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는 존재하는가
※본 글은 <셀프컴패션> 중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도식이란 성격의 일부이다. 우리 각자는 다른 사람들의 성격과 구별된다고 느끼는 독특한 성격(자아의식)을 지녔다. 우리의 성격은 성장하면서 형성되며, 시간이 지나면서 일정한 일관성을 갖추는 듯이 보인다. 설사 여러분이 동창회에서 옛 친구를 처음엔 잘 알아보지 못했어도, 마치 시간이 정지한듯 얼마나 금방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는지만 생각해보아도 자명하다. 우리와 관련된 것들 중에는 변하는 것도 있고, 똑같이 그대로 남는 것도 있다.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신경과학자들은 두뇌 안에서 발견되는 어떠한 '자아'도 없다는 데 동의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볼프 징어 박사에 따르면, 두뇌란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다. 두뇌는 산지사방의 활동으로 터질 듯하지만, 이렇듯 짜증날 정도로 와글거리는 혼란 상태로부터 독립적 의식이 어떻게 어디에서 생겨나는지는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다. 게다가 내적 성찰이란 렌즈를 통해 우리의 정신 활동을 면밀히 살펴보아도, 일어났다 사라져버리는 짧은 순간의 경험만 드러나기 십상이다. 어떠한 자아도 없으며 단지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이런 감정, 저런 인상 뿐이다. 심지어 의식의 경험조차 왔다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나란 누구인가?
'자아'의식은 우리가 정서적 고통 상태에 있을 때 자동으로 생겨나는 듯하다. 예를 들어 만일 죽기 겁난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도대체 '누가' 실제로 죽는 것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지 모른다. 남들에게 정서적으로 상처받을 때는, 자신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진짜일까 의심스러울 수도 있다. "나는 도대체 뭐지?" 정반대 또한 사실이다. 우리가 '흘러가고' 있을 때는, 곧 고요하고 기쁘고 보람차게 바삐 뭔가를 하고 있을 때는, '내'가 누구인지 거의 의식하지도 신경쓰지도 않는다.
여러분이 이런 점을 숙고해본다면, 납득이 갈 것이다. '자아'란 거의 언제나 몸과 관련되며, 우리 몸은 생존에 알맞게 되어 있다. 신체가 위험에 처할 때, 우리는 생존을 위해 싸운다. 정서가 어려움에 처할 때, 우리는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애쓴다. ("나는 젊고, 똑똑해"처럼) 지나치게 경직된 '자아'의식에서 생겨나는 문제는, 삶이 변화함에 따라 행복에 지장이 초래된다는 것이다. 결국 실패, 질병, 노화 같은 우리 삶의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야말로, 우리가 평화롭고 행복할지 여부를 결정짓는다. 모욕과 마음의 상처에 맞서 우리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애쓰는 일은 많은 스트레스를 부를 수 있다.
얄궂게도 자기연민의 길에서 진척을 이루려면, 우리에게는 '자아'가 필요하다. 자기비판이나 자기고립을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어떠한 변화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자아가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자기주장을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까지, 우리는 '자아'를 거부하지도, 지나치게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는 친절하고 온유한 태도를 기를 수 있다.
'무아(無我)'라는 개념은 불교 심리학에 내포된 희망의 메시지다. 무아는 진정 어떠한 고정된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심지어 우리의 도식조차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무아'는 우리가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 모든 것의 일부다. 우리가 좀 더 행복해지고 변화하는 상황에 더 잘 적응하기 위해 할 과제는, 고착된 자아상과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행동 양식을 부드럽고 유연해지게 아느 것이다. 여러분은 이따금 아이와 함게 있을 때 아이처럼 느끼고, 노인과 있을 땐 노친처럼, 젊은 여성과 있을 땐 젊은 여성처럼 느끼도록 스스로를 내버려둘 수 있는가? 우리가 한번쯤은 감정이입을 통해서나 삶의 다양한 역할과 상황을 통해 모든 사람, 곧 젊은이/노인, 똑똑한 사람/둔한 사람, 예쁜 사람/못난 사람, 선인/악인, 성공한 사람/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 그렇게 되도록 우리 자신을 내버려 둘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 삶에 더 많은 짐을 지우면서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에만 집착해야 할까?
역설적이게도, 고통받는 '자아'에 연민을 많이 보낼수록 '자아'는 더욱 유연해진다. 예를 들어 내가 따분한 강연을 하고 나서, 했던 말 모두를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스스로를 발견했을 때, 자신을 위로하는 말은 도움이 된다. "막 점심 먹은 뒤였잖아. 뭘 기대하겠어? 모두 차라리 낮잠 자면 좋을 시간이었다고!"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 내면으로부터 오는 연민을 통해, 우리는 불편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상황을 악화시켰던 요인들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시몬 베유의 말처럼 "스스로를 향한 연민은 겸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