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극기(金克己)
煙楊窣地拂金絲
幾被行人贈別離
林外一蟬諳客恨
曳聲來上夕陽枝
『東文選』 卷之十九
해석
煙楊窣地拂金絲 연양솔지불금사
안개 낀 버들 땅을 쓸 듯 금빛 실 흩날리니
幾被行人贈別離 기피행인증별리
얼마나 많은 행인들이 이별에 주었던가
林外一蟬諳客恨 림외일선암객한
숲 밖의 한 매미 나그네의 한을 알아
曳聲來上夕陽枝 예성래상석양지
석양의 나뭇가지로 소리 끌며 올라가네
『東文選』 卷之十九
해설
먼 길 오가는 나그네를 위하여 교통의 요처에 마련해 둔 역참(驛站)은, 그러므로 숱한 봉리(逢離)의 현장이기도 하다. 길가로 늘어선 수양버들이 있고, 역참의 편의시설 말고도, 길목을 지켜 주막들도 있게 마련이다.
봄바람이 불고 봄비가 한두 차례 지나고 나면, 연기인 듯 아지랭이인 듯 아른이른 가무스름하던 수양버들이, 어느덧 황금빛 실가지로 물올라, 부드러운 몸매로 나부끼기 시작하면, 한겨울 웅크리고 들앉았던 사람들도 부스스 활동을 개시하여, 역은 차츰 제철을 맞게 된다.
이별! 편리한 교통 수단으로 가고 옴을 수시로 하고 있는 오늘날의 이별이 아니다. 떠나려는 마음 한번 먹기도 힘들거니와, 한번 가면 다시 올 기약마저 어려운 헤어짐이다. 인정도 고인들의 그것은, 현대인의 그것과는 그 순도(純度)나 점도(粘度)에 있어 비교도 안 될 만큼 진하고도 찰지다.
역두의 수양버들 가지는 꺾이어, 이별의 정표로 가는 이에게 주어진다. 장구령(張九齡)의 ‘절양류(折楊柳)’ 한 구절을 보자.
纖纖折楊柳 持取寄情人
가냘픈 수양버들 한 가지 꺾어 가시는 우리 임께 드리옵니다.
一枝何足貴 憐是故園春
그 한 가지가 뭐 귀할까마는 이 ‘고향의 봄’이니 예삐 보소서.
이처럼 ‘절양류’에는 ‘고향의 봄’으로 상징되는, ‘등지고 가는 따사로운 정’의 적지 않은 사연이 그 연약한 가지에 서리어졌던 것이다.
이렇듯 알뜰한 마음을 담아, 가는 임께 부치는 이별의 정이 얼마마 했던가는 왕지환(王之渙)의 ‘송별(送別)’에서 알 만하다.
楊柳東風樹 靑靑夾御河
봄바람에 나부끼는 저수양버들 운하(運河)를 끼고 청청 늘어서 있네.
近來攀折苦 應爲離別多
요즈막은 더위잡아 꺾기 힘드니 아마도 이별 많은 그 탓이려니……
소매를 나누는 순간, 간신히 참아 오던 슬픔은 마침내 오열(嗚咽)로 터진다. 매일같이 들어오는 저 소리를 서당 개 풍월 듯, 역두의 매미들도 어느덧 배워 익혀, 석양 비낀 가지 위로 소리소리 끌고 올라 저렇듯 애와쳐 울어대고 있다. 목놓아 우는 그 소리는 석양 하늘로 확성되어 천지에 미만해진다.
묘처는 ‘예성(曳聲)’에 있다. 매미 우는 현장을 지켜 본 일이 있는 이면 이내 무릎을 치리라. 그 작은 아름을 벌려 크나큰 나무줄기를 안고 한발짝 한발짝 타고 오르면서, 마치 길게 늘어진 소리 자락을 발발이 끌어올리듯 소리소리 울어가며 기어오르는 품을……
그것은 멀어져 가는 임의 뒷모습을 좀더 멀리 지켜볼 양으로, 보다 높은 곳으로 옮아가는 알뜰한 석별의 정을 여실케 하여, 기절묘절(奇絕妙絶)하기 이를 데 없다. 더구나 그것이 ‘석양지(夕陽枝)’에 이르러서는 이별의 정황을 한결 처연(凄然)케 해주고 있음을 본다.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 마소.
초원장제(超遠長堤)에 해 다 져 저물었다.
객창(窓)에 잔등(殘燈) 돋우고 앉아보면 알리라. 「이명한(李明漢)」
차마 뿌리치고 가는 임이 원망스러워 앵돌아진 심사를 노래한 이 시조에서처럼, 해질녘의 이별은 더욱 처량하다. 이윽고 황혼 어스름 속으로 멀리 사라져 가는 임의 뒷그림자가 차마 서글프기 때문이리라.
김극기 金克己
고려 후기 울산 태화루에 관한 시를 지은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호는 노봉(老峰)이다.
김극기(金克己)[?~?]는 30대 초·중반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무신들이 정권 다툼을 벌이던 고려 명종(明宗) 때 의주방어판관(義州防禦判官)이 되었다. 이후 개경에서 직한림원(直翰林院)을 지냈는데, 이후에는 하정사(賀正使)[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다녀온 사신]의 수제(修製)[격서(檄書)와 같은 글을 짓는 일에 종사하는 임시 관직]로서 금(金)나라 사신단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뛰어난 문장으로 이인로(李仁老)[1152~1220]와 같은 당대 문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던 김극기는 울산 대화루(大和樓)에 올라 시를 지었는데, 여기서 대화루는 이때 처음으로 태화루(太和樓)의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 울산 출신으로 알려진 신라의 기생 전화앵(囀花鶯)에 관한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김극기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전하는데, 『진정국사호산록(眞淨國師湖山錄)』의 기록을 토대로 기사년(己巳年)[1209년(희종 5)]에 사망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학문과 저술
고려 후기의 기록인 『삼한시구감(三韓詩龜鑑)』에는 문집의 양이 135권 또는 150권에 달하였다고 전하지만 현전하지는 않는다. 『동문선(東文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시 몇 수가 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