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러구러 79년 운명의 10월이 되었지. 느닷없이 초대형 공안 사건이 터져. 10월 4일이었던가. 공안 당국에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의 전모를 발표한 거야. 관련자 다수를 검거하고 수십 명을 공개수배했어. 처음에 사람들은 이번에도 조작된 지하사건이겠거니 했지.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매번 박정희는 그런 식으로 넘겨왔으니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어. 사상과 이념을 같이 하는 구좌익들이 모여서 시국담이나 나누고 책이나 돌려보는 정도가 아니었어. 이 사람들은 조직 강령을 만들고 깃발을 제작해서 그 앞에서 맹세하는 기념사진을 찍고 강령 실현을 위해 체계적인 조직 부서를 두고 맡겨진 임무의 성과를 보고하고 무장투쟁을 위해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훔치고 실제 무장력을 담보하기 위해 훈련을 했던 거야. 놀라운 일이 또 하나 있었어.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위원장은 이재문이라는 기자 출신이었어. 앞에서 기억해 두라고 당부했던 바로 그 사람이야. 여기서 기자 출신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해. 이 분은 기자답게 기록을 중요시했다는 거야. 각 부서에서 올라오는 보고서, 사업계획서, 성과보고서 등 조직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보관해 두었다고 해. 더욱 희한한 일은 조직원 상당수가 서울 한복판에 아파트를 두 채 얻어 합숙하면서 생활했다는 거야. 출입구 가까운 아파트에는 무장한 젊은 대원들이 살고 안쪽에는 고위 간부들이 기거했어.
그런데 말이야 일은 우습게 돌아가고 말아. 당시 남민전은 민투(민주화투쟁위원회)라는 산하 조직을 통해 전국 각지에 선전 선동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주로 학생운동하다 제적당한 사람들이 그 활동을 했었어. 그중에 ○○대 다니다 제적당하고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 중인 학생 하나가 대단히 열렬히 활동했다고 해. 이 학생의 애인 역시 제적생이었는데, 이 여학생을 경찰이 주시하고 있었다고 해. 거의 정기적으로 어떤 아파트 부근에서 수배 중인 남학생을 만나 음식물이 들어있는 듯한 통을 전달하는 거야. 경찰이 여학생을 잡아다가 심문했겠지. 말이 심문이지 고문이었겠지. 소문에는 곤봉으로 음부를 찔러댔다고 그래. 밝혀낸 것은 별로 없었어. 단지 애인에게 전달해준 것은 적어도 2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밑반찬이었다는 것뿐이었어. 여학생에게 하던 대로 음식을 전달해주라고 지시하고 남학생이 하는 행동을 집중해서 감시하기 시작했어.
경찰은 곧 음식을 아파트 동의 5층 입구에 있는 방에 전달하고 또 안쪽에 있는 방에도 전달한다는 것, 한 아파트당 고정 거주자가 다섯 정도 된다는 것, 열 명 이상이 수시로 드나든다는 것, 무엇보다 안쪽 아파트의 거주자들은 과거 좌익사건 관련자들이고 입구 쪽 거주자들은 주요 시국사건 수배자들이라는 것을 탐지했지. 그 남학생을 먼저 체포해서 사실을 확인한 다음, 경찰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대대적인 작전을 준비했다고 해. 한밤중에 작전을 개시했는데, 우선 기동경찰 1개 대대를 동원해서 그 아파트단지 전체를 포위했다더라고. 소방대를 동원해서 두 아파트 베란다 쪽 바닥에 이삿짐으로 위장한 에어 매트를 설치하게 했다여. 그리고는 유단자로 구성된 체포조가 동시에 두 아파트로 쳐들어간 거지. 그 남학생을 앞세워 밀고 들어갔으니 방어할 틈이 없었다나 봐. 경찰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나서 조직원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고 해. 훔친 카빈총은 불발이라 사용하지 못했지만, 칼과 몽둥이로 활극을 연출했다고 해.
안쪽 아파트에 기거하던 위원장 이재문은 문서가 들어있는 보따리와 자기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는 거야. 그리고는 문서 보따리를 안고 베란다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고 해. 안타깝게도 투신은 전혀 소기의 성과를 거들 수 없었어. 불태워 없애려던 문서도 마찬가지였고 말이야. 모든 사태를 예견한 듯한 경찰의 작전은 얄밉도록 척척 맞아 떨어졌던 게지. 경찰의 작전이 문제였겠어? 상당한 규모의 지하 전위 조직을 구축하면서 그렇게 용용하게 지상에다가 그렇게 대놓고 아파트를 얻어 은신처를 마련했던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지. 그뿐인가, 조직의 모든 것을 문서로 작성해서 그것을 기록용으로 보관해 두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겠지. 아마 세계 전위 조직 운동사에서 전무후무한 사례일 거야.
각설하고 조직의 모든 것을 샅샅이 알 수 있는 그 문서들을 검토하던 경찰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 자기들이 해결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전국의 공안 사건 대부분이 이들의 소행이었던 거야. 그뿐 아니라 예비군 교육장에서 분실한 카빈총도 이들이 훔친 것이었어. 경악할 일은 또 있었어. 성과보고서를 뒤졌더니 봉화산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땃벌작전을 수행했으나 실패했다고 나오는 거야. 뭔고 봤더니 봉화산작전은 다름 아니라 이○○선배, 김○○ 시인, 서울대 출신 박○○ 선배(물론 이름은 모두 조직에서 부여받은 가명으로 표기되었으나 재판 과정에서 실명이 알려졌지)가 중견 기업가 집에 침입하여 김○○ 시인이 그 사장을 언설로 승복시켜 상당한 조직 운용자금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사업을 말했던 거야. 땃벌작전은 뭐냐? 바로 동아건설 최회장 집 강도 미수사건이었어. 보고서에는 그 사건 관련자는 총 8명이었는데, 5명은 운전을 한다던가 망을 본다던가 후방 지원 요원이었고 3명이 행동 요원이었는데, 그 3명은 봉화산 작전과 같았어.
이○○ 선배가 강도 사건의 공동 정범이었던 것은 분명했지만, 개인 생활고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 해방의 전위 조직’ 운영자금을 위한 거사였던 것이여. 뭔가 있을 것 같아서 15일 동안이나 각종 기술을 넣어 온갖 고문을 다 했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얼마나 낭패였겠어? 이 대목은 이○○ 선배에게 내가 직접 들은 내용이여. 과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 암튼 이근안이 몸소 서울구치소로 특별 면회를 왔더래. 그리고는 대뜸 큰절을 하더라는 거야. 그러더니 존경한다고 말하더래. 자기가 지금까지 공안 경찰로 있으면서 열지 못한 입이 없었는데 너에게는 내가 졌다. 이렇게 털어놓더라는 거야. 북한의 특수공작원들도 다 굴복시켰는데, 너는 어떤 훈련을 받았냐 물으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