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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8. 6. 30. 22:26
■ 경주 표암(慶州瓢巖)
삼국유사 자료에 따르면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이니, 그 남쪽이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마을 어른(村長)은 알평(謁平)이라 하여 처음에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一曰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初降于瓢峯是及梁部李氏祖
양산촌의 촌장인 알평이 탄강하였다고 전해지는 표암(瓢巖, 경상북도기념물 제54호)은 현재 경북 경주시 동천동 507-7번지 일대에 전해지고 있다. 해발 20m정도의 봉우리로 탈해왕 릉과 70m정도 떨어져 있으며, 북천과도 약 7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의 지형적인 특징과 전해지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표암봉이 소도「蘇塗=삼한 시대에 산천(山川)에 제사 지내던 신성한 장소를 말한다」유적의 하나로서 주목받기도 했다.(김광, 1990)
고려 때 부터 전해오던 작자 미상의 ≪동경지 東京誌≫를 1669년 경주 부사(慶州府使) 민주면(閔周冕)이 이채(李採) 등 향중 인사와 함께 편집, 보완하여 증수(增修)하여 간행한『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산천(山川)조에 의하면 “표암은 경주부의 동북 5리에 위치하는데, 이알평(李謁平)이 탄강한 곳이다.
속전에 의하면 이 바위가 나라에 해를 미칠 수 있으니 박을 심어 덮었다고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瓢在府東北五里 李謁平所降處 俗傳 新羅時 以此巖有害於國都 種瓢 以覆故名焉)”는 전설이 전한다.(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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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근의 이야기가 있는 여행[네이버 블로그]
2018.06.06 17:00
경주 표암(慶州瓢巖) (1)
신라 6촌장이 모여서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 건국을 의결한 곳,
전탈해왕릉(傳脫解王陵)에서 서쪽으로 인접한 바로 옆에 표암(瓢巖)과 표암재(瓢巖齋)가 있습니다.
표암은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小金剛山)의 남쪽 자락 끝에 있는 바위산(높이>133,3m) 입니다. 이 바위산이 유명한 이유는 여기서 알천양산촌의 촌장인 이알평(李謁平)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 전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내용은 고대 사회의 신화지만 더 중요한 것은 표암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모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에 와서 표암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를 찾아가는 것은 어렵고도 힘듭니다.
새삼스럽게 어떤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여 표암에 관한 유적이나 역사적 사료가 발견된다면 또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저 지금에 있는 표암을 보면서 그러려니 하고 찾아가야 할 따름이지요.
신라 6촌에 관한 내용은 삼국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제1권(三國史記 卷第一) 신라본기 제1(新羅本紀 第一) 시조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의 "一年夏四月十五日 혁거세가 거서간에 오르다(기원전0057년 04월 15일(음)"를 보면,
혁거세가 거서간에 오르다(기원전 57년 04월 15일)
시조의 성은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 4월 병진(丙辰) [혹은 정월 15일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오르니, 이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했다.
그때 나이는 13세였으며,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辰韓) 육부(六部)가 되었다.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 수풀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이에 가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어, 이를 갈라보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자 재주가 특출하고 숙성하였다.
6부인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므로 이를 받들고 존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받들어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인(辰人)은 박[호(瓠)]을 박(朴)이라 했고 처음에 [혁거세가 태어났던] 큰 알이 박과 같았기 때문에 박(朴)으로 성을 삼았다. 거서간은 진(辰)[한(韓)] 사람들의 말로 왕을 가리킨다.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 한다.].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耶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徃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歲, 岐嶷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辰言王 [或云呼貴人之稱]
삼국유사는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제1권(三國遺事 卷 第一) 제1기이(紀異第一)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의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이 있었다(0032년 (음)"에는,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六村)이 있었다.
1은 알천양산촌(閼川 楊山村)이니, 그 남쪽이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마을 어른(村長)은 알평(謁平)이라 하여 처음에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에 부(部)를 두어 이름을 급량부라 하였는데 본조의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년)에 이름을 고쳐 중흥부(中興部)라 하였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2는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이니, 마을 어른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 하여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 [양을 도로 읽고 혹은 탁으로 쓰니 음은 역시 도이다]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남산부(南山部)라 하니 구량벌(仇良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지금은 일러서라고 말한 것은 태조가 설치함을 말함이다. 아래도 마찬가지이다.]
3은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이니, 마을 어른은 구(俱) [구를 仇로도 쓴다.]례마(禮馬)라고 하여,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한다.]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漸梁) [양(梁)을 탁(涿)으로도 쓴다.]부(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니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
4는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 [賓之 또는 賓子·氷之라고도 한다.]이니, 마을 어른은 지백호(智伯虎)라 하여 처음 화산(花山)에 내려왔다. 이가 본피부(本彼部)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통선부(通仙部)라고 하니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속하였다.
최치원은 즉 본피부 사람이니 지금도 황룡사(皇龍寺)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날 집터가 있어 이것이 최후(崔侯)의 옛 집이라고 하니 아마도 명백한 것 같다.
5는 금산가리촌(金山 加里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북쪽 산이다.]이니, 마을 어른은 지타(祗沱) [只他라고도 쓴다.]라고 하여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다. 이가 한기부(漢祇部) 또는 한기부(韓祇部) 배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니 상·하서지(上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6은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이니, 마을 어른은 호진(虎珍)이라 하여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니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彌村)·[궐곡(闕谷) 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
新羅始祖赫居世王
辰韓之地古有六村. 一曰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初降于瓢嵓峯是爲及梁部李氏祖 [奴礼王九年置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改名中興部. 波潛·東山·彼上·東村屬焉.]. 二曰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 [梁讀云道或作涿, 亦音道.]鄭氏祖. 今曰南山部, 仇良伐·麻等烏·道北·廻德等南村屬焉. [稱今曰者太祖所置也. 下例知.]三曰茂山大樹村, 長曰俱 [一作仇]禮馬, 初降于伊山 [一作皆比山]是爲漸梁 [一作涿]部又牟梁部孫氏之祖. 今云長福部, 朴谷村等西村屬焉. 四曰觜山珎支村 [一作賔之又賔子又氷之], 長曰智伯虎初降于花山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味呑寺南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殆明矣. 五曰金山加里村, [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沱 [一作只他]初降于明活山. 是爲漢歧部又作韓歧部裴氏祖. 今云加德部上·下西知·乃兒等東村屬焉. 六曰明活山高耶村, 長曰虎珍初降于金剛山是爲習比部薛氏祖. 今臨川部, 勿伊村·仍仇旀村·闕谷 [一作葛谷]等東北村屬焉。
삼국유사 제1권(三國遺事 卷 第一) 제1기이(紀異第一)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의 "노례왕 9년에 처음으로 6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6성을 주었다(0032년(음)"에,
위에 쓴 글로 보건대 이 6부의 조상들이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 9년에 처음으로 6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6성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서 중흥부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를 아버지로 삼고 임천부를 아들로 삼고 가덕부를 딸로 삼으니 그 까닭은 자세치 않다.
전한 지절(地節) 원년 임자(壬子)(69년) [고본(古本)에 이르기를 건호(建虎-建武) 원년(25년)이니 건원(建元) 3년(138년)이니 한 것들은 다 잘못이다.]
3월 초하룻날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이랴!” 하였다.
按上文, 此六部之祖似皆從天而降弩禮王九年始改六部名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長福部爲父臨川部爲子加德部爲女其實未詳. 前漢地節元年壬子 [古本云建虎元年, 又云建元三年等皆誤]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俱?於閼川岸上議曰, “我軰上無君主臨理蒸民, 民皆放逸自從所欲, 盍覔有德人爲之君主立邦設都乎。
그러다가 경주 표암에 대한 기록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1619~1672)에 의해서였습니다. 생전에 쓴 글들을 모은 존재선생문집(存齋先生文集)이 1687년에 간행되었는데, 그 문집의 제1권 사(辭)에 감표암사(感瓢巖辭)가 있습니다.
존재는 이 글에서 "어떤 사람은 옛사람들이 바위 아래 박을 심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바위의 모습이 박과 비슷하여 그 같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소위 표암이 '박바위'가 된 유래에 대해 처음으로 설명하고 있지요.
感瓢巖辭
癸巳十一月甲辰。與舍弟登柏栗寺訪瓢巖。有老釋引至其處。巖蓋在柏栗東麓盡處。高可六七丈。不甚斬絶。或云古人種瓢其下。故名以其實。或云以其形之似瓢而得是號。未知其孰信也。遺事記。李氏初祖降于是巖。此則有籍可攷。天之降哲。未必無此理。豈誕妄無稽之說耶。俛仰沈思。肅 然而敬。油然而感。彷徨而不能去。遂作感瓢巖賦。其辭曰。
歲癸巳而南征兮。云余造乎東京。指柏栗而徑逝兮。問瓢巖兮何許。山僧引余以先路兮。示遺石於山之龍。繄吾先之始降兮。其名曰謁平。從無何而屹然兮。不由漸而成形。佐赫君以開邦兮。偕六部而致理。載籍闊而無憑兮。孰竟究其一二。惕余跪而沈思兮。神潛動而髮豎。倚脩巖之崟崟兮。臨平野之渺渺。鶴無蹤兮誰問。鳳有臺兮空留。覽山川之周遭兮。迥千里以相繆。人宜傑於地靈兮。天實佑於玆土。惟大化之 生育兮。固先夏而後裔。當有虞之昌明兮。尙氣化之未已。有呑卵而懷神兮。亦感迹而誕異。及商周而大宣兮。天不假而人爲。時我東之屯閉兮。僻海陬而洪荒。缺產哲后於瓠中兮。迎良弼於虎乳。鷄之鳴兮鵲之噪。紛可怪兮理或有。誰如我祖之妙凝兮。不有因而從天。姓自道而靡襲兮。又非指樹之可倫。綿瓜瓞於百祀兮。間偉傑而簪紳。派千分兮封或異。系實出於同根。伊來躬之眇然兮。奉家戒而來尋。世茫茫而雖敻兮。精怳怳猶親承。心何間於近遠兮。誠固有此感應。識此義者其難兮。措天下於指掌。亂曰。君子報本。廣厥誠矣。致遠則難。惟篤之貴。此若可能。他亦何求。聖賢有訓。盍自由兮。
계사(1653년) 11월 갑진에 아우와 함께 백률사를 올랐다가 표암을 방문했다. 노승의 안내를 받아 그곳에 갔는데 바위는 대체로 백률사의 동쪽 기슭이 끝나는 곳에 있었다.
높이는 6-7자(18~21,2m)이 되었는데 그다지 깎아지르듯 하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옛사람들이 바위 아래 박을 심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바위의 모습이 박과 비슷하여 그 같은 이름을 얻었다고 하기도 하나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
삼국유사에는 이씨의 시조가 이 바위에 내려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문헌으로 고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이 철인을 내릴 때 이 같은 이치가 없지는 않을 것이니, 어찌 망녕 되고 터무니없는 것이겠는가?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동생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은 갈암집(葛庵集)의 남정기행(南征紀行)에서 "날이 저물어 백률사에 투숙했더니 빈산에 흐릿한 달빛만 비치는데 큰 바위는 산허리를 점유한 채 백 척도 더 높이 우뚝 솟았더라.
아득한 옛날 우리 시조께서 하늘로부터 이곳으로 내려오셔 혁거세를 도와 남국을 열었기에 그 이름 청사에 찬란히 빛나지."라고 했습니다. 굳이 표암이라는 표현은 없으나 그 내용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지요.
갈암선생문집 1권(葛庵先生文集卷之一) 시(詩)의 남정기행(南征紀行)은 다음과 같습니다.
南征紀行
癸巳歲云暮。窮泉生一陽。兄弟承家命。聯鑣行邁長。朝戛東海漘。暮宿郵舍傍。侵晨理雙屐。陟彼雲雪岡。側耳聽笙鶴。擧頭望壺梁。暮憩最高頂。丹靑煥禪房。凜然不可留。飄颻復南翔。山川遠紆曲。襟期日悠颺。辛丑入良佐。爲尋遺躅芳。哲人去已遠。故宅但梓桑。聞說重表兄。有金開新莊。乖違已十載。入門參北堂。呼僮館我僕。抽潛供客嘗。仍聞蔣臺好。寤寐不能忘。瓢巖知不遠。明發戒行裝。都亭恣遠矚。目極還愁腸。故國山河在。斜陽衰草黃。壘殘餘古甓。池仄猶石墻。鐘留閱三代。臺空名鳳凰。學士莊寂寞。角干阡荒涼。猗歟薛弘儒。變夷作鄒鄕。西山肅祠廟。展謁惕潛傷。千年基甚厚。一朝墜何忙。後裔儻遵化。先王業可常。無心設庠學。殫力修芬皇。芬皇寺名 頹波日東注。忽焉難爲防。有鑑可反隅。引古見興亡。暮投柏栗寺。空山月微茫。巨石占山腰。崔嵬百尺強。伊昔我鼻祖。從天降此方。佐赫開南國。竹帛名炳烺。空齋悄延佇。感激心愴悢。世人局見聞。渾疑說荒唐。我言蛟龍生。固異犬與羊。履跡篤生周。呑卵寔誕商。況我東海濱。民物久乃章。居然資氣化。摶凝理則當。指樹姓系明。本支徧箕疆。在麗累將相。本朝聲烈揚。眇余後千祀。百里隨雁行。繫馬吟不去。巖下久徜徉。潛心默致敬。怳承陟降光。颯然毛髮動。左右臨洋洋。有誠則必通。無聲難可量。報本誠苟至。自天奠休祥。願言追先德。千秋期永昌。
남정기행(南征紀行)
계사년이라 이해도 저물어 / 癸巳歲云暮。
깊은 땅 밑에 일양이 생길 즈음 / 窮泉生一陽
우리 형제 집안의 명을 받들고 / 兄弟承家命。
나란히 말을 몰아 장도에 올랐지 / 聯鑣行邁長。
아침에는 동해 가로 배알하고 / 朝戛東海漘。
저녁에는 우사 곁에 유숙했노라 / 暮宿郵舍傍。
이른 새벽에 신발을 손질하여 / 侵晨理雙屐。
저 구름과 눈 덮인 산을 올라서 / 陟彼雲雪岡。
귀를 기울여 생학 소리 듣고 / 側耳聽笙鶴。
고개 들어 호량을 바라보았지 / 擧頭望壺梁。
날이 저물녘 최고봉에 쉬노라니 / 暮憩最高頂。
절간의 단청은 휘황찬란 빛나고 / 丹靑煥禪房。
기운이 서늘해 머물 수가 없더라 / 凜然不可留。
표표히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자니 / 飄颻復南翔。
산천은 멀리서 굽이쳐 휘감돌고 / 山川遠紆曲。
가슴속은 날로 후련히 트이더군 / 襟期日悠颺。
신축일에는 양좌로 들어가서 / 辛丑入良佐。
철인의 향기로운 자취 찾았더니 / 爲尋遺躅芳。
그 어른은 별세하신 지 이미 오래 / 哲人去已遠。
고택엔 심어 두신 나무만 남았는데 / 故宅但梓桑。
듣자니 우리 재외종 형님이 / 聞說重表兄。
재력이 있어 새로 집을 지었다네 / 有金開新莊。
내가 이곳 와 본 지도 벌써 십 년 / 乖違已十載。
문으로 들어가 북당에 문안드렸지 / 入門參北堂。
종 불러 우리 하인 쉬게 해 주고 / 呼僮館我僕。
물고기를 잡아서 손님 대접하더라 / 抽潛供客嘗。
한편 듣자니 장대가 좋다 하여 / 仍聞蔣臺好。
자나 깨나 가슴에 잊지 못하였고 / 寤寐不能忘。
표암은 거리가 그리 멀지 않기에 / 瓢巖知不遠。
이튿날 아침 여장 꾸려 찾아갔지 / 明發戒行裝。
도정에서 맘껏 먼 경치 조망하니 / 都亭恣遠矚。
눈길 다한 곳에 다시 시름이 일고 / 目極還愁腸。
옛 도읍지에 산하는 그대로 있어 / 故國山河在。
비낀 석양에 시든 풀만 누렇더군 / 斜陽衰草黃。
보루는 무너져 오랜 벽돌만 남았고 / 壘殘餘古甓。
못은 기울어도 돌담은 아직 섰더라 / 池仄猶石墻。
종은 남아서 세 왕조를 거쳤고 / 鐘留閱三代。
누대 비었는데 이름하여 봉황일세 / 臺空名鳳凰。
학사의 장원은 그저 적막할 뿐 / 學士莊寂寞。
각간의 무덤은 황량하기만 하더군 / 角干阡荒涼。
훌륭하여라 홍 유후 설총께서는 / 猗歟薛弘儒。
오랑캐 풍속 바꿔 추향 만드셨나니 / 變夷作鄒鄕。
서산에 숙연히 서 있는 그 사당 / 西山肅祠廟。
참배하자니 척연히 마음이 아파라 / 展謁惕潛傷。
천년의 왕업 기반이 몹시 두텁거늘 / 千年基甚厚。
일조에 어찌 그리도 바삐 무너졌나 / 一朝墜何忙。
후예들이 행여 그 덕화 따랐다면 / 後裔儻遵化。
선왕의 유업이 길이 이어지련만 / 先王業可常。
학교를 세워 교육할 마음은 없고 / 無心設庠學。
분황이라 절 보수에 힘 기울였기에- 분황은 절 이름이다. - / 殫力修芬皇。
쏟아지는 물결 날로 동으로 흐르니 / 頹波日東注。
어느 날 갑자기 막을 길이 없었지 / 忽焉難爲防。
역사의 거울로 유추해 알 수 있느니 / 有鑑可反隅。
옛일을 끌어다가 흥망성쇠를 보노라 / 引古見興亡。
날이 저물어 백률사에 투숙했더니 / 暮投柏栗寺。
빈산에 흐릿한 달빛만 비치는데 / 空山月微茫。
큰 바위는 산허리를 점유한 채 / 巨石占山腰。
백 척도 더 높이 우뚝 솟았더라 / 崔嵬百尺強。
아득한 옛날 우리 시조께서 / 伊昔我鼻祖。
하늘로부터 이곳으로 내려오셔 / 從天降此方。
혁거세를 도와 남국을 열었기에 / 佐赫開南國。
그 이름 청사에 찬란히 빛나지 / 竹帛名炳烺。
빈집에서 초초히 한참을 섰노라니 / 空齋悄延佇。
북받치는 감회에 마음이 서글퍼라 / 感激心愴悢。
세상 사람들은 자기 견문에 막혀 / 世人局見聞。
다들 황당한 이야기라 의심하지만 / 渾疑說荒唐。
나는 말하길 교룡이 태어나는 건 / 我言蛟龍生。
진실로 개나 양과는 다른 법이라 / 固異犬與羊。
발자국을 밟아 주나라 시조 낳았고 / 履跡篤生周。
알을 삼키고 상나라 시조 낳았다지 / 呑卵寔誕商。
그런데 하물며 해동 우리나라는 / 況我東海濱。
백성들이 오랜 뒤에야 교화됐으니 / 民物久乃章。
그대로 천지의 기운이 절로 뭉쳐 / 居然資氣化。
사람으로 태어나는 건 당연한 이치라 / 摶凝理則當。
나무 가리켜 성을 삼은 계보 분명해 / 指樹姓系明。
본손과 지손 온 나라에 두루 깔렸도다 / 本支徧箕疆。
고려조에는 장수와 재상이 이어졌고 / 在麗累將相。
본조에 와서도 가문의 명성 드날렸지 / 本朝聲烈揚。
보잘것없는 내가 천년 뒤에 태어나 / 眇余後千祀。
백리라 먼 길을 형제 따라 왔노니 / 百里隨雁行。
말 매어 두고 시 읊으며 떠나지 못해 / 繫馬吟不去。
바위 아래서 오래도록 서성이면서 / 巖下久徜徉。
마음 가라앉혀 묵묵히 공경 다하니 / 潛心默致敬。
오르내리시는 빛 황홀히 받드는 듯 / 怳承陟降光。
갑자기 머리털이 쭈뼛 서더니만 / 颯然毛髮動。
영령께서 좌우로 성대히 왕림하셨네 / 左右臨洋洋。
정성이 있으면 반드시 뜻 통하련만 / 有誠則必通。
소리가 없으니 헤아려 알기 어려워라 / 無聲難可量。
보본의 정성이 진실로 지극하다면 / 報本誠苟至。
하늘로부터 상서로운 복이 내리느니 / 自天奠休祥。
바라노니 선조가 끼친 덕을 좇아서 / 願言追先德。
우리 종족이 천추에 길이 창성하길 / 千秋期永昌。
그 후에 1669년 민주면(閔周冕)과 이채(李採) 등이 편집하고 1711년 남지훈(南至熏)이 증간했으며 1845년에 성원묵(成原默)이 수정 증보한 동경잡기(東京雜記) 산천(山川)조에 이휘일이 이야기한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산천(山川)
표암(瓢巖) 부의 동북쪽 5리에 있다. 이알평(李謁平)이 내려와 살던 곳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 이 바위가 국도(國都)에 해를 끼친다 하여 박을 심어 이 바위를 덮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한다.
瓢巖 在府東北五里 李謁平所降處 俗傳新羅時 以此巖有害於國都 種瓢以覆 故名焉。
삼국유사에 기록된 알평(謁平)이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온 그 표암을 알 수 없는 것이나 존재(存齋)가 '감표암사'에서 말한 '옛사람들이 바위 아래 박을 심었기 때문에' 박바위라고 하는 것도 여전히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은 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표암봉을 찾고 표암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는 그 이면에는 조상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이었고 간혹 높지 않은 벼슬이었을지라도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모습은 시대를 초월하는 당연한 귀결적 상황이지요. 개인이든 국가든 여유가 없다면 주위를 살피거나 뒤돌아 볼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이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요.
결국 존재(存齋) 이휘일이나 갈암(葛庵) 이현일 그리고 표암비(瓢巖碑)를 지은 청헌(聽軒) 이경일(李敬一,1734~1820)은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인 알천 양산촌장 이알평(李謁平)의 존재를 찾아가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현재의 모습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1806년(순조6)에 이경일(李敬一)이 비문을 짓고 이집두(李集斗)가 글씨를 쓴 표암비(瓢巖碑)를 이곳에 세움으로 해서 현재의 표암은 과거의 표암봉을 의미하는 연결고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행위 이전의 개연성 문제는 따지지 않더라도 어쩌면 그 진실성에 대한 판단조차도 구태여 요구할 필요도 없게 만들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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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佐命功臣及梁部大人李公諱謁平遺墟碑
謹按慶州李氏舊譜曰 始祖諱謁平初降辰韓之瓢巖峰下 初降云者降生之謂歟 詩曰維嶽降神生甫及申 蘇子瞻以爲申呂自嶽降 古今所傳不可誣也 盖崧高靈淑之氣鍾精毓英 篤生哲人理之所必然者 而獨東京誌所載六部大人 皆從天而降云者異焉 神人降于太白山檀木下而爲檀君與蘿井剖卵遂爲佐命功臣等說自昔沿襲而齊東之言疑信固難定惟此瓢巖一區之爲及梁大人之遺墟而爲我李根本之地則明矣 自始祖以來積德累仁慶流雲仍羅麗之間簪組蟬聯名碩相望逮于我朝枝達派分子孫千億廼公廼卿世濟厥 美二千年之間赫舃爲吾東望族者惟及梁公之餘蔭是庇是庥耳金鰲之麓▨處是我始祖衣履之藏而年代渺茫文獻無徵遂失其傳在今後孫之追遠而想慕者獨瓢巖在耳歲 丁未後孫集星之守永陽也鐫刻于巖上標識之慶之諸孫以爲此不足表揚遺蹟 廼伐石爲穹碑將樹於巖下宗人堯臣輩來徵記文於敬一余以爲此事不謀於衆似有甲乙之論而其爲不忘本則亦或一義旣樹之後永世衞護旡俾童敲而角勵則顧非在慶諸人之責乎遂爲之書.
後孫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左議政鰲恩君敬一謹記
後孫正憲大夫刑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集斗謹書
聖上卽阼六年丙寅九月日立
◇都檢 : 後孫 前掌令鎭宅,幼學 增奎.
◇監役有司 : 亨默. 奎泰.
◇刻字有司 : 景春.
◇監官 : 折衝 重仁.
[국역]
신라 좌명공신 급량부대인 이알평 유허비
(新羅 佐命功臣 及梁部大人 李謁平 遺墟碑)
[謹按慶州李氏舊譜曰 始祖諱謁平初降辰韓之瓢巖峰下 初降云者降生之謂歟 詩曰維嶽降神生甫及申 蘇子瞻以爲申呂自嶽降 古今所傳不可誣也]
삼가 살피건데 경주이씨(慶州李氏)의 구보(舊譜)에 이르기를 시조(始祖)의 휘는 알평(謁平) 이고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峰) 아래 처음으로 내려왔다고 하였으니 처음 내려왔다 함은 탄생을 말한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되 산악(山嶽)이 신을 내리어 보(甫) 및 신(申)을 탄생하였다하고 소자첨(蘇子瞻)이 신(申)과 여(呂)가 산악으로부터 내려왔다고 하였으니 고금에 전설을 믿지 않을 수 없다.
[盖崧高靈淑之氣鍾精毓英 篤生哲人理之所必然者 而獨東京誌所載六部大人 皆從天而降云者異焉]
대저 산이 높고 맑은 기운이 정(精)을 모으고 영(英)을 길러 철인(哲人)을 출생(出生)함은 이치에 필연적인 것으로서 『동경지(東京誌)』에만 기재하기를 6부 대인(六部大人)이 모두 하늘로 쫓아 강생(降生)하였다고 한 것과는 다르다.
[神人降于太白山檀木下而爲檀君與蘿井剖卵遂爲佐命功臣等說自昔沿襲而齊東之言疑信固難定惟此瓢巖一區之爲及梁大人之遺墟而爲我李根本之地則明矣]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와서 단군(檀君)이 되었다느니 또 나정부(蘿井部)의 알에서 나왔느니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느니 등등의 말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로서 떠도는 말과 같아서 의심해야 할지 믿어야할지 결정하기 어려우나 오직 표암 한 곳(瓢巖一區) 만은 급량대인(及梁大人)의 유허(遺墟)로 우리 이씨(李氏)의 근본지가 되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自始祖以來積德累仁慶流雲仍羅麗之間簪組蟬聯名碩相望逮于我朝枝達派分子孫千億廼公廼卿世濟厥美]
시조(始祖) 이래로 덕(德)을 쌓고 인(仁)을 쌓아서 경사가 자손(子孫)에게 내리어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의 사이에 높은 관직이 이어 왔고 명망이 훌륭한 분이 서로 바라 볼 정도였다.
아조(我朝=李朝)에 미치어 나뭇가지처럼 뻗고 물줄기처럼 나뉘어 자손(子孫)이 천억(千·億)으로 불어났고 공(公)도 되고 경(卿)도 되어 대대로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어
[二千年之間赫舃爲吾東望族者惟及梁公之餘蔭是庇是庥耳金鰲之麓處是我始祖衣履之藏而年代渺茫文獻無徵遂失其傳在今後孫之追遠而想慕者獨瓢巖在耳歲]
이천년(二千年) 사이에 혁혁하여 우리 동방에 유명한 집안이 된 것은 오직 금량공(及梁公)의 음덕(陰德)을 감싸주고 덮어준 것이다.
금오산(金鰲山) 어느 기슭이 우리 시조의 묘소인가?
연대(年代)가 아득하고 문헌(文獻)이 고징할 수가 없으므로 드디어 실전(失傳)되고 말았으니 지금에 있어서 후손이 추원(追遠)하여 사모할 데는 유독 표암(瓢巖)이 있을 뿐이다.
[丁未後孫集星之守永陽也鐫刻于巖上標識之慶之諸孫以爲此不足表揚遺蹟]
정조(正祖) 11년 정미(丁未. 1787년)에 후손(後孫) 집성(集星)이 영양군수(永陽郡守)로 있을 때에 표암(瓢巖) 위에다 깊이 새기어 기록했는데 경주(慶州)의 모든 후손(後孫) 들이 이르기를 “이것으로는 유적(遺跡)을 표양할 수가 없다.”하여
[廼伐石爲穹碑將樹於巖下宗人堯臣輩來徵記文於敬一余以爲此事不謀於衆似有甲乙之論而其爲不忘本則亦或一義 旣樹之後永世衞護旡俾]
이에 돌을 다듬어 큰 비석을 표암(瓢巖) 아래에 세우려하자 일가 사람 요신(堯臣)이 찾아와서 경일(敬一)에게 기문(記文)을 지으라 하니 내가 말하기를 “이 일은 많은 사람과 상의하지 않아 갑을(甲·乙)의 의논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 근본을 잊지 않음이 되는 것에는 뜻이 또한 한 가지 일 것이다.
旣樹之後永世衞護旡俾童敲而角勵則顧非在慶諸人之責乎遂爲之書]
이미 세운 후에도 긴 세상에 보호하여 아이들이 두드리고 짐승이 떠받지 않게 함은 경주에 사는 모든 족인(族人)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기문을 쓰다.
[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左議政鰲恩君敬一謹記]
후손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 좌의정 오은군 경일은 글을 짓고
正憲大夫刑曹判書經筵春秋館五衛都摠府都摠管集斗謹書
정헌대부 형조판서 경연춘추관 오위도총부 도총관 집두는 삼가 쓴다.
[聖上卽阼六年丙寅九月日立]
성상이 즉위한 지 6년째 되는 병인년(순조 6, 1806) 9월 일 세움.
-도검(都檢) : 후손 전 장령(前掌令) 이진택(李鎭宅), 유학(幼學) 이증규(李增奎).
-감역유사(監役有司) : 이형묵(李亨默), 이규태(李奎泰).
-각자유사(刻字有司) : 이경춘(李景春).
-감관(監官) : 절충(折衝) 이중인(李重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