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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이씨 선조 문집
1, 국역 충의록(淸安李氏 忠義錄),
저자 손종섭 출판사 국역 청안이씨충의록간행소 쪽수 393쪽
크기 182x257(B5사륙배) 발행일(출간일) 1996년 10월10일
발행인 이영만
@,충의록(한문)
李達和(朝鮮) 編 [發行地未詳] : [發行者未詳], 1961 序跋 線裝 1卷1冊 :
世系圖, 四周雙邊 半郭 19.9 x 15.5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向二葉花紋魚尾 ; 27.7 x 19.5 cm 版心題: 忠義錄 序: 辛丑(1961)
小暑節昌寧曺圭喆書, 靈川金相宇謹書 忠義錄序: 歲戊午(1858)孟冬…
完山柳致明謹書 序: 驪江李鍾祥謹序 識: 退思公八世孫運恊謹識,
退思公十世孫達和謹書 忠義錄重刊跋: 檀紀四二九四年辛丑(1961)
立秋節 退思公十四
石印本(重刊). - [發行事項不明]. 1冊 ; 27.2x.19.2cm.
임진왜란 때 창의한 청안이씨(淸安李氏) 이응춘(李應春) 등 형제들의
충의록이다. 이응춘(1522~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태영(泰英)?
호는 퇴사재(退思齋)로 1566(명종 21)년 무과에 급제,
오위부장(五衛部將)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우춘(遇春),
봉춘(逢春), 아들 승금(承金) 등을 비롯한 동민 300여 명으로 의병을 일으켜 수십 차의 접전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개운포(開運浦)에서 수로(水路)를
막아 놓고 적선(敵船)을 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1832년 그의 아들
고훈련원정(故訓練院正) 이승회(李承會)와 함께 증직 포상되었다.
2,급고실유고(汲古室遺稿),
1995년 발행, 발행인 이동초,급고실유고 세로읽기 한자 339쪽
3,소오재문집 疎迃齋文集
시대 조선 시문집 편저자 이관영 제작시기 1855년 권수/책수 4권 2책
간행/발행/발급자(처) 이채원|이윤락 소장처 계명대학교 도서관
집필자 이원구
조선 후기의 학자 이관영(李觀永)의 시문집.
4권 2책. 석인본. 1855년(철종 6) 이채원(李綵源)·이윤락(李潤洛)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계명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권1·2에 시·만사 165수, 서(書) 10편, 권3에 제문 17편, 발(跋)·묘지 각 1편, 서(序) 3편, 문(文) 1편, 권4는 부록으로 만사 19수, 뇌사(誄辭) 2편, 애사 1편, 제문 21편, 행장·묘갈명·묘지명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 가운데 「상구암선생문목(上懼菴先生問目)」은 이기설(理氣說)·예설(禮說)·경전·주자서(朱子書) 등에 관해 광범위하게 질문한 내용이다. 특히, 근도(近道)의 ‘근’자의 뜻과 선비의 수신방법의 요체에 대하여 문의하고 있다.
「옥원강석문답(玉院講席問答)」은 옥산서원에서 강석을 열었을 때 질의, 응답한 내용을 적은 것으로, 『대학』의 지선(至善)과 정정(定靜)·근도·격물(格物) 등의 물음에 답한 내용이다
4,청원시초
발행인 이영만
소우재공의 <도산구곡>은 모현 기행(模賢紀行)의 장대한 작품이며, <봄을 보내며> 30수의 연작은, 정히 자연 시인의 면모를 엿보게 하고 있다. 일양공의 <비에 갇힌 친구를 위로하며>는 심상한 위로의 말이 먹혀들지 않을 것이매 차라리 이죽거리며 놀려먹음으로써 그 초조해 하는 마음을 역으로 달래 주는, 막역간에 있음 직한 일품이다. 만산공의 <즉흥>, <가을밤>, <서림정에서>와, 그리고 옥간공의 <열여섯날 밤에> 등에는 풍월의 멋이 너울거리는 흥겨운 작품들이다. 옥간공의 <여윈 아내> <어머님 생신에>도 다 알뜰한 인정에서 우러나온 정겨운 작품이며, 또 그의 <도시를 구경하며>에는 정곡을 찌른 날카로운 형안이 돋보인다.
다 어찌 일일이 들어서 말하랴? 여기 선입된 시 들은 무비 수준 이상의 작가들임은 물론이다. 모두가 청안 이 씨의 맑은 시원에 핀 백화난만한 꽃떨기들이다
5, 인와문집(忍窩文集)
시대 조선 시문집 편저자 이술현 제작시기 1835년(헌종 1)
권수/책수 4권 2책 간행/발행/발급자(처) 이재즙|이기혁|이상혁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장서각 도서 집필자 이동화
조선 후기의 학자 이술현(李述賢)의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1835년(헌종 1)경에 이술현의 후손 이재즙(李在緝)·이기혁(李基赫)·이상혁(李祥赫)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장석신(張錫藎)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이재즙·이기혁·이상혁 등의 발문이 있다.
[서지적 사항]
4권 2책. 석인본. 국립중앙도서관과 장서각 도서 등에 있다.
[내용]
권1·2에 시·만사 156수, 가송 3편, 상량문 2편, 권3에 서(書) 11편,
서(序) 1편, 기(記) 3편, 명(銘) 1편, 축문 2편, 제문 11편, 유사 1편,
권4에 부록으로 행록·행장·묘갈명·묘지명 각 1편, 만사 24수, 제문 4편,
기·대학통문(大學通文)·계문초(啓聞草) 각 1편,
부분황시운(附焚黃時韻) 9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자연경관을 읊은 것이 많은데, 이 중 「잡영십수(雜詠十首)」에서는
과거를 회고하면서 지난날 영웅 열사들의 기질을 추모하여 그 뒤를 따르겠다던 각오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색하게 된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우음삼수(偶吟三首)」에서는 예의의 나라로 중국보다 인성이 못하지 않다고
자부하던 민족이 예의와 도덕 개념이 흐려지고 이익만 좇는 각박한
세상으로 변해 가고 있음을 개탄하였다.
서(書)의 「여윤봉화견백(與尹奉化肩白)」은 병중에 있는 친구를 위문한 글로,
서로를 그리워하는 정과 간곡한 우의가 잘 나타나 있다.
「답족질현보건춘(答族侄顯甫建春)」은 병중에 있는 사신을 위문한 글에
답한 것으로, 중병을 얻은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 뒤 사람은 학문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학문하는 방법은 정독(精讀)과 심찰(深察)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학문을 권하였다.
「비설(備說)」은 준비하면 항상 불의의 변을 막을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의 징후가 모든 면에서 드러나기 시작했으나
조정 대신들이 무사와 안일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대비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이와 같이 참변을 당했음을 상기시키면서 오직 준비만이
모든 화근을 방지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 밖에도 거울의 밝은 빛은 항상 남을 비쳐준다고 찬미한 「경명(鏡銘)」과
자기의 포부를 표현한 「인와기(忍窩記)」가 있다.
@1995년 인와문집 한문 세로쓰기 발행 발행인 이재호
6,樂義齋先生遺集
李訥(朝鮮) 著. 木板本 발행사항[刊寫地未詳] [刊寫者未詳],[刊寫年未詳]
2卷1冊 : 年譜, 四周雙邊 半郭 19.1 x 15.3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1葉花紋魚尾 ; 30.2 x 19.8 cm
版心題: 樂義齋集 手書刻序: 白狗(庚戌, 1910)...金道和序
後敍: ...傍裔孫監役[李]樹仁謹書
後識: 庚戌(1910)五月上澣 十一世孫[李]淳赫謹識
卷1, 詩, 書, 雜著. -- 卷2, 附錄
李訥 조선 의병 생년 1569년(선조 2) 몰년 1599년(선조 32)
저서(작품) 낙의재유집 1569(선조 2)∼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의병.
아버지는 첨정 신정(新貞)이며, 어머니는 오천정씨(烏川鄭氏)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효경』과 『논어』를 배웠고, 학문보다 실천이 중요함을 알아 효제(孝悌)를 행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기집 종들과 주민·승려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천사장(天使將)’이라는 기를 앞세우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곽재우(郭再祐)와 화왕성(火旺城)에서 합세하여
적을 공략하였고, 통제사 원균(元均)이 패전하여 죽은 뒤에
진을 월성으로 옮겼다.
그해 9월 대구의 팔공산싸움에서 왼팔에 적탄을 맞았으나
전세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 끝난 뒤 사재를 털어 병화와 흉년으로
시달린 백성을 구휼하고, 자제들을 낙의재에 모아 충효의 길을 가르쳤다.
그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저서로는 『낙의재유집』 2권이 있다.
@ 낙의재공일고(洛義齋公逸稿)
李訥 (1569∼1599) ; 字 若愚, 號 樂義齋, 本貫 淸安.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1918. 2卷1冊 ; 31x20.5cm.
四周雙邊. 半匡 ; 19.9x15.4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一二混入葉花紋魚尾.
조선 중기 의사(義士)이자 학자인 이눌의 시문집
이 문집은 1918년 11세손 순혁(淳赫) 등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시(詩) 가운데는 저자가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팔공산 싸움에서 탄환을 맞고 신음하면서 그 감회를 읊은 칠언절구에 대하여 채몽연(蔡蒙硯), 박충윤(朴忠胤) 등 58인이 쓴 화답시가 저자의 시와 함께 실려 있다. 잡저인 「임진일기(壬辰日記)」는 1592년 설날 아침에 괘(卦)를 뽑아보고 난리가 있을 것을 짐작하여 활쏘기에 열중하였다는 기록으로부터 1598년 12월 3일 동일원(董一元)이 마지막으로 사천(泗川)에서 왜군을 격파한 사실과 1599년 2월 다시 낙의재(樂義齋)로 돌아온 사연 등 전후 8년에 걸친 주요사항을 날짜별로 적은 것이다. 「부제현일기(附諸賢日記)]는 인심재(忍心齋) 김응하(金應河)의 일록(日錄)에서 취한 것으로 1591년 12월부터 1597년 9월까지의 기록이다. 「팔공산제의장회맹록(八公山諸義將會盟錄)」은 당시 저자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모인 의병장들의 명단을 자(字)와 함께 지역별로 써놓은 것이다. 부록의 「유고봉환기(遺稿奉還記)」는 원래 저자의 유문(遺文)이 집에는 하나도 없는데 저자가 죽은지 200여년이 지나 우연한 기회에 어느 한 동자(童子)의 말을 듣고 장기현(長?縣) 목장리(牧場里)의 과부 허씨 집에서 찾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序 ;金道和. 卷之 1. 詩(37首).書 ; 與崔憂樂齋子翼(東輔), 與柳公松壕汝元(汀).
雜著 ; 壬辰日記 - 附諸賢日記, 倡義錄, 八公山諸義將會盟錄.
卷之 2. 附錄 ; 遺事, 行狀, 墓誌銘, 遺稿奉還記, 改莎告由祝.
後? ; 李樹仁.
後識 ; 李淳赫.
7,칠송당실기(七松堂實記),
생년 1543(중종 38) 졸년 1599(선조 32)
이응벽(李應璧)에 대하여
1543년(중종 38) 4월 28일∼1599년(선조 32). 조선 중기 유학자‧의병장.
자는 여완(汝完)이고, 호는 칠송당(七松堂)이다.
본관은 청안(淸安)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영해군(寧海郡)이다.
증조부는 이기(李基)이고, 조부는 이흥방(李興邦)이다.부친 이의감(李宜堪)과 모친 손홍서(孫弘緖)의 딸 밀양손씨(密陽孫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이자사(李自社)의 딸 영천이씨(永川李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역사서를 즐겨 읽고 내용을 깨우쳤다.
칠송당에서『주자강목(朱子綱目)』과 진서산(眞西山)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며 연구하였다.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화암(花巖) 윤홍명(尹弘鳴)‧
인심재(忍心齋) 김응하(金應河)‧재종형(再從兄)인 퇴사재(退思齋)
이응춘(李應春) 등과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크게 무찔렸다. 1593년(선조 26)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진양(晉陽)에서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들과 통곡하며 왜적과 싸워 죽기를 맹세하였다.
1596년(선조 29) 영남의 의병 800여 명과 팔공산(八空山)에서 회맹하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힘을 합쳐 공산(公山)의 왜적을 크게
무질렸다. 1597년(선조 30) 행군하여 도산(陶山)에 이르러
적장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사로잡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싸웠으나 실패하였다. 향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1남 이영수(李英秀)를 두었다.
묘는 경상북도 경주(慶州)에 있다.
8,구암문집(懼庵文集
李樹仁 생년 1739년(영조 15) 몰년 1822년(순조 22)
관직(경력) 僉知中樞府事
1739(영조 15)∼1822(순조 2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도안(道安). 자는 성안(性安), 호는 구암(懼庵),두항거사(杜巷居士).
아버지는 동도팔사(東都八士)의 한 사람인 위현(渭賢)이며,
어머니는 영월신씨(寧越辛氏)로 명상(命相)의 딸이다.
가학(家學)을 이어받았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망라한 많은 서적을
박람(博覽)하였으며, 특히 『대학』과 『중용』을 탐독하였다.
항상 이황(李滉)의 『성학십도 聖學十圖』와 「사칠논변(四七論辨)」,
이언적(李彦迪)의 「태극변(太極辨)」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일찍이 공명에 대한 뜻을 버리고 독서와 의리의 독행에 힘썼으며,
중년에 「자경설 自警說」과 잠(箴) 50여편을 지어 일생 동안 스스로를
책려하며 살았다. 1796년(정조 20) 경상도관찰사가 학행으로 천거하여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다.
강연(講筵)에서 왕과 시폐(時弊)를 논하고 성경(誠敬)을 근본으로 한
절용애민(節用愛民)을 건의하였다.
1818년(순조 18)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작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구암문집』이 있다
9,두촌실기(杜村實紀)
@ 편자명 이기혁 李基赫 간사년 1911 목판본 권책수2권 1책
1,가로: 15.4cm 광곽크기(반곽기준) 세로:19.3cm 행자수(반엽기준) 10행 20자 기타內向2葉魚尾 형태사항주기2卷 1冊(同書 4部).
서(序)重光大淵獻(辛亥, 1911)陽月完山後人柳必永謹序
2,크기 : 31.9×20.9 序:柳必永(1911), 跋:崔鉉弼
조선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 이팽수(李彭壽, 1559∼1592)의 업적을 기록한 책이다. 이팽수는 고려말의 공신 이양길(李陽吉)의 9세손이며 호가 두촌(杜村)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의병을 모아 홍천 등지에서 적을 무찌르고 문천회맹(汶川會盟)에 참가하여 경주를 탈환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후 무과에 급제하고 복병장(伏兵將)에 제수되어 울산 서생포(西生浦)의 방어를 담당하였는데, 중과부적의 전세(戰勢)를 이기지 못하고 38세로 순국하였다. 1783년(정조 7)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고 가선대부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으로 증직하였다. 이 책에는 그의 유사(遺事), 가록(家錄), 정려문(旌閭文), 묘비명 등이 소상히 채록되어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산대리에 위치한 덕산서사(德山書社)는 이팽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재실(齋室)이다.
10, 퇴사제공일고(退思齋公逸稿)
목판본
淸安李氏忠義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인 李應春(1522-1592)의 임란공적및 충의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간행한 책이다. 이응춘의 자는 泰英, 호는 退思齋이다. 권수에는 1858년 柳致明과 驪江 李鍾祥이 쓴 序가 있으며, 권말 退思公의 八世孫인 運協이 쓴 識와 十世孫인 達和의 발문이 있다. 世系圖를 포함하여 退思齋公逸稿를 싣고, 그 외 12義士之遺事를 함께 수록하였다.
11,습와유집(習窩遺集)
조선 중기의 무신 이주천(李柱天)의 시문집. 3권 1책. 목활자본.
1910년 9대손 용구(容球)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도화(金道和)의 서문과
권말에 이능오(李能吾)·이기혁(李基赫)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105수, 서(書) 3편, 권2에 기(記) 3편, 잠(箴) 2편, 제문 2편,
권3은 부록으로 습와기(習窩記)·상량문·행장·묘갈문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는 서경(敍景)·감회류(感懷類)가 많은데,
특히 1642년 청나라의 원군으로 끌려가며 읊은 〈지개성유감 至開城有感〉·
〈대동강 大同江〉·〈의주 義州〉·〈과구련 過九連〉 등의 시는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생각하며 괴로운 심회를 표현한 것이다.
기에는 자전적 일기 2편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 〈병자호란일기 丙子胡亂日記〉는 1636년(인조 14) 12월 15일부터 그 이듬해 3월 28일까지의 일기로, 서두에 의병으로 출정하면서 동지들과 맹세한 내용을 싣고 있다. 〈금주일기 錦州日記〉에는 1642년 1월 25일부터 4월 25일까지의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잠의 〈좌우잠 左右箴〉에는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수행(修行)에 관한 조목 50개항이 수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도서와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2,영풍정실기(詠風亭實紀),
文集名: 詠風亭實紀 著者: 이계수(李繼秀) 1567年(明宗22)~1637年(仁祖15)
木版本 著作时代: 조선시대 중기
序、编、跋著者: 序-金道和(1910), 年譜後敍-南熙朝, 年譜跋-李鎭宇,
跋-李邁久, 小識-李時赫
12,인와문집(忍窩文集),
편저자 이술현 제작시기 1835년(헌종 1) 권수/책수 4권 2책
간행/발행/발급자(처) 이재즙|이기혁|이상혁 4권 2책. 석인본
조선 후기의 학자 이술현(李述賢)의 시문집.
1835년(헌종 1)경에 이술현의 후손 이재즙(李在緝)·이기혁(李基赫)
이상혁(李祥赫)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장석신(張錫藎)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이재즙·이기혁·이상혁 등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시·만사 156수, 가송 3편, 상량문 2편, 권3에 서(書) 11편,
서(序) 1편, 기(記) 3편, 명(銘) 1편, 축문 2편, 제문 11편, 유사 1편,
권4에 부록으로 행록·행장·묘갈명·묘지명 각 1편, 만사 24수, 제문 4편,
기·대학통문(大學通文)·계문초(啓聞草) 각 1편,
부분황시운(附焚黃時韻) 9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자연경관을 읊은 것이 많은데, 이 중 「잡영십수(雜詠十首)」에서는 과거를 회고하면서 지난날 영웅 열사들의 기질을 추모하여 그 뒤를 따르겠다던
각오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색하게 된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우음삼수(偶吟三首)」에서는 예의의 나라로 중국보다 인성이 못하지 않다고
자부하던 민족이 예의와 도덕 개념이 흐려지고 이익만 좇는 각박한
세상으로 변해 가고 있음을 개탄하였다.
서(書)의 「여윤봉화견백(與尹奉化肩白)」은 병중에 있는 친구를 위문한 글로,
서로를 그리워하는 정과 간곡한 우의가 잘 나타나 있다.
「답족질현보건춘(答族侄顯甫建春)」은 병중에 있는 사신을 위문한
글에 답한 것으로, 중병을 얻은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 뒤 사람은
학문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학문하는 방법은 정독(精讀)과
심찰(深察)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학문을 권하였다.
「비설(備說)」은 준비하면 항상 불의의 변을 막을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의 징후가 모든 면에서 드러나기 시작했으나
조정 대신들이 무사와 안일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대비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이와 같이 참변을 당했음을 상기시키면서 오직 준비만이
모든 화근을 방지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 밖에도 거울의 밝은 빛은
항상 남을 비쳐준다고 찬미한 「경명(鏡銘)」과 자기의 포부를 표현한
「인와기(忍窩記)」가 있다.
13,소오제문집(疎迃齋文集),
조선 후기의 학자 이관영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이관영(李觀永)의 시문집. 4권 2책. 석인본.
1855년(철종 6) 이채원(李綵源)·이윤락(李潤洛) 등이 편집, 간행
권1·2에 시·만사 165수, 서(書) 10편, 권3에 제문 17편, 발(跋)·
묘지 각 1편, 서(序) 3편, 문(文) 1편, 권4는 부록으로 만사 19수,
뇌사(誄辭) 2편, 애사 1편, 제문 21편, 행장·묘갈명·묘지명 각 1편 등이 수록
서(書) 가운데 〈상구암선생문목 上懼菴先生問目〉은 이기설(理氣說)·예설(禮說)·경전·주자서(朱子書) 등에 관해 광범위하게 질문한 내용이다. 특히, 근도(近道)의 ‘근’자의 뜻과 선비의 수신방법의 요체에 대하여 문의하고 있다.
@〈옥원강석문답 玉院講席問答〉은 옥산서원에서 강석을 열었을 때 질의, 응답한 내용을 적은 것으로, ≪대학≫의 지선(至善)과 정정(定靜)·근도·격물(格物) 등의 물음에 답한 내용이다. 계명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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