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린공원(近隣公園)
인근 주민의 레크리에이션, 특히 정적 레크리에이션의 장으로서 설치하는 것으로,
인근주민은 어느 때나 이용하면서 산책을 하고, 휴식하고, 독서를 즐기고, 음악을
듣고, 혹은 집회 등도 갖는다. 종래 공원이라고 불리는 것의 대부분이 이러한 것
이었으나 근대에 와서 동적 레크리에이션이 성행하게 되고 또한 공원의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점차 다양한 종류의 공원이 요구되었고 공원의 분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종래의 공원에 동적 레크리에이션을 위한 시설이 보완되고
그로 인하여 종래의 공원은 본래 사명으로 하던 정적 레크리에이션 장소로서의
특색을 점차 잃게 되었다. 그러나 종래의 공원은 여전히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도시에서 일반 시민의 일상생활에 가장 친숙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특징을 잃는 일이 없도록 적절히 취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공원은 하나
의 국민학교 통학 구역에 상당하는 인근 구역에 적어도 1개소는 있는 것이 바람
직하며 인근 주민이 도보로 용이하게 이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필요조건이 된다. 이를 위한 유치 거리는 1,600m 이하이고, 가장 바람직한
거리는 약 800m이다. 그리고 통틀어서 근린 공원이라 부르지만, 주거지역‧상업
지역‧공업지역 등과 같이 그 설비되는 장소에 따라서 포함되는 시설에는 각기 특색
을 갖추도록 할 필요가 있다. 어느 경우에도 일반 운동경기의 시설을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하며, 그와 같은 시설이 공원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 공원
은 본래의 사명을 잃고 운동공원화되고 만다. 근린 공원에 설치되어야 할 주요
시설로는 자유광장‧수림‧잔디밭‧화원‧풍치원‧마을회관 등이 있다.
안개낀 장충단공원 - 배호
안개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 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자리에 새긴 그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 기슭에
수많은 사연을 가슴에 움켜지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배호[1942~1971]는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에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 1946년 4월경부터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 81
번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에서 생활하였다. 1949년부터 1955년
까지 서울 창신국민학교를 다녔다. 6·25 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란을 가기도
하였다. 1955년 서울 영창학교(성동중학교 전신)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부산으로 내려가 이모의 모자원에서 생활하면서
1956년 부산 삼성중학교 2학년 1학기까지 마쳤다.
이후 음악을 하기 위해 혼자 서울로 올라와 외삼촌 김광빈에게 드럼을 배웠다.
1958년부터 김광빈 악단, 김인배 악단 등에서 드럼을 연주하였고, 1960년
부평 미군부대 캠프 마켓(Camp Market) 관할 클럽 등에서 2년간 악단 생활
을 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하였다. 1963년 21세 때 「굿바이」와 「사랑의
화살」 두 곡을 녹음하고, 예명을 배호로 지었다. 1964년 낙원동 프린스
(Prince) 카바레의 밴드 마스터로 뽑혀 배호와 그 악단이라는 밴드를 꾸려
드럼을 치며 노래하는 가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반야월 작사
김광빈 작곡의 「두메산골」을 타이틀로 한 1집 음반
『황금의 눈』을 내고 공식 가수로 데뷔하였다.
1966년 신장염에 걸려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청량리 단칸방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신진 작곡가 배상태를 만나 배호의 대표곡이자 최대 히트곡인 「돌아가는 삼각지」
를 녹음하여 1967년 4월 음반을 발표하였다. 특색 있고 호소력 깊은 음색 덕분에
「돌아가는 삼각지」가 전국 인기 순위를 휩쓸면서 배호는 정상의 인기 가수로 자리
잡았다. 이어서 병석에서 발표한 최치수 작사 배상태 작곡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이 연속 히트함으로써 인기 가수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969년 MBC 10대 가수상 수상 등 인기 정상과 더불어 몸이 회복되면서 왕성한
가수 활동 시작하여 히트곡"안녕" 및 주옥같은 번안곡 등 생애 최고로 활발한 활동
과 노래를 발표하면서 본인이 내 생애 최고의 한 해’ 로 말할 정도로 전국적인 인기
를 차지하였다. 가을부터 TBC, KBS, MBC 등 주요 가요 가수상을 휩쓸었다.
이후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이 재발하여 다시 병원에 입원하였다.
1971년 7월 마지막 곡들인 「마지막 잎새」와 「0시의 이별」을 녹음하였다. 명동
코스모스백화점 공연 중에 각혈로 퇴장하고, 동년 10월 20일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진행 이종환] 출연 후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였다. 동년
10월 30일 세브란스병원 입원 이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11월 7일 더 이상
가망이 없자 퇴원, 미아리 집으로 가던 중 의식 불명으로
자택에서 만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양주 향토문화백과 )
2020-11-13 작성자 명사십리
첫댓글 노원에 근린공원 단풍 곱구 아름답구료.
만추에 멋진 단풍 구경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기분 좋은 축복의 하루 선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