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내용 (1)
…별로 스승답지도 않고, 크게 한 것도 없는데 뭐. 요즘 스승이 있나요, 이 시대에. 학생들이 선생 때리지만 않으면 잘하는 거지. ㅎㅎㅎㅎㅎ…. 선생만 안 때리기만 하면 잘하는 거지. ㅎㅎㅎㅎ….. 아이 참 세상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근래 자꾸 체벌문제 가지고 소송하고 그러더라구요. 화가 나면 때릴 수 있는데 때릴 때 화가 나서 때렸냐 아니면 그냥 때렸냐, 그거 가지고 또 문제 삼고요. 화가 나서 때리면 그건 안된다는 거라. 화가 나서 때리면 화풀이로 했기 때문에 그건 체벌이 아니다, 이래가지고 또 선생님이 아주 곤경에 처하고 그러더라고요. 하여튼…
또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워놓은 자식, 선생이라고 때리면은 부모된 입장은 기분은 물론 안 좋겠죠. 안 좋긴 안 좋겠지마는 아이들 가르치다 보면 참 화날 때 있거든요. 화날 때 있으면은 좀 때리기도 하고 그렇게 되는데…. 우리들의 의식은 빨리 따라가질 못하고 다른 외형적인 것만 자꾸 선진국 따라가고 그렇게 되는 거죠. 의식이, 생각이 선진국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겉으로만 자꾸 앞서가는 사람들을 쫓아가는 거지. 그러니까 그걸 감당을 못하는 것 같애요.
특히 우리나라이 사람들 생각이 잘 안 변하더라고요, 보면은. 아주 지나간 거, 묵은 거, 이거 가지고 상당히 오랫동안 붙들고 늘어지는 그런 성격이 또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보면은 묵은 것, 묵은 감정, 묵은 일, 이런 거 자꾸 들춰내는 그런 게 있거든요. 그게 다 성격이라고요, 우리 나라 사람들 성격이예요. 그렇다면은 옛날 습관대로 우리가 살아오면서, 예를 들어서 선생이 좀 학생들 잘못한다고 꾸짖다 보면은 화가 나고, 때리다 보면은 그 가운데 화도 섞이기도 하고, 순간적인 것이긴 하지만은, 그러한 것들도 옛날에 우리가 늘 해 오던 그런 건데 그게 얼른 안 바뀌거든요. 그 마음이 안 바뀌는 거라.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안 하는데 말이야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면 되느냐 . 안하면 좋은데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이 그렇게 빨리 바뀌지가 않아.
오히려 일본 사람들은 뭘 한가지를 이렇게 바꾸어 놓으면은 전체가 바꾸자 하면은 확 바꾸고 그래요. 설 같은 것도 양력으로 쓰는 것이 그 사람들은 당연히 되잖아요. 명치때 바꿨다나 어쨌다나. 그런데 우리는 안되잖아요. 그렇게 법으로 단속을 하고 뭘 하고 떡집을 어떻게 폐쇄를 하고 뭐 그랬어요, 한 때. 그렇게 했는데도 그게 안 되는 거라. 그래 도로 그냥 되돌아 와 버렸지. 도로 되돌아 와 버렸어요. 그거보면 참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전통을 크게 좋아 안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그런 묵은 것에 대한 미련, 그것은 또 대단한 거 같아요. 거의 안 바뀌는 것 같아요. 살아온 습관들, 의식이 빨리 안 바뀌어. 그리고 다른 지엽적인 것은 아주 빨리 변하고. 세상 추세가 그렇다 보니까. 눈은 빨리 변하고 마음은 그렇게 빨리 따라가질 못하고. 거기서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생기는 것 같애요.
오늘은 종지용출품, 26번 인데 289쪽에 거기서부터 할 차례죠.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은, 적문(迹門)과 본문(本門)으로 나누었을 때 본문의 내용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런 전조, 서론이 바로 이 종지용출품의 전반이고 후반부터는 본문의 본론에 해당이 되는 정종분(正宗分)에 들어가는데. 우리가 참 잘 알아야 할 것이 불교의 근본 원리, 또 불교가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사람을 어떻게 보고 또 이 우주와 삼라만상의 실상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그런 아주 궁극적인 안목, 최상의 안목이 법화경에 잘 표현이 됐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부처님을 이해하는 어떤 이해력, 부처님을 보는 안목을 여기서는 생각하고 있지마는 그 안목이 결국은 우리들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또 어떤 하나의 사물을 이해하고 우리가 보통 ‘마음, 마음’ 하는 그 마음도 이해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여기 법화경의 가르침 속에 있다. 그것의 하나로서는, 두 가지 입장으로 우리가 보아야 된다 그게 이제, 본문과 적문의 두 가지 입장으로 봐야 된다.
부처님을 두고 이야기를 한다면은 부처님은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 그건 너무나도 뚜렷한 사실입니다. 이건 뭐 불자가 아니라도 잘 아는, 그야말로 모든 인류의 상식에 속하는 그런 대성자(大聖者)의 출현이라고 이렇게 볼 수가 있죠. 그런데 그렇게만, 역사적인 사실만 가지고 보는 게 그게 제대로 본 것이냐. 그것은 아니라는 거죠. 보다 더 다른 차원의 부처님이 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우선, 우리가 ‘마음, 마음’ 하지요. 보통 불교에서 마음 이야기하는데 마음에도 또 본문의 입장과 적문의 입장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지금 뭐 날씨가 어떻다, 오늘은 무슨 날이다, 현재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 따라서 또 바깥 어떤 현상에 따라서 우리 마음이 그것을 분별하는 것은 하나의 자취입니다, 마음의 자취라고 할 수가 있어요. 본문과 적문의 관계에다 이야기하면 적문에 해당됩니다. 하나의 자취이거든요. 예를 들어서 붉은 꽃을 보면 붉은 걸 알고 푸른 꽃 보면 푸른 걸 알고 그 현상 따라서 쫓아가는 그 마음의 작용은 하나의 자취야, 흔적이라고요.
그런데 그 상황 따라서 쫓아가는 그런 순간, 순간 다른 마음의 작용, 그 뿌리에는 정말 영원히 변치 아니하는, 그리고 또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또 언제쯤이면 없어질지도 모를, 그런 아주 장구한 시간을 두고 본래 있었던 우리의 참마음이 있어요, 또. 그 참마음이 있어가지고 그 참마음 자리에서, 변하지 않는 참마음 자리에서 우리의 생각이라고 하는 거, 순간 순간 변하는 그 생각의 작용이 계속 거기서 피어오르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 묘한 것이, 그렇게 퍼내도, 우리가 잠에서 깨어가지고 오늘 이 시간 이 순간까지 얼마나 많은 마음 작용을 했습니까. 잠에서 깨어나서부터 뭐 활동하고 무슨 뭐 옷 갈아입고 세수하고 오늘 할 일 생각하고 또 아이들 학교 보내는 문제, 무슨 사업 문제, 집안 어디서 벌어지는 문제, 또 뉴스에서 그냥 일어나는 온갖 상황들 전부 보도에, 아침만 하더라도, 아침 한 시간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분별을 합니까. 이 시간이 될 때까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분별을 그렇게 하고 오느냐, 이거는 이제 그야말로 일찰라에 몇 번씩 변하는 능력을 가진, 변화할 수 있는 그런 순발력을 가진 게 우리 마음이라. 일찰라라면 백 이십 분의 일초라고 그래요, 불교에서는 그렇게 짧은 순간까지도 이야기하거든요. 그렇게 순발력 있다고 우리 마음은.
그렇게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면서도 또 그런 작용을 나타내는 본래의 우리 마음 자리가 있어. 그런 관계를 본문과 적문이다, 우리 마음 하나만 두고 보더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근본 마음자리, 일심 자리는 본문에 해당되고, 근본마음에 해당되고, 어떤 현상을 따라서 우리가 쫓아가고 분별하고 이해하는 의식활동을 적문이다, 흔적, 또는 자취, 그런 세계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또 옆의 꽃한송이만 두고 보더라도 현재 이런 꽃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이것은 하나의 흔적이고 자취예요. 그러나 이 꽃이 이렇게 우리 눈에 이런 모습으로 비치기까지는 보이지 아니한 어떤 근본이 있어. 그걸 진리라 그러고 그걸 법이라 그래요, 불교에서는. 그걸 법이라 그래. 그걸 수 있는 원리. 뭐 씨가 내포하고 있는 뭐가 됐든지. 아니면은 씨 뿐만이 아니예요. 씨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다른 모든 여러 가지 보이지 아니하는 많은 조건들, 이것이 말하자면 본문에 해당되고 밖으로 이렇게 나타난 것은 적문에 해당돼.
또 보이지 않는 많은 조건들이 같은 조건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무언가 조그마한 차이로, 보십시오, 꽃은 붉고 그 잎은 푸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줄기는 단단하구요. 그 뿌리에서 받아들이고 뭐 태양이라든지 수분이라든지 거름이라든지 온갖 그런 상당한 많은 조건들이 전부 똑같은데 무엇인가 어느 뭔가 다른 조건이 있어 가지고, 그 사이에 다른 조건이 개재돼 가지고 붉은 꽃, 푸른 잎, 딱딱한 줄기, 그런 어떤 다른 변화를 보여준다고요. 그런 것들은 전부 흔적입니다, 자취예요.
그런데 보이지 아니하는 근본 자리가 또 있어. 근본 자리가 있어가지고 붉어야 할 자리에는 붉게 나타나고 푸르러야 할 자리에는 푸르게 나타나고. 연해야 할 자리에는 연하게 나타나고 단단해야 할 자리에는 단단하게 나타나고, 그렇습니다. 또 김씨의 얼굴은 김씨의 얼굴대로, 이씨는 얼굴은 이씨의 모습대로, 남자는 남자의 모습대로, 여자는 여자의 모습대로. 전~부 고 상황에 맞게 그렇게, 그러면서 다르게, 그렇게 나타날 수 있는 거죠. 그건 이제 자취입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그럴 수 있도록 하는 근본 내면의 세계가 있어, 원리의 세계가 있다고요. 우선 부처님이 그렇고 우리들 자신이 그렇고 한 송이 꽃이 그렇고 모든 존재가 전부 본문의 입장과 적문의 입장, 그 양면을 동시에 우리가 이해하고 있어야 무엇을 바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 한 쪽만 이해하면 안돼요.
그래서 법화경에서 말하는 소위 깨달음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을,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그 세상 삼라만상을 모두가 여실하게,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아니한 그 양면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어야 된다. 그걸 이제 드러내는 거죠. 부처님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부처님은 이러이러한 역사상을 지녔으면서 또 그것은 너무나 우리에게 영원한 어떤 근원적인 생명, 어떤 진리적인 생명, 또 생명인 그 진리, 거기서부터 발현된 것이다. 거기서부터 어떤 역사적인 현실로.
또 우리가 기도을 하면 감응할 수 있는 것도 그것도 또 하나의 흔적이예요.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면 거기에 어떤 그 감응이 나타나는 것 그것도 하나의 흔적이거든요. 그것도 하나의 자취라고요.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 그런 상황으로 나타나는 거요. 그래서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이라고 불교의 아주 유명한 염불구절인데 천강에 물이 있으면 천강에 다 달이 비춘다. 컵에는 컵에 맞는 알맞은 달이 비추고 흐르는 강물에는 흐르는 강물대로 그 그림자가 깨어지면서도 계속 그 자리에 이렇게 달의 그림자가 보이고 못에는 못대로, 바다에는 바다대로, 그런 어떤 흔적이 나타나는 거죠. 그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근원자리가 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그랬죠. 우주에 꽉 차있는 어떤 전파와 어떤 수신기를 갖다 놓으면 거기에 그림과 소리가 바로, 조건이 맞으면 바로 거기에 그림도 보이고 소리도 나타나는 것과 같다. 뭐든지 다 그렇습니다. 모든 존재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꽃이 요렇게 요런 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이 맞으니까 탁 이렇게 꽃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잎으로 나타날 조건이 맞으면 잎으로 나타나고. 줄기로 나타날 조건이 맞으면 줄기로 나타나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전부 그 장소에 그 입장에 알맞게 그렇게 나타나는 그런 입장이 있고 그것만 보면 안된다는 거예요, 부처님을. 부처님의 본문의 내용이 그거예요. 밖으로 나타난 그것만 가지고는 함부로 평가하지 마라. 그랬을 때 본래의 그, 구원실성(久遠實成)이라는 말도 쓰는데, 영원한 부처님이 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걸 여기서 이제, 그건 잘 안보이는 거니까 이해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여기 14품, 후 14품 종지용출품부터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결국은 보이는 부처님이 있을 수 있었다 라고 하는 그 문제를 지금 이해시킬려고 하는 게 돼 놔서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고 볼 수가 있고 또 상당히, 뭐라고 할까 당혹스러운 이야기들도 있고 그래서 여기는 이해를 못하겠다 하는, 사바 세계 사람들이 이해를 잘 못하는 그런 표현들이 있어요.
우리는 안 보이는 건 참 이해하기 어렵잖아요. 보이는 건 잘 압니다, 보이는 건. 역사적인 석가모니 누구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석가모니의 본신, 본래의 몸, 본래의 생명력은 그건 이해 못하고, 쉽게 이해 못한다고요. 또 우리도 밖으로 나타나는 외면은 잘 봐요. 잘 알아요. 아, 그 사람 어떻다 어떻다 하지만은 그렇지만 그럴 수 있도록 하는 저변의 우리의 마음 자리는 쉽게 이해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들 자신도 잘 이해 못하고 남은 더 이해 못하죠.
그러니까 그 양면을 아주 동시에 정확하게 안다고 하는 거, 이게 이제 지혜고 불교적인 안목이고 또 세상살이에도 그런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런 눈을 갖춰야 그게 제대로 눈을 갖춘 거라고 할 수 있죠. 뭐 어떤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것만 가지고 단순하게 그렇게 평가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뭐 여기 땅이 갈라지고 거기서부터 많은 보살이 올라온다. 그런데 그 많은 보살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보살들이냐. 보니까 너무 얼굴도 잘났고 수행력도 깊어 보이는데 저 많은 이들을 부처님이 언제 교화했단 말이냐. 이런 이야기가 돼요. 그런 거를 부처님이 있다가 그래요. ‘저 사람들은 내가 아주 오랜 세월 전부터 내가 교화한 사람들이다’ 그래요.
아니 그러니까 더 모르는 거야. 아니 내가 알기로는 나보다도 몇 살 더 많고, 부처님 제자, 가섭존자 같은 이들은 석가모니가 자기보다 열 살이나 밑이고 말이지 달리 표현하면 다 안다 이거야. 태어나서 태자로 좀 있다가 출가해서 육년 고행하고 그리고 성도해가지고 그때부터 우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지 않았느냐. 우리가 알고 있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당신은 그 석불인데 언제 그 많은 보살들을 어디서 우리 모르게 교화했단 말이냐. 당신이 … 성불하고부터, 아니 출가하고부터 지금까지 뭐 한 시간도 우리의 눈을 피해서 우리 모르게 행동한 적이 없고 우리 모르게 어디 중생 교화한 적이 없는데 언제 저 사람들을 교화했느냐, 이런다고요, 여기에.
그러니까 이제 부처님이 있다가 내가 성불한 것이 내가 태자로 있다가 육년 고행하고 그 때 보리수 아래서, 저기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성불한 걸로 너희들 그렇게 알지? 아니야. 사실에 있어서는 사실에는 유구한 세월 이전에 내가 이미 성불했어. 사실에 있어서는 저 많은 보살이 그 때 벌써 교화했던 보살들이야.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자기 자신 이야기를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모든 사람들도 예를 들어서 40 먹은 사람이 있다손 치면은 40년 전부터 그것은 네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너의 본래의 생명은 먼 세월 이전부터 있었어. 그러나 40년 전에 어떤 인연에 의해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이 돼서 그 때부터 그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이야, 사실은.
또 그 이면에 어떤 세상에서 누구의 이름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지 또 모르지 않습니까. 불교에 익숙한 분들은 그런 거 다 알지 않습니까. 전생에 우리가 어떻게 살았었다. 기억을 못해서 그렇지 어쨌건 수많은 세월을 살아올 때 마다, 몸을 받을 때 마다 내가 지어 놓은 그 인연에 알맞는 그런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렇게 어떤 흔적을 보였던 거지. 그래 본래 우리의 참생명은 영원 이전부터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것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정말 우리의 참생명은 어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게 아니라 게 육십 먹었다고 해서 육십 먹은 게 결코 아니고 무량 아승지 나이를 가지고 있는 게 우리의 참생명이다. 수 억 만년의 나이를 가지고 있는 게 우리의 참생명이라. 그렇게 이해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이 되야 되거든요, 불교는. 결국은 그게 이해가 돼야 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이해가 되어야 불교를 조금 이해를 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어려운 문제들을 여기서 뭐라고 할까요, 하나의 이야기 형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땅이 찢어져 가지고 그 많은 보살들이 땅에서 솟아 올랐다면 지구가 여태 남아 있겠어요. 삼천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 지구가 그냥 남아 있을 리가 없죠.
그러나 여기서 된 그 이야기는 하나의 상징적으로, 본래 갖추고 있는 우리의 본래의 생명, 그것은 부처로서도 또는 보살로서도 또는 보통 사람으로서도 얼마든지 그런 흔적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고 그 흔적을 나타낼 때는 왜 그 모습이냐. 왜 어떤 이는 부처의 모습으로 왜 어떤 이는 보살의 모습으로 왜 어떤 이는 우리같이 못난 모습으로 이렇게 나타나느냐. 그거는 그런 조건이 그 순간에 맞춰졌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나는 거지. 조건이. 그랬을 때 조건이 됐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갈고 닦고 수행을 많이 하고 복을 많이 짓고 또 이렇게 경전을 많이 공부해서 지혜를, 자꾸 경전공부 하는 것은 지혜가 자꾸 밝아지는 거죠, 지혜가 자꾸 이렇게 연마가 되면은 다음 생에는 아니면 다음 생까지 안 가고도 나이가 들어서도 달라질 수가 있는 거요. 머리도 달라질 수가 있고. 다음 생에는 상당히 다른 조건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조건을 우리가 그만치 맞춰 놨으니까. 그만치 좋은 조건이 되도록 준비를 해놨기 때문에 그런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이렇게 차별한 것이 전부 우리가 근본은 똑같은데 밖으로 나타나는 흔적을 남기는데, 자취를 남기는데 자취를 남길려면 그만한 조건을 만들어줘야 되거든요. 조건이 만들어질려면은, 만들어진대로, 조건을 제공한 대로, 다시 말해서 흙으로 주먹만하면 그것 가지고 도자기나 불상을 만들어도 주먹만한 불상밖에 안돼요. 한아름쯤 되면 한 바구니 쯤 되면 흙을 가지고 두드려가지고 불상을 만들면 제법 크다고요. 그런데 한 트럭을 가지고 예를 들어서 불상을 만들었다, 흙 한 트럭을 이겨 가지고 불상을 만들어. 그러면 상당히 불상이 클거요. 흔적이란 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현재 이런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요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내가 조건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 다음엔 좀더 달라야 된다 싶으면 내가 하고 싶은. 예를 들어서 내가 피아노를 아주 잘 치고 싶은데 내생에는 좀 잘 치면 좋겠다 하면 지금부터 요런 이치를 알 때부터 조건을 그렇게 맞춰 줘야 돼. 조건을 그런 방향으로 맞춰주면은 그 조건에 맞게 태어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지금 불상이 흙으로 만들었는데 다음에는 내가 동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싶으면은 동을 준비하는 거요. 구리를 준비해서 만들면은 구리 불상이 나온다고요. 흙을 준비해서 만들면 흙 불상이 나오고. 흙도 구어 놓으면 도자기 불상이 되고 그냥 해 놓으면 흙 덩어리 불상이 되고, 그 조건에 맞춘대로 그렇게 되도록 돼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게 다 그렇죠. 곡식을 키워봐도 그렇고 다른 식물을 키워봐도 그렇고.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진리의 세계가,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있다, 하는 그런 내용의 핵심이 바로 종지용출품 그 다음에 여래수량품. 여래수량품에 가면 그런 이야기를 아주 본격적으로 이제 하게 됩니다.
그동안 땅이 갈라지면서 맨 처음 이야기가 타방국토에서 온 팔 항하사나 되는 그런 보살들이 우리가 법화경을, 또 우리가 불교를 포교하는 그런 일에 노력하겠습니다 하니까 너희, 그만 둬라. 너희가 아니라도 내가 거느리고 있는 이 사바세계에 어마어마한 보살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있어가지고선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거야, 이렇게 하자마자, 그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땅이 뒤흔들리면서 땅이 갈라지죠, 갈라지면서 어마어마한 많은 보살들이 이제 올라왔습니다.
그러니까 미륵보살을 위시해서 그 동안 부처님 슬하에서 법문 듣고 있던 많은 보살들이 그 광경을 보고 어떻게 했어요? 뭐 기절해 자빠지거나 아니면 상당한 의심을 갖거나. 도대체 저 사람들이 어디서 있다가 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땅에서 솟아 올랐단 말이냐 하는 그런 의심을 하는 대목입니다. 여기가. 차토보살의심(此土菩薩疑心)이라 해 가지고.
二. 疑念序 1. 此土菩薩疑 ⑴ 長行疑念
26. 爾時彌勒菩薩과 及八千恒河沙諸菩薩衆이 皆作是念하대 이시미륵보살 급팔천항하사제보살중 개작시념
이시(爾時)에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그리고 팔천항하사(八千恒河沙) 여러 보살 대중들(諸菩薩衆)이 개작시념(皆作是念)하대, 다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건 이제 의심하는 생각이라, 의념이라 그래요. 의심하는 생각을 냈다. 궁금해 하는 거죠.
27.
我等이 從昔已來로 不見不聞如是大菩薩摩訶薩衆이 從地涌出하사 아등 종석이래 불견불문여시대보살마하살중 종지용출 住世尊前하야 合掌供養하고 問訊如來라 하더니 주세존전 합장공양 문신여래
아등(我等)이 종석이래(從昔已來)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옴으로서 불견불문(不見不聞), 이런 사실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뭔고 하니. 여시대보살(如是大菩薩), 금방 땅에서 솟아 올라온 이 많은 큰 보살 마하살(摩訶薩) 대중들이, 종지용출(從地涌出) 땅으로부터 용출해서,
주세존전(住世尊前)하야, 세존 앞에 머물러 가지고서, 합장공양(合掌供養) 하고서, 합장공양하고서, 문신여래(問訊如來), 여래에게 문신한다, 안부를 묻는다, 그래요. 안부를 묻는 이런 일들은,
내가 그동안 부처님을 쭉 지켜봤지만은, 심지어 태자 때도 지켜봤구요, 출가해서 육년고행할 때도 어떤 이들은 지켜봤구요, 또 육년고행하고 나서 성도하고 나서 지금까지 사십여년동안 교화활동을 펴는데 하루도 떨어져 있은 적이 없이 당신을 지켜봤는데 아 어디서 이런 난데 없는 이런 보살들이 이렇게 와 가지고 부처님께 안부를 묻는 것은 나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라고 하더니,
28. 時彌勒菩薩摩訶薩이 知八千恒河沙諸菩薩等의 心之所念하며 시미륵보살마하살 지팔천항하사 제보살등 심지소념 幷欲自決所疑하니라 병욕자결소의
이시에 미륵보살(時彌勒菩薩)이 지팔천항하사제보살등(知八千恒河沙諸菩薩等)이, 그 전까지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거여. 소병소뇌(小病小惱)하십니까 하고 안부를 물었죠, 이 땅에서 올라온 보살들이. 그리고 또 대표 보살들이 있었죠. 네 보살.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상행(上行), 무변행(無邊行), 정행(淨行), 안립행(安立行)이라고 하는 그 사대보살이 그 땅에서 올라온 보살중에서는 대표자들이었죠. 이런 이들이 와서 말하자면 안부를 묻고 그랬었습니다.
그래 이시에 미륵보살마하살이, 팔천항하사 모든 보살들의(八千恒河沙諸菩薩等), 마음에 의심하는 바, 마음에 생각하는 바(心之所念)를 알고(知), 또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더라도 이 궁금증을 풀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것을 알고 병욕자결소의(幷欲自決所疑), 스스로 의심하는 바를 해결 하고자 한다고 하는 사실을 미륵보살이 아는 거라. 미륵보살, 자기도 의심스럽지마는 또 자기를 따르고 있는 그 팔천 항하사나 되는 그런 많은 보살들이 전부 같이 의심하고 있으니, 궁금해 하고 있으니, 그러니 할 수 없이 미륵보살이 늘 선두가 돼서 대표가 돼서 부처님께 여쭙게 되죠. 그래서,
⑵ 偈頌正問 合掌向佛하사 以偈問曰 합장향불 이게문왈
합장향불(合掌向佛)하사,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해서, 이게문왈(以偈問曰) 게송으로서, 여긴 이제 그냥 묻는 게 아니고 시형식을 통해서 아주 정중하게 그렇게 묻습니다. 미륵보살을 저 앞에 부처님이 광명을 놓아서 온 세계가 환히 눈에 들어올 때도 그 때도 대중들이 궁금해하고 그 궁금증을 미륵보살이 다 읽고 그리고나서 미륵보살이 또 부처님께 여쭙게 되는 그런 과정을 밟았어요. 저 앞에서. 여기서도 또 역시 같은 형식입니다.
① 問何所來
29. 無量千萬億 大衆諸菩薩은
무량천만억 대중제보살 昔所未曾見이라 願兩足尊說하소서 석소미증견 원양족존설 是從何所來며 以何因緣集이닛고 시종하소래 이하인연집
무량천만억(無量千萬億) 대중제보살(大衆諸菩薩)은, 한량없는 천만억 대중 여러 보살들은 석소미증견(昔所未曾見)이라, 옛날에 일찌기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원양족존설(願兩足尊說)하소서. 원컨대 양족존께서는 좀 설명 좀 해 주십시오. 양족존은 부처님이죠. 부처님께서 설명 좀 해 주십시오. 시종하소래(是從何所來)며, 어느 곳으로부터 이 사람들이 왔느냐. 도대체. 땅 속에서 왔다고는 했지만 도대체 진짜 어디서 왔는지. 또 이하인연집(以何因緣集)인가. 무슨 인연으로 여기 이렇게 모였느냐 이거야. 이 많은 보살들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모였느냐. 그런데 이 사람들은 보니까.
② 何因緣來 30. 巨身大神通이며 智慧叵思議라 거신대신통 지혜파사의 其志念堅固하고 有大忍辱力하며 기지념견고 유대인욕력 衆生所樂見이라 爲從何所來닛고 중생소락견 위종하소래
거신(巨身)이야, 몸이 커. 그리고 대신통(大神通)을 가졌어. 신통력도 대단하거든. 지혜파사의(智慧叵思議), 지혜가 불가사의다. 이 파(叵) 자는 불가 파 자예요. 불가, 아닐 不 자 옳을 可 자, 한자 두 자를 이 파 자가 다 가지고 있어요. 합일 합(合) 자라는 그런 글자도 있고. 여기 불가 파 자도 있고. 한자로 쓰다 쓰다가 어떻게 쓸 수 없어서 아예 그렇게 불가 파 라고 해서 불가사의, 그걸 풀면 불가사의가 되죠. 지혜는 불가사의다, 이 말이여.
기지념견고(其志念堅固)하고, 그 뜻과 생각은 아주 견고해. 아주 심지가 강하고 아주 꿋꿋한 그런 사람들이라 이거야. 그리고 유대인욕력(有大忍辱力)이야. 큰 인욕의 힘을 가졌어. 어떤 어려움도 어떤 고난도 다 참고 견딜 수 있는 그런 능력도 이분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더라.
중생소락견(衆生所樂見)이라. 그리고 너무나 이분들은 잘났어.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사람들마다 전부 보고 즐거워 해. 보기를 좋아하고. 그런데 위종하소래(爲從何所來)잇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어디로부터 여기에 왔습니까 라고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또 부연해서 계속 이야기 하죠. 그 상황을 묻는 말로서 그 상황을 좀 더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③ 敍其數量 31. 一一諸菩薩의 所將諸眷屬이 일일제보살 소장제권속 其數無有量하대 如恒河沙等하며 기수무유량 여항하사등
일일제보살(一一諸菩薩)의 소장제권속(所將諸眷屬)이, 그 많은 보살들이 있습니다. 낱낱 보살들이 거느린 바 여러 권속, 그 보살들이 또 많은 권속을 거느렸다고 그랬거든요. 거느린 바 권속들이. 기수무유량(其數無有量)하대, 그 숫자가 한량없어. 여항하사등(如恒河沙等)하며,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이 많은 권속들을 또 거느렸더라. 보살들이 하나하나가 또 그렇게 많은 보살을 또 역시 거느렸더라.
32. 或有大菩薩은 將六萬恒沙하대 혹유대보살 장육만항사 如是諸大衆이 一心求佛道하며 여시제대중 일심구불도 是諸大師等 六萬恒河沙가 시제대사등 육만항하사 俱來供養佛하고 及護持是經하며 구래공양불 급호지시경
혹유대보살(或有大菩薩)은, 어떤 큰 보살은 장육만항하사(將六萬恒沙)하대, 육만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많은 사람을 거느렸다, 그랬어요.
자 이쯤 해놓고. 여기에 이렇게 많고 많은 숫자, 여기 본래 ??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얼마죠. 육만 항하사 보살들이 솟아 올라왔어요. 그런데 그 육만 항하사 보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들 권속을 거느리고 있어. 제일 많이 거느린 사람은 그 한 사람이 육만 항하사 권속을 거느리고 있어. 그러니까 그 사람은 대장이야, 대장인데 그 밑에 따르는 제자들, 따르는 권속들이 또 육만 항하사 보살이다, 이렇게까지 해 놨어요. 그러면 이 한 사람만 하더라도 예를 들어서 육만 항하사 보살은 놔 두고 한 사람에게 따르는 사람만 하더라도 역시 또 육만 항하사 보살이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라고요.
그건 뭘 뜻하는가 하면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들. 모든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 그리고 부처님 당시 때 사람만이 아니예요. 부처님이 태어나시기 이전에 스쳐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 또 부처님 이후 오늘 이 순간까지, 앞으로 수많은 세월 동안 올 우리들 자손, 자손의 자손, 자손의 자손, 자손의 자손,,, 해서 죽 끝도 없이 이 지구상에 명멸해 갈 그 많은 사람들, 전부 이 말 속에 다 포함됩니다. 그래도 여기 표현한 숫자가 더 많아요. 경에서 표현한 숫자가 사실은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많은 사람들이 말하자면 전부가 본래의 보살이다. 본문 보살, 적문 보살 그랬죠. 본화(本化)보살, 적화(迹化)보살 그런 말도 했는데 본래 교화한 보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본래 마음이야. 본래 생명이고. 그런 뜻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맞아 떨어지지 안 그러면 도저히 어디 맞아 떨어질 데가 없어요.
육만 항하사를 거느렸으되,
如是諸大衆이 一心求佛道하며,
이와 같은 대중이 일심으로 불도를 구하며, 전부 불제자라 그래요, 불교는. 어떤 사람이고간에 다 불제자라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시제대사등(是諸大師等) 육만항하사(六萬恒河沙), 이 큰 스승, 그러니까 대장인 보살인 대제자인 보살을 여기서 대사등 육만항하사가,
구래공양불(俱來供養佛), 함께 와서 부처님께 공양하고, 개호지시경(皆護持是經), 전부 이 경전을 보호하고 지킨다, 가진다. 이 법화경,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이것을 모두 보호하고 모두 가진다.
33. 將五萬恒沙하대 其數過於是하며 장오만항사 기수과어시 四萬及三萬과 二萬至一萬이며 사만급삼만 이만지일만 一千一百等으로 乃至一恒沙하며 일천일백등 내지일항사 半及三四分과 億萬分之一이며 반급삼사분 억만분지일
또 장오만항사(將五萬恒沙), 또 어떤 보살은, 저 앞에 어떤 사람은 육만 항하사 권속을 거느렸기도 하고 또 혹 어떤 사람은, 똑같이 권속을 거느린 사람이 있나요. 예를 들어서 한 집안에도 자식이 있는 사람도 있고, 하나 뿐인 사람도 있고 둘인 사람, 셋인 사람, 넷인 사람,, 뭐 요즘도 보니까 다섯 명 자식을 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다섯 명, 일곱 명, 뭐 얼마든지 그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보면은 어떤 보살은 오만 항하사를 거느렸으되,
기수과어시(其數過於是)하며, 이말은 무슨 말인가, 그 숫자가 이것보다 지나간다. 이 뭔 말인고 하니 오만을 거느린 보살들은 앞에 육만을 거느린 보살들보다도 더 많다 이거야. 예를 들어서 육만을 거느린 보살들은 백 명이라면은 오만을 거느린 보살들은 이백명도 되고 삼백명도 된다, 이 말입니다. 거느린 사람이 적을 수록 그 팀은 더 많아. 팀 숫자는 더 많아. 이해하시겠죠. 거느린 사람이 많으면은 그 팀은 아무래도 좀 적고. 많이 거느린 팀은 적고 적게 거느린 팀은 훨씬 많아. 그래서 결국은 숫자가 얼만지 알 수가 없는 거죠.
사만(四萬), 그리고 삼만(三萬), 또 이만(二萬), 일만(一萬), 일천(一千), 일백(一百) 등으로 내지 일항하사(乃至一恒沙), 그리고 반 항하사, 그리고 삼분의 일 항하사, 사분의 일 항하사, 그리고 억만 분의 일 항하사, 또, 항하사며,
34. 千萬那由他인 萬億諸弟子와 천만나유타 만억제제자 乃至於半億이 其數復過上하며 내지어반억 기수부과상 百萬至一萬과 一千及一百과 백만지일만 일천급일백 五十與一十으로 乃至三二一하며 오십여일십 내지삼이일
그리고 천만나유타(千萬那由他)인 만억제제자(萬億諸弟子)와, 요건 요 앞의 억만분의 일까지는 ‘항하사’라고 하는 게 붙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항하사라는 말이 없고 실제적인 숫자가 천도 되고 만도 되는 그런 나유타인 만억 제 제자들. 이런 제자들을 거느린 그런 보살도 있었고,
내지(乃至) 반억(半億), 오천명 쯤 거느리는 그런 보살들도 있었고. 이런 이들이 기수부과상(其數復過上)이라. 그 숫자가 다시 또 앞에, 위에 것보다는 지나간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처럼 오만 항하사를 거느린 보살은 육만 항하사 거느린 보살팀보다 훨씬 많고 또 사만 항하사 거느린 보살은 오만 항하사 거느린 보살들이 만팀, 백만팀이라 하더라도 사만 항하사 보살 거느린 보살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고. 삼만은 더 많고, 이만은 더 많고, 일만은 더 많고 숫자가 적을 수록 훨씬 앞의 사람들 팀보다 더 많다. 이런 말이여.
그래서 백만, 일만, 일천, 일백, 백명 거느린 사람도 있고, 오십 명 거느린 사람. 또 일십, 십명 거느린 사람. 내지 세 사람 거느린 사람, 두 사람 거느린 사람. 한 사람 거느린 사람. 그저 딱 한 사람, 요새 자식 하나 두듯이 딱 한 사람 거느리고 자기가 대표가 돼 가지고 쫄랑 쫄랑 이렇게 나타나는 사람도 있다 이거여. 그런데 그 뿐만 아니라
35. 單己無眷屬으로 樂於獨處者가 단기무권속 낙어독처자 俱來至佛所하대 其數轉過上하며 구래지불소 기수전과상
단기무권속(單己無眷屬)이야, 또 어떤 사람은 저 혼자야. 저 혼자 대표가 돼 가지고 나타난 사람도 있더라 이거야. 혼자 권속이 없으니까 낙어독처(樂於獨處)여, 혼자 대표 노릇도 다 하고 또 와서 부처님 앞에 대표로 인사도 하고. 또 있을 때는 저 혼자 있고 말야. 권속이 없으니 자기 혼자, 독처(獨處), 홀로 처해 있기를 좋아하는 자. 뭐 어쨌든 어떤 경우의 보살들이라 하더라도 다 와서
구래지불소(俱來至佛所), 함께 와서 부처님 처소에 이르되, 기수전과상(其數轉過上)이라, 그 숫자가 점점히 더욱 더, 앞의 것 보다 상(上), 위의 것 보다 지나가더라. 이게 그 얘기죠. 그러니까 세 사람 거느린 사람보다도 두 사람 거느린 팀들이 훨씬 많고, 두 사람 거느린 팀 보다는 한 사람 거느린 팀이 훨씬 많고, 한 사람 거느린 팀보다는 저 혼자 온 사람이 또 숫자가 훨씬 더 많다. 이러한 표현입니다.
36. 如是諸大衆을 若人行籌數하대 여시제대중 약인행주수 過於恒沙劫토록 猶不能盡知하며 과어항사겁 유불능진지
그래서 이와 같은 제대중(如是諸大衆)을 약인행주수(若人行籌數)하대, 이와 같은 많은 사람들은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주수(籌數)를 행하대, 주수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주판’ 할 때 쓰는 말이죠. 그 숫자를 헤아린다 이 말이여, 헤아릴 주(籌) 자. 그 숫자를 한번 헤아려 본다 이거여. 그 숫자를 헤아리면 도대체 얼마나 되겠어요.
과어항사겁(過於恒沙劫)토록,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세월이 지나도록 유불능진지(猶不能盡知), 오히려 능히 다 헤아려서 알지를 못해.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말도 못하지. 이거는. 알 수가 없는 거죠.
④ 問其師與法
37. 是諸大威德 精進菩薩衆을 시제대위덕 정진보살중 誰爲其說法하야 敎化而成就하며 수위기설법 교화이성취 從誰初發心하고 稱揚何佛法이며 종수초발심 칭양하불법 受持行誰經하고 修習何佛道닛고 수지행수경 수습하불도
시제대위덕(是諸大威德) 정진보살중(精進菩薩衆)을, 이 모든 큰 위덕을 가진, 그리고 정진을 열심히 하는 보살 대중들을,
수위기설법(誰爲其說法)하며, 누가 그들을 위해서 설법했으며 교화해서 성취했느냐(敎化而成就) 이 말이예요. 이게 질문이거든요. 누가 그 사람들을 위해서 설법했고 또 누가 그 사람들을 교화해가지고 이렇게까지 사람을 만들어 놓았냐. 이렇게 아주 훌륭한 보살로 만들어 놨느냐.
종수초발심(從誰初發心)하고 누구로부터, 종수(從誰)는, 누구 수(誰) 자 거든요. 누구에게서 처음 발심했느냐. 누구로부터 발심했냐. 그게 다 이제 동기가 있거든요. 우리가 불교를 좋아하고 절에 가게 된 것, 아, 어떤 친구 따라갔다가 내 그 길로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있다고요. 종수초발심, 누구로부터 처음 발심했고, 또,
칭양하불법(稱揚何佛法), 그 사람은 뭐 관음기도가 좋다 하더냐, 지장기도가 좋다 하더냐, 어떤 불법을 따라 이 사람들을 칭양, 일컬어서 드날렸느냐. 또 수지행수경(受持行誰經)하고, 또 이 사람들은 관음경을 좋아하느냐, 반야심경 좋아하느냐, 금강경 좋아하느냐, 법화경 좋아하느냐, 화엄경 좋아하느냐, 수경(誰經),어떤 경전을 수지하고 또 어떤 경전을 수지하면서 그것을 실천하느냐.
수습하불도(修習何佛道), 어떤 불도를, 우리는 석가모니한테서 요런 요런 걸 배웠는데,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어떤 부처님께, 어떤 불법을, 어떤 경전을 그리고 어떤 불도를. 뭐 참선하느냐, 무슨 경 배우느냐, 무슨 염불하느냐. 어떤 불도를 도대체 닦고 있느냐. 너무너무 궁금한 거야. 보니까 전부 부처님 제자고, 부처님 제자 중에서도 참으로 훌륭하고 그런데, 그런데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익힌, 어떻게 수행했던 사람들이냐. 그런게 궁금할 수 밖에 없죠.
예를 들어 초파일 기념 행사같은 거 할 때 체육관에서 막 사찰마다 별별 팀들이 다 나타나 가지고 부처님 오신 날 전날에 축하 행사를 하는데 어떤 데서 보면은 말하자면 질서정연하고 어디서 먹물 옷이 그렇게 많이 있었는지 먹물 옷을 착 입혀가지고 질서정연하게 그렇게 착 줄서 가지고 그렇게 등장하는 그런 팀들도 있다고요. 보니 전부 눈이 휘둥그레해. 야, 저건 어느 절에서 왔는가. 누구에게 훈련 받았는가. 저 사람들은 무슨 경전으로 공부하는가. 기도는 뭘 하는가. 다 궁금해 할 거 아녜요. 그런 행사를 상상하면은 충분히 이해가 가요. 그런 식이라, 말하자면.
여기에 지금 많은 보살이, 지상에 보살이 본래 있었고 부처님 제자들 팀들이 콱 있었어요. 그리고 또 석가모니 분신 부처님 하고 그 분신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또 있었고. 그 다음에 다보불을 따라 오는 사람들이 또 있었어요. 그러니까 크게 나누면 네 팀이라. 땅에서 금방 솟아오른 보살들도 있고.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로 나열이 돼 있는 거죠. 그런데 지상에 있던 보살들이, 미륵보살 같은 이들, 뭐 가섭 존자, 아란 존자, 사리불, 수보리, 이런 이들은 궁금해 죽을 지경인 거야. 이런 상황을 보고.
⑤ 結請 (1.結歎 2.請答來處 3.請答來緣 4.大會同請 5.請答師主等) 38. 如是諸菩薩의 神通大智力으로 여시제보살 신통대지력 四方地震裂하고 皆從中涌出하니 사방지진열 개종중용출
여시제보살(如是諸菩薩)의, 이와 같은 모든 보살의, 신통대지력(神通大智力), 신통과 큰 지혜의 힘으로
사방지진열(四方地震裂)하고, 사방에서 땅이 진열, 진동을 하고 쪼개진다 이거야. 땅이 그냥 사정없이 진동을 하면서 땅이 갈라지고,
개종중용출(皆從中涌出)하니, 그 가운데, 땅 가운데로부터, 용출했더라, 막 솟아 올랐더라. 큰 유전 개발한 게 문제가 아니예요. 유전 개발하면 땅에서 석유가 막 솟아 오르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이건 뭐 어마어마한 그런 상황인데 결국은 뭐냐. 현재 존재하고 미래에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모든 이 땅 이 터의 우리들이라, 전부. 이 땅 이 터 우리들을 보고 하는 소리예요. 바로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또 할아버지… 또 우리 손자의 손자, 손자의 손자… 죽 있는 그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땅에서 나왔죠. 그런데 보살이라고 하는 칭호를 했기 때문에 우리보다는 좀 차원을 달리 한, 허공 중에서 나왔다. 땅 밑 허공 중에서 나왔다, 최소한도 평등의 도리, 공(空) 도리 또는 불성의 도리를 최소한도 알고 있는 사람. 이런 의미가 그 속에는 약간 가미가 돼 있어요.
39. 世尊我昔來로 未曾見是事라 세존아석래 미증견시사 願說其所從 國土之名號하소서 원설기소종 국토지명호
세존아석래(世尊我昔來)로 미증견시사(未曾見是事)라, 세존이시여, 우리는 옛날부터 일찌기 이런 일은 처음 봤습니다. 이런 일은 본 적이 없습니다.
원설기소종(願說其所從) 국토지명호(國土之名號)하소서. 원컨대 그들이 좇아 온 바 국토의 이름을 좀 이야기해 주십시오. 도대체 어느 국토에서 왔는지. 우리가 지구상이라고 하면은 구석구석 다 지명까지 다 아는데 이 사람들은 어디서 도대체 어디 있던 사람들이지 좀 이야기 해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이 존재를, 이 국토상에,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 존재를 부각시키는 일입니다, 이게.
40. 我常遊諸國하대 未曾見是衆하며 아상유제국 미증견시중 我於此衆中에 乃不識一人이라 아어차중중 내불식일인 忽然從地出하니 願說其因緣하소서 홀연종지출 원설기인연
아상유제국(我常遊諸國)하대, 우리는 항상 여러 나라에 유행을 하되, 미증견시중(未曾見是衆)하며, 그동안 부처님 법을 편다고 어느 지방, 어느 나라 안 가본 데 없어요. 다 돌아봤지마는 이와 같은 대중들은 아직 까지 일찌기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어차중중(我於此衆中)에 내지(乃) 불식일인(不識一人)이라. 나는 이 많은 대중들 가운데 내가 한 사람도 모르겠어. 한 사람도 만나본 사람도 없고 한 사람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거여. 모두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아주 땅 속에서 올라 온 사람들에 대한 어떤 의미, 다시 말해서 본래의 우리의 생명, 본생명입니다, 이게. 이 사람들은 본문 보살이예요. 본래부터 있던 보살이다, 이 뜻입니다. 그래 우리 마음 속에.. 본래 우리 마음이예요, 그게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내가 아니고 역사를 초월한, 부모가 낳아 준 이 이전의 본래 내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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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mary 님! 수고하셨습니다..복습 잘 하고 갑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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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님, 고맙습니다. _()()()_
mary님 늘 수고하심에 머리숙여 존경을 보냅니다,_()_
고맙습니다 ()()()
메리님, 감사히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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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양면을 아주 동시에 정확하게 안다고 하는 것, 이게 지혜고 불교적인 안목이고 ,또 세상살이에도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런 눈을 갖춰야 그게 제대로 눈을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뭐 어떤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것만 가지고 단순하게 평가해선 안된다는 것.................
Mary 님 ! 고맙습니다.
40세된 사람은 40년전부터 존재 했던 것이 아니고 본래의 생명은 아득한 과거부터 존재해 왔지만 40년전에 인연에 의해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서 40년전에 그 모습이 나타났을 뿐이다
종지 용출한 무수한 보살들=모든사람들이 본래 보살,本化 보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