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러비전·영화·광고 시장을 휩쓸며 우리 시대 어느 정치가나 예술가보다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최진실. 최고의 스타인 그녀도 힘겨운 나날을 보냈었다.
귀여운 여자의 대명사 「최진실」은 이제 연예인의 이름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 현상이다. 「최진실 신드롬」이라는 용어가 통용될 만큼 그녀는 이 시대의 가장 귀엽고 예쁜 여자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여성들은 누구나 최진실의 발랄하고 깜찍한 분위기를 선망하며 남성들은 그녀처럼 애교스러운 여성과의 만남을 꿈꾼다. 최진실이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거나 지난 92년 10월 저축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을 만큼 알뜰하다는 것 정도는 마치 친지의 일처럼 알고 있다. 관능미나 탁월한 연기력의 소유자도 아니면서 그녀는 데뷔 4년 만에 15억을 벌었고 지난 3년간 각종 연예인 설문조사에서 인기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광고에 나타난 최진실의 이미지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도 발표되었고 한때「최진실 시리즈」란 유머 시리즈도 유행했었다.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최진실. 영상시대라 불리는 90년대가 탄생시킨 최고의 스타인 그녀도 한때는 자살을 기도했을 만큼 힘겨운 나날을 보냈었다. 굶주린 소녀에서 억대 스타가 된 그녀의 진실은 무엇일까.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어린 시절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한 산부인과에서 최진실은 태어났다. 어머니 정옥숙씨(46)는 큰 나무에서 빨간 과일을 따는 태몽을 꾸고 딸이 태어날 것을 예감했다. 친할아버지는 손녀가 진실되게 살라는 뜻에서「眞實」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온 가족이 경기도 고양군 삼송리로 이사했다. 논에서 개구리가 울었고 아이들은 아랫도리를 그대로 내놓고 동네를 누비고 다녔지요. 나도 풀벌레를 잡거나 개울에서 물장구를 치고 또 개구리도 잡아 먹으면서 지냈습니다. 철이 없었기 때문이겠으나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약값을 감당키 어려워 어느날 진실이와 진영 남매를 데리고 산으로 가 뱀을 잡았다. 어머니는 계속 숲 속에서 뱀을 잡아 오셨고 그 뱀을 고아먹은 덕분에 아버지의 병도 많이 회복되었다. 건강을 찾은 아버지가 중동 근로자로 떠나면서 최진실은 국민학교 3학년 때 서울 불광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촌스러운 모습과 가난한 집안 때문에 서울 아이들에게 주눅이 든 그녀는 말 없는 성격으로 변했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역할들을 일인 다역으로 흉내내는 것이 낙이었다. 공부하라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으나 성적은 항상 중간은 유지했다. 특히 미술에는 소질이 있어서 각종 미술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동네 산에 올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일요일에도 그림을 그리러 가면 아이들은 도시락을 싸왔는데 나는 대신 누룽지를 뭉쳐갔죠. 아이들은 그게 더 맛있다고 바꿔먹고…
아역 스타였던 강수연이 다니는 것을 알았다. 최진실은 수업이 끝나면 강수연의 교실로 가서 그녀가 앉았던 의자에도 앉아보고 책상도 만져보며 자신도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별명은 수제비
아버지가 중동에서 보내준 돈을 어머니가 알뜰히 모은 덕분에 최진실 가족은 곧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 때 귀국한 아버지는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고 다시 노름에 빠져 집은 물론 모든 재산을 날렸다. 동생과 진실이는 고모가 경영하던 지하 레스토랑의 단칸방에서 살기도 했고 어머니는 외가에서 머물며 포장마차를 해 남매의 학비를 벌어야 했던 것. 습기찬 지하 단칸방에 살며 밥도 제대로 해먹지 않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의 도시락을 나눠먹었다. 지금도 돈독한 우정을 지속하고 있는 친구 지영이는 그녀를 위해 매일 도시락을 두 개 싸왔다. 지영이 어머니는 가끔 용돈을 주기도 했다. 돈이 생기면 그녀는 밀가루를 사다가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가장 간단하고 또 푸짐했기 때문이다. 친구들 집에 가서도 직접 수제비 솜씨를 선보여 별명이「최수제비」가 되었다.
멸치 다시다에 쫑쫑 썬 김치와 김치국물을 넣어 얼큰하게 만드는 것이 그녀만의 비법. 하지만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때 지하 단칸방에서 만들어 먹던 수제비의 맛은 나지 않는다. 고모가 이제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라고 한 날 최진실은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노름에 빠져 가족을 돌보지 않고 있고 어머니가 끌던 포장마차도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팔아버려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느껴졌다.
그래도 길거리에서 죽을 수는 없어서 친구집으로 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하늘나라겠거니 하고 눈을 뜬 것은 여전히 친구집. 이틀 내내 설사를 하는 것으로 그녀의 자살 기도는 끝났다.
친구들은 모두 대학입시 준비로 바빴으나 대학 진학이 불가능한 그녀는 남몰래 KBS 탤런트 시험에 응모했다. 1차 서류 심사에서는 합격했지만 2차 실기 시험에서 떨어져 연기자가 되겠다는 첫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녀는 꿋꿋하게 또 밝게 자랐다.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 덕이 큽니다. 그리고 학비를 제때 못내고 도시락도 못 싸가지고 다니면서도 학교는 하루도 빠짐없이 맹목적으로 다녔어요. 사실 학교와 친구들이 기쁨이기도 했지만요. 2년 후엔가 어느 잡지가 주선한「인기 스타의 모교방문」이란 기회에 학교에 들러 당시의 앨범을 보았을 뿐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여서 타자나 부기도 배우지 못해 취직도 어려웠다. 동네「롯데리아」에 나가 햄버거와 콜라를 주문받으며 하루 6시간씩 시간당 6백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했다. 열아홉이었고 가슴은 막연히 스타가 되겠다는 꿈으로 부풀어 있었으나 현실은 우울하기만 했다. 어머니 보기도 민망해 그녀는 우선 사진관에서 정면, 측면 사진을 찍어 충무로 스튜디오에 들렀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가 소속되어 있던 모델 에이전시에 함께 갔다가 CF 출연 제의를 받았다. 아모레 화장품모델인데 수영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수영은 전혀 못했지만『잘한다』며 출연을 약속했다. 주연 모델인 박영선이었다. 최진실은 박영선이 수영장 옆을 지날 때 수영장 속으로 뛰어드는 엑스트라 역이었다. 『그때는 4월이었는데도 날씨가 꽤 쌀쌀했어요. 그런데 내 잘못이 아니라 박영선의 표정이나 걸음 때문에 NG가 나서 30번이나 물에 빠져야 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덜덜 떨고 다이빙대에 부딪쳐 이마가 다쳐도 사람들은 주인공 영선이만 신경쓰지 수건 하나 건네주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러나 잠자리에 누워 그녀는 슬픔에 잠기기보다 「나도 꼭 스타가 될거야」라는 희망을 갖고 잠이 들었다. 하루종일 물속에 잠겨 있었던 첫 CF 출연으로 그녀는 30만원을 받았다. 지금은 단발 CF에도 1억 이상을 받지만 당시로는 처음 만져보는 거액이어서 무조건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 후 최진실은 브렌닥스 치약, 비너스 란제리, 한국화장품 등의 광고에서 얼굴을 보였다.
한국화장품 광고에서 메인 모델 김희애 옆에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을 눈여겨 본 삼성전자 홍보부장 덕분이었다.
최진실은 직원 시사용 시험테이프로부터 만들어야 했다. 그 테이프가 호응을 얻어 1년간 전속을 맺게 되었다. 전속금은 2천만원. 덕분에 단칸 사글세방에서 독채 전세로 옮길 수 있었다. 최진실의 깜찍한 모습이 담긴 삼성전자 VTR 광고시리즈는 엄청난 히트를 거두며『저 예쁜 새댁이 누구냐』는 문의가 빗발쳤다. 사실 저는 처음에 속이 상했어요. 갓 스무 살이어서 발랄한 아가씨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주부역이라니까 억울했지요』
최진실의 모습에 남편들은 넋을 잃었고 텔레비전 앞에서 싸움을 하는 부부가 늘었다. 그녀의 주가도 폭등, 89년 재계약을 할 때는 두 배가 뛴 4천만원을 받았다.
전처후 스타로 급성장
지난 여름 장안에 화제를 일으킨 MBC「질투」에 출연하기 전까지 최진실의 배역운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첫 텔레비전 출연도 드라마가 아닌 MBC「일요일 일요일 밤에」로 시작됐다. 그녀가 소속된 모델 에이전시의 다른 모델들과 함께 여럿이 등장하는 코너에 출연키 위해 방송국 대기실에 있다가 「조선왕조 오백년」조연출자의 눈에 띄어 담당 연출자인 이병훈 부국장을 만나게 된 것. 자존심도 상하고 별 기대도 하지 않아서 그날은 화장도 안하고 갔더니「넌 맨얼굴이 낫구나」하시더군요』
평양 기생 출신인 장미역을 맡아 최수종과 공연했다. 장미역은 맞아 죽는 역이었고 그녀의 영화 데뷔작인「남부군」에서는 빨치산 박민자역으로 총에 맞아 죽었다. 첫 주연작인 MBC 텔레비전 베스트셀러 극장「시진읍」에서는 불에 타 죽는 팔푼이 우리들의 천국」에서는 백혈병으로 죽는 승미 「약속」에서는 암으로 죽는 역이었다. 영화「숲속의 방」에서도 자살하는 여대생 역을 맡을 수록 그녀의 인기는 치솟았다. 그녀를 영화에 데뷔시킨「남부군」의 정지영 감독은 최진실의 매력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최진실의 웃음에서는 평화가 느껴집니다. 매우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면서도 그 어떤 시련이 닥쳐도 역경을 딛고 무지개처럼 신선하게 떠오를 것 같은 묘한 신비감을 주거든요』
「수잔브링크의 아리랑」등에 잇따라 출연하며 최진실은 각종 설문 조사에서 인기 1위의 자리를 차지했다. 연기 활동만이 아니라 친정격인 CF에서도 「따라하지마」「언닛」「엄마 딱 한 입만 더요」등 유행어를 탄생시켰다.
인공 감미료가 들지 않은 천연음식에서 느껴지는 담백함과 청량감, 그리고 솔직함이 남녀노소의 사랑을 받았다.
최진실의 부담스럽지 않은 만만한 미모가 남성에게는 소유의 현실적 대상으로 여성들에게는 막연한 우호의 대상으로 느껴져 폭넓은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익숙해 있던 대중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최진실은 텔레비전 토크 프로그램이나 매스컴의 인터뷰에서 스스럼없이『고등학교 때 매일 수제비만 먹었다』 『어머니가 포장마차를 끄는 것이 부끄러워 친구들 몰래 숨은 적도 있다』 등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기 때문이다.
저축상 받은 또순이
연예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가수 변진섭과의 스캔들도 최진실은 다른 연예인처럼 무조건 부정하지 않았다. 남편감으로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결혼 할 사이가 아니다』라는 그녀의 말이 확대 해석되어 많은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난 92년 10월 27일「저축의 날」기념식에서였다. 최진실은 이날 알뜰하고 검약한 생활에 은행 저축을 많이 한 것이 수상 이유였다.
그녀에게『최진실양, 옛날엔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다는데 요즘은 어때요』라고 묻기도 했다. 사실 쥐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고 수제비로 배를 채우던 시절에 비하면 그녀는 너무나 부자가 되었다.
최진실은 너무나 숨가쁘게 살아왔다. 대부분은 출연료가 폭등한 지난 1,2년 사이에 번 돈이고 매니저, 대행사 등의 필요 경비를 제외하면 그 절반 정도가 그녀의 재산으로 남아 있다. 즉, 롯데 차밍바의 한번 촬영에 1억 4천만원을 받은 것을 비롯 아세아 자동차, 요플레, 보르네오 가구, 씨의상 등에서 단발에 1억, 전속금은 2억을 받았다는 것. 어머니를 위해 상가를 마련했으면 8개의 통장에 현금 2억 정도를 저축해두었다. 억대 스타이면서도 그녀의 소비생활은 데뷔 당시나 별다른 변화가 없다. 자가용만 스쿠프에서 소나타로 바꾸었고 그것도 기사 없이 스스로 운전한다. 화려한 스타의 옷장 역시 초라하기 짝이 없다. 출연할 때만 살짝 입고 그대로 돌려주고 평소에 입는 옷들은 남대분 시장이나 이태원 보세상가 등에서 구입한다. 요즘은「씨」라는 브랜드의 전속 모델이어서 카달로그 촬영 후에 옷을 선물받기도 한다.
보석이라면 동생과 나눠낀 금반지가 전부고 대부분 시장이나 거리의 리어카에서 파는 귀걸이, 헤어밴드 등 2,3천원짜리 액세서리로 멋을 낸다.
점심값을 아낄 수 있고 어머니의 정성도 느끼고 또 얼마 전부터는 신경성 위염 증세도 있어 부담없는 도시락 반찬으로 1석3조의 효과를 보고 있는 것. 커피도 잘 마시시 않는다.
잠자는 것이 소원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 어머니에게 2만원 정도 용돈을 타서 나오는데 대부분 자동차 기름값과 주차비로 사용된다. 60평형 그녀의 빌라 역시 주인 모녀를 닮아 검소하고 소박하다. 고급가구도 없고 유명한 화가의 미술품도 눈에 뜨지 않는다.
남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가난도 체험해 보았고 또 쉽게 벌기 어려운 큰 돈도 벌어보았습니다. 이제는 나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제대로 돈을 쓸 생각입니다』
지난 4년간이 결코 장미빛 길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연기에 몰두해도「CF스타」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녔고 하루 4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영화, 드라마, 카탈로그 인터뷰 등에 이끌려 다니느라 건강도 나빠졌다. 영화「숲속의 방」을 촬영할 때는 그녀를 너무 어리게 보는 촬영팀과의 마찰로 항상 소화불량 증세로 고통을 겪었고 영화계에서는「건방지다」는 비난을 받았다.
거절당하는 편에서는 「돈만 밝힌다」「언제적 최진실이냐」고 비아냥거린다. 지난 해 봄에는 과로에 마음고생, 또 어릴 때 앓았던 관절염까지 도져 몇번이나 쓰러지기도 했다. 모처럼 휴가 때 어머니와 부산에 갔을 때도 그곳에서 MBC 텔레비전「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해야 했다. 항상 잠이 모자라 녹화장에서도 평평한 구석만 보이면 눈을 붙이고 잠을 잔다. 그러나 카메라 앞에서는 항상 상큼한 표정으로 변신하는 것은 그녀의 의지 탓이다. 드라마「질투」로「질투 신드롬」을 일으키며 브라운관을 장악한 최진실은 영화「미스터 맘마」의 대히트로 이제 가장 믿음직한 연기자로 인정받고 있다. 흥행수입의 20%를 배당받도록 계약, 1억 이상의 보너스를 받을 만큼 당당한「스타」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 나이로는 스물여섯. 더이상 꿈꾸는 소녀도 아니고 곧 결혼도 해야 한다. 요즘도 MBC 텔레비전 드라마「매혹」을 비롯 CF와 다른 스케줄 때문에 잠시의 휴식도 불가능하다. 여전히 하루에 팬레터가 2백통 이상이고 출연 섭외도 그치지 않고 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도 필요할 것 같고 무엇보다 나를 위해 고생한 어머니를 위해 좋은 딸 노릇을 하고 싶어요』
사랑받는 아줌마 연기자가 되겠다
최진실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 포장마차를 끌며 혼자 힘으로 남매를 키운 은혜를 잊지 못해 자신은 옷을 사입지 않아도 어머니에게는 더 젊어보이는 예쁜 옷을 사주지 못해 안달이다. 영화제 시상식 등에도 어머니를 더 곱게 차려 입혀 함께 나온 최진실 모녀는 자매처럼 보인다.
최근 개인 택시를 마련해 드려 맏딸 노릇을 했다. 한때는 차라리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원망도 했었으나 이제는 그이 입장도 이해하게 되었다. 함께 살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선활동도 활발히 펼칠 생각이다. 30만원을 받고 너무 감격스러워 어머니가 계신 단칸 셋방으로 뛰어들었던 최진실은 이제 살짝 웃는 표정만 촬영해도 1억을 버는 억대 스타로 성장했다.
「귀여운 요정」으로 머물 수는 없겠지요. 아줌마가 되어서도 실력 있는 연기자로 평가받고 싶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제시카 탠디처럼 할머니가 될 때까지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요 』
또 누구와 결혼할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항상 지갑에는 2만원 이상의 용돈은 없다는 것이다.
<사진설명: 92년 10월 저축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은 최진실.> |
출처: 해불양수(海不讓水) 원문보기 글쓴이: 가짜 모범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