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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르수 우잘라>를 읽고 써봤습니다. 회원 여러분 머리 좀 식히시라고...돈 버느라 힘드실텐데.
나누고 베풀다 숲이 된 사람-자연에 생명을 주는 맑은 영혼
아르세니에프가 데르수 우잘라를 만난 곳은 1906년 항카호 주변 네프강가에서였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이다. 당시 아르세니에프는 지도상의 공백지역인 시호테 알린 지역을 네 번째로 탐사하고 있었다. 데르수 우잘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평상시처럼 검은 담비를 사냥하고 있었을 것이다. 상트 페테르부르그 출신인 아르세니에프는 험준한 지역에서 잠시 곤경에 처했을 테고 그 때 우연히 나나이족 원주민 데르수가 그에게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추론컨대 당시 데르수의 나이는 57세, 아르세니에프는 34세였다. 둘은 다음해 다섯 번째 탐사 때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두 맑은 영혼이 맞닥뜨렸을 때 숲은 무슨 노래를 부르고, 대지는 어떤 장단을 맞추었으며, 안개는 어떤 춤을 추었을까.
이 책은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에프가 데르수와 탐사를 끝낸 뒤, 그와 함께한 여정과 그 여정 속에서 발견한 데르수의 영혼에 대한 기록이다. 언뜻 보기엔 극동 시베리아에 대한 탐사 기행문이 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목 <데르수 우잘라>에서 알 수 있듯 글은 데르수와의 만남에서 시작하여 데르수의 죽음에 대한 아르세니에프의 단상으로 끝난다. 탐사 도중 만나는 폭우와 맹수의 습격은 데르수의 면모를 읽게 하는 장치로서 역할을 하며, 탐사대장으로서 대자연을 바라보는 아르세니에프 감수성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흠뻑 느끼게 해준다. ‘울창한 숲이 비에 젖어 홀죽해졌다’거나 ‘유럽살쾡이는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짐승이다’라는 표현에서 그도 데르수 못지 않은 따뜻한 인간임을 감지할 수 있다.
<데르수 우잘라>는 인간이 자연의 품에서 벗어났을 때 무엇을 잃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자연인 데르수는 자연에서 모든 것을 얻고 배운다. 가라앉은 대기 속으로 안개가 치솟고 총을 쐈을 때 큰 메아리가 돌아오면 큰 비가 내린다는 것을 알고, 동물의 발자국을 보고서 그들의 이동 경로를 추정해 낼 수 있다. 또 비가 올 때 자작나무 껍질로 우산을 만들 수도 있다. 데르수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자연 속에 있는 것이다. 문명인에게서는 퇴화해 버린 인간의 동물적인 감수성을 그는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이는 자연을 얕보지 않는 겸손한 그만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 순박한 데르수도 화를 내는 때가 있다. 대원들이 데르수의 발자국을 보지 못하고 길을 헤맨다거나 남은 음식을 불 속에 처넣어버릴 때이다. 눈과 귀를 닫고 머리만 흔들고 다니는 문명인의 무감각함과 까마귀, 오소리가 와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함부로 없애버리는 이기심에 그는 주름투성이의 얼굴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그는 개미 같은 작은 곤충도 늘 염려했으며 타이가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생각했다. 하릴없이호랑이(암바)에게 사격을 해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밤길을 무서워했으며, 참새를 ‘의젓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데르수 우잘라, 그는 이 땅에 숨쉬고 있는 것들을 옆에서 바라볼 줄 아는 순수한 영혼이었다.
또 한 가지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당시 조선인의 생활상과 모습이다. 데르수는 중국들을 매우 싫어했으며 조선인도 버금가게 싫어했다. 중국인들은 교묘한 술책으로 원주민의 터전을 짓밟고 파괴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고리대금으로 아녀자를 빼앗고 논밭을 빼앗는다. 조선인도 만만치 않아 밭을 일군답시고 산에 불을 놓아 사냥감을 다 쫓아내 버린다. 그래서 탐사 도중 만난 조선인의 오두막에 부러 들지 않고 밖에서 잠을 청한다. 몇 군데서 보이는 조선인의 생활은 광맥을 좇아 굶어 죽는 양상으로도 나타나며, 물레방아와 맷돌을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이민족으로도 묘사된다. 그러나 아르세니에프는 데르수와의 관계에 더 비중을 두어서인지 조선인을 비롯한 그 밖의 이방인에 대한 시선은 맹물처럼 무덤덤하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사정과 곡진한 이유가 있었을 터인데 그에 대해 천착하지는 않는다.
데르수는 탐사 도중 멧돼지를 놓친 데 이어 사슴 사냥에도 실패한다. 그에게도 자연의 법칙이 적용된 것이다. 그 밝던 시력이 감퇴해 우울해한다. 마음 따뜻한 아르세니에프는 데르수를 위해 하바로스크에 거처를 마련한다. 그러나 숲에서 야영을 하며 살던 자유로운 영혼은 상자곽 속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한다. 수도요금을 내는 아르세니에프에게 왜 물값을 내느냐며 분개하고 장작을 파는 사람을 도둑놈이라고 욕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호랑이가 아닌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다시 떠난다. 숲으로, 그의 친구에게서 받은 멋들어진 총을 둘러메고.
2주쯤 지난 후 아르세니에프는 데르수의 죽음을 접한다. 강도의 소행이었다. 몇 푼 안 되는 돈과 총을 뺏기 위해 문명인은 그를 죽였다. 데르수는 그가 속한 원시림보다 더 야만적인 문명의 굴레에 희생당한 것이다. 원시적 공산 관념이 남아 민족과 종교에 상관없이 항상 사냥감을 이웃과 똑같이 나누었던 데르수. 아르세니에프가 들려주는 푸슈킨의 민화 <어부와 물고기 이야기>를 듣고 “대장, 그 사람 불쌍해…착한 사람이다. 바다에 많이 많이 나가 물고기 불러냈어. 운타(신발) 많이 닳았을 거야”라며 마음 아파하던 노란 얼굴의 사나이. 그는 시베리아소나무 두 그루의 호위를 받으며 대지에 몸을 눕힌다. ‘진정한 고독은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는 순간에야 가장 절절한 것 같다. 누구나 고독한 때에야 지나온 모든 일들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오래도록 팽겨채둔 자신의 실체가 기억 저편에서 가만히 다가오는 것이다. 과거는 한낱 지난 세월이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실체이다‘ 우수리 근처 그 숲에 가면 데르수가 나를 불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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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머리가 오늘 날씨 처럼 화창해졌습니다. 장화 지침해서 연해주 한카호에 함 가보고 싶은데..
졸필이라서...올 여름에는 저도 염리학교 다니는 아들녀석과 한 번 가봐야겠습니다. 항카호 근처 플라타노프카가 참 좋다고 하네요. 항카호가 전라도만 하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