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을 구독하시는 분들은 이미 보셨겠지만, 월간문학 7월호에 문효치시인의 문학특강이 <내가 만난 사람들>이란 제목하에 실려져 있고, 10월호에는 정광수선생님의 평론으로 <문효치론>이 실려 있습니다.
사실 이제껏 문효치시인님의 작품은 거의 접해본 적이 없었는데, 월간문학을 통해 좋은 글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우리 민들레님들과 그 기쁨을 함께 하고자합니다.
문효치시인은 1943년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66년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현재까지 10권의 시집을 선보이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계십니다. 문효치시인의 시는 백제의 정신이라고 할만큼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시인은 한국전쟁 당시 부친의 월북으로 연좌제에 묶여 갖은 고초를 겪었고, 울화로 속병이 들어 죽음을 넘나들게 되었는데, 그 시기에 무령왕릉 발굴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인은 여윈 몸을 이끌고 무령왕릉을 찾았고, 1500년전의 유물을 바라보며 죽음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시인은 백제의 유물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시공을 넘나드는 상상력으로 백제의 정신을 이미지화 하고, 시인 자신과 일체화시키면서, 백제시라는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갔습니다.
시인은 무령왕릉의 유물에서 시작해서 백제의 역사에까지 시적 영역을 확대하는데, 백제문화가 일본에 건너가 아스카문화로 꽃 피우는 과정까지도 시인은 놓치지 않고 시로 형상화했습니다.
대충 시인의 소개는 이정도로 하고, 월간문학에 실려있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문효치시인의 작품을 소개하겠습니다.
바람 앞에서 (1966년 서울신문 당선작)
해 어스름 구름 뜨는 언덕에
너를 기다려 서겠노라
잎 트는 山家, 옹달샘 퍼내 가는 바람아
알록달록 色실 내어
앞산 바위나 친친 감고
댓가지 풀잎에 피리부는 바람아
꿈꾸는 이파리의 아우성을
하늘에 대어 불어 놓고
보일듯 말듯 그림 그리어
강물에 풀어가는 色바람아
감기어라 바람아, 끝의 한오라기까지도 와
기다리며 굳은 모가지에 휘감겨
네 부는 가락에 핏자국을 쏟아 놓아라
해 물리는 살빛을 색바람아 감고 돌아
네 빛 중 진한 빛의
뜨는 달의 눈물을 그려 봐라
너를 기다려 어두움에 서겠노라
어디선가 맴도는 色바람의 울음아
山色 (1966년 한국일보 당선작)
당신의 입김이
이렇게 흐르는 山허리는
山빛이 있어 좋다
당신의 유방 언저리로는
간밤 꿈을 해몽하는
조용한 아우성의 마을과
솔이랑 학이랑 무늬 그려
도자기 구워 내다
새벽 이슬 내리는 소리
五月을 보듬은 당신의 살결은
노을, 안개
지금 당신은 山빛 마음이다
언제 내가 엄마를 잃고
파혼 당한 마음을
山빛에 묻으면
청자 밑에 고여 있는
가야금 소리
山빛은 하늘에 떠
돌고 돌다가
산꽃에 스며 잠을 이룬다
아픔.1
햇빛, 벼랑에 서다
바윗돌의 틈새 풀잎으로 서다
창백한 어지러움이
뿌리를 뽑아 맴돌다
날다, 날개도 없이
내리꽂히다
비릿한 단내, 깨어지다
멈추다, 멈춘 곳에서
새 풀잎으로 덮다
그리움 속에 잠들었던
그 빛깔로 바꾸어
살 끝에 하늘거리다
사랑이어 어디든 가서
사랑이어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를 뻗어 휘젖는
사랑이어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될
온몸을 태워서
찬란한 한 점의 섬광이 될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빛깔이 없어 보이지 않고
모형이 없어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어
무엇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선명한 모형을 빚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사랑이어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물이 되어라
무령왕의 목관
그렇지, 님을 실어 저승으로 저어 가던 한 척의 배가 세월의 골 깊은 앙금에 익어 지금 여기에 머무르다 이별을 서러워하던 혈육의 눈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채 쉬임없이 들려오는 창생의 울음소리 짭짜름한 저승의 바람 냄새가 잡혀와, 그렇지 우리가 또 빈손으로 타고서 아스름한 바다를 가르며 저어 가야 될 한 척의 배가 여기에 왔지
무령왕의 나무두침
나는 이제 천 년의 무게로
땅 속에 가 호젓이 눕는다
살며시 눈 감은 하도 긴 잠 속.
육신은 허물어져 내리다가
먼지가 되어 포올포올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 나의 자유로운 영혼은
한 덩이의 푸르른 허공이 되어
섬세한 서기로 남느니.
너는 이때에 한 채의 현금이 되어
빛깔 고운 한 가닥 선율이 되어
안개처럼 멍멍히 젖어 들어오는
그리운 노래로나 서리어 다오
** 나무두침 - 두침이란 사자의 머리를 고여 놓은 베게를 말한다. 나무로 만든 두침.
무령왕의 능
죽은 것은 당신만이 아니다
갈대숲에 바람 부는 소리를 내며
내 몸 속에도
죽음은 수시로 드나든다
그럴 때마다
내 누운 방은
한 채의 상여가 되기도 하고
어두운 무덤 속이 되기도 한다
죽은 자의 혼령들이여
죽은 것은 당신만이 아니다
무령왕비의 은팔찌
왕비여 여인이여
내가 그대를 사모하건만
그대는 너무 멀리 계십니다.
같은 이승이라지만
우리의 사이에는
까마득히 넓은 강이 흐릅니다
그대를 향해서
사위어지는 정한 목숨.
내가 만드는 것은
한낱 팔찌가 아니라
그대에게 건너가려는
내 그리움의 몸부림입니다.
내가 빚는 것은
한낱 용의 형상이 아니라
그대에게 건너가려는
내 사랑의 용틀임입니다.
비늘 하나를 새겨 넣고
먼 산 보며 한숨집니다.
다시 발톱 하나 새겨 넣고
달을 보며 피울음 웁니다.
내 살 깍아
용의 살을 붙이고
내 뼈를 빼어 내어
용의 뼈를 맞춥니다
왕비여, 여인이여.
그대에게 날려 보내는 용은
작은 손목에 머무르지 않고
그대 몸뚱이에 휘감길 것이며
마침내 온몸 구석구석에
퍼져 스며들 것이며
그러다가 지쳐 쓰러지더라도
파고들 것이며, 파고들어 불 탈 것이며
그리하여 저승의 내정까지도
따라 들어갈 것이며......
왕비여, 여인이여
내가 그대를 사모하는 것은
그대 이름이 높으나 높은
왕비여서가 아니라
다만 그대가 아름다워서일 뿐
눈이 시리게 아름다워서일 뿐입니다.
**무령왕비의 은팔찌 안쪽에는 그 공예품의 작가이름(다리)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으로 시인은 다리가 왕비를 여인으로 사랑했을거라는 상상의 날개를 펼쳐서 쓴 글이라고 함.
무령왕의 귀고리
손끝에 잡혀
올라오는 구슬
순금의 잎사귀들이
당신의 신화를 이야기하며
주렁주렁 매달려 내리다가
파란 하늘을
한 점 따 물었다
백제의 하늘은
천년의 세월을 한꺼번에 물고 날아와
지금 옥빛으로 반짝이며
내 머릿속
한뼘의 쓸쓸한 공간과 만나고 있다
오, 밝아지는 머리의 뼛속
어둠에 묻혀 잠자던 피가
깨어나 출렁거린다
내 몸 속에 수만은 支流를 뻗쳐
당신 시대 그 기쁨과 슬픔이 풀려
소리 내며 흐르고 있다
스이고 천황
달빛은 바다를 건너
보라색으로 오네
와서 여왕의 어깨에
꽃밭을 가꾸네
꽃은 날아가 아스카데라를 짓고
부처님도 모셔 앉히네
기와 굽던 솔숲에
두견이는 울어싸코
여왕의 꽃밭에서도
웃음이 흰 이를 드러내며 반짝이네
** 백제의 여인 스이고가 일본으로 건너가 부처를 모시고 아스카데라(비조사)를 짓고 나라를 세워 천황이 되는 과정을 시로 형상화함.
구다라지바에
차나무 가지 끝 물방울
속에 버스가 멈추네
정류장에서 길이 열려
백제사로 가네
절을 짓고
탑을 쌓고
풍경의 옆으로 바람이 와 등을 치네
밝은 염주 속에
큰스님들이 앉아 염불하듯
물방울 속에
버스 한 대 와 있네
왕인의 수염
그물에
그대의 옷, 옷의 자주 물감 들여
그 풀에
그대의 옷, 옷 속의 살내음 들여
꽃 피우네
그대 언덕 위로
땀개어 오를 때
눈길(視線)에 걸어 둔 엊저녁 노을
그 풀에 달아 물을 켜네
그 풀 심네
내 안에 파여
어둡고 습한 동굴 속
그 풀로 밝히네
어둠 속의 치밀한 적막을 뚫어 길을 닦네
** 왕인은 4세기 말엽에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백제문화를 전했다고 함.
구다라카와(百濟川)
물은 흐르는데
시간은 응고한다
견고한 시간의 몸체에
햇빛이 부딛칠 때마다
금빛 불꽃이 튄다
함성의 정령들이
치마를 내리며 내려앉는다
소금같은 바람이
나른한 오후의 한 구석을
염장한다
나라의 들판에서
** 일본 고대국가의 수도였던 나라의 들판에서 백제의 정령들이 함성를 지르는 모습을 그림.
법륭사 석가삼존상
잠자리 한 마리 들어와
부처님의 생각에 파문을 짓는다
부처님, 한 번 일어났다가 앉는다
투웅
앉은 소리가 금당의 천장을 울린다
법고, 범종, 목탁, 풍경, 운판, 목어
덩덩 트엉 딱딱 캥캥 토드락 토드락
이것을 한꺼번에 일어서서 고함 고함이다
문득 잠자리 한 마리
내 생각 속에 날아든다
** 범륭사는 일본 나라현에 있는 백제 양식의 절로, 고구려 담징이 금당벽화를 그린 절이다.
끈
구름의 모양이
바뀔 때마다
산은 몸을 틀었다
산사나무 층층나무 아그배나무 등속
뿌리를 내린 것들도
함께 몸을 흔들었다
나무에 붙은
지벌레 송충이 비단 거미들도
모두 놀라 일어나 어정거리고 있었다
생명은 구름과 산과 나무와 벌레들에게
모두 한 줄로 연결되어
그 끈을 쥔 자의 손놀림에
매달린 구슬이 되어
짜르르 짜르르 울고 있었다
계곡의 물이나 돌멩이들도
함께 매달려 울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