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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뮤직:
그 때, 그 시절의 '은퇴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6년 1월 해체했다. '한국 대중음악계에 느꼈던 환멸 때문에.' '음악으론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어서.' '지쳐서.' 마찬가지였다. 몇 년이 지나도 호기심은 식지 않았다. 가수의 입술은, 종종 노래대신 은퇴를 말해왔다. 추측은 언제나 만발했다. 언론의 유전자다. 습성은 변하지 않는다. '은퇴'를 둘러싼 관심이 식을 때 즈음, 관습처럼 나오는 얘기는 또한 '재결합'이나 '컴백'이었다. 가수는 눈앞에서 사라졌어도 노래는 들려오니까. 대중은 식지 않는다. 관습과는 관계없이, 잊을 수 없는 마음이다. '언젠간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그 땐 어떤 음악일까?' 어떤 선언이 대중의 마음까지 차단했던 적은 없다. 은퇴를 말했다 해도, 음악이 뮤지션을 떠날 일도 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뮤지션은 대중을 떠날 수 있을까? 그럴 때 식지 않는 마음과,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본능 안에서 은퇴는 어떤 형식이 되기도 한다. 1971년엔, 가수 김추자의 은퇴를 언급하는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대중은 70년대 중반, 무대 위에서 독보적이었던 그녀를 기억한다.
글 / 정우성 ('GQ 코리아' 피처에디터)
시작은 1969년과 신중현이었다. 기준이 '스타덤'이라면, 신중현 작곡의 '님은 먼 곳에'를 꼽는 게 옳다. 1970년이었다. 이후에도 수많은 가수들이 다시 불렀다. 조관우도, 거미도 불렀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도 있었다. 거기선 수애도 불렀다. 김추자는 1970년대를 풍미했었다. 중반은 전성기였다. 지난 2007년 [신동아]와의 인터뷰 제목은 '난 은퇴하지 않았어요, '공백기'가 길어졌을 뿐'이라고 말했다. 1971년 [경향신문]은 이렇게 썼다.''전근대적인 풍토속의 연예계를 떠나기로 했어요'라고 물의의 톱싱거 김추자(23)는 은퇴를 결심했다. 학교(동국대 연극영화과)로 되돌아가 학업을 계속하겠다는 그는 노래를 부른다면 취미로만 부르겠다는 것.' 그녀의 '은퇴선언'을 기억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후에도 활동은 이어졌었다. 기사는 이어진다.
옛날신문 기사 본문보기 : 경향신문 1971. 08. 07
'그러나 은퇴를 하면서도 김추자는 '전근대적인 풍토'인 연예계엔 할말이 너무 많다고 한다. 물의의 도화선이 되었던 방송PD와의 약속 불이행문제에 대해션 '방송의 쇼프로가 너무 많은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김추자 자신은 '인기관리를 위해 스스로 출연을 억제해'왔지만 'PD들이 일방적으로 약속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야단들'이었다는 것이다.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도 구도는 비슷했다. 그녀는 '세종문화회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었다'고 말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김추자와 공연하겠다'고 대관신청을 해 놓은 것이 원인이었다.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었고, 피해는 그녀가 고스란히 받았다. '거짓말이야'를 둘러싼 '간첩소동', 얼굴과 손을 200바늘 이상 꿰맸던 어떤 사고, '가요계 정화 운동'에 휩쓸렸던 어떤 시대. 김추자는 그 안에 있었다. 지금도 그녀만큼 '새로운' 가수는 없다. '전위', '센세이션'이라는 단어들이 김추자를 묘사하기도 했지만. 이슈는 노래의 외곽에서 시끄러웠다.
밥 딜런의 가사는 영미권 대학의 강의 텍스트로도 쓰인다. 'Desolation Row'에서 그가 쓴 이미지와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대비 시켰을 때 느껴지는 쾌감은 음악과 시대, 지성과 감성을 넘나든다. 그가 해마다 노벨 문학상에 거론되는 덴 이유가 있다. 기사는 이렇게 쓴다. '60년대 예언자처럼 홀연히 나타난 밥딜란은 인권, 원자폭탄의 위협, 사회부정등을 고발한 반체제 가수로서 몇 년 안돼 세계 제 1의 가수로 군림했었다.' 그리고 1976년, 은퇴를 말했었다. 기사는 이어진다. '보다 원숙하고 조용해진 가운데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거친 목소리를 가진 그는 일본, 호주, 영국 등지의 순회 공연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현재 파리에 머물고 있다.' 밥 딜런의 노래는, 기타와 목소리로 가수가 들려줄 수 있는 '메시지'의 극이었다. '반체제 가수', '영혼을 파고드는 목소리' 같은 묘사는 언제나 모자란다. 가사는 굳이 읽어가며 번역해보지 않으면 그가 왜 밥 딜런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 흘려보낼 수 없는 노래라서, 다시 듣는다. 밥 딜런이 던진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지금도 바람 속에 있다.
옛날신문 기사 본문보기 : 경향신문 1978. 08. 12
가수 하춘화의 은퇴선언은 지난 1979년 3월 27일이었다. 기사는 이렇게 쓴다. ''팬들이 아쉬워할 때 멋있게 떠나겠다'는 말을 남기고 하춘화가 가수 폐업을 선언했던 것이 지난 79년 3월 27일. 그로부터 만 2년이 흐른 지금까지 하양은 너무 지나치다 하리만큼 자기 노출을 거부해왔다." 하춘화는 첫 음반은 만 여섯 살에 취입했던 신동이었다. 하지만 첫 라디오 방송에서, 아나운서는 '어린아이까지 노래를 시키다니 참 한심한 세상입니다'라고 말했었다. 그런 시대였다. 은퇴 이후에도 말은 무성했다. 기사는 이어진다. ''하춘화는 말 못할 사랑의 고민 때문에 서둘러 은퇴했다'는 추리에 이어 수사당국까지 긴장시켰던 '분신자살설', 그리고 76년 그녀가 낭주 고교의 건립부지로 5천 평의 땅을 기증한바 있는 연고지 전남 영광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한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하춘화는 이렇게 말했다. '소문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제게 갈채를 보냈던 많은 분들한테 저의 근황을 솔직히 알려드리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2009년은 그녀가 '가수'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 50년이 되는 해다. 이럴 땐, 어떤 노래로 그녀를 응원할 수 있을까?
옛날신문 기사 본문보기 : 경향신문 1981. 04. 11
노래를 부르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가수도, 있을 수 있다. 음악과 멀어지고도 아무렇지 않은 스타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은퇴를 말했던 입술들은 노래를 놓지 않았다. 은퇴를 받아들였던 대중의 귀는, 그들의 '선언' 대신 '노래'를 놓지 않았다. '은퇴를 번복했다'는 말이 그들의 진정성엔 '흠집'으로 남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가요 평론가 박성서 선생이 [가요박물관] 가사 해설집에 쓴 글에서, 반야월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흘러간 가요'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흘러온 가요'라고 해야지." 밥딜런의 새 앨범은 지난 4월에 발매됐다. 하춘화는 50년 동안 노래해 왔다. 개인 공연 최다 횟수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돼있다. 2007년 인터뷰에서 김추자는 새로운 음반을 언급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말미엔 이렇게 자신을 정의했다. "인간 김추자는 된장, 고추장 담그는 데 명수고 젓갈도 잘 알고 김치도 잘 담그며 이 세상에 지배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존재. 다만 자연만이 김추자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연을 노래한 것 들어보세요. 거기에 김추자가 있어요." '선언'이 그들의 노래를 막진 못했다. 가수는, 그런 식으로 사라지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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