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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나무날 저녁, 서대문에 자리한 공간 새길에서 <1946년 10월 항쟁_진실과 화해>를 주제로 성공회대 김상숙 교수님 모셔 배우는 시간 가졌습니다. 떼제공동체의 신한열 수사님께서 사회를 맡아주셨고, 특별히 10월 항쟁의 유가족이신 최영진 선생님께서 아내 분과 함께 참석해주셔서 더욱 뜻깊은 자리였어요.
사실 우리들에게 대구 10월 항쟁은 낯설고 생소한 역사이지요. 저는 대학교를 다니며 6년이 넘는 시간을 대구에서 지냈는데도 처음 보고 듣는 이야기였어요. 교수님께서는 항쟁의 배경과 과정, 의의와 영향, 그리고 왜 이 역사가 왜곡되거나 잊혀질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해주셨습니다.
# 미완의 해방, 되풀이되는 식민지 악몽
(해방의 노래, 김순남 작곡)
https://youtu.be/I3Ce9Uxy8sw?si=z2DS3fojXOemEntp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는 있는 것 없는 것 가리지 않고 모조리 다 빼앗겼지요. 강제노역, 징병, 식량 공출, 위안부.. 심지어 언어까지도요. 비록 우리 힘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지만, 우리 민족은 해방공동체를 형성하여 자주적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민족운동인사, 또는 지역 유지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자발적으로 설립했어요. 주민들은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 등 자치조직을, 청년들은 치안대를 구성하고요. 그러나 같은 해 9월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며 점령정책과 군정을 실시합니다. 미군정의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첫 번째는 친일 관리를 재등용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토지개혁 지연과 가혹한 식량 공출 정책이었습니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의 구식민지 체제 관료들을 중심으로 행정과 치안조직을 형성합니다. 임시정부 세력은 조직으로 인정하지 않고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배제시키지요. 그 결과 친일파와 (반공) 친미파가 득세하게 됩니다(그중에는 미국에서 유학한 지식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많았다고 해요). 여기에 토지개혁 지연과 가혹한 식량 공출 정책은 일제 강점기의 악몽과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자신들을 억압하는 데에 앞장섰던 경찰관들이 해방 이후에도 강제로 빼앗다시피 쌀을 공출해가는 것을 경험하며 농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고 민심은 매우 흉흉해졌습니다. 이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미군정의 공출이 일제보다 혹독했다고 증언합니다. 더 이상 빼앗을 쌀이 없으니 보리까지 공출해갔다고 하지요. 여기에 해외로 나간 동포들이 귀환하면서 인구가 급증했고, 전염병(콜레라)과 홍수까지 덮치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경북지역은 그 정도가 더욱 심각했다고 해요. 1946년 10월 항쟁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들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면서 발생한 사건”(진실화해위 보고서, 2010)이었습니다.
#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1946년 10월 1일, 오전에는 대구부청과 경북도청 앞에서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빈민들의 식량 요구 시위가 있었고, 오후에는 대구역 광장에서는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이 주도하는 파업 노동자와 시민들의 연대 시위가 있었습니다. 노동자와 시민이 연대한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경찰이 총격을 가하게 되고, 그로 인해 2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다음 날(2일) 수천 명의 군중들이 항의하며 경찰서를 점거했어요. 학생들은 대구경찰서 앞으로 전날 죽은 노동자의 시신을 앞세워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시위의 열기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미군정은 2일 오후에 대구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 4대를 앞세워 시내로 진입하여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체포에 나섰습니다. 3일 무렵에는 어느 정도 진압되었지만 미군정에 항의하는 시위는 주변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어 경북, 경남, 충청, 서울, 경기, 황해, 강원, 전라에서도 민중들이 들고 일어서게 됩니다. 당시 경상북도에서만 전체 인구(317만 8,750명)의 1/4인 77만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12월 중순까지 남한의 대부분의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고 해요.
특히 도시에서 농촌으로 항쟁이 불붙으며 그 성격은 ‘식량배급’에서 ‘토지혁명’으로 변화하는데, 이것은 농촌에서 지주와 소작인 간의 원한 관계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평소 지주의 수탈이 극심하고 소작농과의 대립이 첨에했던 지역일수록 농지 개혁이 지체된 것에 대한 불만이 격렬하게 폭발하였던 것이지요. 어떤 이념이나 주의가 아니라 양반 없애고 땅 준다 하니 억울하고 분통했던 마음 터뜨려 뛰쳐나갔던 것입니다.
“그때는 무슨 주의가 없었어요. 일하는 사람은 모두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남로당이 뭔지도 몰랐지. 선동자가 ‘양반 없애고 땅 준다, 이북처럼 논밭 부치던 것 네 것 된다’하고 선전하니 그 말에 어릴 때부터 고통 받고 대대로 맺혀 있던 한이 고마 풀렸는기라. 그래서 내 세상인가 싶어 천지도 모르고 폭동이 일어난 기라.”
대구 시위의 여파로 이어진 영천 항쟁을 목격한 함태원의 진술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동원하여 관련자 8,000여 명을 검거하고(1946년 12월 기준) 다수의 민간인을 학살합니다. 농촌 지역에는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의 우익 청년조직을 강화하여 주민들을 통제하지요. 특히 서북청년단은 이북에서 공산당에 의해 부모와 가족을 모두 잃고 월남하여 베다니 전도교회(지금의 영락교회)에 있는 탈북자 합숙소에서 함께 생활한 청년들이었습니다. 당시 이승만을 위시한 반공 정권은 이들이 가진 공산당에 대한 증오를 이용해 10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서북청년단에 총을 주고 운동 주동자들을 잡으라고 했다고 하죠. 지속적으로 정부의 비호 아래에서 보도연맹 학살사건, 제주 4.3 사건 등의 민간인 학살과 고문 등의 범죄를 일으킨 서북청년단은 이후 군대와 경찰 조직의 요직에 등용되었습니다.
(10월 항쟁의 노래 ‘인민 항쟁가’ 시인 임화, 작곡가 김순남)
https://youtu.be/6TB0YGJYWQ0?si=F7hmqcrNOf_sGNw6
# 항쟁 이후
10월 항쟁은 식민 통치와 봉건제 유산의 청산을 시도했던 미완의 시민혁명이자, 미군정과 친일 경찰로부터 건국의 주권을 탈환하기 위한 숭고한 항거였으며, 전국으로 확산된 항쟁이라는 점에서 ‘제2의 3ㆍ1운동’이라고 부를 만했다. 농민의 자발적 봉기 양상은 19세기 농민 항쟁(1862년 농민 봉기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계승이었다.
<10월 항쟁_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 김상숙 지음, 돌베개 출판
10월 항쟁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듬해인 1947년 전국 각 지역에서 민전(민족주의민족전선)의 주최로 열린 3.1절 집회에 수만 명의 민중들이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촉구와 조직의 정비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이때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경찰이 발포를 하고, 서울, 부산, 정읍, 영암, 순천, 제주에서는 16명 사망하고 22명 부상 당하게 됩니다. 제주의 경우 이 사건이 1948년 4.3항쟁의 출발점이 되었지요. 제주 4.3 진압을 위해 전남 여수에서 출항 대기 중이던 군인 중 좌익 계열 장교들과 2,000여 명의 사병이 출항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킨 사건이 바로 여순 항쟁이고요.
또한 1948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와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민중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앞세워 이 운동을 탄압합니다. 결국 계엄령 하에 실시된 남한 단독 선거에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지요. 그는 정부 수립 후 반공 체제를 공고히 구축하기 위하여 반공 사상과 기독교 사상, 그리고 봉건왕조사상이 결합된 일민주의를 내세워 좌우 이념대립 갈등을 극도로 심화시킵니다. 지지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군을 자기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반대 세력을 축출하는 ‘숙군’이라는 작업을 7차례나 단행하기도 했고요. 또한 주민 통제 강화를 위하여 지방 보수세력 통해 농촌 마을 단위까지 우익 청년단체를 준군사조직이자 사조직으로 육성합니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서북청년단이 나서면서 폭력적인 반공주의가 확산됩니다. 이러한 군경의 강경한 진압 때문에 일부 주민들은 입산하여 야산대(파르티잔, 비정규군='빨치산')를 형성하면서 1948년경에는 농촌 마을 단위까지 빨치산과 군경 사이에서 지역민들이 좌우로 분열되었지요.
전국의 감옥이 정치수로 넘치게 되자 이승만 정부는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을 목적으로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합니다(1949년). 1949년 말에는 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달했고, 서울에만도 거의 2만 명에 이르렀어요. 주로 사상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거의 강제적이었으며, 지역별 할당제가 있어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의 비율을 보면 학생들이 대부분인데, 당시에는 대학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중고등학생과 같은 청소년들이었지요. 1949년부터 1950년까지 정부는 수용소와 군법회의를 통해 보도연맹의 민간인들을 무고하게 학살했으며,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부와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함으로써 6·25전쟁 중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습니다. 전쟁 와중에 조직은 없어졌지만, 지금까지도 정확한 해명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해요.
#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기억해달라.
최영진 선생님께서는 10월 항쟁 당시 경찰에 의해 죽은 노동자의 시신을 들것에 실어 시위를 주동했던 삼촌 최무학(당시 30세, 대구의과대(현 경북대학교 의대) 학생회장)님의 조카로, 10월 항쟁 후 연좌제로 가족 대부분이 총살당하거나 고문받고 빨갱이라는 오명을 쓴 채 죽게 됩니다. 고작 자신이 젖먹이 어린아이였을 때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된 선생님은 그 이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어떤 원망도 없이 그저 잊혀질 뻔한 역사를 이렇게 자세히 연구하고 설명해주신 김상숙 교수님과 이 자리에 참석한 청년들에게 거듭 고마운 마음 전하셨어요. 아픈 역사에 귀 기울이고 기억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정말 고맙다고 말씀하셨지요.
이후 대구는 사회운동의 대가 끊기게 됩니다. 최영진 선생님과 그 가족들이 겪은 비극은 남한 전역으로 확대되어 극심한 좌우 이념의 갈등, 대립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로 이어지지요. 빨갱이로 몰려 처형 당하거나 매 맞거나 고문 당하거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독한 가난 속에서 지역사회의 수군거림과 손가락질을 받아야했어요. 유족들은 연좌제와 보복이 두려워 긴긴 세월동안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미안함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2006년에 처음으로 학술 심포지엄에서 10월 항쟁이 언급되었고 2010년 진실화해 위원회 정부에서 먼저 이 사건을 공식화하지요. 대구10월항쟁 유족회가 발족되고, 2016년에는 ‘10월 항쟁 및 민간인 희생자 조례’라는 이름으로 시 조례에 ‘항쟁’이라는 말이 들어간 유일한 조례로 제정됩니다.
10월 항쟁의 역사를 알리는 것을 넘어 국가와 시민 사회에 바라는 점은 과거 청산입니다. 과거의 정부가 잘못한 것을 현재의 정부가 바로잡고, 피해를 입은 국민을 위로하고 보상하면서 화해하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는 진상규명과 피해자 배·보상, 가해자 처벌, 사건을 사회적으로 역사화 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국가 추념/기념 시설을 짓고, 교과서 내용 시정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사회가 함께 이 아픔을 기억하고 공감하며 역사와 화해해야 할 것입니다.
10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11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 보리라
12 야훼께서 복을 내리시니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주리라
13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
(시편 85편, 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