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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아름다운 팔대(八臺) 팔경(八景)
▼해운대(海雲臺)의 유래와 자연환경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좌동·우동 일대의 경승지.
해운대구는 동래구와 더불어 조선시대 동래군(東萊郡)에
속하였던 곳으로 부산지방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곳이다.
신라의 유명한 학자이며 문인인 최치원(崔致遠)이 가야산 입산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너무도 경치가 아름다워 동백섬 동쪽 벼랑의 넓은
바위 위에 ‘海雲臺’라고 쓴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산의 절벽이 바다 속에 빠져 있어 그 형상이 누에의
머리와 같으며, 그 위에는 온통 동백나무와 두충나무 그리고 소나무·
전나무 등으로 덮여 있어 싱싱하고 푸르기가 사철 한결같다고
기록될 정도로 알려진 명승지로서 대한팔경의 하나이다.
태종대·몰운대·신선대·오륜대·의상대·겸효대·강선대와 함께
부산팔경에도 속하며, 해운대 자체에도 팔경이 있을 정도로 경치가 수려하다.
현재 해수욕장을 비롯하여 온천, 고급관광호텔 등의 숙박시설 및 위락시설이
고루 갖추어져 있는 우리나라 제일의 관광지·피서지·피한지 중의 하나이다.
▼ 태종대(太宗臺)
힘을 다해 배 후미를 따르지만 과자 한 조각 얻어먹지 못하는녀석들도 있는데요.불평불만하지 않고 계속해서 따라옵니다.
태종대 앞바다를 향해 항해하는 태종대 곤포관광유람선신나는 음악과 함께
관광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면서 관광객들의 기분을 고조시킵니다.
벌써 12월 중순으로 접어들었는데날씨는 화창한 가을 날씨 같습니다.시계가 너무 좋네요.
친구들이 좋아하는 모습에마라토너 전용재도신바람이 났습니다.
저 멀리 영도에서 제일 높은 봉래산(395m) 정상도 보입니다.
주전자를 닮은 주전자섬입니다. 태종대 앞바다의 외로운 돌섬이지요.
오래전 자살바위가 있었던 곳에는커다란 전망대 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수많은 세월을 견뎌낸 바위 기암괴석이라고 해야할 듯합니다. 다양하고 신기한 모습이 탄성을 자아낼 정도입니다.
태종대 바위 위로는 관람로가 조성되어 있어 수월하게 경관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해안의 바위가 마치 빵처럼 보입니다.
직접 가서 봤을 때는 그렇게 크게 보였던 등대 바다에서 보니 아담한 자태입니다.
▲ 부산 앞바다를 지나는 수많은 배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태종대 등대 태종대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는 추억을 만들어 주는 고마운 등대입니다.
기암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태평양
부산 영도 남쪽에 위치한 해안의 넓은 언덕이다. 1969년까지 군사시설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이곳은 4.3㎞의 순환도로를 따라 유원지로
개발되었다. 신라 태종 무열왕이 활쏘기를 즐겼던 곳이라 해서 태종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신하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던 장소였으며 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는 동래 지역에 가뭄이 들면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으로 이용되었다. 울창한 숲과 기암절벽, 탁 트인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내는 태종대는 한 시간여의
산책길을 따라 탁 트인 남해의 경관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한때 ‘자살바위’로 유명했던 신선암은 태종대의 대표적 명소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 우뚝 솟은 바위의 형상이 인상적이다. 승용차의 진입이
금지된 잘 가꿔진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것도 좋지만 관람열차인 ‘다누비열차’를
이용해 각 정류장마다 자유롭게 타고 내리며 태종대의 명소들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전망대 정류장에서 내려 태종대 앞바다를 조망한 후 등대로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산책로를 따라 가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다. 태종대를 돌아본
후 태종 무열왕의 팔준마가 물을 마셨다는 연못의 전설을 지닌 해변의
절경 감지자갈마당을 둘러보거나 지하 600m에서 끌어올린
식염온천인 태종대 온천에서 여행의 피로를 풀 수도 있다.
▼ 신선대 (神仙臺)
사진은 신선대 전망대 에서 본 부산의 신선대부두 전경입니다.
길을 더 가면 나오는 신선대 전망대.
영국 브로턴 함장 상륙기념비.
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에 있는 신선대(臺).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9호. 부산만(釜山灣)과 수영만(水營灣)
사이에 길게 돌출한 반도의 남단부 바닷가에 작은 돌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 산을 이 고장사람들이 신선대라고 부른다. 산에 올라서서 앞을 바라보면 부산만
너머로 조도(朝島)가 보이고, 동남쪽으로는 오륙도와 흑석도 등 수려한 바다의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이 산에는 병풍대(屛風臺)와 의기대(義妓臺)가
있어서 바다의 경관과 함께 경승지를 이룬다.
옛날에는 봉우리 위에 무제동이라는 큰 바위가 있어서
신선과 백마(白馬)의 발자국이 있었고, 바위 가까이로 다가서면
풍악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해진다.병풍대는 산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의 절경을 즐겨 찾아왔던 풍류객들이 새겨놓은 글과
글씨가 많고, 신라 때 최치원(崔致遠)이 남긴 ‘神仙臺’라는 친필각자가
있었다고 한다. 의기대는 임진왜란 때 왜적들의 화를 피하여
기생들이 바다로 몸을 던졌던 자리로 알려지고 있다.
부산광역시기념물 제27호. 낙동강 하구와 바다가 맞닿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부산시의 중심가에서 서남쪽으로 약 16㎞ 떨어진
다대포와 인접하고 있으며 그 넓이는 14만평에 이른다.
이 일대는 지형상의 여건으로 인하여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어,
모든 것이 시야에서 가리워지기 때문에 ‘몰운대’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다대포와 몰운대는 조선시대 국방의 요충지로서 임진왜란 때는
격전이 벌어졌으며, 이순신(李舜臣)의 선봉장이었던 정운(鄭運)도 이
앞바다에서 500여척의 왜선을 맞아 힘껏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그는 이곳의 지명을 몰운대라 한다는 말을 듣고 ‘운(雲)’자와 자기
이름의 ‘운(運)’자가 같은 음이라는 점에서, “내가 이 대에서
죽을 것이다(我沒此臺).”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정운을 위한 사당이 세워졌다고 하며 지금은
그의 순절(殉節)을 기리는 유적비가 서 있다. 이 곳은 16세기까지는
몰운도(沒雲島)라는 섬이었으나, 그 뒤 낙동강의 물에 밀려 내려오는
토사의 퇴적으로 인하여 다대포와 연결되어 육지가 되었다고 한다.
오륜대의 명칭 유래는 기록상에서 여러 가지로 전한다. 먼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고적조에는 “오륜대는 동래부의 동쪽 20리의
사천(絲川)이 있었는데, 대에서 4~5보 가량으로 시내[溪]에 임하고 암석이
기이하여 구경할 만하다. 속전에(俗傳)에 이르기를 사람이 대 주위에 사는데 오륜을
다 갖춘 까닭에 이같이 이름 지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옛날 오륜대를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갖춘 다섯 명의 노인이 풍경을 돌아보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으로 전한다. 『동래군지(東萊郡誌)』[1937]에는 “오선감여가
(五仙堪輿家)가 말하기를 오륜이라는 것은 모양은 월륜(月輪)과 같아
내[川]에 잠겨 있는데 무릇 다섯 군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륜대는 현재 오륜대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호숫가의 절벽
형태로 남겨져 있다. 오륜대 저수지 부근이 수원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개발이 제한되어 대중교통의 접근이 불편하나, 저수지
일대에 잉어회, 장어구이, 오리고기, 닭백숙, 민물고기 매운탕을 파는
음식점들이 즐비하여 주말이면 시민들이 많이 찾는 위락지가 되었다.
주변에는 오륜대 고분군과 부산가톨릭대학교, 오륜대 한국 순교자 박물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1964년 상수원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다가
45년 만인 2010년에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두구동 스포원 파크에서 시작해
상현 마을을 거쳐 오륜대까지 이어지는 회동 수원지[오륜대
수원지의 옛 이름]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 의상대(義湘臺)
의상대에 올랐습니다. 바위의 품이 아주 넓고 주변 조망도 뛰어 납니다.
미륵사에서 서쪽 방향(화장실 방향)으로 미륵봉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습니다.
미륵봉에도 작은 크기의 돌샘이 있습니다.
미륵봉에서 고당봉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바위입니다. 탑바위라고 불러도 좋을 듯 싶습니다.
미륵사에서 서쪽 방향(화장실 방향)으로 미륵봉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습니다.
미륵봉에도 작은 크기의 돌샘이 있습니다.
고당봉 아래에는 기도처인 고모당이 있구요.
고당봉의 정상부입니다.
고당봉에도 조그만 크기의 돌샘이 있습니다.
▲ 고당봉 표지석입니다. 오후 늦게 올랐기때문에 산정에서 호젖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금정산에 있는 바위.
1746년(영조 22) 동계 승려가 만든 『범어사 창건 사적
(梵魚寺創建事蹟)』에 범어사의 창건 설화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흥덕왕 때 왜구의 침입이 있어 왕이
근심하였는데,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화엄 신중(華嚴神衆)과
40법체(法體), 제신(諸神) 및 천왕(天王)이 호위하고 있는 태백산의 의상
대사(義湘大師)를 초빙하여 동해 해변에 있는 금정산의 바위 아래에서 칠일
밤낮으로 화엄 신중을 독송하면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흥덕왕은 사신을 보내 의상 대사를 맞이하였고, 의상 대사와 함께
친히 금정산에 가서 칠일 밤낮을 독경하니 왜구가 격퇴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금정산 아래에 범어사를 창건하였다.”
범어사 창건 설화에 보이는 금정산 바위는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의상 대사가 바로 의상대(義湘臺)에서 왜구의
침입을 걱정하여 동해를 바라보며 국태민안을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 바위를 의상대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의상대는 금정산의 금정 팔경(金井八景) 가운데 하나로 꼽힐
정도로 풍광이 수려하다. 금정 팔경이란 금정산 주변의 풍치림과
돌, 물, 청량한 바람 등과 같은 자연이 이루어내는 풍경과 정취 여덟
가지를 선정한 것이다. 어산노송(魚山老松)은 어산교의 노송,
계명추월(鷄鳴秋月)은 범어사 계명암의 가을 달, 청련야우
(淸漣夜雨)는 범어사 청련암 대밭의 밤비 소리, 대성은수
(大聖隱水)는 범어사 대성암 개울물 소리, 내원모종(內院暮鐘)은
범어사 내원암에서 듣는 저녁 종소리, 금강만풍(金剛晩楓)은
범어사 금강암의 단풍, 의상망해(義湘望海)는 의상대에서 보는
동해, 고당귀운(姑堂歸雲)은 고당봉에 걸린 구름을 말한다.
1740년(영조 16) 편찬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보면
의상대를 “금정산 산정(山頂)의 일출을 보는 곳”이라고
하였다. 역대 동래 부사들이 이곳을 즐겨 찾아 절경을
노래한 한시(漢詩)가 전해 오고 있다.
▼ 겸효대 (謙孝臺)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배산에 있음
1366년(공민왕 15)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당시의 실력자
신돈(辛旽)을 탄핵하였다가 살해될 뻔하였으나, 이색(李穡)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동래 현령으로 좌천되어 부임한 정추
(鄭樞)의 겸효대(謙孝臺)에 관한 시가 『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 정추는 동래 현령으로
있으면서 지금의 배산(盃山) 위에서 신선(神仙)처럼 사는
김겸효를 자주 만나 가슴을 터놓고 지냈다. 동래 현령으로
좌천되어 온 정추는 속세를 벗어난 김겸효의 신선 같은 삶이
그리워 현령 일을 보는 여가를 타서 김겸효를 자주 찾은 것이다.
당시 겸효대는 경치가 뛰어나 시인과 묵객들의
유상처(遊賞處)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겸효대에 관해 전하는 사료는 『동래부지(東萊府誌)』,
『동국여지승람』,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 등이 있는데,
겸효대의 위치가 동래현 남쪽 약 2㎞[5리]에 있고, 신선인
김겸효가 노닐던 곳이라 하여 겸효대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배산은 금련 산맥에 속하는 산으로 금련산에서
북쪽으로 약 1.5㎞에 위치한다. 잘매산 또는
잘미산이라고도 한다. 해발 고도 254m인 독립 구릉성
산지로, 형태는 종순형(從順形)이다. 안산암질 암석으로
이루어진 배산은 산지의 고도와 규모에 비해 정상 부근의
경사가 급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북쪽의 산기슭은
수영강으로 향하면서 완만해지며 작은
선상지(扇狀地)로 이어진다.
산 정상과 능선에는 규모는 작으나 성곽 모양의
토루(土壘)가 형성되어 있고, 곳에 따라 토루에서
떨어져 나온 애추(崖錐)가 생성되어 있다. 배산은
구성 암석이나 지형적인 특징으로 보아 본래 금련
산맥에 이어지는 산지이었으나 오랜 지질 시대의
삭박(削剝) 작용에 의해 해체되면서 지금은 독립된
산지로 남아 있다. 동쪽에는 배산에서 삭박 작용으로
분리된 해발 고도 80m의 토곡산이
수영강과 평행하게 놓여 있다.
겸효대가 있는 배산은 모양이 술잔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생겨 ‘배산(盃山)’이라고 불렀다. 주변에
다른 산의 능선은 없고 도심의 주택가 한가운데
외롭게 솟아 있다. 배산 일대에서 연산동 고분군이 발견되었고,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인 배산성 터[盃山城址]가 있다.
▼ 이기대 (二妓臺)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산 1번지 해안에 있음
이기대(二妓臺)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먼저 『동래 영지(東來營誌)』[1850]에는
“좌수영에서 남쪽으로 15리에 있으며 위에 두 기생의
무덤이 있어서 이기대라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경상 좌수사가 두 기생과 풍류를 즐기던
장소라 하여 이기대라고 하였다고도 전한다. 앞의
두 견해에 대해, 옛날 관리들은 가는 곳마다 연회를
했으며, 천민에 속했던 두 기생의 무덤이 있어 붙인
이름으로는 보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한복(崔漢福)[1895~1968, 수영의 향토 사학자]의
의견은 다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수영성을 함락시키고
이곳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수영의 의로운 기녀가
자청해 연회에 참가해 술에 취한 왜장을 안고 물속에
떨어져 죽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원래
의기대(義妓臺)가 옳은 명칭이나 후에
이기대가 되었다고 한다.
이기대는 장산봉[225m]에서 동쪽 바닷가 끝에
자리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산 1번지 해안
일대에 있으며, 2㎞에 달하는 기묘한 바위로 이루어진
암반으로 평면에 가까우면서 비스듬히 바다로 빠져드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기대는 청정 해안이자 분지형
자연 습지 지역으로 다양한 생태계를 보존하고 있으며,
특히 반딧불이를 볼 수 있어 이기대 반딧불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주변에는 신선대(神仙臺)와
오륙도(五六島)가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 갈메기
문성재 노래
지금은 그 어디서 내 생각 잊었는가
꽃처럼 어여쁜 그 이름도
고왔던 순이 순이야
파도 치는 부두가에
지나간 일들이 가슴에 남았는데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정녕 나를 잊었나
◈
지금은 그 어디서 내 모습 잊었는가
꽃처럼 어여쁜 그 이름도
고왔던 순이 순이야
그리움이 물결치며
오늘도 못잊어 내 이름 부르는데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벌써 나를 잊었나
2016-02-0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