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이기게 하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고난도 주시나이까. 하나님만이 선하시고 완전하시다 하시기에 우리는 고난을 통해 시험과 교훈을 받아야만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나 보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대로는 그 나라에 못 가옵니다. 그 죄를 씻기 위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이미 고난을 당하셨으니 우리가 그와 함께하기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에만 아버지를 찾고 울부짖으며 때로는 하나님을 한없이 원망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포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고난을 통해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니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야 하옵니다. 행복과 불행, 선과 악이 얽힌 이 땅에서 강한 훈련을 하여 수준 높은 자녀 고르기가 바로 하나님의 섭리일지도 모르옵니다. 고난을 통해 비로소 그리스도를 만나니 우리가 유익하다 하셨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인내하면 소망을 이루게 되고 또 주님은 우리가 정금같이 아름답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성령이시여 이 고난의 의미를 속히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고난을 승리로 이끄사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품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사랑에서 떠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도 비교할 수 없사옵니다. <삘릉새를 위한 서곡 / 강지용>
**고난 속에 잉태되는 부활의 생명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부활이라는 생명을 잉태시키고 계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운행의 법칙이다. 우리는 그 고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쓰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에 함께하시고 이 고난을 부활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때 인간은, 역사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 아브라함 마슬로우는,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느냐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이겨 왔느냐와 비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없이 위대한 사람을 생각하기 어렵다.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부활의 진리가 숨어 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기 자신에게, 가정에, 교회에, 민족에게 어떤 시련이 와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하나의 깨어진 꿈은 모든 꿈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의 부서진 희망은 모든 희망의 마지막이 아니다. 폭풍우와 비바람 저 너머로 별들은 빛나고 있으니 그대의 성곽이 무너져 버릴지라도 다시 성곽 짓기를 계획하라. 수많은 꿈들이 재난에 무너져내리며 고통과 상한 마음이 세월의 물결 속에서 그대를 넘어뜨릴지라도 그래도 신앙에 매어달리라. 그리고 그대의 흐르는 눈물 속에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기를 힘쓰라.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 정태기>
**용서 못할 죄는 없습니다
어느 미망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남편이 죽은 지 14년이 지나도록 매일 남편의 무덤에 따라 들어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죽기 바로 전에 남편과 싸우고 그가 사고라도 당하길 바랐습니다. 그리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남편이 큰 사고를 당해 죽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녀를 용서하셨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다시 행복을 바라는 것은 죽은 남편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모든 죄와 실패에 대해 대가를 치러주셨는데, 왜 우리는 계속해서 후회합니까? 그리스도는 모든 죄의 짐과 실패의 억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시기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떤 크리스천이 비가 오는데 과속으로 자동차를 몰았습니다. 그 결과 동승한 친구가 죽는 사고가 났습니다. 그는 번민하며 자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그는 이전에 결코 깨닫지 못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목적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하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효력이 미치는 것입니다. 만일 그분의 희생이 우리 죄를 씻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실패한 인생, 성공한 그리스도인 / 어윈 루처>
나는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죽지 않고 나를 괴롭히는 옛사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주님, 그 사랑을 사람들 앞에서 표현조차 못하는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소서. 혹 불이익과 위험을 당하지 않을까 남의 눈치를 볼 때도 있습니다. 오, 주님, 나를 구속하신 그 사랑에 겨워 내 삶도 주님께 드리게 하소서.
** 부활은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을 완성으로 이끄는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결국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언젠가 키에르케고르는 그와 같은 생각을 부드럽고 편편한 돌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편편한 돌을 연못의 수면 위로 던지게 되면 춤을 추듯 물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더니 물 속으로 쑥 가라앉아 버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면이 잔잔해집니다. 마치 이것은 사후의 소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는 ‘호흡’이라는 희곡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막이 오르면 쓰레기가 잔뜩 어질러져 있는 무대가 등장합니다.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아기의 첫 울음 소리로 시작한 연극은 한 노인의 임종의 헐떡거림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막이 내려옵니다. 여기서 베케트가 말하고자 한 요지는 인생은 허무하고, 존재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벧전 1:3, 4). 이것은 한 마디로 소망을 의미합니다. <크리스천 모범 텍스트 / 제임스 에모리 화이트 >
**실수했을 때 만나주시는 하나님
1929년, 캘리포니아 대학의 축구 선수인 로이 리글즈는 장미 컵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했다. 전반전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그는 상대편 조오지아 공대가 놓친 공을 가로채서 고울을 향해 갔는데 방향이 틀렸다. 그때 로이의 동료 선수인 베니 좀이 그를 뒤쫓았다. 리글즈가 상대편을 위해 득점을 하기 바로 전에 베니는 리글즈를 쓰러뜨렸다. 조오지아 공대는 고울 라인 지점에서 찬 공을 빼앗아 2점을 얻어냈다. 전반전이 끝나고 탈의실에 들어간 리글즈는 구석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프라이스 코치는 침묵을 지키며 후반전을 위한 격려의 말도 하지 않았다. 선수들이 후반전에 나갈 채비를 할 때 그는 단지 “전반전을 뛴 선수 전원이 후반전에도 뛴다”라고 말했다. 프라이스 코치는 로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로이, 일어나서 가라. 경기는 반밖에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로이 리글즈는 다시 경기를 하러 나갔고 후에 조오지아 공대 선수들이 말하기를 그는 그때까지 그들이 본 어느 선수보다도 열심히 뛰었다고 한다. 제이 하돈 로빈슨 박사는 「캠퍼스 생활」이란 잡지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나는 ‘대단한 코치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나서 내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모든 큰 실수와 항상 기꺼이 나를 용서하시고 다시 해볼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한다.” <주의 형상, 나의 형상 / 죠쉬 맥도웰>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한 어린 소년이 있었다. 그래서 소년은 초콜릿과 음료수를 배낭에 챙겨 들고 여행길에 나섰다. 한참을 걸었을 때 소년은 길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할머니는 지치고 배도 고파 보였다. 그래서 초콜릿을 꺼내 할머니에게 드렸다. 할머니는 고맙게 받아드시고 소년에게 웃음을 지어보이셨다. 할머니의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이번에는 음료수를 건네드렸다. 할머니는 또다시 웃어보이셨다. 할머니와 소년은 가끔씩 서로를 바라볼 뿐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소년은 피곤함을 느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걸음 걸어가다 말고 달려가 할머니를 꼭 껴안아드렸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의 얼굴에는 행복이 넘쳐흘렀다. 소년의 어머니는 소년의 행복한 표정을 보고 소년에게 물었다. “오늘 무엇을 했기에 그렇게 행복해 보이니?” “오늘 하나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어요. 엄마도 아세요? 하나님은 내가 여태껏 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가지셨어요.” 할머니의 아들 역시 할머니의 얼굴에 나타난 평화로운 표정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그렇게 행복해 보이세요?” 그녀가 대답했다. “오늘 공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초콜릿을 먹었단다. 너도 아니? 그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더구나.” 마더 데레사는 하루에 다섯 번만이라도 미소를 지으라고 하였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바뀔 것이고 쉽게 하나님을 뵐 수 있을 것이라고. <배꼽 없는 사람은? / 권상혁 엮음>
**다르게 보이는 용기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근본 명령은“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이다(레 11:44, 45). 유대인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느 날 오후, 한 유대인 소녀와 차를 마시러 간 일이 있었다. 그 소녀는 열 살 안팎의 나이였다.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율법에 허락된 음식만 먹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이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았다. 물론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특별한 행동을 보고 그들이 유대인인 것을 쉽사리 알아낸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쉽사리 알아낼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은 어떤 점에서 달라야 하는가? 첫째, 그리스도인의 다른 점은 자비에 있다. 기독교는 어린이, 부녀자, 노인, 병자, 노예들에 대한 자비심을 세계에 가져왔다. 그리스도인은 친절한 사람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다른 점은 정결에 있다. 기독교는 이방 세계에 새로운 표준이 되는 순결과 충성과 정결을 가져왔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다른 점은 그에게 완고함이 있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그의 믿음을 유혹할 수 없다. 넷째, 그리스도인의 다른 점은 그의 용기에 있다. 여기서 용기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이며,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용기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 윌리엄 바클레이>
**기독교 - 예수 - 십자가 = ?
어떤 마을에 잘 지어진 아름다운 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의 벽에는 선명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믿는다.” 언제부터인가 건물 벽에 담쟁이 넝쿨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벽에 쓰인 글을 가리기 시작했다. 벽에 쓰인 글 중에서“십자가에 못박힌”이란 부분을 담쟁이 넝쿨이 가렸다. 그래서“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라는 말만 보였다. 얼마 후 담쟁이 넝쿨이 더 자라나서 이번에는“그리스도”를 가리게 되었다. 결국 남은 말은“우리는 믿는다”는 말뿐이었다. 끝내는 이 담쟁이 넝쿨이 벽을 모두 가려 원래 있던 글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누구를 믿으며, 무엇을 증거하는 자들인가? 우리의 영혼이 죄에서 해방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보라. 예수님에게서 십자가를 빼보라.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빼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는 이 신앙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아예 우리의 존재 가치마저도 없어질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났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주를 믿음으로써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 우리는 이제 제대로 믿고, 제대로 된 복음을 증거하자. <하나님의 프로포즈 / 박상훈>
**좀 더 무거운 줄을
물결이 거센 강을 가로지르는 현수교 공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건축자들은 처음에 두 낭떠러지 사이에 커다란 연을 날립니다. 일단 연이 강 다른 편에 안착하면 줄이 연결된 셈입니다. 이 줄에 좀 더 무거운 줄을 묶어서 강을 가로지르게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더 무거운 줄을 엮어 강을 가로지르게 합니다. 이렇게 한줄 한줄 더하여 강철 케이블이 강을 가로지르게 됩니다. 계속 케이블을 늘려감으로써 나중에는 거대한 다리가 완성됩니다. 어느 누구도 완성된 거대한 다리를 보고서 처음에 연에 한 가닥 줄을 연결하여 짓기 시작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이 발전합니다. 위대한 믿음은, 시련에 시련을 거듭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거듭해서 의지하며,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각각의 시련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약속을 주장하여 응답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 삶의 믿음이라는 줄에 좀 더 무거운 줄을 연결하게 되는 셈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아시며, 인생에서 닥치는 시련에 쉽게 굴복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성경에 수많은 약속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우리가 의심이 들 때 믿음을 강하게 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약속을 주장하는 기도 / 토마스 이클리>
**사장님 며느리 된 가정부
한 처녀가 집이 너무 가난하여 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취직 자리를 찾았으나 할 수 없이 어느 집에 식모로 가게 되었다. 그런 형편에서도 주인의 양해를 구하여 주일에는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는 처녀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교회건축이 마무리 단계에 왔으나 재정이 모자라 중단할 위기까지 되었으며 내일 밀린 인건비를 주지 않으면 인부들이 목사님께 행패를 부리겠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은 처녀는 5년 간 식모살이를 하며 쓰지 않고 모아둔 돈을 몽땅 찾아서 목사님께 드렸다. 그러면서 “버릇없는 사람들이지 돈을 제때 못준다고 주의 종에게 행패를 부리다니 말이 됩니까?” “자매님, 이 돈이 있어야 시집이라도 가지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한 푼 없어도 해결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목사님은 헌금을 받았으나 그 어린것이 갖은 고생을 하며 소중히 모은 돈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자매와 함께 눈물로 기도하였다. 이렇게 해서 건축은 계속되었고, 이 사실을 들은 온 교인들은 눈물로 회개하고 헌금하여 교회는 완공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 중에서 큰 회사의 사장인 장로님이 무조건 우리 며느리라며 납치하다시피 데려가서 돈 한 푼 없이 결혼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과감한 투자를 하는 자에게 과감한 복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한국교회 예화집 / 조제은 편저>
**장미나무가 된 가시나무
골짜기에 가시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하루는 정원사가 오더니 그 가시나무를 파내어 장미꽃나무 사이에 심는 것이 아닌가! 아이쿠! 이 사람이 대단한 실수를 하고 있구나! 나같이 쓸모 없는 가시나무를 이렇게 아름다운 장미나무들 사이에 심어놓다니…. 머지않아 내가 쓸모 없는 가시나무라는 것을 알면 뽑아서 불에 던지겠지? 그런데 정원사가 예리한 칼을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이제야 이 사람이 내가 가시나무라는 것을 알았구나! 아니나 다를까 그 정원사는 그 가시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이었다. 어?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다시 장미의 싹을 접붙이는 것이었다. 아! 불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내가 장미나무가 되다니 이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야! 여름이 되어 아름다운 장미꽃이 그 나무에도 피었다. 그것을 보면서 정원사가 말했다. “본래 너는 가시나무였으나 장미를 접붙여 이제 장미나무가 되었으니 아무도 너를 가시나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님이라는 장미꽃을 통해 구원해 주셨다. 천지창조 때 생명이 없는 먼지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다시금 예수님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다. 이 귀한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나그네길인 이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야 할 것이다.
<말씀의 징검다리 / 정장복 , 주승중 엮음>
**게으른 것이 눈
어렸을 적에 농사일을 도우면서 짜증내고 싫어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늘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것이 눈이란다”며 나를 타이르셨다. 한 번은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보릿단을 탈곡해야 하는데 그것을 올려다보며 막막해 하고 있는 나에게 어머니는 또 그 말씀 “눈이 게으른 것이여. 내일 비가 온다는데 하는 데까지 해봐야제…” 하시면서 보릿단을 헐어 탈곡기에 넣기 시작하셨다. 그날 어머니와 나는 꼬박 날을 새워서야 그 높은 보릿단을 다 탈곡해낼 수 있었다. 하고 보니 정말 어머니 말씀대로 사람에게 제일 게으른 것이 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보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일도 실제로 부딪쳐보면 쉬운 일과 어려운 일, 그리고 불가능한 일의 차이는 시간이 좀 더 걸리는 차이뿐이라고 에디슨은 말하였다. 미얀마에 윈게트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부하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정글을 꿰뚫고 지나간 뒤가 아니면 어떠한 정글도 돌파 불능이라는 보고를 하지 말라.” 이 말은 모순 같지만 부딪쳐보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뿐이다. 사실 상식과 현실이 항상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상식으로 보면 안될 일도 부딪쳐보면 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가 있어도 웃으면서 맞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삶의 용기이고 성공의 비결이기도 하다. <고난은 맞서서 이기고 죄는 피해서 이기라 / 오몽근>
**불평을 그치라
외적인 고난과 긴급한 상황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불평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비결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것은 거의 모두가 불신앙으로 인내치 못하여 일어난다. 사람이 불만족으로 인하여, 그리고 인내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가 된다. 불평한다는 것은 감사치 못하는 죄인데, 왜냐하면 실상 우리는 고난보다는 은혜를 더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려깊지 못한 죄인데, 왜냐하면 고난은 우리에게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불평은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는 또 하나의 죄다. 불평하는 사람은 죄를 범하기 십상이다. 마귀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불평하도록 만든 후에 불을 지핀다. 우리의 마음에 이러한 분노의 독심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하라! 만일 어떤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돈이 잔뜩 들어있는 돈 가방을 던졌는데, 그 던지는 과정에서 머리를 살짝 스치는 바람에 찰과상을 입었다 해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그가 돈 가방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고난의 상처를 입히시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더욱 부요해진다. 이러한 고난들은 우리의 영광을 더욱 부요하게 해주는데 어떻게 우리가 불평할 수 있다는 말인가? <거룩한 열정 / 토마스 왓슨>
**나의 힘이 아님
나는 집회를 통해 감명을 받고 하나님께 제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일주일이나 한 달 정도 후면 시들해져 오래 지나면 없던 일같이 되고 맙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헌신을 받으셨을 때부터 그 헌신을 보살피고 유지시키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헌신의 문제에 있어서 벌레 같은 나와 전능하신 여호와가 함께해야 한다. 벌레 같은 자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당신을 맡기기를 두려워하는가? 왜 당신은 지속적인 헌신을 경험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당신이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적인 헌신은 어려움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전적으로 헌신하는 삶은 인간에게 전적으로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하는 전적인 헌신은 우리에게 정해진 삶이며 가능한 삶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신을 지속시키신다는 사실을 믿으라. 조지 뮬러의 90회 생일 때 사람들은 그의 행복의 비결과 하나님께 받은 축복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두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그가 하나님 앞에 매일 선한 양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은혜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거짓 없는 순종으로 선한 양심을 하나님께 매일 드리고 말씀으로 매일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는 것이 전적으로 헌신하는 삶이다.
<당신이 일상의 유혹들과 마주칠 때 / 브루스 윌킨슨 편집>
**주님이 공급해 주실 겁니다.
시카고에서 살고 있던 가난한 과부 호킨슨은 ‘주님께서 공급해 주신다’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굉장한 시련이 왔을 때에도 그녀는 강한 믿음과 늘 웃는 모습을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항상 곁에서 돌봐 주어야 할 정신 박약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마저도 만성 관절염으로 병상에 눕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회의 청년부원들이 그녀를 문병하기 위해 그녀의 집에 갔을 때, 그들은 그녀가 우울해 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부인과 아드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그녀는 “주님이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라고 평상시처럼 조용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녀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아들은 어떻게 될까?’ 하고 궁금해 했습니다. 그녀의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이 장례식 후 집에 가보자 그녀의 아들은 자신이 수집한 우표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우표는 호킨슨의 아들이 어머니 앞으로 온 편지들을 전해주지 않고 우표만 떼어서 모아두었던 것입니다. 편지 봉투는 뜯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었는데, 상당수의 편지 속에는 그의 나머지 인생을 지낼 수 있을 정도의 현금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걱정을 주님께 맡겨 버릴 때,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경이로운 방법에 깜짝 놀랄 것입니다.
<절망적일 때 가장 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 / 기독신문사 출판기획부 엮음>
**하나님을 찾는 방법
어떤 과부가 많은 액수의 요금 청구서를 받아 들고 큰 낙담에 빠져 있었습니다. 요금을 다 치르었는데도 청구서가 다시 날아왔던 것입니다. 영수증을 찾지 못한 그녀는 요금을 다시 지불해야 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녀가 가진 돈은 남편의 장례비로 거의 다 써버렸기 때문에 영수증을 찾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며칠 후 수금원이 그 과부의 집을 방문하여, 만약 며칠 안으로 요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법정에 고소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나비 한 마리가 열린 창문으로 날아 들어왔습니다. 나비를 본 그녀의 어린 아들은 학습 과제물로 내려고 그것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이 나비를 잡으려 하자 나비는 소파의 등 위에 내려앉았다가 그 뒤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소년은 그 무거운 가구를 혼자 옮길 수 없어서 수금원에게 자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이 가구를 밀어젖히자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것을 집어든 과부의 눈은 기쁨과 흥분으로 동그랗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영수증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간절한 기도를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고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시 9:10). <새벽이슬처럼 / 한태완 편저>
**성공의 기초
실패를 극복하는 것은 건물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전에 그 땅이 어떠했든지간에 기초가 튼튼하면 좋은 건물이 지어질 수 있습니다(디즈니랜드는 전에 늪지였던 곳에 만들어졌다). 인간은 실패의 잿더미를 극복할 수 있는 기초가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변화하지 않고 신뢰할 만한 건물 석재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돌보신다(신 31:6).
2. 하나님의 말씀은 다 이루어진다(수 23:14).
3.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무궁하다(애 3:22).
4.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것은 다 기억된다(마 6:20).
5. 믿음은 결국 승리한다(벧전 1:9).
6. 영생의 약속은 확실하다(요 10:28).
7. 사랑은 영원하다(고전 13:8-13).
우리가 믿음 위에 우리 인생 건물의 기초를 놓느냐, 놓지 않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됩니다. 인간의 삶은 진보하든가, 퇴보하든가 둘 중에 하나일 뿐 중립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따라가야 할 분명한 길이 필요합니다. 실패는 대부분 패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의 상실에서 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금붕어처럼 어떤 뚜렷한 방향이 없어 원 안에서 맴돕니다. 꿈과 목표를 이루며 이를 성취하고 싶다면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생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큰 꿈을 꾸는 법을 배우십시오.
<지쳤습니까? / 로스 로우드>
**불안을 평안으로
어떤 사람이 처음 자동차가 나왔을 때 포드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는 길가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디가 어떻게 고장이 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뒤따라오던 같은 포드 자동차가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신사 한 사람이 내렸습니다. 신사는 다가오더니 자신이 그 고장난 곳을 좀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잠시 자동차 엔진의 한 곳을 만지더니 다시금 시동이 걸릴 수 있도록 고쳐 놓았습니다. 고장난 차주인은 너무도 놀라며 당신은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그 신사가 건네준 명함에는 “헨리 포드”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신사는 다름 아닌 포드자동차를 만들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동차에 대해 잘 알 수 밖에요. 천지만물을 지으셨고, 인간을 만드신 분이 누구입니까? 나의 체질을 아시는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그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든 상관없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위로와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문 밖에 서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을 열기만 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풍성한 자리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이 어렵다 해도 우리의 진정한 친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세미꼴 이야기 / 정명식>
**인생의 본질
인생의 본질을 안다면 애착을 버리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어떤 거룩한 랍비의 이야기가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인 몇 명이 폴란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이들은 거룩한 랍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랍비는 인생의 대부분을 그 마을에서 보내고 있다고 했다. 이 거룩한 사람을 보려고 그의 집을 찾아간 그들은 집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다. 살림살이가 거의 없이 집안이 썰렁했던 것이다. 랍비가 앉아서 성경을 공부하는 의자와 책상, 그리고 간단한 침대가 눈에 띄는 가구의 전부였다. 손님들은 물었다. “랍비님, 당신의 가구는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랍비는 잠시 책에서 눈을 떼 이들을 올려다 보면서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는 여러분의 가구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가구요? 왜 우리가 가구를 들고 다닙니까? 우리는 잠시 지나가는 길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랍비가 말했다. “나도 똑같습니다.” 애착에서 벗어나고 소유에 대해 죽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나그네 인생길에 들고 다녀야 하는 ‘가구’가 얼마만큼이 적절한지 깨닫게 된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필요도 없는 물건을 지고 다니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된다. 그 자유와 아울러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인생을 누리게 된다. <네가 선 곳은 어디든지 거룩한 곳이니라 / 에드워즈 헤이즈>
**각자에게 맞는 헌신
하나님께서 식물들에게 각기 독특한 열매를 맺도록 하신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각기 다른 헌신의 열매를 맺도록 하셨다. 종, 왕자, 과부, 젊은 여인, 결혼한 여인들은 각각 자기만의 고유한 헌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신앙 훈련은 능력과 활동, 각 개인의 책임에 적합해야 한다. 주교가 은둔자가 될 수 없으며, 결혼한 남자가 수도사가 될 수 없다. 숙련된 기술자가 하루 종일 교회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 벌은 꽃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꿀을 뽑아 낸다. 꽃은 벌이 그 꽃을 발견한 순간의 모습 그대로 건강하고 싱싱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진정한 헌신은 이보다 더 탁월하다. 다른 사람의 소명을 상하지 않게 하며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다. 모든 소명은 헌신과 연합될 때 발전한다. 가정 생활은 더 나아지며 사랑은 자란다. 섬김은 더 신실해진다. 기술자의 일터에서, 궁정에서, 결혼한 부부의 가정에서 헌신은 제한되지 않는다. 각각의 소명에 맞는 창조적이고 다양한 헌신의 모습이 있다. 우리가 어디서 일하든지 우리는 헌신의 삶을 열망할 수 있고 또 열망해야 한다. 주님,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세상을 등질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어 기쁩니다. 제 영 안에서 세상의 세력과 지배를 약하게 하소서. 기도와 제가 하는 일들을 훌륭하게 잘하기 원합니다. <날마다 예수님 마음 가까이 / 버나드 뱅글리 편집
**영혼의 정화
영혼을 깨끗게 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불행과 고난, 걱정과 내적인 고통 등을 통해서이며, 둘째는 불타는 사랑, 즉 인내할 줄 모르는 갈급한 사랑의 불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계시와 통찰력과 모든 참된 경험적인 지식들을, 사랑의 가장 참된 증거인 고통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고난을 통한 영혼의 정화는 인내를 낳습니다. 고난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사랑과 자비 같은 최고의 성품들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자아를 전멸시키고 정화시킵니다. 세상의 것을 가져다가 천상의 것으로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중에 내버려두실 때만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때는 없습니다. 태양이 구름 뒤에 가려있더라도 태양의 위치가 변하거나 그 빛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고통 당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여러분을 정화시키고 여러분을 깨끗케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자아를 멸하기 위해서입니다. 주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유익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그 분의 즐거움이 되기만을 구하면서 여러분의 전 존재를 주님께 맡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영성 깊은 그리스도인 / 마이클 몰리노스>
**죄인의 자리를 회피함
우리는 죄를 결점, 실패, 연약함, 약점, 실수, 무능력, 편견이라고 말하며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평가할 때에 하나님의 기준을 떠나서 우리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받은 구원을 내세워 회개하지 않는 구실로 삼아 죄인의 자리를 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구원의 보장은 위대하고 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죄인이고 항상 죄인일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죄로 끌어가지 않습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며 그 깨달아진 죄가 우리를 다시 은혜로 이끌어 갑니다. 스펄전의 한 제자가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관해 스펄전 앞에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설교를 극화시켜서 갑옷을 입고서 성령의 검을 휘두르며 외쳤습니다.
"이제 마귀는 어디 있습니까?”
이에 스펄전은 “마귀는 그 갑옷 안에 있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죄인의 자리를 저버림으로써 사탄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진실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어떤 변장이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럴 듯한 영적인 언어와 교회에서 받고 있는 높은 평판의 껍질 밑에 감추어진 우리의 참 모습은 오직 죄인일 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함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개인 부흥 / 스탠리 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