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펀하고 시원하게, 붓끝에 장승업의 넋이
河石 박원규 <취화선> 서예가
가히 ‘서화(書畵)계의 드림팀’이라 부를 만하다. 일랑 이종상 서울대 박물관장을 비롯해 박대성, 김선두 화백까지 불러모았으니. 혹여 ‘진품명품’을 감별하기
위함이라고 오해하지 마시라. 조선시대
전설적인 화가 오원 장승업의 일대기를 <취화선>에 담느라 애쓰고 있는 임권택 감독을 돕기 위해서다. 서예가 하석 박원규(55) 또한 ‘드림팀’의 일원이다. 그의
몫은 각종 현판, 주련 등에 쓰일 약 250여점의 글씨. “내가 다 쓰는 건 아니고. 제자들이 도와주니까 가능해요. 한점 고르려면 몇 백장을 써야 하는데,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하석과 임권택 감독과의 만남은 <춘향뎐>
때로 거슬러올라간다. 한 방송사의 명인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를 보고서 임 감독이 프로포즈를 던졌고, “뜻이 있으면
힘껏 도와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대로 하석은 무료 봉사를 선뜻 자원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진 인연. 이로 말미암아 지금 그는 ‘취화선’ 타이틀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다. “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질펀한 느낌도 주면서 술 한 사발 걸치고 갈긴 시원한 초서였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관객이 알아먹기 어려울 테고… 몇 백장 쓰고 나면 임 감독님이 골라주시겠죠.”
하석의 꼼꼼함은 영화작업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한획에도 ‘캐릭터’가 있다고 믿는 그는 육교화방, 일반기와집, 상가 등 각기 다른 공간에 쓰일 서체를 일별해서 제자들에게 일러준다. “입춘대길 넉자도
어느 집이냐에 따라 다르지요. 사대부 명가냐 아니면 주막이냐에 따라서 글자 모양이나 격이 당연히 달라야죠.” 렌즈에 담기지 않을지라도 전문가가 썼다면 철저한 고증이 따라야 한다는게 그의 원칙. <춘향뎐>에서 이도령이 기거하던 방의 병풍에 읽기 좋은 아담한 해서체로 권학문하는 내용의 글귀를 쓴 것도 과거를 앞두고 사서삼경을 읽는 열아홉살 이도령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덧붙인다.
하석이 붓을 잡게 된 계기는 우연에 가깝다. 판사였던 형님 집에 걸려
있던 석당 선생의 붉은 낙관에 반했다는 것. 그때부터 ‘깔쭉깔쭉’
글씨를 썼다는 그는 뒤늦게 전북대 법학과에 진학했지만, 송창 선생
등을 쫓아다니며 서체 다듬는 데만 열중했다. 그의 재능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북도전에서, 그리고 동아미술제에서
대상을 연거푸 수상한 그는 대만으로 3년간 유학을 떠났고, 돌아온 뒤에도 짧은 이력에 개인전을 여는 등 서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해도 거르지 않고 예술가로서의 열정과 고집을 불태우며 18년 동안 작품집을 발간해왔다.
<취화선> 작업이 끝나는 대로 그는 작품집 발간을 위해 100일 ‘동안거’에 들어간다. 이 기간만큼은 인디밴드 활동과 사진 작업을 하는
자식들과의 대화도 거둘 정도이니, 온전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위해 진력하는 셈이다. 올 겨울 그가 작업실인 석곡실에서 씨름할 화두는 목숨 수(壽)자. “삶이라는 게 항상 죽음을 끼고 있는 거니까, 한자
쓰는 데도 소흘히 할 수 없지요.” 지금이야 은은한 커피향으로 가득하지만, 석곡은 곧 진한 묵향을 뿜어낼 것이다.
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
프로필
1947년 생. 1979년 동아미술제 대상 수상. 1988년 서울 백악미술관에서 첫번째 개인전인 河石 漢簡展 개최. 1984년부터 매년 1천부 한정 작품집 간행. 현재 17번째 작품집 발간 현재 성균관대 예술학부 부설 서예전문 과정 출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