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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의 역할과 관계에 대한 소론
재일대한기독교회의 현실
재일대한기독교회는 1908년부터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들을 위해 전도해 온 교회이다. 그런데 100년 이상 일본에서 전도를 해 왔지만 일본이라는 특수한 선교적 상황으로 인하여 재일대한기독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일본 교회들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전도를 해 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일본 전국에 100여 개의 교회와 전도소가 있지만 그 중에 절반 이상은 재정적 자립을 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장로가 있는 조직교회보다 장로를 세우지 못한 미조직교회가 더 많다.
그래서 이곳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하는 목회자들은 당회가 있는 조직교회에서 목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곧바로 일선에 파견되어 목회를 하는 경우가 많다. 전도사나 부목사로 봉사하면서 목회를 배우거나 경험할 여건과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본국으로 연수를 가거나 본국 교회에 부교역자로 봉사할 수도 있고 하고 싶어하는 교역자들이 많지만 여러 교파적인 문제와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본국에서 장기적으로 목회를 경험하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 결과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한 경력들은 많이 있지만 당회를 비롯하여 일반 회의나 교인들을 대하는 현실적 목회적 경험들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갈등과 오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목회의 성공여부가 교회 회의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목회의 성공은 목사와 장로들의 경력의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장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서의 장로에 대하여 알아 본 후에 장로들의 여러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성경에서의 장로
1) 구약
구약의 출애굽기에서 나타나는 장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목격자와 증인들이다(출3:16,
2) 신약
신약성경에 장로(Presbyteros)라는 단어는 65회 등장하는데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그 당시의 최고의결 및 통치기구인 산헤드린 소속의 평신도 대표이다. 그들은 유전을 포함한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며 사회질서를 수호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합세하여 예수를 죽이는데 깊이 관여하였다. 두 번째는 각 지역의 회당 대표들인데 이들은 회당의 행정적인 관료로서 집회를 관장하였으며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설교도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초대교회 지도자들인데 세분하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층에 속한 장로(행11:27-30,
2. 재일대한기독교회에서의 장로란?
재일대한기독교회 헌법에서는 장로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보자. 우선 장로는 교회의 피택함을 받고 목사와 협력하여 치리와 권징을 행한다(헌법 제5장-장로 제28조 장로의 직무). 그리고 장로는 적당한 지식과 통솔의 능력이 있고, 성서 딤전
즉 장로는 목회자가 아니라 교인의 대표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자기의 정체성과 기능을 구분하여 공동체에서 정해진 장로의 역할을 숙지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보자. 이 말씀은 앞으로 논하게 될 소론의 주요 말씀이기도 하다.
[이것은 믿을 만한 말이다.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그는 선한 일을 열망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독은 비난받을 일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잘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않으며 폭력적이지 않으며 온유하며 싸우지 않으며 돈을 사랑하지 않으며 자기 집안을 잘 다스리며 자녀들을 모든 단정함 가운데 복종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이 자기 집안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는가?) 또 개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도 안 된다. 이것은 그가 교만해져서 마귀의 정죄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라야 한다. 이는 그가 비방과 마귀의 덫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디모데전서3:1-7)
그리고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재일대한기독교회는 장로교회가 아니라 장로제도를 도입하여 실행하고 있는 연합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100년이 넘는 역사를 통하여 다양성, 소수성, 연합성을 강조해 온 것이다.
3. 관계를 통한 장로의 자세와 역할
(1) 하나님과의 관계
교회의 문제들은 주인이 누구인가의 싸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인들 보다는 소수의 목회자와 장로들에 의한 주인 싸움과 주도권 싸움으로 인하여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봉사하고 헌신하되 아무리 오랫동안 한 교회를 다녔다 하더라도 주인 노릇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돈 많고 경력과 경험이 많은 사람이 헌금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곳이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그네 정신이 필요하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장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돈과 권력과 정치를 좋아하지 말고 도(道-말씀)를 사모해야 한다. 장로의 경건은 그들의 삶의 자세와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야 하므로 예수의 향기에 목말라 해야 한다. 그래야 말이 많은 장로가 되지 않는다. 말은 교회를 망하게 하지만 말씀은 교회를 성장하게 한다. 그래서 말이 많은 장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은혜로운 간증을 많이 하는 장로가 되어야 한다.
말이 많은 장로는 비록 그 말이 정당하고 올바른 주장이라 할 지라도 교인들에게 불쾌감만 준다. 하지만 신앙의 체험과 은혜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살아있는 하나님을 간증하는 장로가 된다면 그가 비록 세상에서는 배우지 못한 장로라 할 지라도 교인들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게 될 것이다. 장로는 교인들에게 말로 부담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으로 기쁨과 즐거움과 위로를 나타내는 봉사직이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대표기도를 짧게 하는 대신에 개인의 기도를 길게 하라고 한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어떤 장로는 대표기도 할 때마다 설교를 한다. 그 주일에 설교하게 될 말씀을 미리 읽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분석하여 자기 생각과 주장을 교인들에게 알리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를 핑계 삼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장로는 자신의 기도를 길게 하고 공동체의 핵심적인 기도를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때 가능하다. 장로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은 기도를 할 때, 모든 교인들은 그 장로가 기도하는 시간을 목말라 기다리게 될 것이다. 장로의 기도를 기다리는 교인들이 많은 교회는 복되고 은혜로운 교회이다.
이런 장로가 소천(召天)하게 되면 목사와 교인들은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므로 장례식은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전도집회요 가장 소중한 생명말씀 축제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 장로는 정말 잘 죽었어]라는 말을 한다면 그 희생과 봉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군다나 주님 앞에 갔을 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3일 동안 무덤에서만 가만히 누워계시지 않았다. 음부에까지 내려가셔서 노아시대 때 심판을 받았던 사람들까지 만나시면서 전도하셨다. 이 주님의 열심이 고인이 된 장로를 통해서도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무슨 일을 결정하게 될 때, 지금 내가 죽는다면 목회자와 교인들은 얼마나 울어줄까를 고민하는 장로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올바른 믿음과 인격으로 장로직을 충실하게 수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2) 나 자신의 자아와 장로와의 관계
장로의 인격에 교회의 미래가 있다고 한다. 장로가 경력과 경험과 개성과 같은 자아를 내세우면 교회는 힘들어 진다. 사회에서의 전공이 회계사라고 할 지라도 교회에서는 주차 봉사나 쓰레기 줍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전문직 교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로의 역할은 날마다 순교하듯이 자기의 자아를 죽이면서 아름다운 희생과 성숙한 인격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교인이 교회에 다니는 최고 목표는 장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날마다 순교하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바울의 목숨도 하나이다. 그런데 어떻게 날마다 죽을 수 있는가? 이것은 자아를 죽이는 순교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간증인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저 사람은 장로가 되더니 이상해졌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나는 저 장로님처럼 교회 생활과 사회생활을 하고 싶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교인들과의 싸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아와 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3) 목회자와의 관계
목회자도 인간이라서 넘어지기 쉽다. 그러나 목회자가 잘못하면 목회자 만의 죄가 아니라 공동체의 죄가 되고 책임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이단으로 흐르지 않도록 파수꾼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파수꾼이 칼이 오는 것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않고 백성들에게 경고를 주지 않아서 칼이 나와 그들 가운데 누구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 죄악으로 인해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의 책임은 내가 그 파수꾼의 손에 물을 것이다. 사람아, 내가 이스라엘 족속을 위해 너를 파수꾼으로 삼았다. 그러니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서 그들에게 내 경고를 들려주어라](에스겔33:6-7).
목회자 문제는 장로들의 문제와 직결되므로. 목회자를 청빙하고 나서 나중에 <나는 몰랐다, 속았다>고 핑계하지 마라. 모두가 자기 책임이요 교회 공동체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독선적이거나 이단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건강한 외침을 하라.
또한 이미 언급하였듯이 재일대한기독교회는 교파교회가 아니라 연합교회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목회자들이 교파 싸움을 하지 않도록 파수꾼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 선교사와 일본에서 안수 받은 교역자들 간에 갈등과 문제가 있을 때에는 중재와 조정 역할을 감당해야 정치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파수꾼의 역할도 감당하라. 그래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편133:1)의 공동체적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장로가 반석 같은 목회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 목회자와 교회는 힘들어 진다. 장로란 자신의 교회 철학과 신념과 목회 철학을 관철시키는 직분이 아니라 담임 목사의 목회 철학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직분이다. 목사도 장로에 속하지만 목회는 목사가 해야 한다.
아무리 나이가 어린 목회자라 하더라도 목회는 목사가 하게 해야 하며 목회를 목사에게 배우도록 도와야 한다. 젊은 목회자라고 하여 장로가 가르치겠다고 덤벼들면 교회는 갈등과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가 장로에게 목회를 배우면 목회자는 장로와 교인들의 눈치만 보는 목회를 해 나갈 확률이 많다. 이런 일들이 이어지는 교회는 갈라디아교회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형국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교역자를 교회의 모든 회의에 입회(배석)시켜야 한다. 특히 당회에는 반드시 참석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당회를 녹화하여 전교인들이 방청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다. 인자한 얼굴을 가진 장로가 회의만 하면 고함을 지르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그 장로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국회 생방송을 하듯이 일일이 방송하는 것은 어려울 지는 몰라도 부교역자(제 3자)를 당회에 입회시키는 것이 좋다. 그러면 회의를 진행하는 것과 결정하는 일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실재로 부교역자들이 현장에서 봉사하는 실무자이므로 효율적인 교회운영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
더불어 부교역자들은 회의 진행을 배우게 되며 담임목회자가 되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순조롭게 목회를 해 나갈 수 있다. 일석이조이다. 목회자가 실수하고 실패하는 대부분은 이유는 설교라기 보다는 회의인 경우가 더 많다. 설교에 성공해도 회의에 실패하면 무능한 목사로 낙인이 찍혀 사임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부교역자들과 신학생들까지도 반드시 당회와 제직회에 참석시켜야 한다. 그러면 목회자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제직들과 교인들과의 관계도 원활하게 이루어져 나갈 것이다.
나는 여러 장로님들을 경험하였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로가 있다. 어느 날 나보다 갑절이나 연로하신 장로님이 전화를 걸어 왔다. 장로는 지금 교회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 무슨 기도를 해야 좋을까 하고 상담하였다. [목사님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좋을 까요?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떤 말씀을 읽고 기도를 준비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것은 목사가 되어서 장로와의 관계에서 가장 기쁜 경험이었다. 장로와 목회자와의 관계가 이런 관계가 된다면 어떠한 문제들도 해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생명을 걸고 다윗을 도왔던 요나단과 같은 관계와 영적전쟁에서 모세의 양팔을 들어주며 도와서 승리하였던 아론과 훌처럼 관계해 나간다면 올바른 덕이 세워 질 것이다.
(4) 장로들과의 관계
장로는 목회자와 교인들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동료 장로들 간의 관계이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가 목회한다 하더라도 장로들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예수님도 이겨내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하나가 되려고만 하지 말고, 장로들끼리 하나가 되는 것이 더 급선무이다. 모든 장로가 하나가 되면 목회자가 조금 무능하다 하더라도 교회는 은혜로운 공동체가 될 것이다.
(5) 교인들과의 관계
장로는 교인들의 대표이다. 교인들의 의사를 잘 살피고 잘 듣고 목회자에게 올바로 전달하는 연결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생각을 교인들의 생각인 것처럼 전달하지 말아야 한다. 교인들의 올바른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한 가지를 제안한다. 장로들은 예배 전후에 교회입구에서 교인들에게 인사하고 악수하라. 그러면 교인들의 일주일간의 상황을 알 수 있다. 교인들 이름 조차도 모르는 것은 직무유기이다.
교인들에게 인사만 하고 악수만 한다면 조금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교인들의 상황을 알 수 있다. 거기에다 악수를 하면 교인들의 일주일간의 삶을 살필 수 있게 된다. 교인들을 잘 알게 되면 교인들과 신령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면 목사에게만 심방을 청하지 않고 장로들에게 심방하러 와 달라고 요청할 것이다.
장로는 회의하는 사람이 아니라 열심히 교인들을 심방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심방하여 설교하라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위로하고 권면하고 살피고 간호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목회자의 주된 업무인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일을 분담할 수 있다.
또한 장로는 교회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결정과 관리와 감독만 하라. 모든 실무는 안수집사, 권사, 서리 집사에게 맡겨라. 결정 기관이 집행까지 하면 누가 감사를 하는가? 제직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헌법을 참고하면 모든 재정적 실무는 제직들이 해야 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장로들은 헌법을 배우고 장로고시에 합격하여 장로가 되었다. 그런데 감독자들이 실무를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헌법위반임과 동시에 비성경적인 장로이다. 올바른 집행은 교인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게 한다.
(6) 가족과의 관계
장로는 신앙계승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일부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목회자 세습에 대하여 욕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욕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그것은 부자간의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신앙계승은 이루어진 모습이다. 그런데 장로의 자녀들을 보라. 그들이 예수를 믿고 있는가? 교회를 다니고 있는가? 자녀들이 그 장로가 소속된 교회나 재일대한기독교회에 남아 있는가? 장로 자녀들이 재일대한기독교회의 목회자가 되려고 할 때, 감사하고 기뻐하고 환영하는가?
장로는 교인들만 자기 자녀들을 잘 살펴야 한다.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면 할 수록 자녀들이 교회와 멀어지고 있다면 당장 장로직을 휴직하거나 그만 둘 결단도 필요할 것이다. 장로는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승리하여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참고로 장로는 세습 목회에 대해서도 잘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은퇴목사나 명예목사의 이상한 간섭들과 행동에 대하여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세습보다 더 악한 모습은 전임목회자들의 이상한 행동들이 아닌가?
(7) 세상과의 관계
장로는 세상에서 할 일이 없다고 매일 교회로 출근하여 목회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사역의 영역을 명확하게 지켜라. 목사는 직업이지만 장로는 직업이 아니다. 장로는 교회 안에서만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유력한 자가 되어야 한다. 룻의 남편이었던 보아스가 그런 유력한 사람이었다(룻2:1). 보아스 같은 유력한 자란 힘이 있는 사람이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요, 도덕성이 있는 사람이다.
장로는 세상으로 파견된 선교사이다. 이것이 만인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마5;16)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나오도록 해야 한다. 장로는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하겠지만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사람은 장로로 합당하지 않다. 장로는 세상에서의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결론
여러 가지로 많은 관계들을 열거하여 크게 부담이 되겠지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그러면 감당하게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말이 아니라 말씀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귀하게 쓰시고 최후 승리와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시위를 하면 반드시 이 찬송을 부른다고 한다. 모든 관계를 잘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장로들이 이 찬송을 부르면서 자신에게 시위하면서 매일매일 순교하는 자세로 봉사해 나가면 참 좋겠다. 주님의 고난의 영광을 위하여….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일세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찬송 135, 갈보리 산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