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安안鏞용자甲갑자)!
희수가 되어서야 ‘100년 편지’를 통해 아버지 영전에 처음 글을 올리게 되니 아스라하게 지나간 세월이 참으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철없던 어린 시절 대 여섯 살 쯤 되던 어느 해 설날 어려운 살림에 설빔으로 새 바지저고리를 입고 이른 아침 마을 논에서 썰매를 타다가 수렁에 빠져 옷이 엉망이 되어 집에 돌아오니 그 모양을 보고 화가 나신 아버지 꾸중에 돌 각담으로 내 쫓겨났던 일과 늘 건강이 안 좋으신지 별로 하시는 일도 없이 어설픈 나무꾼으로 뒷산에서 땔감이나 마련하는 것이 일상이시던 1945년 8월 해방이 되던 날 우리 오두막집에 마을사람들이 모이고 아버지는 밤 새 하얀 광목에 태극기를 그려 읍내 장터로 만세를 부르러 가시는 그 모습은 평소의 아버지가 아니셨고 그처럼 그렇게 기분 좋은 아버지를 뵌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두어 달 뒤 다시 두문불출하시더니 집에 찾아오는 사람도 만나지 않으시며 오지도 말라며 돌아가라고 하실 뿐 힘에 겨운 듯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건강이 나빠도 병원에 갈 수도 없어 마을에서 침놓는 노인에게 침이나 맞고 어머니의 애타는 간호 이외에는 별 방법 없이 날이 갈수록 힘겨워 하시던 1946년 12월 아버지(57세)는 누님과 여동생 그리고 저를 남겨 둔 채 눈을 감으시니 제 나이 9살이었습니다. 그해 겨울은 무척이나 추었고 눈이 많이 쌓였지만 초가삼간 좁은 집안에 문상객이 머물 수가 없어 뒷산에서 생나무를 베어 마당에서 화롯불을 피우며 밤을 지새웠고 장롓날에도 십 여리가 넘는 먼 길에 상여를 따르는 조문객이 왜 그리도 많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때의 기억들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6.25 전쟁이 일어나고 전란 중에는 초가삼간도 불에 타 버려 이웃집 사랑방으로 전전해야만 했고 봄이 되어도 텃밭에 심을 씨앗이나 호구지책도 해결 할 수 없게 생활은 비참해 그야 말로 초근목피로 연명을 해야 했던 처절한 역경 속에서 그래도 삼남매를 지켜주셨던 어머니가 계셨기에 약관시절 외롭게 고민하면서 주경야독해야 만 했던 12년이란 인고의 생활은 잊을 수가 없는 날들이었습니다.
우리집안은 3대 독자로 내려오면서 아버지 대에서 형제이셨던 큰아버지가 계셨는데 나중에 기록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투신 하신 것도 알게 되었지만 1970년 여름 제 나이 30 중반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네 애비가 독립운동을 했으니 그 기록을 찾아 총무처에 제출해서 명예회복을 하라”고 하셨고 어머니도 같은 말씀이 있으셨으나 집에는 아무런 자료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서울의 이곳저곳의 도서관을 헤매던 중 마침내 남대문 도서관에서 독립운동사(제3권)틀 발견하여 활자로 된 아버지의 기록을 처음으로 확인하여 그 내용을 요약하면
“순천군 낙안면은 문인 향으로 경술국치 전후에 유생들이 국권회복을 꾀하던 중 전국에서 기미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가족들의 안위는 뒤로 한 채 안용갑(자 종학27세) 등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의 굳은 신념을 서약하는 이팔사(二八社) 33인 결사대원으로 가담하여 비밀조직을 통한 연락과 거사를 위한 준비로 독립선언서, 태극기 및 ‘대한독립기’ 등을 준비하고 4월 9일(음 3월 3일)과 13, 14일 3차에 걸쳐 낙안과 벌교 장날을 기하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28일 적 헌병대에 검속되어 순천과 광주지방법원을 거쳐 1919년 7월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 6월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다음해 순종황제의 특사로 출옥을 한 뒤에는 혜지사(惠芝社-유족을 돕는 단체)를 운영하며 만전을 기했다. 그 후 정부 수립 후 이들의 3.1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58년 6월 전라남도지사와 순천군수에 의하여 낙안초등학교 교정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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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 입구에 3.1독립운동기념비가 이전 건립되었다. |
그리고 어머니 말씀도 “시집와서 1년도 안 되어 3.1 독립만세운동으로 수없이 일경들이 집을 수색하고 드나들며 포위 가솔들을 협박과 구타를 하면서 아버지의 행방을 감시당하면서 어느 때는 그들의 포위망을 싸우면서 뚫고 탈출도 했었으나 끝내 피체되어 옥고를 치루고 출옥 할 때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낙안 신기리 십리길에서 횃불로 마중을 하였고 나와 보니 함께한 동지들의 희생으로 인한 유족들의 생활이 어려운 것을 보고 이를 돕는 혜지사를 운영하면서 가산이 몰락되자 생계의 어려움과 계속되는 일경의 감시로 1935년 끝내 정든 고향을 떠나 안양에 정주하게 되었다.”하여 아버지가 하셨던 일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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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시절에 당신의 빈자리 절망과 한의 그림자
흘러간 세월이 당신의 위대한 발자취 일깨워 주고
광복의 선구자 당신은 영원히 빛나는 겨레의 등불
애국지사 안용갑의 묘와 비문에서 |
그 후 정부에서는 1975년 광복절을 기해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마감하여 이후 통일이 되기 전에는 포상이 없을 것이라는 발표가 있어 독립운동사에서 본 내용을 근거로 자료 수집을 시작하여 순천군 낙안면 낙안초등학교를 찾아가 운동장에 있는 기념비의 앞 뒤 사진을 찍고 독립운동사의 중요 내용들을 원고지 60여 매에 옮겨 정리해서 사진과 함께 정부에 제출하였으나 그해 광복절에 발표된 명단에서는 누락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소식도 없이 12년의 세월이 흘러간 1986년 5월 정부에서 선친의 서류를 보완해서 제출하라 하는데 어떤 서류를 어떻게 보완하라는 내용도 없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제출한 서류를 폐기하지 않고 그나마 관심을 갖고 보류하였음에 감사하며, 그동안 훈. 포장이 서훈 된 후손들을 만나 조언을 들어 그 당시의 재판기록을 첨부해야 실증자료가 된다고 해서 발행기관을 묻고 물어서 부산지방법원을 찾아갔더니 3.1운동 당시의 문서는 사직운동장 뒤 ‘정부기록물보관소’로 가라고 해서 찾아가 정문에서 신고를 하니 삼엄한 경계 속에 개별 안내를 받아 담당자를 만나 선친의 재판기록을 신청하였더니 기록은 있으나 ‘제적등본’이 첨부되어야 발행이 가능하다하여 나중에 ‘제적등본’을 받아보고 확인하여 발행해 주기로 하고 귀경 ‘제적등본’을 발송한 지 15일 후 15쪽의 판결문 사본을 받아서 정부에 제출한 1986년 12월 16일 비로소 ‘건국훈장 애족장’ 제1866호로 추서되어 정부수립 후는 38년, 공훈을 찾기 시작한 지 12년이란 세월이 지나서야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85세)가 타계하신 지 1년 6개월 후 묘에 훈장을 올리면서 지난 날 처절한 인고의 생활로 저희를 지켜주셨던 어머니 생전에 밝혀드리지 못 한 이 불효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며 철부지시절의 어리석은 생각도 그 고난의 생활들을 이제는 다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한겨울 외롭게 쓸쓸하게 영면하셨을 때 조문객이 많으셨던 것도 그 암울했던 시기에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면서 사생취의 하셨던 애국애족의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정신의 표상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훌륭한 뜻을 우리후손들이 이어받아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분단된 조국의 아픔이 평화적으로 하나 되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음우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 모든 것 다 놓으시고 편히 쉬옵소서.
1) 독립운동사 (제3권 보성군, 순천군 편),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이 은상/ 독립운동사번각발행처(교육도서출판사), 1972. 7.15 발행/ p.p 576~578, 593~594에서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