에 자재하지 못하며, 제8지 이상이 될 것 같으면 공용(功用)이 없는 동시에 자재하는 차이가 있으니, 제7지의 보살은 꿈속에서만 한결같고[夢中一如], 제8지 보살 이상이 되어서만 잠이 꽉 들어서도 한결같은[熟眠一如] 참다운 오매일여가 성취됩니다.
무상천°무상정°멸진정°수면°민절, 이 오위 가운데에 일체 중생들은 네 가지는 있으나 멸진정이 없고, 성인은 뒤의 세 가지만 있고, 그 가운데에도 여래 및 자재보살은 오직 하나만 있으니 수면과 민절이 없기 때문이다.
無想天 無想定 滅盡定 睡眠 悶絶의 此五位中에 異生은 有四니 除在滅定이요 聖唯後三이요 於中에 如來及自在菩薩은 唯得一이니 無睡悶故니라. [唯識論]
유식론에서는 여래와 자재위보살은 수면과 민절이 없어서 어떠한 깊은 잠에 들었든지 어떠한 큰 병이 나거나 다치든지 하여 기절했다 하여도 거기서 변동이 없고 언제든지 한결같다는 것이니 그것이 실지로 오매일여입니다. 멸진정에 있어서는 수면과 민절이 없으니까 여기서는 언제든지 한결같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이 제7지의 몽중일여와 제8지의 숙면일여와의 근본 차이입니다.
이런 유식론과는 달리 『능가경』에서는 아라한의 지위를 증(證)해도 멸진정이 되어서 자재위보살과 같다고 합니다.
무심의 오위 가운데에 일체 중생들은 네 가지가 있다는 것은 무상천․무상정․수면․민절은 있으나 멸진정이 없음이요, 성인은 다만 뒤의 세 가지가 있으니 멸진정°수면°민절이요, 부처님 및 제8지 이상 보살은 오로지 멸진정 하나만 있어서 수면과 민절이 없다. 수면과 민절 두 가지는 악법인 까닭에 나타나 보이기는 잠을 자는 것 같으나 실지는 잠이 없는 까닭이니, 즉 이승의 무학도 또한 민절은 있느니라.
無心五位中에 異生有四等者는 除滅盡定이요 聖唯後三이요 佛及八地已去菩薩은 唯得有一滅盡定하야 無睡眠悶絶이니 二以惡法故로 現似有睡나 實無有故며 卽二乘無學도 亦有悶絶也니라. [宗鏡錄 四七]
부처님과 자재위보살 이상은 누구든지 참다운 오매일여에 들어서 수면과 민절이 분명히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자재위보살의 멸진정이라는 것이 어떻게 틀리느냐 하면, 부처님은 진여위이어서 제8 아뢰야 미세념까지도 끊어진 순무심의 멸진정이고 제8지 보살 이상은 제6식°제7식이 끊어진 무심의 멸진정입니다.
무심도 자재위보살 이상의 무심과 부처님의 무심이 달라서 구별되듯이, 멸진정도 부처님이 수용하는 멸진정과 자재위보살 이상이 수용하는 멸진정과는 구별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멸진정이든지 자재위보살 이상의 멸진정이든지 간에 멸진정에 들면 수면과 민절이 완전히 끊어져서 오매일여한다는 것만은 틀림없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데 있어서 참다운 구경까지 성취하려면 반드시 노력노력해서 잠이 꽉 들어서도 언제든지 변동이 없는 오매일여의 경계를 돌파해야지 그런 경계를 뚫고 나아가기 전에는 공부라고 취급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떠한 문제가 해결되느냐 하면 예전 조사스님이 깨친 경계와 부처님이 깨친 경계가 똑같다는 것이 해결됩니다. 보통으로 볼 때는 아무려면 조사스님 조사스님 하지만 부처님과 같은 경계가 될 수 있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가칠종의 정맥으로 내려온 조사스님네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오매일여라는 경계를 지내 가지고 깨친 사람들이지 오매일여의 경계를 지내지 않고 깨쳤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현사스님이 지적한 그대로로서 참다운 선지식이라 하면 잠이 꽉 들어서도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를 성취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렇지 않으면 선지식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잠이 꽉 들어서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에 있다 하면 벌써 제8지 보살 이상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만 가지고 본다 하여도 종문에서 조사나 종사라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제8지보살 이상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것만 가지고 조사라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매일여가 된 여기서 깨쳐야 된다고 늘 말하느니만큼 실지에 있어서 제8마계(第八魔界)를 벗어나서 진여의 대원경지가 현발되지 않고서는 조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 대해서 앞으로 더 자세히 말하겠는데 특히 유의할 것은 종문 중에서 조사라는 스님치고 잠이 꽉 들어서도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를 지내지 않은 스님은 한 분도 없다는 것을 유의합시다.
4) 사중득활(死中得活)
달마대사가 말하였다.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이 허덕이지 아니하여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한 생각도 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져서 번뇌가 순식간에 쉬고서 혼침과 산란을 끊어 없애 종일토록 어리석고 분별이 없으니 마치 진흙으로 만들거나 나무로 조각한 사람과 같은 까닭에 장벽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집에 이르는 소식이 결정코 가서 멀지 아니하다.
達磨云하되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하야 心如墻壁하야 可以入道니라. [傳燈錄]
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하야 塵勞頓息하고 昏散을 勦除하야 終日獃惷惷地하야 恰似箇泥塑木彫底하나니 故로 謂墻壁으로 無殊라 하니라 到這境界現前하면 卽到家消息이 決定去地不遠이니라. [高峰妙]
우리가 생각이나 분별로 과거니 미래니 하는데, 한 생각도 나지 아니하는 무심지에 들어갈 것 같으면 거기서는 과거°현재°미래 전체가 다 끊어져 버리는데 이것을 ‘과거와 미래가 끊어졌다[前後際斷]’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로(塵勞), 즉 밖으로의 모든 반연이 순식간에 쉬게 되는데 이것이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는 것[外息諸緣]’이며, 또 혼침과 산란을 끊어 없애게 되는데 이것이 ‘안으로 마음이 허덕이지 않는 것[內心無喘]’입니다. ‘애준준(獃惷惷)’이란 목석과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모양을 말하는데 무심한 경계를 표현한 말입니다. 일체 인연을 다 쉬고 일체 번뇌망상이 다 끊어진 무심지의 경계를 목석과 장벽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면 목석과 장벽과 같은 대무심지에 이를 것 같으면 이것이 도(道)냐 하면 도(道)가 아니라 여기에 이를 것 같으면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 즉 도(道)를 이루는 것이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바가 없으니 곧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쉰 것 [外息諸緣]’이요, 안에서 나는 바가 없으니 곧 ‘안으로 마음이 허덕이지 않는 것[內心無喘]’이다. 이미 내심무천하고 외식제연한 즉 한 생각도 나지 않는 것[一念不生]이다.
外無所入則外息緣이요 內無所岑則內心無喘이니 旣內心無喘하고 外息諸緣則一念不生이니라. [密雲悟]
내가 이렇게 여러 큰스님들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흔히 ‘마음이 장벽과 같다[心如牆壁]’는 말에 대해서 오해가 많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장벽과 같다고 하니 어디 가다가 담이나 벽에 탁 부딪치는 것과 같이 가도 오도 못하게 앞에 무엇이 가로막힌 것으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장벽과 같다’는 것은 흙으로 만든 사람과 같고, 나무로 조각한 사람과 같아서 목석과 다름없는 대무심지를 장벽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일념불생하고 전후제단한 무심지가 장벽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오매일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면 몽중일여만 되어도 무상정이니만큼 겉으로 볼 때는 일념불생 전후제단과 같은 경계이며, 거기서 실지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숙면일여의 자재위보살 이상이 되어도 일념불생 전후제단의 경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도냐 하면 도는 아니어서 여기에 다시 살아나 깨쳐야 합니다. 자재위보살 이상의 멸진정에서 오매일여를 성취하여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지 도를 성취한 것은 아니니 이 경계를 종문에서는 ‘죽은 데서 다시 살아난다[死中得活]’고 합니다.
일념불생전후제단이 되었다고 해도, 대무심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거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이 사람은 크게 죽은 사람[大死底人]입니다. 크게 죽은 사람은 구경각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도(道)를 이루지 못하였으며, 견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실지로 이만한 경계에 도달하려면 참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또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다[死了不得活]고 하면 이것은 도가 아니고 견성이 아니라고 고불고조가 한결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물며 객진번뇌가 그대로 있는 경계에서 견성을 했다든지 도를 이루었다든지 하면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크게 죽은 경계에서 참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쉬고 쉬어 한 생각이 만년이며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면 승묘경계라고 부르니 보봉 광도자가 이런 사람이며 세간의 진로가 그를 어둡게 하지 못한다. 비록 이러하나 도리어 승묘경계에 떨어져서 도안을 가린다. 한 생각도 나지 아니하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승묘경계에 도달하여서는 반드시 곧바로 큰스님을 찾아보아야 함을 알아라.
休去歇去하야 一念萬年하며 前後際斷하면 喚作勝妙境界라 하나니 寶峰廣道者가 便是這般人이라 世間塵勞가 昧他不得하나니 雖然恁麽나 却被勝妙境界하야 障却道眼이니 須知到一念不生 前後際斷處하야 正要見尊宿이니라. [五祖演]
보봉 광도자(寶峰廣道者)는 진정 문선사의 제자이며 총림에서는 광무심(廣無心)이라는 별명을 가진 스님으로서 일념불생 전후제단이 되기는 했지만 살아나지 못해서 실지 도안(道眼)은 없다고 평(評)을 했습니다. 외식제연 내심무천은 쌍차(雙遮)를 말하는데, 철두철미한 쌍차(雙遮)가 되면 쌍조(雙照)가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지만, 쌍차(雙遮)한 데서 머무르면 보봉 광도자같이 무심에 머물러서 실지 쌍조(雙照)가 절대로 안 됩니다. 결국은 도를 성취하려면 쌍차(雙遮)가 된 데서, 즉 크게 죽은 데서 다시 살아나 쌍조(雙照)가 되어야 합니다. 죽어 가지고 살아나지 못하면 이것은 산송장입니다.
보통 번뇌망상°분별심이 그대로 있는 것을 가지고 공부가 아닌가, 도가 아닌가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죽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 사람도 도가 아닌데 아직 죽지도 못한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법문은 오조 법연선사가 ‘사량분별이 떨어진 대무심지에 들어 크게 죽은 사람도 도가 아닌 승묘경계’일 뿐이라고 한 진정 문선사(오조 법연선사의 스승)의 법문을 인용하여 한 말입니다. 사량분별이 다 끊어진 여기에서 크게 깨쳐야 실지로 바로 안 것이고 도를 이룬 사람인 만큼 누구든지 이런 바른 길로 가야지 도가 아닌 것을 도로 삼으면 자타가 다 망한다고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것[大死却活]은 선문의 생명선입니다.
원오스님의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오는구나’라고 법문하심을 보고 홀연히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니 마치 한 뭉치 헝클어진 실을 칼로 한번 끊으니 다 끊어지는 것과 같았다. 동상(動相)이 나지 아니하나 도리어 청정한 무심경계에 앉게 되었다. 원오스님이 말씀하시되 “아깝구나. 너는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하였으니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야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원오스님 방에 들어갈 때마다 다만 ‘유구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는 공안을 들어 물으시고 내가 겨우 입을 열려고 하면 즉시 ‘아니다’라고만 말씀하셨다. 내가 비유로써 설명하되 “이 도리는 흡사 개가 뜨거운 기름솥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핥으려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자니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니, 원오스님이 “너의 비유가 지극히 좋구나”고 하셨다. 어느 날 원오스님이 ‘나무가 넘어지고 등칡이 마르니 서로 따라 온다’고 법문하심을 듣고 내가 즉시 이치를 알고는 ‘제가 이치를 알았습니다’고 하였다. 원오스님이 ‘다만 네가 공안을 뚫고 지나가지 못할까 두렵다’ 하시고는, 한 뭉치의 어려운 공안을 연거푸 들어 물었다. 내가 이리 물으면 저리 대답하고 저리 물으면 이리 대답하여 거침이 없으니 마치 태평무사한 때에 길을 만나면 문득 가듯 하여 다시 머무르고 막힘이 없으니 바야흐로 ‘내가 스스로를 속이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을 알았다.
老漢이 見圓悟老師의 擧熏風自南來하고… 忽然前後際斷하야 如一綟亂絲를 將刀一截截斷相似하니라 雖然動相이 不生이나 却坐在淨裸裸處하니 老師云可惜다 爾死了不能活이니 不疑言句是爲大病이라 絶後更甦하야사 欺君不得이니라 每入室에 只擧有句無句如藤倚樹話하고 纔開口하면 便道不是하니라 我說箇譬喩曰아 這箇道理는 恰如狗子가 看熱油鐺相似하야 要舐又舐不得하며 要捨又捨不得이니라 老師曰爾喩得極好라 一日에 因老師가 擧樹倒藤枯相隨來也하야 老漢이 便理會得하고 乃曰某會也니라 老師曰祗恐爾透公案未得이라 하고 遂連擧一絡索詴訛公案하야 被我三轉兩轉截斷하니 如箇太平無事時에 得路便行하야 更無滯碍하야 方知道我不謾爾이니라. [大慧廣錄]
대혜스님이 자기가 알았다고 큰소리친 이후 이십여 년 만에 몽중일여가 되어서는 부처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고 감격해 한 일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몽중일여가 되니 공부가 다 된 것 아닌가 하고 원오스님을 찾아뵈니 ‘너의 지금 경계도 성취하기 어렵지마는 참으로 아깝구나! 죽어서는 살아나지 못하였으니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야 너를 속일 수 없느니라’고 경책하셨습니다. 전후제단의 승묘경계(勝妙境界)를 선문에서는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였다[死了不活]’ 하여 지극히 배척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철저히 깨쳐 활연히 크게 살아나야만 정안(正眼)으로 인가하는 것입니다. 크게 죽은 후에 다시 크게 살아나기 전에는 불조 공안들의 심오한 뜻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공안, 즉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몽중일여가 되고 숙면일여가 되었다 하여도 공안의 뜻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객진번뇌가 여전한데도 공안을 알았다 하고 견성했다 하고 보림한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임제정맥에 있어서 원오스님과 대혜스님은 역사적으로 유명하고 큰스님입니다. 이런 큰스님들의 경험담이고 서로서로 지시하고 지도하고 의지한 그런 공부 방법이니 여기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게 된다면 결국 자기만 죽고 맙니다. 이러한 공부과정은 선종뿐 아니라 전체 불교에 있어서 표준입니다. 이처럼 대혜스님이 원오스님의 지시를 따라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라는 공안을 참구하여 마침내 ‘서로 따라온다’는 원오스님의 법문에서 다시 살아나서, 즉 깨쳐서 일체 공안을 바로 알아 인가를 받았으며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지어 주었습니다.
흔히 내가 장 고불고조의 뜻을 따르자고 하니 조상의 뼈만 들춘다고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제방에 많은 모양인데, 그러나 고불고조(古佛古祖)를 표방해서 전통적인 큰스님네들 법문을 귀감으로 삼고 거울로 삼아야지 공연히 내 옳으니 네 그르니 하여 서로서로 비방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표준은 고불고조에 두어야 하니 원오스님이나 대혜스님 같은 큰스님네들이 실지에 있어서 몽중일여가 되고 오매일여가 되어서도 거기서도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참으로 화두를 참구하여 깨쳐서 비로소 조사가 되고 도인이 되고 했으니 이것을 모범으로 삼지 않으면 무엇을 모범으로 삼겠습니까? 내가 장 주장하는 뜻을 충분히 이해하기 바랍니다.
반달이 지나도록 움직이는 모양이 일어나지 않으나 여기에 앉아 머무르면 합당치 못하다. 그것은 견의 자리[見地]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니 정지견(正知見)을 가린 것이다. 매번 잠이 꽉 들어서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듣고 봄이 없을 때엔 두 동강이가 되니 경이나 어록에서 이 병을 고칠 수 없었다. 이처럼 가슴속에 걸리는 것이 십 년이 지났는데 하루는 마른 잣나무를 보니 눈에 띄자 당장에 깨쳐서 그 전에 얻었던 경계가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지니 마치 캄캄한 방 가운데서 밝은 해가 있는 데로 나온 것과 같아서 비로소 경산노인의 서 있는 곳을 보았으니 삼십방을 두드려 주었으면 좋을 것이다.
半月餘에 動相이 不生하나 不合向這裏坐住니 謂之見地不脫이라 碍正知見이니라 每於睡著하야 無夢想見聞地엔 打作兩橛하니 經敎語錄에 無可解此病이라 如是碍在胸中者十年이라가 一日엔 見枯栢하고 觸目省發하야 向來所得境界가 撲然而散하야 如闇室中에 出在白日하니 始得見徑山老人의 立地處라 好與三十棒이로다. [雪岩錄]
‘견의 자리[見地]를 벗어나지 못했다’ 함은 무심지에 머물러 있음이니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 것이며, 십 년이 지나 잣나무를 보고 깨쳤다 함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니, 쌍차(雙遮)된 데서 쌍조(雙照)가 된 것을 말하니 실지 중도를 정등각한 것입니다. 몽중일여가 되고 숙면일여가 된 대무심지에서 다시 살아나야 확철히 깨치는 것입니다.
설암스님이 고봉스님에게 물었다.
“낮 동안 분주할 때에도 한결같으냐?”
“한결같습니다.”
“꿈속에서도 한결같으냐?”
“한결같습니다.”
“잠이 꽉 들었을 때는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느냐?”
여기에서는 말로써 대답할 수 없으며 이치로도 펼 수가 없었다. 5년 후에 곧바로 의심 덩어리를 두드려 부수니 이로부터 나라가 편안하고 나라가 조용하여서 한 생각도 함이 없어 천하가 태평하였다.
雪岩이 問曰日間浩浩時에 作得主麽아 答作得이니다 睡夢中에 作得麽아 答作主니다 又問正睡著時엔 主在何處오 於此에 無言可對오 無理可伸이라 後五年에 驀然打破疑團하니 自此로 安邦定國하고 一念無爲하야 天下太平하니라. [高峰妙]
고금을 통해서 몽중일여가 되었다 해도 실지 공부가 아니고 잠이 꽉 들어서 공부가 안 되면 아무리 석가․달마 이상으로 깨쳤다고 큰소리쳐도 그것은 아무 소용없고 참다운 공부가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잠이 꽉 들어서 공부가 되나 안 되나 이것을 표준삼고 공부하여야 합니다. 이상에서 인용한 스님들은 중국스님들이니 그럼 우리나라에서는 어떠냐는 것을 나옹(懶翁)스님과 태고(太古)스님의 말씀을 인용하겠습니다.
공부가 이미 동정(動靜)에 간격이 없으며 오매(寤寐)에 항상 일여하여 접촉하여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넓고 아득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한다. 마치 개가 뜨거운 기름솥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핥을래야 핥을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은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당한가.
工夫가 旣到動靜無間하며 寤寐恒一하면 觸不散蕩不失하야 如狗子見熱油鐺相似하야 要舐又舐不得하며 要捨又捨不得時에 作麽生合殺오. [懶翁集]
나옹(懶翁)스님이 공부해 나아가는 정도를 열 단계로 나누어 공부십절목(工夫十節目)을 작성하여 수도의 지침이 되게 하였는데 이것은 그 제6 절목으로서 참선하여 도를 깨침에는 오매일여의 경계를 통과함을 필수조건으로 삼으니, 만일 이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견성이 아니며 도를 깨친 것이 아닙니다.
점점 공부가 오매일여에 이른 때에는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이 요긴하다. 화두를 참구하는 의심이 정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끊어진 곳에 이르면, 금까마귀가 밤중에 하늘을 뚫고 높이 날아오르리니, 그때에 슬프거나 기쁜 생각을 내지 말고 모름지기 본분종사를 찾아가서 영원히 의심을 결단하라.
漸到寤寐一如時에 只要話頭心不離니 疑到情忘心絶處하면 金烏夜半에 徹天飛리니 於時에 莫生悲喜心하고 須參本色永決疑어다. [太古集]
누구든지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거기서 자족심을 내지 말고 본분종사를 찾아가서 참으로 바로 깨쳤나 어쩌나를 점검받아야 합니다. 태고스님이나 나옹스님은 고려 말엽의 큰스님들로서 열심히 정진하였으며 나중에 중국에 가서 인가를 받은 스님들로서 오가칠종의 정맥을 바로 안 스님들입니다. 그런 큰스님들이 공부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오매일여를 많이 말씀하셨으니 오매일여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견성이란 오매일여의 대무심지에서 깨쳐 인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보면 나의 오매일여에 대한 법문은 어렵기 그지없고 보조스님의 『수심결』은 쉽다고 말합니다. 방장스님의 법문은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곳에서 오매일여가 되어 가지고 거기서 깨쳐야 한다’고 하시니 이 공부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고 도저히 어떻게 손댈 곳이 없으나, 『수심결』에서는 망상이 그대로 있고 번뇌가 그대로 기멸하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을 견성이니 돈오니 하고, 객진번뇌를 점차로 없애 가는 것을 보림이니 점수니 하니 공부가 쉽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잘 하는 말이지만 고려 중기 이후 이조로 내려오면서 큰 공부인(功夫人)이 옳게 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ꡔ수심결ꡕ에 있다고 봅니다. 『수심결』에 보면 번뇌망상 이대로가 견성이라 하고 화두 안 해도 된다 하니 공부인이 날래야 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중국까지 가서 공부를 바로 전해 받은 태고스님이나 나옹스님은 철저하게 오매일여의 관문을 말씀하고 계시느니만큼 우리가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하고 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동정에 일여하고 오매에 항상 일여하여 화두가 현전함이 마치 물 속에 달이 비춰 여울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물이 세차게 흘러 접촉하여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넓고 아득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한다. 마음 가운데는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고 밖으로는 흔들려도 움직이지 아니하면, 의심 덩어리가 부서지고 바른 눈을 뜨는 것이 가까웠다. 홀연히 안팎으로 맞부딪쳐 자기를 깊이 밝히면 또 마땅히 대종사를 찾아 시험을 구하여 법의 그릇을 이룰 것이요 적은 것에 만족하여서는 안 된다.
動靜一如하고 寤寐恒一하야 話頭現前이 如透水月華가 在灘浪中하야 活潑潑하야 觸不散蕩不失하야 中寂不搖하고 外撼不動하면 疑團이 破하고 正眼이 開近矣라 忽然築著磕著하야 洞明自己어든 又宜見大宗匠하야 求煅煉成法器오 不可得小爲足이니라. [蒙山]
우리가 공부를 함에 있어서 오매일여라는 관문의 통과가 근본이 되어 있는데 오매일여가 되어서 깨쳤다 해도 구경에 못 들어가는 수가 있으니 꼭 본분종사를 찾아가서 인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만치 공부라는 것이 어려운데 공부하다가 번뇌망상이 여전한 사량분별을 가지고 아는 체하는 것은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선계(禪界)에서는 이 병이 너무 깊어 한철 두철 나면 뭐 좀 알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오매일여가 되었나 안 되었나 스스로 생각해 보고 양심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크게 죽은 사람이 불법도리가 전혀 없어서 현묘°득실과 시비°장단이 여기에 이르러서는 다못 이렇게 쉬었느니라. 옛 사람은 이를 평지 위에서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모름지기 저쪽으로 뚫고 지나가야 되며, 혹 의지하거나 이해함이 있으면 아무 관련 없느니라.
大死底人이 都無佛法道理하야 玄妙得失과 是非長短을 到這裏하야 只恁麽休去나 古人은 謂之平地上死人이니 須是透過那邊하야사 始得이요 或有依倚解會하면 沒交涉이니라. [碧岩錄]
이처럼 무쇠로 만들어 놓은 사람은 혹 기특한 경계를 만나거나 혹 나쁜 경계를 만나더라도 이 앞에 이르러서는 모두 꿈속과 같아서 육근이 있음을 알지 못하며 아침저녁을 알지 못한다. 비록 이러한 경계에 이르렀어도 찬 재와 꺼진 불을 지켜서 캄캄한 곳으로 들어가서는 못쓰니, 모름지기 몸을 돌리는 한 활로가 있어야 한다.
這般生鐵로 鑄就漢이 或遇奇特境界하며 或遇惡境界하야도 到此面前하여는 悉皆如夢相似하여 不知有六根하며 不知有旦暮하나니 直饒到這般田地하여도 切忌守寒灰死火하여 打入黑漫漫地去也니 須是有轉身一路하여사 始得다. [碧岩錄]
제8 아뢰야 무기식의 거짓 무심인 찬 재와 죽은 불에 집착하여 몸을 돌리는 활로를 못 얻으면 영원히 사지(死地)에 매몰되고 맙니다.
조주스님이 투자스님에게 물었다.
“크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에는 어떠합니까?”
“밤 길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날이 밝아서 가야 한다.”
굉지스님이 소참에서 이 법문을 거론하고서 말씀하였다.
“만약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난] 이 시절을 알면 곧 ‘밝음 가운데 어두움이 있으니 어두움으로 서로 만나지 말고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으니 밝음으로 서로 만나지 말라’ 함을 알 것이니라. 일체 만법이 다 없어진 때에 밝고 밝게 항상 있으며 일체 만법이 생길 때에 비고 비어 항상 고요하니 문득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다고 말함을 알 것이다.”
설두스님이 이 법문에 대해서 송하였다.
삶 가운데 눈이 있으니 오히려 죽음과 같고
약을 거리끼니 어떻게 큰스님을 감정하리오.
옛 부처도 오히려 일찍이 이르지 못했다 말하니
티끌 모래 뿌림을 누가 이해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趙州問投子大死底人이 却活時에 如何오 投子云不許夜行이요 投明須到니라 宏智小參에 擧云 若箇時에 識得하면 便知道當明中有闇이니 勿以闇相遇요 當暗中有明이니 勿以明相覩로다 一切法盡處箇時에 了了常存요 一切法生時箇時에 空空常寂이니 須知道死中活活中死니라 雪偈頌云活中有眼還同死하니 藥忌何須鑑作家오 古佛도 尙言曾未到어니 不知誰解撤塵沙요. [宏智錄 五]
일념불생 전후제단이 되어서 멸진정의 깊고 깊은 무심지에 들어가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크게 죽은 사람이니 거기서 살아나야지 살아나지 않으면 견의 지위[見地]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구경은 모르고 맙니다.
‘밝은 가운데 어두움이 있으니 어두움으로써 서로 만나지 않는다’ 함은 조이쌍적(照而雙寂)입니다. 어두움이 있다고 하여 밝음의 상대적인 어두움으로만 취급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니 밝은 가운데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으니 밝음으로써 서로 만나지 않는다’ 함은 적이쌍조(寂而雙照)입니다. 밝음이 있다고 하여 어둠과 대립되는 밝음으로만 취급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니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 있는[雙雙] 밝음과 어두움입니다. 절대로 한 편에 치우쳐서 서로 대립되는 밝음과 어두움이 아닙니다. 밝음과 어둠의 대립이 그친 동시에 밝음과 어둠이 서로 융통자재하는 중도의 밝음과 어두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법문은 석두(石頭)스님의 참동계(參同契)에서 굉지스님이 인용한 구절입니다. ‘일체 만법이 다 없어진 때’란 쌍차(雙遮)를 말하고 ‘밝고 밝게 항상 있다’는 것은 쌍조(雙照)를 말하며 전체적으로는 크게 죽은 가운데 크게 살아남을 말합니다. ‘일체 만법이 날 때’란 쌍조(雙照)를 말하고 ‘비고 비어 항상 고요하다’는 것은 쌍차(雙遮)를 말하며 전체적으로는 크게 산 가운데 크게 죽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쌍차(雙遮)가 쌍조(雙照)며 쌍조(雙照)가 쌍차(雙遮)여서 차조(遮照) 동시이니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다는 것은 깨친 경계를 말하는 것이나 말로써 아무리 설명해 봐도 소용없습니다. 실지로 깨쳐 봐야 아는 것이니만큼 화두를 부지런히 해서 오매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서야 그 경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티끌 모래를 뿌린다’ 함은 장경(長慶)스님의 법문을 설두스님이 인용한 것입니다. 장경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묻되 “어떤 것이 바른 법의 눈[正法眼]입니까?” 하니 “바라노니 모래를 뿌리지 말라”고 한 법문입니다. 여기에 와서는 견성성불이라는 것도, 임제 할과 덕산 방도, 향상일로도, 또 온갖 말과 수식어가 다 소용없고 천칠백 공안도 눈에 모래를 뿌리는 것인 줄 알아야만 어느 정도 ‘삶 가운데 죽음이 있고 죽음 가운데 삶’이 있다는 뜻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삶 가운데 죽음이 있고 죽음 가운데 삶’이 있다 한다고 무슨 별다른 깊은 법이 있는가 집착하여 매달리게 되면 영원토록 불법을 모르고 깨치지 못하고 마는 것이며 그렇다고 실지 이런 경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크게 죽어서 크게 살아나면 제8 아뢰야 무기식까지 다 없어진 참으로 크게 죽은 경계가 나타납니다. 여기에서는 항상 죽은 가운데 항상 살아 있고 항상 산 가운데 항상 죽어서 밝음과 어두움이 서로 고요하고 서로 비치니, 곧 부처님과 조사의 바른 눈입니다. 이것을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는[雙雙] 시절이라고 합니다.
숨이 끊어진 때와 종적이 끊어진 곳에서 참으로 바른 눈을 갖추어야 한다. 그때에는 역력하여 가라앉지 아니하고 신령하고 신령하여 상대가 끊어지니 문득 사방으로 활보하며 주위에 널리 응할 것이다.
絶氣息時斷蹤跡處에 須具眼하여사 始得다 那時에 歷歷不沈하고 靈靈絶對하여 便能闊步大方하여 周旋普應이니라. [宏智錄]
대무심지에서 크게 살아나야 함을 말하는 것이니, 크게 살아나면 쟁반 위를 구슬이 구르듯이 자유자재한 큰 활용[大用]이 널리 펼쳐 규범이 있지 않은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크게 죽은 데서 크게 살아나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경계가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번뇌망상이 그대로 있는 데서 대용(大用)이 나타난다고 한다면 이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마음이 안온하며 꽉 차 있고 살 방도가 차고 서늘한 때에 문득 겁(劫)이 공함을 보아서 털끝만큼도 인연의 번뇌를 짓지 아니하고 실끝만큼도 장애를 지음이 없다. 공허함이 지극하여 광명이 있고 청정함이 원융하여 빛나니 만고에 뻗쳐 혼매하지 않는 한 사실이 있다.
田地穩密密處와 活計冷湫湫時에 便見劫空하여 無毫髮許도 作緣累하며 無絲糝許作障翳하여 虛極而光하고 淨圓而耀하여 歷歷有亘萬古不昏昧底一段事로다. [宏智錄]
‘공허함이 지극하여 광명이 있다’ 함은 일체가 공한 크게 죽은 경계인 쌍차(雙遮)를 말하고, ‘청정함이 원융하여 빛난다’ 함은 크게 살아난 경계인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적적한 가운데 광명이 있고 광명 가운데 적적하여서 억천만 겁이 지나도록 언제든지 어둡지 아니하는 이런 경계는 진여본성을 깨치고 진여대용이 현전한 사람의 경계입니다. 제8 아뢰야 무기식까지 영원히 없앤 참으로 크게 죽은 경계의 대공적(大空寂) 가운데서 크게 살아나서 발하는 대광명은 억천 겁이 지나도 옛되지 않고 만세에 뻗쳐 늘 지금이니 이것이 부처님과 조사들이 바로 깨친 경계이며 이것을 대적광(大寂光)이라고 합니다.
임제종에 있어서는 대기대용(大機大用)으로 밀고 나가지만 마음자리[心地] 문제에 있어서는 조동종이 아주 섬세하여서 ‘미세조동(微細曹洞)’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만큼, 이러한 자세한 법문이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천동 굉지스님의 법문을 인용했습니다.
만약에 식음(識陰)이 다 없어지면 둥글고 밝은 청정한 묘심이 그 가운데서 피어나니 깨끗한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넣은 것과 같다. 이에 십지와 등각을 뛰어넘어 여래의 묘장엄 바다에 들어가서 보리를 원만히 성취하여 무소득으로 돌아간다.
識陰이 若盡則圓明淨心이 於中에 發化하여 如淨瑠璃內含寶月하여 如是乃超十地等覺하여 入於如來妙莊嚴海하여 圓滿菩提하여 歸無所得이니라. [楞嚴經]
식음(識陰)이란 제8 아뢰야를 말합니다. 오매일여의 크게 죽은 데서 다시 크게 살아나는 것을 ‘깨끗한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넣은 것과 같다’고 하며 안과 밖이 철저하게 밝게 되는 것이니 진여본성을 깨친 성불의 경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소득이 있느냐 하면 무소득으로서 한 법도 얻을래야 얻을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식음(識陰)이 없어지면 바야흐로 지위를 뛰어넘어 무소득을 요달하여 구경을 원만히 성취하니 깨끗한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넣어 놓은 것과 같다.
若得識陰盡하면 方超地位하여 了無所得하여 究竟圓成하여 如淨瑠璃內含寶月이니라. [宗鏡錄]
선가에서도 구경각을 ‘깨끗한 유리병 속에 달을 넣어 놓은 것과 같다’고 표현하는데, 크게 죽은 데서 크게 살아나는 것을, 고요하면서 서로 비친다[寂而雙照]느니, 비치면서 서로 고요하다[照而雙寂]고 말합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부지런히 부지런히 해서 크게 죽어서 크게 살아나야지 아직 죽지도 못하여 망상분별이 기멸하는 경계에서 견성했다고 착각을 일으키든지 혹은 그런 망견을 가지고 남을 지도하게 된다면 저 망하고 남 망치는 것입니다. 한번 죽어서 크게 살아나야 하는 것이니 죽은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산송장이지 산 사람은 아니니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크게 살아나야 안과 밖이 철저하게 밝아서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이글을 읽으면 스님이 살아가야 할 자세는 알 수 있으나, 속세를 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나와있지 않은 듯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