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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14권
가선대부 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공주목사 이공의 신도비명 서문을 아우르다.[嘉善大夫忠淸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廵察使公州牧使李公神道碑銘 幷序]
고(故)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이공(李公)을 장사 지낸 지 3년 만에 손자 규응(奎應)이 종부형(從父兄) 규량(奎亮)의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저희 조부께서는 포의 시절부터 당세의 현사대부들과 서로 친하게 지냈지만 특히 선생님께서 저희 조부를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조부의 묘에 어찌 선생님의 명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선생님께서도 연로하셨으니 저희 조부를 위해서 묘에 명을 지어주시지 않는다면 조부의 아름다운 덕을 후세에 발양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전에 한 소인배가 포의(布衣) 이정(李涏)이 상언한 일로 인하여 나를 불측한 화에 빠뜨릴 것을 도모하여, 선왕께 고해서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바닷가로 유배를 보낸 일이 있었다.
옥에서 나오자 그 소인배가 더욱 화를 심하게 내면서 유언비어를 지어내어 상의 노여움을 격발시켰다. 그러자 상이 대간(臺諫)에 지시하여 빨리 논의하여 다시 심문하라고 하였는데 대간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곧바로 대사헌(大司憲) 정광충(鄭光忠) 등 12인을 내치고 그 관작을 삭탈하였으며 대사간(大司諫) 박사눌(朴師訥) 등 13인을 유배 보내니 조정이 공포에 떨었다.
공은 탄식하며 “대신을 만나보지 않으면 아무개의 죽음을 구제하기에 부족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대신을 만나서 “문장은 국가의 정화인데 지금 조정에서 만일 황 아무개를 죽인다면 문장은 여기에서 끊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이 감동하여 조용히 “아무개는 문장이 있습니다.”라고 상언하였다.
선왕이 이로 말미암아 마음으로 애석히 여겨 이윽고 나를 특별히 석방하고, 5년이 되지 않아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ㆍ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제수하였으니 매우 성대한 은덕이었다. 그러나 온 조정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공의 한마디 말이 아니었다면 어찌 대신을 감동시키고 명주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할 수 있었겠는가?
예부터 군자가 유언비어를 당하여 죄 없이 죽는 일은 진실로 많았다. 공은 힘이 미약한 하대부(下大夫)였는데도 남의 환란을 위급하게 여겨, 기미를 살피지도 않고 함정 속에서 구해주었으니 어찌 어진 분이 아니겠는가? 지금 공이 이미 돌아가시고 규응이 공을 위하여 명을 구하는데 나도 늙어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는지라, 비록 사양하고자 하여도 그리 할 수 없다.
공의 휘는 수득(秀得)이고 자는 중오(仲五)이며 본관이 한산(韓山)이니, 문정공(文靖公) 색(穡)의 12세손이다. 증조(曾祖) 휘 덕사(德泗)는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태연(泰淵)은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냈다.
부친 휘 만직(萬稷)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고 모친 김씨(金氏)는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 익추(益秌)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 생원시에 합격하고 영묘 12년에 제릉 참봉(齊陵參奉)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면직되었으나 또 휘릉 참봉(徽陵參奉)에 보임되었다.
자리를 옮겨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가 내시교관(內侍敎官)에 고쳐 임명되었고, 후에 다시 의금부로 들어가서 도사가 되었다가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로 승진하였다.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를 거쳐 의흥 현감(義興縣監)으로 나갔고 4년이 지나 임천 군수(林川郡守)로 승진하였으나 4년 만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호조로 들어가 좌랑(佐郞)이 되어《정례(定例)》를 수찬하는데 참여하였다. 인천 부사(仁川府使)에 제수되었다가 책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직(호조좌랑)에 그대로 유임되었다. 또 공주 판관(公州判官)으로 나가게 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고,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을 거쳐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나갔다가 겨우 몇 달 만에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승진하였다.
공은 수령이 되어 의옥(疑獄)을 잘 처결하였다. 임천군(林川郡)의 여자 숙매(叔梅)가 몰래 무인(武人) 정만주(鄭晩周)와 간음을 하고는 결국 지아비 정창혁(鄭昌爀)을 죽이고 그 자취를 감추려고 이름을 선단(仙丹)으로 바꾸었다.
공은 숙매가 지아비를 살해하였으니 형법상 참형에 해당한다고 여기고, 철저히 조사하여 그 정상을 알아내어 법대로 처리하기를 청하였다. 관찰사가 놀라 말하기를 “군수의 정밀함과 민첩함, 엄혹함이 아니었다면 옥사를 어찌 이와 같이 결단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이에 54주(州)의 의옥(疑獄)을 모조리 그에게 맡기니 공은 이로써 이름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서산군(瑞山郡)의 백성 안만균(安萬均)이 살해를 당하였는데 범인을 잡지 못하였다. 공은 “범인을 잡으려면 멀리 볼 필요가 없으니 마치 아침 안개 속에서 소를 잃었을 경우 그 소리만 들리고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지금 추관(推官)이 범인의 정상을 알지 못하고 아침 안개 밖에서 구하니 종적을 찾지 못할 뿐 아니라 또 장차 범인을 놓쳐버릴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에 옥사가 해결되자 관찰사가 공의 영명함에 탄복하였다.
옥천군(沃川郡)의 여자 이순(李紃)이 정원득(鄭元得)과 간음을 하고 그와 함께 지아비 김인건(金仁建)을 살해하였다. 공은 “음부(淫婦) 이순이 김인건에게 개가하고 또 정원득과 몰래 간음을 하여 함께 김인건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원득이 이미 옥중에서 죽었으니 이순은 곧 협박을 못 이겨 따랐을 뿐인데 어찌 족히 수악(首惡)과 함께 죽일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관찰사 역시 그렇다고 여겼다. 호서인(湖西人)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공이 옥사를 처리하는 솜씨는 비록 옛날의 양이천섬(良二千石)이라도 이보다 낫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청주 목사에서 내직으로 들어와 종부시(宗簿寺)의 주부(主簿)가 되었고, 선혜청(宣惠廳)에서 공을 뽑아 낭청으로 삼아 영남(嶺南)을 관장하게 하였다. 드디어 을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 참지(兵曹參知)가 되었으며 승정원으로 들어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이 문간공(李文簡公)이 국정을 잡고 있을 때 공을 경상도 관찰사로 천거하려 하였는데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자가 있어 극력 저지하며 말하기를 “이 아무개는 갓 급제한 사람일 뿐이니, 갑자기 관찰사로 삼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문간공이 이에 그만두었다.
공은 또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고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얼마 뒤에 경주 윤(慶州尹)으로 나갔다. 당시 영남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공이 당도하여 창고의 쌀 4천 석을 내어서 백성들을 구휼하니 영묘가 말을 하사하며 칭찬하였다.
이윽고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 참의가 되었고, 오랫동안 자리에 있다가 우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忠淸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ㆍ순찰사(廵察使)ㆍ공주목사(公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그때 마침 조정에서 옛 관찰사를 유임시키니 공은〔충청도 관찰사로 나가지 못하고〕 결국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상이 대신에게 묻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누가 좋겠는가?”라고 하자 대신이 공을 천거하니 상이 매우 기뻐하였다. 대신이 말하기를
“이 아무개는 나이가 많은데 어떠실지요?”라고 하니 상이 말하기를 “앉아서 변경의 문을 진정시키는 일인데 연로한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고 하고는 드디어 제수하였다.
그러나 공은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있다 또 우승지에 제수되었다. 영묘가 한번은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에 납시어 신하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아무개가 낭관일 때에 벌써 내 이미 그의 사람됨을 알았는데 지금 이 아무개가 유악에 출입을 하고 보니 그 명민함과 근실함을 더더욱 알겠노라.”라고 하였다.
조재호(趙載浩)가 말 잘못한 것으로 인해서 죽을죄에 걸렸을 때 춘천 사람 가운데 체포되어 하옥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공이 부사가 되자 상이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춘천 사람들이 편히 지내지 못하여 내 매우 근심스러웠다. 그대는 빨리 가서 그들을 회유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공이 명을 받들고 그날로 관직에 나아가 백성들은 안정시키니 몇 달이 지나서 부가 편안해 졌다. 임기가 차서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 참의가 되었으나 나이 70세가 되었는지라,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그 후에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면직되고 물러나 9년 동안 공주(公州)에 살면서 벼슬을 제수하는 명을 모두 고사하였다.
영묘가 하교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여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진출하였고, 형조 참판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공은 사람됨이 맑고 굳세고 질박하고 진중하였으며 인륜을 좋아하고 붕우에게 돈독하였다. 환란에 임해서 배반하는 바 없었고, 마음을 다하여 의를 이루었으며, 남이 당한 화(禍)를 풀어주지 못할세라 염려하였다.
전에 문간공(文簡公)이 재상으로 있을 때에 원한이 있는 집에서 어떤 일로 공을 모함하려고 하였다. 이에 노파를 시켜 저자거리에서 “이상공이 내 사위를 죽이고 내 딸을 빼앗으려고 하였다.”라고 하면서 가슴을 치며 울고불고 마지않도록 하였다.
그러자 다음 날 지평(持平) 조종부(趙宗溥)가 문간공을 탄핵하니 상은 형조에 명하여 그 사건을 조사하라고 하였다. 공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상공이 어찌 죄가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어떤 이가 공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이상공을 비방하는데 족하가 힘을 다해 그를 도우니 화를 입을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상공과 친하여 마음으로 그의 원통함을 알거늘 이를 풀어주지 못하고 도리어 사람들과 함께 그를 못된 곳으로 밀어 넣어 죄에 빠트리는 것을 저는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조 판서 조공(趙公) 영국(榮國)이 그 소리를 듣고 한숨을 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공은 참으로 군자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전리(田里)에 있다가 을미년 4월 7일에 집에서 작고하니 향년 79세였다. 그해 6월 9일에 공주(公州)의 일신(日新)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여 사물을 잘 다루었으며, 개연히 당세에 뜻이 있었으나 만년에 가서야 비로소 과거에 합격하였다.
문간공(文簡公)은 그가 쓰일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번번이 그를 꺼리는 사람들에 의해 억제를 당하여 안으로 조정에 둘 수 없었고 밖으로 번진에서 능력을 시험할 수도 없었으니 아, 애석하도다. 배필은 정부인(貞夫人)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감역(監役) 석로(錫老)의 딸이다.
공은 자식이 없어 그 형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휘 수보(秀輔)의 차자(次子)인 사홍(思弘)을 후사로 삼았고, 사홍이 일찍 죽어 또 자식이 없자 그의 형인 사중(思重)의 차자를 후사를 삼았으니 이가 곧 규응(奎應)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이씨가 한성에 봉해진 것은 / 李封韓城
문정공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 自文靖始
문정에게 후손이 있었으니 / 文靖有孫
이 관찰사였네 / 維觀察使
단묘가 손위하자 / 端廟遜位
물러나 벼슬 않고 지내시니 / 退居不仕
공은 남은 공열을 받들어 / 公承遺烈
개결하기가 숫돌 같았네 / 潔行是砥
그 벗이 누구인가 / 其友爲誰
문간공이니 / 曰文簡公
산과 물을 함께 다니며 / 山攀水游
술과 안주를 함께 하였네 / 樽俎與同
영묘께서 태평한 정사를 펴심에 / 英廟垂拱
문간공 높이 등용되었고 / 文簡登崇
공도 을과에 급제하여 / 公擧乙科
궁중에서 임금을 모시게 되었네 / 遂侍王宮
말은 간명하였고 / 其言則簡
뜻은 어찌 그리 확고하였는지 / 何志之約
강직하여 아유하지 않았고 / 侃侃不諛
부끄러운 기색 가지지 않았네 / 而色無怍
시운이 쇠퇴하여 / 時運之頹
요인(妖人)들이 함께 일어나니 / 羣妖並作
문간공 참소에 걸려 / 文簡罹讒
구학으로 물러나셨네 / 屛于丘壑
공은 그의 원통함을 안타까워하며 / 公閔其寃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 不畏芒刃
붙들어주고 도와주며 / 扶之右之
그 의리 드높았네 / 惟義之峻
공의 나이 늙었으니 / 公年旣老
어찌 높은 자리 나아가길 구하였으랴 / 豈求榮進
초야의 옷 입고 돌아와 / 野服以歸
조정에 들지 않았네 / 乃絶朝覲
꽃은 섬돌을 덮었고 / 花覆賓階
대나무는 문을 에워쌌으며 / 竹圍于扃
집안사람들 엄숙하여 / 家人肅肅
공정(公庭)에 있듯 하였네 / 如在公庭
천명을 알아 후회 없이 / 知命靡悔
편안함을 누리셨나니 / 綏此康寧
길이 후세에 남기고자 / 詒于百世
묘문에 명을 새기노라 / 墓門有銘
<끝>
[註解]
[주01] 가선대부 …… 이공 : 이수득(李秀得, 1697~1775)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오(仲五)이다. 1736년(영조12)에 제릉 참봉
을 지냈고, 청주 목사로 있을 때에는 의옥(疑獄)을 잘 다스린다고 하여 충청도 관찰사가 54주(州)의 옥을 모두 그에게 맡겼다.
1753년(영조2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1759년 충청 감사가 되고, 1766년 승지로 제수되었으며, 1769년 대사간을 거쳐
1773년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그 뒤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지만 병으로 사직하고 공주에 내려가 여생을 마쳤다.
[주02] 전에 …… 있었다 : 황경원의 친척 이정(李涏)이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손위(遜位)할 때의 일을 거론하다가 불경죄(不敬罪)로 친
국을 받아 물고되자 황경원이 그의 상언(上言) 내용을 산삭해주었다는 죄로 연좌되어 거제도에 위리안치된 사건을 가리킨다. 실록
에서는 홍인한이 황경원을 해치려고 했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어, 여기서 소인배도 홍인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영조실록 37년 9월 9일》
[주03] 이에 …… 떨었다 : 영조가 황경원의 일과 관련하여 발계(發啓)하지 않았다고 하여 대신들을 삭직하고 문외 출송한 일을 가리킨다.
발계는 의금부에서 처결한 죄인에 대해 미심쩍은 점이 있을 적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이를 다시 조사하여 아뢰는 것을 뜻한다.
《영조실록 37년 9월 20일》
[주04] 의옥(疑獄) : 증거가 불충분하여 쉽게 결단할 수 없는 옥사를 말한다.
[주05] 협박을 …… 있겠는가 : 원문은 ‘脅從’으로, 남의 위협에 의해 부득이 죄를 같이 짓는 것을 이른다. 《서경(書經)》 〈윤정(胤征)〉에
“괴수는 섬멸하되 협박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말라.〔殲厥渠魁, 脅從罔治.〕”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 경우 관대하게
처벌했다.
[주06] 양이천섬(良二千石) : 선정(善政)을 베푸는 수령(守令)이라는 말이다. 중국 한대(漢代) 태수(太守)의 녹봉(祿俸)이 2천 석이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한서(漢書)》 권89 〈순리열전(循吏列傳)〉에 “서민이 향리에서 안정을 취하며 탄식과 근심이 없게 하려면, 정치
와 송사(訟事)가 공평하게 잘 다스려져야 하는데, 나와 함께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바로 양이천섬일 뿐이다.[庶民所以安其田
里, 而亡歎息愁恨之心者, 政平訟理也, 與我共此者, 其唯良二千石乎.]”라는 선제(宣帝)의 말이 실려 있다.
[주07] 선혜청(宣惠廳)에서 …… 하였다 : 선혜청(宣惠廳)은 선조 때 실시된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에 따라 대동미, 대동포 등의 출납을
맡은 관아이다. 도제조(都提調)와 제조ㆍ낭청(郎廳) 등의 관직이 있었다.
[주08] 이 문간공(李文簡公) : 이천보(李天輔, 1698~1761)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의숙(宜叔), 호는 진암(晉庵), 시호는 문간(文
簡)이다. 1739년(영조15)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40년 정자가 되고 교리ㆍ헌납ㆍ장령 등 언관직을 역임한 뒤 1749년
이조 참판에 올랐다.
그 뒤 이조 판서ㆍ병조 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고 영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176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장헌세자
(莊獻世子)의 평양 원유사건(遠遊事件)으로 책임을 느끼고, 음독 자결하였다. 저서로 《진암집》이 있다. 황경원ㆍ남유용ㆍ오원 등
과 영조조 4가로 불리었으며 특히 황경원과 친하였다.
[주09] 의소세손(懿昭世孫) :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정조의 친형이기도 하다.
출생 후 곧바로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1752년(영조28) 3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였다.
[주10] 조재호(趙載浩) : 1702~1762.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대(景大), 호는 손재(損齋)이다. 1739년(영조15) 우의정 송인명(宋
寅明)의 천거로 세자시강원에 등용되었다. 그 뒤 홍산 현감(鴻山縣監)으로 있으면서 춘당대시(春塘臺試)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
승지로 특진되었고, 이어 경상도 관찰사. 이조 판서 등을 거쳐 1752년 우의정이 되어 《천의소감(闡義昭鑑)》의 편찬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759년 돈녕부 영사로 있으면서 계비(繼妃)의 책립을 반대한 죄로 임천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 춘천에 은거하였다.
1762년 장헌세자(莊獻世子)가 화를 입게 되자 그를 구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오히려 역모로 몰려 종성으로 유배, 사사되었
다. 저서로 《손재집》이 있다.
[주11] 문간공(文簡公)이 …… 하였다 : 문간공은 이천보(李天輔)이다. 당시 지평 조종부(趙宗溥)가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지아비를 병
들어 죽게 하였다고 하면서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를 탄핵하였다.
그 내용은 이천보가 여염의 강성(姜姓)을 가진 사람의 아내가 자색이 있는 것을 보고 지아비가 멀리 나간 것을 알고는 부정한 방법
으로 겁주어 데려다가 첩을 만들고 그 지아비가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말을 듣고는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포장(捕將) 정찬술
(鄭纘述)에게 분부하여 때려죽이라고 하였으나, 정찬술이 그 억울함을 알고 기꺼이 실행하지 않으니, 다른 일을 꾸며서 파직하도록
하고 결국 죽게 하였다는 것이다. 《영조실록 30년 11월20일》
[주12] 조공(趙公) 영국(榮國) : 조영국(趙榮國, 1698~1760)으로,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군경(君慶), 호는 월호(月湖). 시호는 정헌
(靖憲)이다. 헌납ㆍ교리ㆍ부제학ㆍ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1746년 우승지로 정조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 참
판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750년 균역청이 설치되자 당상관이 되어 결미절목(結米節目)을 제정하는 등 조세 운영의 합리화에 공헌하였다. 그 뒤 대사헌ㆍ동
지의금부사, 이조ㆍ공조의 참판을 거쳐, 균역청당상으로서 세제 개혁에 발휘한 실력이 인정되어 1752년 호조 판서에 특진되었다.
이어 한성부 판윤이 되어 도성의 개천을 준설하였고, 이듬해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1755년 찬집당상으로 《천의소감(闡義昭
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천시(天時)ㆍ지리(地利)ㆍ농기(農器)ㆍ인사(人事)ㆍ수리(水利)ㆍ부종(付種)ㆍ수차(水車)의 중요성을
역설한 농서, 《농사총론(農事總論)》을 지었다.
[주13] 문정에게 …… 지내시니 : 관찰사는 이색의 증손으로 사헌부장령ㆍ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ㆍ봉상시사(奉常寺事)ㆍ이조 참의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이축(李蓄 1402~1473)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축은 세조의 왕위찬탈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주14] 태평한 정사 : 원문은 ‘垂拱’이다. 《서경》 〈무성(武成)〉에 나오는 말로, 성군이 옷을 늘어뜨리고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는데도 세
상이 잘 다스려진다는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뜻하는 말이다. <끝>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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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嘉善大夫忠淸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廵察使,公州牧使李公神道碑銘。幷序
故忠淸道觀察使李公旣葬之三年。孫奎應。以從父兄奎亮之狀。來謂景源曰。吾祖自布衣時。與當世賢士大夫相友善。而獨夫子知吾祖者爲最深。吾祖之墓。烏可無夫子之銘乎。今夫子年已老矣。不爲吾祖銘其墓。則無以發揚德美於後世也。景源曰。吾何敢辭。往者小人。因布衣李涏上言。謀所以陷吾不測。乃告于先王而逮繫之。流于海中。旣出獄。小人甚恚。遂爲飛語。激上之怒。諷臺諫。趣論更問。臺諫不從。於是立黜大司憲鄭光忠等十二人。削其官爵。流大司諫朴師訥等十三人。廷中震恐。公歎曰。不見大臣。不足以救某之死。乃見大臣而語之曰。文章。國之精也。今朝廷如殺黃某。則文章自此絶矣。大臣感動。乃從容爲上言。某有文章。先王由是心惜之。已而特釋。不五年。授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甚盛德也。然廷中震恐之際。微公一言。則何以感動大臣。而開寤明主之心邪。自古君子遭飛語。無罪而死者誠多矣。公以眇然下大夫。急人之難。不見幾微。而拯諸陷穽之中。豈不賢哉。今公已卒。而奎應爲公求銘。吾老矣。朝夕將死。雖欲辭。不可得也。公諱秀得。字仲五。韓山人。文靖公穡十二世孫也。曾祖諱德泗。義禁府都事贈吏曹參判。祖諱泰淵。平安道觀察使。父諱萬稷。江原道觀察使。母金氏。繕工監奉事益秌之女。公少擧生員。英廟十二年。補齊陵參奉。未幾。免。又補徽陵參奉。遷爲都事義禁府。改內侍敎官。其後復入義禁府。爲都事。陞典牲署主簿。由翊衛司司禦。出監義興縣。居四年。陞林川守。四年。棄官而歸。入戶曹爲佐郞。與修定例。除仁川府使。以書未完。仍前職。又出爲公州判官。辭不赴。由敦寧府判官。出爲淸風府使。纔數月。陞淸州牧。公爲吏善斷疑獄。林川郡女子叔梅。陰姦武人鄭晩周。遂殺其夫鄭昌爀。欲諱其迹。改名仙丹。公以爲叔梅弑夫。法當斬。乃窮治得其情狀。請寘法。觀察使驚曰。非郡守精敏刻深。則決獄何能如是哉。乃悉以五十四州疑獄歸之。公以是名聞王朝。瑞山郡民安萬均。爲人所殺。而賊不得。公以爲欲求其賊。不必遠觀。如失牛朝霧之中。聞其聲。不見其形。今推官。不知賊情。求之於朝霧之外。則不惟不得蹤跡。又將失之。其後獄成。觀察使服公之明。沃川郡女子李紃。姦鄭元得。與殺其夫金仁建。公以爲李紃淫婦。改適仁建。而又與元得陰姦。同殺仁建。然元得旣死獄中。則李紃直脅從耳。何足與首惡同誅乎。觀察使亦以爲然。湖西人相與言曰。李公決獄之術。雖古之良二千石。不能過也。自淸州入爲主簿宗簿寺。宣惠廳差公爲郞。管嶺南。遂擧乙科。陞通政。參知兵曹。入承政院。爲同副承旨。李文簡公秉國政。欲擧公爲慶尙道觀察使。有不悅者力沮之曰。李某及第屬耳。不可遽爲觀察使。文簡乃止。公又以兵曹參議。爲左副承旨。由掌隷院判決事。遷司諫院大司諫。已而。出爲慶州尹。嶺南大饑。公旣至。出其廩米四千石。以救其民。英廟賜馬以奬之。已而。入爲刑曹參議。居久之。由右承旨。拜忠淸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廵察使,公州牧使。會朝廷仍舊觀察。公遂除禮曹參議。上問大臣曰。誰可爲東萊府使者。大臣擧公。上甚喜。大臣曰。李某年老奈何。上曰。坐鎭邊門。雖老何傷。遂授之。公辭不赴。已而。又拜右承旨。英廟嘗幸懿昭世孫墓。顧謂左右曰。李某爲郞官時。予已知其爲人矣。今李某出入帷幄。益知其明敏謹愼也。趙載浩以言坐死。春川人逮繫甚衆。公爲府使。召見。下敎曰 。比者。春人不寧居。予甚憂之。爾趣行而懷柔焉。公承命。卽日之官。輯綏士衆。居數月。府中帖然。秩滿。入爲戶曹參議。以年七十。上疏辭。其後除工曹參議。以病免。退居公州者九年。凡有除命。皆固辭。英廟下敎加嘉善。進同知義禁府事。由刑曹參判。遷司憲府大司憲。公爲人淸毅簡重。好人倫。篤於朋友。臨患難。無所背負。竭心慮。以致其義。恐不能紓人之禍也。初。文簡公爲相時。怨家以事欲陷之。乃使老嫗。言於市曰。李相公殺我之婿。奪我之女。因叩胸涕泣不已。明日。持平趙宗溥劾文簡公。上命刑曹。案其事。公愕曰。李相公寧有罪邪。或謂公曰。衆人皆毁李相公。而足下扶之甚力。恐有禍也。公正色曰 。吾友善李相公。心知其寃。而不能訟。反與衆人擠陷之。吾不忍爲也。吏曹判書趙公榮國。聞其言。喟然歎曰。李公誠君子也 。公在田里。以乙未四月七日。卒于家。享年七十有九。其年六月九日。葬于公州日新之原。公少明達。能綜物。慨然有志於當世。而晩節始中一第。文簡公知其可用。然輒爲忌者所抑。內不得寘於廟堂。外不得試於藩輔。嗚呼惜哉。配貞夫人東萊鄭氏。監役錫老之女也。公無子。以其兄敦寧府都正諱秀輔次子思弘。爲之後。思弘早卒。又無子。以其兄思重次子。爲之後。卽奎應也。銘曰。
李封韓城。自文靖始。文靖有孫。維觀察使。端廟遜位。退居不仕。公承遺烈。潔行是砥。其友爲誰。曰文簡公。山攀水游。
樽俎與同。英廟垂拱。文簡登崇。公擧乙科。遂侍王宮。其言則簡。何志之約。侃侃不諛。而色無怍。時運之頹。羣妖並作。
文簡罹讒。屛于丘壑。公閔其寃。不畏芒刃。扶之右之。惟義之峻。公年旣老。豈求榮進。野服以歸。乃絶朝覲。花覆賓階。
竹圍于扃。家人肅肅。如在公庭。知命靡悔。綏此康寧。詒于百世。墓門有銘。<끝>
江漢集卷之十四 / 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